28.로마교회의 뿌리
[1] 온 세상에 전파된 믿음
신약성경에 수록된 말씀들 가운데서는
그 중간 쯤에 삽입되어 있는 로마서가 큰 분수형을 이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기록마저
제대로 정리되고 있지 않던 때에
이미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파악하여 전파하고 있었는데
특히 AD 56년경 그가 로마교회에 보낸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 신학의 기초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에서
3년간 복음을 강론할 때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 이 바울의 신학은
죄의 인식과 회개에서 시작햐여
칭의(稱義) -구원(救援) -성화(聖化)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의 풀코스를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스터플랜과 종말론, 그리고 실천신학에
이르기까지 언급을 하고 있어,
실로 로마서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 신앙을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바울은 그가 세번째 전도여행중
3개월동안 고린도교회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이 편지를 기록하여 두었던 것 같으며
겐그레아교회에 들렀을 때
그곳의 여집사 뵈뵈 편에 그것을 로마로 보냈는데
늘 마음속으로 로마에 가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편지의 서두에 적고 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9,10)
왜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고 싶어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또 늘 자신을 가리켜
이방인의 사도라 자칭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는 바로 그 이방인들의 중심지였고
전 세계를 다스리는 세상 권세의 수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 로마를
자기 사역의 최대 목표지이자
최종 선교지로 삼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또 로마를 눈앞에 둔 채
마케도냐와 아가야 교회들의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 바울은
우선 자신이 정리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적어서
로마교회에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을 장사하던
로마의 카타콤(지하묘지)에는
악3백년간 약 10∼20세대가 지나갔다고 본다면
로마의 대화재 사건으로
네로의 박해를 받은 AD 64년경에는
적어도 20만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이들의 조직은 매우 치밀해서
가난한 도시빈민들은 물론
정계의 고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침투해 들어갔음이 밝혀졌다.
많은 고관들이 비밀교인들로서
로마교회를 은밀하게 돕고 있었으며
나중의 도미티우스 황제 때에는
황제다음 가는 권력자였던 집정관 글라브리오와
역시 집정관이며황제의 조카 사위었던 클레멘스까지도
기독교인임이 밝혀져 처형되었다.
뿐마 아니라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자매도
클라디우스 황제 때의 시녀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로마서 16장에는 바울이
자기가 알고 있는 26명의 이름을 적으며 문안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며 16명은 헬라인이고
오직 빌롤로고의 아내 율리아만이
로마출신의 여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바울이 알고 있던 유대 및 헬라출신의 교우들도
로마교회의 주축세력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의 서두에서
이 편지의 수신자가
16장에 언급된 유대인과 헬라인 형제들이 아닌
로마인 교우들인 것을 밝히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로마인들의 그리스도 신앙이 왕성하였던 반면에
유대인들 속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아직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소문만을 겨우 듣고 있었다.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행 28:22)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관계없이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선행이 또한 모든 로마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그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가 하면
타락한 로마의 산물로
티베리스 강에 버려진 아기들을 주워다 길렀으며
감옥의 간수들을 매수하면서까지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그야말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도
온 천하에 소문난 로마교회의 믿음에 대하여
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이러한 로마교회의 소문난 믿음을 생각해보며
나는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토록 강한 조직과 큰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로마교회는
도대체 누가 가서 전도하고
누가 가서 개척했던 것일까?
바울이 로마교회의 교인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고 나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나 고린도에 머물렀던 AD 51년경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령 때문에
로마에서 쫓겨온 아굴라 부부를 만나 동역자가 되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기록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AD 49년에 경제력이 막강해진 유대인들을
소요죄로 몰아서 추방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1-3)
이 기록에서 아굴라 부부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든가
바울의 전도를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되지 않응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로마에 있을 떼부터 기독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이미 로마에 40년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교회가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2] 숨어있는 전도자
나는 우선 이 로마교회의 뿌리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가지의 가능성과 추측들을 모두 다 검토해 보았다.
워낙 로마교회의 성립자체가 베일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가설도 여러가지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우선 그 첫번째의 가능성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120문도가
각각 다른 방언으로 증거하는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던 3천명의 방문객 가운데
로마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행 2:10)
이들이 로마에 돌아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로마교회를 세웠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조직이 유대인 회당의 조직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 그 문제중의 하나였고,
또 그 유대인들이 어째서 동족이 아닌
로마사람들에게 먼저 전도했느냐는 문제도
설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다면 왜 로마교회의 주축이
유대인들이 아니고 로마인들이었느냐는 문제도
해결하기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서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시작된 환난을 피하여
흩어진 유대인 문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전도했다고하므로(행 11:19),
그들중에는로마까지 들어가서
전도한 사람도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앞의 경우와 같은 문제점들을 충족시키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고
그것을 증명해 줄만한 아무런 역사적 자료도
또한 찾아 볼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에 나섰을 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던 갈라디아지방의 교인들이
로마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지방 전도를 끝내고
안디옥에 귀환한 것이 AD 49년경이므로
그곳에서 세례받은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
로마에 갔다 하더라도
속주 출신이 그들이 로마에
거대한 로마인들의 교회조직을 이룩했다고 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나 짧았다.
이와 같은 논리는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문안하고 있는 교우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들 중의 유대인은 AD 49년에 추방되었다가
추방령이 풀린 54년에 다시 들어갔거나 처음 들어갔을 것이며,
헬라인들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끝낸 49년
또는 그 이후에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이 가능성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는 것이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직 거론해 보지 않았던
사도 베드로의 직접 전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증거상의 취약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로마교회에 남아있는 베드로의 강력한 영향이다.
로마교회는 후일 오랜 고난끝에 로마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고,
다시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자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추존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시 수세기가 지난 후에는
베드로가 순교하고 그
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바티카누스언덕에
로마교회의 상징인 거대한성당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 하였던 것이다.
박해를 받던 시절에 로마교회 성도들이
은밀히 사용하던 암호는 '물고기'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 에수 그리스도의 헬라어 이니셜로 만든
'ἰχθύς'(익투스, 물고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암호도 역시
어부였던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로마교회를 세운 사람은
베드로라는 것이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어보면
베드로가 AD 42년경에
로마를 방문하였다는 카톨릭의 전승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었으며,
AD 44년경에는 헤롯 아그립바의 박해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행 12:14).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와
에루살램을 떠났는데(행 12:17),
그가 다시 사도행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AD 49년경 저 유명한 안디옥교회의 식사시간이다.
당시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방인 신자들의 갑작스런 증가로
소외를 느낀 유대 출신 교우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느니,
이방인과 유대인은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다느니 하며
구박을 시작하여
이방인 선교의 선봉인 바울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안디옥에 도착한 베드로는
이방인 형제들과 식사를 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보낸 조사단이 도착하자
당황한 베드로가 말썽을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다 바울의 호통을 들었다(갈 2:1-14).
그러므로 베드로의 행적 중
분명하지 않은데가 있다면
바로 AD 44년에서 49년 사이의 공백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가 로마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설립했다면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베드로의 일을한번도 언급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배드로전서의 서두에서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의 형제들에게
문안을 하고 있다(벧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 1:1.2)
이것은 성령께서
바울이 아시아 비두니아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도행전 16장 7절의 기사와 연결시켜 볼 때,
베드로가 이 지역에서 활동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
이렇게 볼 때
누가 로마에 복음을 전했는지는
샤프(P.Shaff)의 말대로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숨어있는 전도자에 대한 나의 추적은
좀 더 계속되었다.
나는 로마교회의 특징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았다.
(…빈민층과 귀족층을 동시에 침투한 강력한 조직력,
폭넓은 구제활동과 실천력,
그리고 그들 사이에 박혀 있던 베드로의 깊은 영향…)
거기까지 생각해 가다가
나는 갑자기 한가지 잊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사도행전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3] 고뇌하는 로마의 지성
로마교회에 남아있는 베드로의 강한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던 중에
내가 생각해낸 것은
베드로가 직접 로마에 가서 전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베드로의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이
로마교회를 세웠을 경우에
같은 형상이 생길수 있다는 점이었다.
(베드로의 영향을 깊이 받은 로마사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머리 속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이달리야대의 백부장 고넬료였다.
그는 바로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나는 부지련히 사도행전 10장을 찾아서 들여다 보았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10:1,2)
그러나 나는 아직 이 고넬료라 하는 로마군대의 장교가
확실히 로마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시 로마 군대의 장교 중에는 속주의 출신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도 다수 있엇기 때문이었다.
나는 즉시 고넬료가 소속되어 있던
이달리야대에 관해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람세이(Ramsay)의 조사에 의하면
이달리야대는 다른 로마의 부대와는 달리
이달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만으로 조직된 특수부대였다.
말하자면 이달리야대는 로마의 엘리트들만으로 구성되어
황제에게 충성하는 정예부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특수한 엘리트 부대가 로마를 떠나
속주에 진주한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뿐이었다.
그 예로서 유대 전역에
열심당의 반란이 확산되고 있던 AD 69년에도
로마는 이 이달리야대를 갈릴리 지역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로마는 어째서 헤롯 아그립바1세 때에
이달리야대를 다른 4개 부대와 함께 가이사랴에 진주시켰던 것일까?)
헤롯 아그립바1세가 다스리던 당시의 유대에는
어떤 우려할만한 상황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로마쪽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당시 로마에서는 광란의 황제 칼리굴라가
근위대의 장교들에 의해 암살되고
장교단은 그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는데,
그것이 AD 41년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근위대 장교단이 우선 취해야 했던 조치는
각 속주들이 새 정권에 승복하도록 단속하는 일이었다.
그 때에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대의 왕인 헤롯 아그립바 1세였던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1세는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죽였던
헤롯 안디바의 형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그의 부친 헤롯1세의 미움을 받아 피살되자,
그의 딸 헤로디아는 숙부 헤롯 빌립에게 시집 갔다가
후에 다시 다른 숙부 헤롯 안디바와 야합했으며,
헤로디아의 동생 아그립바는 로마로 피신했는데,
그는 로마에서 공부하다가
젊은 칼리굴라와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칼리굴라는 황제가 되자
AD 39년 유대인의 헤롯 안디바를 거세하고
아그립바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니 칼리굴라를 암살하고
로마의 정권을 잡은 근위대의 장교단이
아그립바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마침내 충성스러운 정예부대 이달리야대를 비롯한
5개 부대를 진주시켜
아그립바를 위압하려 했을 것이다.
성경에도 이 당시
로마 정부와 아그립바 사이에 있었던
신경전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아그립바는 자신의 친구이며 후원자였던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스스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의식하고
모든 유대인들을 결속시켜
자신에 대한 지지를 굳게 하려고 하였다.
그가 유대인들이 미워하던 나사렛당의 박해를 시작하여
요한의 형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체포했던 것도
모두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행 12:1-4)
베드로가 탈옥한 이후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그립바는
직접 가이사랴로 가서
로마가 파견한 주둔군의 목전에서
자신의 통치능력과 백성들의 지지를 과시하려 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지방의 지도자들이
식량원조의 문제 때문에
자신에게 화친을 요청해온 것을 기회로
대규모의 군중집회를 열어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과시했던 것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아그립바는 AD 44년 가이사랴의 군중집회가 열린 노천극장에
은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나타났다.
장내의 군중들은 그를 신(神)이라 부르며 환호했는데,
관중의 열광과 찬사에 도취해 있던 왕은
갑자기 위에 통증을 느꼈다.
그로부터 5일 후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도행전의 기록도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1-23)
어쨌든 아그립바가 죽었으므로
가이사랴에 진주했던 이달리야대는
더이상 거기 머무를 필요가 없어
로마로 귀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달리야대의 청년장교 고넬료
(로마식으로 읽으면 코르넬리우스 : Cornelius)는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한
AD 41년에 가이사랴에 파견되었다가,
아그립바가 죽은 AD 44년에 로마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AD 43년 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베드로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의 집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원의 도리를 전한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예수에 관해서 모르고 있었으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늘 기도하며 구제에 힘쓰고 있었다.
(···로마의 청년 장교 고넬료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가 AD 41년에 가이사랴에 와서
AD 43년경에 베드로를 만났으니
그 짧은 동안에 하나님을 알게되고
늘 기도하며 구제에 힘쓸 정도의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유대 땅에서 이방인에게
자기들의 종교를 가르치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방인들이 이방의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그들의 강론을 듣고 유대인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그렇다면 청년 장교 고넬료는
이미 로마에서부터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었을 것이고
그것은 저 광란의 황제 칼리굴라 시대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다른 장교들이 칼리굴라의 암살을 모의하고 있을때
이 세상 권세에 환멸을 느끼며 로마의 거리를 걷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는지도 모른다.
"과연 로마는 세계를 지배할 자격과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그가 세상권세의 수도이며
정치와 무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한 복판에서
정의와 진실의 부재를 목격하며 방황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신이 인간을 다스린다면 신은 또 무엇인가?"
[4] 로마교회의 영광과 교훈
고뇌에 잠겨 로마의 거리를 걷고 있던 고넬료는
곳곳에 서 있는 수많은 신상(神像)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상적 공화정치를 표방하던 로마는
시민들과 각 속주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거리는 신들의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로마의 신들은 물론이요, 헬라의 신들이며,
아시아의 아르테미스, 에집트의 이시스신 등
온갖 신들이 모여드는 곳이 로마였다.
그 수많은 신상들에게 조차 더욱 회의와 환멸을 느끼던 그는
문득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에게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그는 거기서 모세의 오경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예언의 말씀들을 들었을 것이다.
거기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있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가르침이 있었고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
유대인 쪽에서 볼 때 이방인인 고넬료는
점점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그 가르침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곧 군인다운 실천력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다가
유대의 가이샤라지방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가이샤라에서도 구제와 기도에 힘쓰던 중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4,5)
베드로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그를 마중하는 고넬료의 감격은
우리까지도 감동하게 한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 10:24-26).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이렇게 하여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은
베드로의 강론을 듣게 되었고,
마침내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되었으며,
성령받은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행 10:34~48).
그후 고넬료는 이달리야대의 철수와 함께 로마로 돌아가서
열정적이고도 헌신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로마교회는 엘리트 장교인 고넬료의 영향을 받아
군대식의 강력한 조직으로 사회 각층에 파고 들었으며,
폭넓은 구제활동과 사회봉사도
역시 그의 실천적인 믿음을 본받은 것이었다.
또한 로마교회는
그에게 세례를 주었던 베드로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았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정을 토대로
로마교회의 빈 공백 속에
고넬료의 이름을 대입해 보았다.
AD 37~41 : 칼라굴라 황제의 광란적 통치,
청년 장교 고넬료, 유대인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다.
AD 41 : 칼라굴라 피살, 클라우디우스 황제 즉위,
로마 정부, 이달리야대를 유대의 가이사랴에 파견
AD 43 : 고넬료, 베드로에게서 세레받음
AD 44 : 베드로 체포, 탈옥, 헤롯 아그립바 1세 사망,
이달리야대 철수, 고넬료 로마에 귀환, 로마교회 개척
AD 49 : 클라우디우스 황제, 유대인 추방령,
아굴라 부부 고린도에
AD 50 : 바울, 예루살렘 총회 끝나고
제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아굴라 부부를 만남,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잔류.
AD 54 : 클라우디우스 사망, 네로황제 즉위, 추방령 해제,
아굴라 부부등 유대인들 로마에 귀환.
AD 56 : 바울, 3차 전도여행 중 로마서를 집필하여 뵈뵈 편에 전달.
예루살렘에 갔다가 체포됨.
AD 58 : 바울, 로마로 압송됨.
AD 59 : 바울, 로마에 도착.
AD 62 : 베드로, 로마에 도착.
AD 64 : 로마의 대화재 사건. 바울과 베드로 순교.
이렇게 하여 나는 로마교회의 감동적인 교회사를 조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추리가 학자들에 의하여 입증되려면
더 많은 방증들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어쨌던 나는 로마교회의 뒤안에 숨어있는 고넬료의 짙은 그림자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고넬료는 끝내 교회사의 표면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넬료 뿐만 아니라 로마교회를 배후에서 키우던 많은 인물들이 교회사의 뒤에 숨어 있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한 곳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던 그들은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도임이 드러나서 황제 앞에 서게 되면 성령의 지시를 따라 기꺼이 에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처형을 받았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사 속의 두 가지 기적을 말할 때
로마교회의 자생(自生)과 한국교회의 자생을 말한다.
그래서 2천년 전, 로마교회를 칭찬하며 또 충고했던 바울의 권면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충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4~17).
270년간의 충성으로
대제국 로마를 거의 다 정복했던 로마의 지하교회는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라고 충고한 바울의 가르침과
끝내 교회사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은 고넬료의 전통을 포기하고
권력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되어가던 하나님의 나라를
암흑 속으로 끌어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상권력과 야합하는 교회,
또는 그 권력을 탈취하겠다고 투쟁하는 교회들은
모두 다 심각하게
로마교회의 실패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김성일님의 '성경과의 만남'(신앙계)>
http://blog.daum.net/matsy/6654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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