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요나3일영성원 원장 이에스더 (1)-(5)

영국신사77 2018. 5. 15. 08:44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 일가 친척 ‘목회자 150여명’ 은혜 주신 하나님

내 고향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주님, 어린 소녀에게 소임 맡길 시험을

입력 : 2015-06-03 00:09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 일가 친척 ‘목회자 150여명’ 은혜 주신 하나님 기사의 사진
원장으로 있는 서울 홍제동 요나3일영성원 개인기도실 앞에서 단식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그는 기도의 기적에 대해 늘 강조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네 수영장을 찾았다. 직선거리 25m인 수영장을 정확히 50회 왕복하면 1,250m가 된다. 보통 1시간10분이 소요되는 이 수영은 숨도 가쁘고 힘들지만 건강을 위해 주일 외엔 하루도 거르지 않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주위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 내가 아직 현장에서 왕성한 사역을 펼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한다. 하나님의 종은 사명자로서 자신을 잘 가꾸고 또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더 역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내 나이 69세.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이다. 숱한 희로애락과 거친 파도를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나와 함께 해주시며 힘과 용기, 은혜와 능력을 주셨다. 내 삶에 좌정해 역사해 주신 좋으신 주님을 두 손 들어 찬양한다. 연약하기만 했던 한 홀사모에게 주신 주님의 강력한 은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이제 그 간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내 고향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이다. 서양 선교사에 의해 증조부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난 출생부터 이미 4대 신앙인이었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신앙의 뿌리가 깊었는가 하는 것은 아들로 태어나면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고, 또 딸로 태어나면 사모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가풍으로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안의 일가친척까지 목사가 된 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니 무려 150여명이나 되었다. 조부도 목회자(이상기 목사)셨고 선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외가 친가가 다 독실한 기독교 가계(家系)였다.

둘째 딸인 나는 할머니의 낭랑한 기도 소리를 언제나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 새벽기도도 할머니의 등에 업혀 빠짐없이 참석했다. 할머니는 강대상에 호롱불을 켜 놓으시고 잠든 나를 무릎에 누인 채 기도하셨다.

5살 때 6·25가 일어났다. 우리 가족도 평양 큰집을 버리고 남한으로 피란길에 나섰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멀고 먼 길이었지만 우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걷고 또 걸어 경북 김천에서 얼마 안떨어진 종산골이란 곳에 안착했다. 영양실조에 너무나 힘이 들었던 나는 형체만 겨우 알아보는, 눈이 안 보이는 실명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사에게 가볼 수도 없는 가난한 형편에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주님. 이 딸의 눈을 치료해주세요.” 간절한 부모님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켜 시력이 회복됐고 다른 어린이들과 다름없이 뛰놀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당시 설교하던 외국인 선교사 특유의 말투를 곧잘 흉내내 어른들을 배꼽 잡게 만들곤 했다. 그때부터 예능에 자질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씩씩하게 길가로 나가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내가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중학교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결교단 임영재 목사님을 통해서였다. 부흥사셨던 임 목사님은 영적 카리스마도 대단했지만 포용력과 자상함으로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나의 신앙이 바르게 뿌리내리는 데 큰 도움을 주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약력=1946년 평양 출생. 중앙총회신학교 졸업.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여성강사단장 및 국제단식기도원 원장 역임. 현재 요나3일영성원 원장. 홀사모선교회 회장. CTS CBS 방송설교. 저서 ‘주님 한손만 잡아 주소서’ ‘행복한 기도대장’ ‘3일 기도의 기적’ 등.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2) 나를 10번 찍어 반려자로 삼은 장경환 전도사

“절대 목사에겐 시집 안간다”던 나를 믿음의 남편 통해 주님의 종 만드셔

입력 : 2015-06-04 00:01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2) 나를 10번 찍어 반려자로 삼은 장경환 전도사 기사의 사진
목사가 되어 왕성하게 사역하던 어느 날, 영적 멘토인 고 임영재 목사님 부부를 모시고 식사 접대를 했다. 왼쪽이 이에스더 목사.

중학교 때 금요철야예배 시간에 성령을 체험하고 깊은 회개기도 가운데 방언까지 하게 된 나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성령의 불을 받으니 내가 죄인인 것이 인정되고 회개가 터져 밤새도록 기도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다. 거듭남의 체험은 기쁨과 감사, 은혜를 충만하게 했다. 깊은 기도는 은사로 이어졌고 어린 나이임에도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목회자는 가난한 것이 당연했던 때였다. 후줄근한 옷에 비쩍 마른 몸에 성경책만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만큼은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반면 코쟁이로 불리는 외국 선교사들이 멋진 옷에 지프를 타고 우리가 보지도 못한 서양음식을 먹는 것이 부러웠다. 차라리 미국사람에게 시집 가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님의 오랜 지병으로 인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이를 야무지게 잘해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오랜 투병 중에도 기도생활은 철저하게 하셨는데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신유를 체험하시고 병을 이겨내셨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걸스카우트 대원으로 봉사했고,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해 고등학교 발레 교사가 되었다. 난 집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목회자 사모가 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느 날 한 기도원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봉직하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나 사윗감으로 점찍으셨다. 열정적이고 용모도 뛰어난 이 장경환 전도사에게 나를 시집보내고픈 마음이 드셨던 것이다.

“내가 봐둔 전도사와 선을 보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라.”

“엄마. 난 절대로 목사에겐 시집 안 가요. 딸을 평생 고생시키려고 하세요? 생활능력도 없는 가난한 전도사 전 싫어요.”

어머니는 양가 어머니들이 선을 보기로 약속은 했지만 내가 워낙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됐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교회의 믿음 좋은 처녀를 딸이라고 하고 맞선 자리에 나가게 했는데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 전도사는 포기하지 않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불쑥 찾아왔다. 마스게임을 지도하던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아주 쌀쌀맞게 대하고 돌려보냈는데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집요하게 구애를 해왔다. 나는 정식으로 맞선을 보겠다고 한 뒤 일부러 짧은 치마를 입고 한껏 멋을 내고 나갔다. 내가 사모감으로 적절치 않다고 그쪽 어머니에게 보이고 포기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어머니는 예상대로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장 전도사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맞는 말이었다. 나를 위한 열정적인 구혼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고 나는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YMCA회관에서 예배 형식으로 드린 결혼식에서 나는 과감한 초미니드레스를 입어 하객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토록 목회자와는 결혼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나의 길을 예비해 서서히 당신의 종으로 쓰기 위한 준비를 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난 결국 우리 집안의 가풍대로 목회자 아내가 되었고 남편은 경기도 파주 탄현면의 25평 정도 작은 교회에 첫 부임을 했다. 초가집 사택이 딸린 이 교회는 임진강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 달 목회자 사례비가 쌀 두 말에 보리 한 말, 현찰 2만원이 전부였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3) 남편, 죽는 날까지 목회·기도… 홀사모가 되다

“4명의 자녀와 저를 책임져 주세요” 눈물 기도에 목회자의 길 소명 받아

입력 2015-06-05 00:10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3) 남편, 죽는 날까지 목회·기도… 홀사모가 되다 기사의 사진
목사 안수를 받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야간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한 뒤 목회 일선에 나서게 된다.
고교시절 난 전국 행사인 남원 춘향이로 뽑히기도 했고 미스코리아에 출전했다가 지역 결선에서 어머니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한때 영화 촬영까지 하다 부모님의 반대로 중단할 만큼 외모에는 자신이 있었고 여기에 발레까지 전공해 몸매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눈이 높을 만큼 높았고 자존심도 무척 셌다. 그리고 절대 목회자와 결혼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목회자 사모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센 기도를 당해낼 수 없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갇혀 지내려니 매우 갑갑했다. 

남편은 사회도 잘 보고 영어와 음악 실력도 뛰어난 다재다능한 목회자였다. 목회엔 정말 열심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난 가계를 돕느라 다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발레 레슨을 했다. 남편이 속한 장로교(기장)는 교단에서 정해주는 목회지로 가야 했다. 문산에서 다시 김제로 갔다가 안양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였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지나치게 무리하며 목회하던 남편이 갑자기 소회가 안 되고 혈압이 높아지는 이상증세로 힘들어했다. 목회는 점점 자리를 잡고 성도는 느는데 남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난 일단 학교 근무를 중단하고 간병에 매달렸다. 그런데 남편은 병약한 몸을 외면한 채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이를 시작했다.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나는 남편을 살려 달라고 주님께 뜨겁게 부르짖었지만 결국 남편은 소천하셨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엄청났다. 이어진 현실도 암담했다. 당시 난 네 자녀를 두었다. 맏이가 중학교 3학년 그리고 둘째가 중학교 1학년, 둘 다 딸이었다. 그 밑에 2년 터울로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아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목회자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와 아이들은 대책 없이 사택을 비워주고 나가야 했다. 전셋집이라도 하나 얻어주는 배려나 일정 기간의 생활비 지원도 전혀 없었다. 이때 난 홀사모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내가 목사가 되고 안정을 찾으면서 홀사모 돕기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직접 체험해 보아야 그 아픔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책임져 달라고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남편이 못다한 목회를 내가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았다. 이것은 개인 의지가 아닌 성령의 명령이었다. 

나는 당시 서울 청파동에 있던 대한신학교를 찾아 야간에 신학 공부를 하고 낮에는 교회 사역을 하며 아이들을 양육했다. 여성 목회자를 처음 배출한 중앙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막상 목회 일선에 나서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편 친구와 아는 분들이 거의 목사인데 아내인 내가 목회를 한다고 하면 다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기간에 나는 골방기도를 통해 영성을 쌓고 또 쌓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가혹한 현실을 주시는지 따지고 싶기도 했지만 이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예전과 다른, 깊은 믿음을 키우게 해 주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하여 목회에 집중하던 나에게 캐나다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사님, 안수도 받으셨으니 말씀에 목말라하는 캐나다 한인들을 위해 순회설교 좀 해 주세요. 비자 기간인 3개월간 지내시며 좀 쉬기도 하시구요.” 

이 제안은 갑갑해하던 내게 새로운 돌파구였다. 그러나 한창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문제였다. 시댁에 노크를 했더니 모두 고개를 저었고 결국 친정에 애들을 맡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아이들 걱정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4) 캐나다 공무원 “기도로 병 고쳐줄 수 있나요?”

비자 연장하러 갔다가 기도 부탁받아… 30년 된 지병 치유에 특별시민증 선물

입력 2015-06-08 00:16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4) 캐나다 공무원 “기도로 병 고쳐줄 수 있나요?” 기사의 사진
캐나다 오타와벧엘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는 이에스더 목사.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교회였다.
남들이 보면 자식을 팽개치고 캐나다로 사역을 나서는 나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담대하게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용기를 주셨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나는 즉시 복음에 목말라하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기후가 좋고 먹을 것이 풍부한 캐나다에서는 가는 곳마다 산해진미를 차려 내왔다. 그러나 손이 가지 않았다. 아이들 생각에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난 주의 종이기 이전에 모성애 강한 어머니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금식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와 비례해 나의 영성은 더욱 깊어졌고 성도들에게 큰 역사를 일으키는 집회가 이어졌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각종 은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온 한 여사역자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계속 집회 요청이 이어졌다. 그런데 나의 집회에 오타와에서 온 유학생 청년그룹이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에스더 목사님, 저희가 오타와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저희 교회 담임 목사로 모시면 안 될까요? 부탁입니다. 저희는 목사님처럼 열정적인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주의 종은 양들이 요청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난 나를 애타게 기다릴 자식들을 생각지도 않고 덜컥 승낙을 하고 오타와벧엘교회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새로운 사명감에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광비자로 온 나는 3개월이 지나 연장신청서를 관계기관에 제출하게 되었다. 비자담당관은 내게 왜 연장을 하려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를 도우려고 온 통역성도가 “우리가 세운 교회 목사님이신데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으니 계속 계시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 담당관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로 병도 고치나요. 난 30년째 병명이 없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어요. 늘 고통을 느끼는데 의학적으로는 나오지 않아 답답하죠. 은사가 많은 목사님이시라니 기도를 받아도 되나요?”

난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해 30여분은 한 것 같았다. 그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성령이 임해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자신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당신은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확실히 맞는 것 같소. 내겐 평생 3명에게 보증을 서서 특별시민증을 나오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 중 한 장을 당신을 위해 쓰겠소.” 

난 비자연장은 물론 거주자격까지 보너스로 받은 셈이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어느 것도 불가능이 없다. 교회에서는 내게 살 집과 차를 마련해 주었고 나는 이곳 저곳을 순회하며 마음껏 집회를 인도했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 나와 함께하며 캐나다 사역의 입지를 다져 주었다. 

그동안 아이들에겐 생활비를 보내주며 안부를 전하다 1986년 2월, 한 달간 휴가를 내어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 사이 몰라보게 자라 있었고 엄마의 공백을 큰딸이 잘 메워 주고 있어 감사했다. 

난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잘 섬기는 집사님을 통해 우연히 공군사관학교를 나온 현역 공군 중위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동역자가 되어 지금까지 함께 사역하고 있는 사위 장덕봉 목사이다.

장 목사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학생부 회장을 맡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부친도 그를 주의 종으로 삼으려 기도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등록금 부담이 없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소명을 찾아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나는 그를 본 순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위라는 느낌이 빠르게 스쳐갔다. 이는 기도하는 나의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5) 믿음의 딸-사위, 얼굴도 안보고 결혼 날짜 잡아

공사 출신 장덕봉 중위를 보는 순간 주님이 주신 미래 사윗감임을 직감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5) 믿음의 딸-사위, 얼굴도 안보고 결혼 날짜 잡아 기사의 사진
결혼식을 마치고 사위 장덕봉 중위와 딸이 폐백을 드리는 모습. 사위는 군인으로 근무하며 신학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해 목사가 된다.
결혼도 대물림을 하는 것인가. 내가 어머니의 기도로 목사와 결혼하게 된 것처럼 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늠름한 공군사관학교 출신에 믿음 좋은 장덕봉 중위를 사위 삼고 싶어 서두르는 나의 모습이 예전의 엄마 모습 그대로였다. 기도해 보니 딸의 배우자감으로 장 중위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믿음이 왔다.

딸은 20대 초반이라 아직 소녀 같았고, 나도 곧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으며, 장 중위도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갈 예정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릴 것 같았다.

“장 중위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딸과 장 중위를 맺어주라는 응답을 받았어요. 함께 기도해 보십시다.” 

장 중위는 딸을 한번 보지도 않고 내 말만 들은 채 기도해 보겠다고 하더니 나흘이 지난 후 자신도 응답을 받았다며 결혼을 승낙했다. 우리 집안의 가풍대로 딸도 사모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결혼이 또 있을까. 신앙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딸과 장 중위는 결혼식 날짜를 미리 정해 놓고 그 전날 처음 만났다. 다행히 딸이 사위를 만족해하는 눈치여서 마음을 놓았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는 결혼이라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진행되었다.

하객들의 축의금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남은 돈을 사위에게 주며 신혼여행비로 쓰라고 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뒤로 미루고 딸과 의논해 그 돈을 자신이 지휘하는 공군부대 성가대원 가운비로 사용하겠다고 해 기특했다. 딸은 사위의 성가대 연습이 늦게 끝나 신혼 첫날밤을 자취방에서 보냈다고 했다. 나는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위의 모습에 서운하기는 커녕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캐나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딸과 아직 도움을 줘야 하는 아이들을 보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캐나다에서는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빗발쳤고 나를 데리러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려고 하면 국내 부흥집회가 잡히곤 해 출국이 자꾸만 늦어졌다. 

한번은 사위가 근무하는 대구의 공군부대 기독장교 모임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이날 하나님이 크게 역사해 주셔서 모두들 은혜를 받았고 매주 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사위 입장도 있어 당분간이란 단서를 붙이고 예배를 인도했는데, 아예 예배처소를 얻어 목회를 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사위도 이렇게 말했다.

“이 목사님, 캐나다보다 한국 사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장모님으로서가 아니라 목사님으로 모시고 옆에서 힘껏 도울 테니 국내 사역을 하시지요. 무엇보다 아내와 처남들이 장모님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난 캐나다 교인들에게 미안했지만 한국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딸의 집과 가까운 교회에 터를 잡고 철야하며 기도의 포문을 열었다. 하나님께 내가 목회할 수 있는 공간을 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렇게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병원 앞으로 가라”는 응답을 받았다. 

대구 파티마병원으로 가보니 건축 중인 새 건물이 있었다. 전세만 준다는데 사정해 50여평에 월세로 들어가기로 계약했다. 완공과 함께 요나금식기도제단이란 현판을 걸고 입주를 했다. 요나와 같은 신앙인이 주변에 너무나 많기에 금식하며 죄를 자복하고 신앙인으로 거듭나자는 의도였다. 

집회를 시작하자마자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넘치기 시작했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나면서 매일 200여명의 성도가 문제를 안고 모여들었다. 저녁 10시 반부터 12시까지 1차 집회를 열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기도를 드렸다. 낮에는 주부들이 밤에는 직장인들이 모여 뜨겁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