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세계로교회는 담임목사와 함께 1년 6개월 과정의 제자훈련과
6개월 과정의 사역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수집사와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을 수 없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직분자로 추천받은 사람은 100% 세워졌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교회 안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면 다 옳다.
그런데 다른 조직과 달리 교회만의 특징이 있다.
모든 최종 결정은 담임목사가 내리며,
기도하고 응답받은 방법을 따르다 보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진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해 세운 사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이런 질서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교회 힘은 분산되고 능력은 사장된다.
세계로교회 장로님들은 다양한 의견을 놓고 토론을 충분히 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담임목사가 정리해 제안하면 그 자리에서 논란을 끝맺는다.
담임목사가 결론적으로 ‘이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제안하면
더 이상 그것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교회를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담임목사를 거꾸러뜨리는 것, 담임목사의 사기를 꺾는 일이다.
‘내가 이 교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지.’
담임목사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목회하는 교회는 복된 교회다.
그런 목사는 쉬지 않고 기도하며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기가 꺾인 목사와 교회는 마귀의 놀잇감이 된다.
교인들도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복을 놓치고 만다.
교회에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은혜를 받지 못한다.
나이로 치면 나는 교회 장로님 20명 가운데 19번째로 어리다.
나이 차가 많지 않은 장로님들은 나를 동생처럼 여겨주시고
연세가 많은 분은 아들처럼 대해주신다.
그분들은 늘 나의 응원군이다.
“목사님, 소신껏 하십시오.”
“목사님, 하고 싶은 것 있으시면 다 하십시오.”
어느 교회 저녁 집회를 갔더니 담임목사님이 나오지 않았다.
당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5시간째 당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회 장로님들은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70세가 돼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해도 됩니까.”
“당회실 옆에 방이 하나 있는데,
회의하다가 피곤하시면 3분의 1씩 나누어서 잠시 쉬고 와서 또 합니다.”
“꽤 중요한 안건이 있나 보죠?”
“아닙니다. 늘 그렇게 합니다.”
회의를 위한 회의, 비판을 위한 회의는 할수록 회의만 생긴다.
한번은 “올해 어르신 개안수술을 500명 해 드립시다”하고 제안했다.
교회 재정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지만 일단 동의를 해주셨다.
나중에 한 장로님이 물었다.
“돈은 어떻게 하죠?”
“돈은 나중에 장로님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한번은 예배드리러 온 성도들의 옷차림을 보니
양복 입은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니, 교인들이 청바지 입고 교회 오는데, 나도 한번 청바지 입고 교회에 가자.’
그래서 아래는 청바지를, 위에는 티셔츠를 입고 설교했다.
그런데 장로님들은 내가 뭘 입었는지 신경도 안 쓴다.
나는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 일을 이뤄놓아야 잠을 잘 수 있다.
새벽기도 시간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기도하고 곧바로 실천한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와보면 없던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원망하거나 비난한 당회원은 없다.
히브리서 13장 17절 말씀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목회자가 근심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소신껏 목회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라.
때로는 넘어지고 실수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보라.
몇 번씩 넘어지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걸을 수 있게 된다.
모든 직분자가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사람은 담임목사다.
‘OO 교회가 좋다’고 말할 때 그 말의 60~70%는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좋다’라는 뜻이다. 목사가 엉망이면 장로나 집사들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사가 좋으면 성도들이 어지간하더라도 그 교회를 좋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직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사가 목회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크게 성장한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베드로를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도들이 거룩한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예수를 영접하고 난 다음부터는
바울을 향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놈이라고 정죄하지 않았다.
자기를 알아주고 실수를 감춰주고 사기를 높여주면
목회자는 그런 성도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다.
그 때문에 성도들은 목회자가 원래 사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헌신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높이고, 또 높이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붓다는 영혼을 믿지 않았다
전도자: 열반(니르바나)은 해탈과 동의어로 쓰기도 합니다. 불교에선 열반이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탐욕 분노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경험될 수 있는 것이라 보고 소유욕을 불러오는 애착에서 인간고의 원초적 뿌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즉,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열반인 것입니다. 참고로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길로서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선정을 말합니다.
대상자1: 그래도 부처님은 영혼을 믿지 않았습니까.
전도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영혼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설은 무영혼설로 불립니다. 붓다는 영혼설 지지자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영혼은 무엇인가’ ‘영혼은 어디서 왔는가’ ‘육체가 숨을 거둘 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육체와 유리된 후에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놓고 논쟁할 땐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반대심문 형식으로 논증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믿는 생각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 노력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크기와 형태를 물었습니다. 그는 제자 아난에게 영혼과 관련된 주장은 무수히 많다고 말하면서 증명되지 않고 인식할 수 없는 수없는 영혼 존재에 관한 논의는 무익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영혼신앙이 신을 믿는 신앙과 마찬가지로 정견을 함양하는 데 유해할 뿐만 아니라 미신의 온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마할리에게 영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영혼설을 비영혼설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영혼에 기초한 종교는 억측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영혼을 본 적이 없고 영혼과 대화를 해본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혼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마음은 영혼과는 다른 것이며 영혼 신앙은 무익한 것이라고, 그래서 영혼에 기초하는 종교는 무가치한 것이고 단지 미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붓다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법하는 한편 환생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교리를 설법하는 것을 자가당착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혼이 없다면 환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망고씨앗에서 망고나무가 자라날 것이고 그 나무는 망고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것이 망고 씨앗의 환생이다. 그러나 이 망고에 영혼은 없다. 이와 같이 영혼이 없더라도 환생은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상자1: 부처님이 영혼을 부정했다면 윤회설도 부정했다는 말씀입니까.
전도자: 영혼을 부정했던 붓다가 윤회설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붓다는 전생에서 저지른 행동이 현세에 고통을 만들어내고 현생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윤회설을 부정했습니다.
전생이 현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힌두교의 주장과는 일치하지만, 붓다의 주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붓다는 전생이 내세를 좌우한다는 힌두교 교리가 참으로 간악한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교리를 만들어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유일한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국가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처럼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교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불교 전문 서적 ‘인도로 간 붓다’라는 책에서도 붓다가 힌두교의 그런 교리를 지지했을 것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윤회사상은 계급사회에서 불만을 품은 대중이 항상 있게 마련인데 그 불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그럴듯한 논리가 됐습니다. 오늘날 인도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데는 바로 이와 같은 윤회설이 민중 사이에서 받아들여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윤회설은 붓다의 사상이나 설법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