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골고다의 수수께끼
누가 뭐라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골고다의 처형장이다.
거기엔 로마 군대로 상징되는 정치 권력이 있었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종교 세력이 입회했으며,
강도라는 이름으로 예수와 함께 처형된 독립 투사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의 고난을 구경하며 희롱하는 무지한 민중도 있었고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묵묵히 그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지성인들
그리고 이제는 오직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없는 무력한 여인들이 거기 있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던 인류사상 최대 사건의 무대는
그토록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계시던 6시간 동안 혹
독한 고통속에서 남겨놓은 소위 가상칠언(架上七言)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자신을 처형한 자들을 위해 용서를 비는 사랑의 기도(눅 23:34),
함께 매달린 강도를 위로하는 약속의 말씀(눅 23:43),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요 19:27),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는가 하고 울부짖는 비통한 절규(막 15:34),
처절한 신음과 함께 새어나온 목마름의 호소(요 19:28),
끝까지 그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드린 순종과 신뢰(눅 23:46),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음을 선언하신 그 완결성(요 19:30)…
그것은 참으로 인간의 모든 애환과 갈등을 농축해 놓은 최대의 드라마였고
인류의 간절한 꿈과 소망을 핏빛으로 아로새겨 놓은 영원한 금자탑이었다.
예수 그 분은 자신을 못박은 자들의 용서에 대해서도 아버지께 부탁하셨고
자신의 영혼까지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일까?
이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던 나는 또 한가지의 의문에 부딪치게 되었다.
골고다의 무대에 대한 하나님의 시나리오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되고 있을 때 모두 다 도망쳤고
베드로마저도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후
울면서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골고다의 현장에 갑자기 요한이 나타났던 것일까?
몹시도 현실적이며 기회주의적이었던 요한의 성격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 밤의 행적에서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그날 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사태의 진전을 탐색하려고 가야바의 집까지 따라갔다.
그는 이미 가야바 뿐만이 아니라 그 집 여종들까지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가야바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 쪽과 예수 쪽에
양다리를 걸치기로 했던 것이다.
요한은 끈질기게 현장을 지키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메시야의 출현을 선포하고 새정부의 수립을 발표하면
요한은 당연히 도망간 다른 제자들과 경쟁하지 않고
요직에 발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요한은 언제까지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빌라도가 예수의 구명을 단념하고
민중의 요청대로 바라바를 석방함과 동시에
예수의 처형을 선고할 때까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는 그 슬픔과 행진과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선고하자 군병들은 예수를 채찍질하였고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운 다음
침을 뱉으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요한이 보기에 예수는 더 이상 메시야가 아니었다.
예수를 따라다녔던 요한의 야망도 이제는 끝장난 것이었다.
현실주의자인 요한은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예수는 골고다언덕에서 마지막 순간에 메시야 강림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되지 않는가?'
요한은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골고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예수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요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요한이 예수를 이해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본래 성격이 격렬해서
오래 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예수는 요한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한가지 조치를 해 놓았다.
예수는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추가 체포령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 속에 보낸 안식일 다음날 새벽,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무덤에 다녀온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그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베드로보다 앞서서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빈 무덤 앞에서 온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는 감히 무덤 안으로 뛰어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 20:4,5).
예수가 부활했다면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려서 신음하던 예수가 아니요,
전지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지금까지 선생의 눈을 속여 가며
양다리 걸치기를 해온 요한의 비밀을
모조리 간파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와 요한과의 관계는
지난 날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요 13:23) 다정한 관계에서
씁쓸한 관계로 바뀌고 있다.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나타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면서
그가 당할 수난을 예고해 준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아무말씀도 없으시므로
민망해진 베드로가 대신 묻는다.
"주여, 이 사람은 어찌 되겠삽나이까?"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극히 쌀쌀한 것이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0∼22)
이 때부터 요한의 죽을 수도 없는 고독은 시작되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 때에도 마리아를 모시고 피신해야 했고,
그의 형제 야교보마저 순교하고 베드로가 체포 당하는 난리통에도
마리아와 함께 숨어다녀야 했다.
요한은 다시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서 마리아를 안디옥으로 모셨고,
그 안디옥이 또 위험해지자 이번에는 에베소로 옮겨갔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고
다른 제자들도 하나 하나 순교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모두 다 순교하고 요한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요한은 이미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요한은 예수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예수는
바로 '태초로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요 1:1)이었고,
그는 마침내 백발의 노구로
예수의 추억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요한복음은 바로 요한의 참회록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불멸의 복음서에서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썼다.
이렇게 요한의 구원을 계획하신 예수의 웅대한 구상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자료출저 : 김성일님의 '성경과의 만남'(신앙계)>
http://blog.daum.net/matsy/6654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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