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사로의 미스테리
[1]사라진 나사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작정한 이유를
우리는 복음서의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예수는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면서
안식일에도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치셨으며
둘째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으심으로써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셋째로, 너희가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여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의회가
본격적으로 예수의 제거를 모의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 직후부터였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버젓이 살아 있으니
예수의 표적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 셈이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공의회는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며
아예 나사로까지 함께 없애 버리자는 의견까지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예수의 수난으로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입성 때,
예루살렘 백성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한 것도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 때문이었다.
나는 예수의 수난 이후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는가 궁금하여
성경의 여기저기를 뒤져보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사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날
성밖의 베다니에서 열린 환영 잔치에 참석한 후
그 누이들 마르다, 마리아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라진 후
예수는 베다니에서 아침 잡수실 곳도 없었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도
마가의 집에서 신세를 지셔야 했다.
예수의 수난 때에도 이들 세 남매의 행적은 보이지 않았고
골고다의 현장에는 세 사람의 마리아가 있었는데
곧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온 여인이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타락한 여인이었다.
반면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예루살렘 성 밖 베다니에 살고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도 예수의 무덤을 찾아갈 정도로
담대하고 활동적인 여자였으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와 달리
비활동적이요 소극적인 여자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만을 놓고도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무리한 가설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다면 나사로의 세 남매는
베다니의 잔치 이후 성경에서 사라진 것이다.
수난의 현장에도 없었고
마가의 다락방에도 없었고
사도행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나사로의 세 남매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더 큰 문제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 중요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마
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에는 고스란히 빠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누가복음 10장에만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가 잠깐 나올 뿐
마태, 마가에서는 아예 그들 세 남매의 이야기가 비치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웬일인가?
물론 요한복음이 먼저 나왔다면
다른 기록자들이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생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으며
그 다음이 마태복음이고 누가복음은
그 수신자로서 익명의 고관 '데오빌로 각하'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로마의 최고위층까지 기독교가 침투할 수 있었던 AD 80년경으로 추정되며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요한이 밧모섬으로부터 돌아온 AD 96년경,
즉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를 비교해 읽으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복된 부분이나 직접 목격하지 못해서
분명하지 않은 어떤 부분들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은
자기보다 앞서 기록한 세 복음서에 이미 기록된 사건을 가능한 한 생략하였고
오히려 거기서 빠뜨린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보충한 느낌이 든다.
또 예수와 베드로가 만난 장소에 대하여서도
세 복음서의 기자는 갈릴리 바닷가의 장면만 기록했으나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요한은
그보다 먼저 요단 강변에서 있었던 만남을 추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예수의 직접 제자가 아니니 그렇다치고
마태는 나사로 사건의 현장에 있었을 텐데
어찌해서 나사로의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다시 '나사로의 현장 검증'을 위하여
요한복음 11장을 곰곰이 뜯어보기 시작하였다.
[2]갈릴리와 예루살렘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우선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모독 사건 때문에
베뢰아 지경까지 피신한 예수에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기별이 오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 베다니로 가자고 하시는데
뜻밖에도 제자들의 반응은 극히 냉담할 뿐만 아니라
불손하기까지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에게로 가자."
그러자 도마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러나 예수와 제자들간의 불화는
거기까지만 기록되어 있을 뿐,
장면은 바뀌어 베다니의 현장이 되고
거기에 제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면 '죽으러 가자'고 하던 도마의 말도
충성을 나타내기 보다는 몹시 빈정거리는 말투로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제자들은 이 시점의 기록을 어떻게 이어 놓았는가?
나는 다시 세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기록의 흐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7장 2-4절에 보면
예수의 형제들이 그에게 초막절을 기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초막절은
바로 구세주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월절(고난)과 칠칠절(부활과 성령강림)을 거쳐야만
초막절(영광의 재림)의 주인이 될 것을 아셨기에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서 사양하시다가
형제들이 먼저 올라간 후 별도로 올라가신 것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 도중 사마리아 지경에서 기록이 끊어지며
마태복음은
이들 일행이 유대지경에 도착하면서 기록이 끊어진다.
그리고 두 복음서는
모두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지경에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신경질적으로 통제하다가
예수의 핀잔을 듣는 대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복음서에는
예수의 초막절 설교, 베뢰아 전도, 나사로 사건 등이 몽땅 빠져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누가복음에는 초막절 기간 동안에 있었던
예수의 행적과 설교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마르다, 마리아자매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베뢰아 지방 전도까지도 상세히 기록했으나
나사로의 사건만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엉뚱하게 나사로와 같은 이름인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들어가 있다.
그 후에는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경고,
'회개와 용서'의 설교가 나온 다음
'열 문둥이의 비유', '휴거의 예고'가 있고
드디어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이 세 복음서를 살펴볼 때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베뢰아로 물러가셨을 때부터
'나사로 사건' 이후 '어린아이' 대목까지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선생이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했을 때
불평하고, 거부하고, 빈정거렸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베다니의 잔치 자리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심하게 나무랐으며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3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고 비난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자들은 나사로와 그 누이들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다시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살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정치적 메시야로 출현하실 것을 기대하여
예수 자신은 십자가상에서 고난 당하실 것을 계속 예고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누가 높은가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그 좌우에 모시게 해 달라고 인사 청탁까지 넣었다.
권좌를 향한 세력 다툼에는
의례 그 계보와 파벌이 생기게 마련이다.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다수당은 단연 베드로 쪽이었다.
그는 자기 형제 안드레를 비롯, 벳새다 출신의 빌립과 그 친구 나다나엘이 있었고
도마도 역시 갈릴리의 어부였다.
거기다가 요한과 야고보 형제까지 합치면
7명으로 단연 다수당이 되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열심당'의 혁명 세력에서 들어온 시몬과
역시 같은 계열로 보이는 다대오, 가룟 유다 3인의 진보 세력이 있었고
마태와 작은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서도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소외된 계층에 있었다.
그러나 다수당 내에서도 요한 형제의 출세욕으로 내분이 표면화되자
이들을 대동단결 시키기 위하여 나타난 개념이 '갈릴리 동지' 의식이었고
이 의식화의 주역은 아마도 가룟 유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되자 '갈릴리 의식'으로 단결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만 가면 친밀하게 지내는 나사로 일가를
집권시의 중요한 라이벌로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외 계층인 갈릴리 사람이 아닌 유대의 베다니 사람이었고
제자들은 '지역감정'으로 나사로 일가와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하여
베다니로 돌아가자고 간청하셨을 때에 따라가지 않은 것으로 본다.
다만 개별 행동을 잘하고 기회주의자였던 요한만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서 이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로써 예수와 제자들은 서로 헤어졌으나
갈릴리에서 다시 만난다.
예수는 '실족'과 '회개'와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으며
이 때부터 '실족케하는 자'로 지목된 가룟 유다는
예수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요한복음 12장 20-24절에 보면
예수의 위험을 알아차린 헬라인들이
예수께 면담을 청하고 망명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예수는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며
이를 사양하시는데 아마도 이 때
예수께서는 같은 위험을 당하게 된 나사로 일가를 그들에게 부탁하셨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전승에는
나사로가 프랑스 리용 지방 교회의 감독이 된 것으로 나오는데
아마도 그들 일가는 예수의 수난 전에
헬라를 거쳐 리용(당시의 루구두눔) 지방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어쨌든 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있었던 제자들의 부끄러운 사건을
마태와 마가는 기록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다만 누가는 나사로로 상징되는 유대인의 고난을 예고한
'부자와 나사로'의 설교만을 적어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90이 넘도록 오래 산 요한은
오히려 담대하게 이 사실을 기록할 마음이 생겼다.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을 모두 쓰고 나서도 망설이던 요한은
마침내 이 사실을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예수에 대한 마지막 충성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요한의 참회록으로 인식하게 된 나는
이것을 토대로 장편소설 [ 제국과 천국 ]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수난 전에 제자들이 바라던 나라는
로마와 다름없는 현실의 '제국'이었고
예수의 이상은 하늘의 나라 '천국'이었던 것이다. 그
러나 결국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후 그의 천국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는 로마에서, 안드레는 아가야에서,
시몬과 다대오는 페르샤에서, 도마와 나다나엘은 인도에서,
빌립은 히에라볼리,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모두들 기꺼이 천국을 위해 순교했으며
마침내 예수 그 분이 바로 '진리'였음을 깨달은 노령의 요한은
눈물의 참회 속에 한 복음서를 기록해 놓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http://blog.daum.net/matsy/6654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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