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김용복 ⑴] 고학생 도우려 만석지기 꿈 품어
2003.11.30~2003.12.30.
경기도 성남시에 싸구려 설렁탕집을 차렸다.
성공을 꿈꾸며 이것저것 벌여봤지만
번번이 쓰디쓴 실패만 맛보고 난 뒤였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굶어죽게 할 수는 없어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시작하긴 했지만 도무지 의욕이 없었다.
낮에는 낡은 누비바지를 입고 여기저기 150원짜리 설렁탕 배달을 다니고,
밤에는 내 울분을 못 이겨 연거푸 소주병으로 나발을 불어댔다.
간혹 취객들로부터 수모라도 당한 날에는 미친 듯이 울부짖기도 했다.
희망의 빛이라곤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삶의 의욕도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언제부터인가 한쪽 호주머니에 자살에 쓸 약을 잔뜩 넣고 다녔다.
세계 최상급의 쌀을
1년에 1만2000섬씩 쏟아내는 전남 강진의 70만평 농토를 돌아볼 때마다
‘이게 내가 일궈낸 것인가’라는 벅찬 감회가 가슴에 차오른다.
더구나 친환경 무공해 농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보석을 쏟아질지 모른다.
14년전 10억원의 기금으로 시작된 장학회를 통해서
법관 의사 군장교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올해에는 1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해 농촌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앞으로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슴에 꽁꽁 맺혀 있던 한을 거의 푼 것같다.
주위에서 크게 성공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나 자신도 이 정도면 성공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위 두 장면의 주인공은 동일인이다.
바로 나, 김용복이다.
앞은 1970년대 초반 처절했던 시절의 내 이야기고. 뒤는 현재 상황이다.
내 인생을 지상에 공개한다는 것이 영 쑥스럽고 마뜩찮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에 어긋나게,
혹시라도 나의 성공담을 자랑하는 인상을 주지나 않을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정확히 70성상을 꽉 채운 지금,
이런 기회로 내 인생을 새롭게 정리해보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용기를 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다른 데 있다.
내 인생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도전을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지배해온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앞에서 두 장면을 대비시켰지만,
내가 살아온 길은 처절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성공이라는 과실을 따내기 위해서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면서 입은 상채기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간혹 가슴 벅찬 기쁨과 감격의 순간도 있었지만,
내 삶은 가혹한 시련들의 연속이었다.
끼니도 잇기 어려운 가난을 숙명으로 짊어지고 태어나
그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어린 시절,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객지를 떠돌던 청소년 시절,
한시라도 빨리 성공을 거머쥐고자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와 열사의 사막을 헤맸던 장년 시절….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잡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만석지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나처럼 가난 때문에 공부를 중단하는 학생이 없도록 하자”
고 수천번 다짐했던 내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제 어느 정도 꿈을 이뤘다.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 귀향길에는 내가 만든 ‘용복장학회’의 도움으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성장하는 장학생들이 동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의 성취는 내가 잘났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가족과 수많은 분이 음으로 양으로 도왔고, 크고 작은 행운도 따랐다.
특히 부족하기만 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채찍질하며 챙겨주신 하나님이 안 계셨던들
오늘의 성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필자 약력>
△ 1934년 전남 강진 출생
△ 1964년 건국대 법정대학 정외과 졸업
△ 1971년 연세대 행정대학원 수료
△ 1971년 국제수출포장공업사 창립
△ 1978년 (서울)영동농장 창립
△ 1982년 석탑산업훈장 서훈
△ 1989년 용복장학회 설립
△ 2003년 농촌문화재단 설립
△2003년 건국대 총동창회장 피선
[자료출처:국민일보]
[역경의 열매―김용복⑵] 형편 어려워 중2때 수업료 못내 퇴학
봄비가 구슬프게 뿌리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의 호안둑길.
한 앳된 소년이 옆구리에 조그만 보따리를 끼고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과 빗물이 뒤섞인 가운데서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걷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그의 나이 이제 14세. 부모님 슬하에서 응석부리며 학교 다녀야 할 시기에,
소년은 혼자서 제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고 있었다.
운명이 뭔지 모르는 나이이지만,
북받치는 설움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걷던 그 소년이,
바로 56년의 세월은 건너뛴 나, 바로 김용복이다.
왜 이토록 어린 나이에 나는 객지로 향해야만 했을까.
무슨 슬픈 사연이 있길래
아직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생업을 찾아 나서야만 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것이다.
금릉중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 날.
나는 교실에 들어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갔다.
반장에다 항상 1등을 유지하고 있던 터라,
선생님이 무슨 격려의 말씀이라도 해주려나 싶었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의 입에서는 “용복아, 담임인 나로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나.
이렇게 오래 수업료를 내지 않으면 교칙상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하는구나”하는 말씀이 나왔다.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교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학교로부터의 추방. 어린 나이에도 참으로 슬프고 비참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돈의 논리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걸 어린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끔 각인시켰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밭뙈기 하나 없는 집안 형편에, 고향에 머무른다는 건 또다른 짐이었다.
마침 그때 이웃집 ‘방매댁’ 아주머니가 부산으로 이사하면서,
“대도시에 가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잘하면 공부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부산에 가서 공부할 방법을 찾아 볼 게요.
돈도 많이 벌어서 언젠가 아버지를 편히 모실테니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잘 지내세요.”
집을 떠나려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2∼3년전 6살 위 형님이 총살 당하는 장면과,
공립학교인 강진중 입시에서 최고 성적을 내고도
공산주의자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 일이 떠올랐다.
거기다 내가 젖먹이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솟구쳤다.
형님은 여순반란사건으로 온 마을이 공포의 도가니에서 숨죽이고 있을 당시,
‘산사람’들의 강요에 못이겨 짐 한번 져주고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싣고온 처참한 형님의 시신,
아버지와 함께 그 시신을 산으로 옮겨 묻었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쨌든 너무 이른 시기에 내 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나는,
순창을 거쳐 일주일 이상의 뱃길로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첫 밤을 맞은 곳은 범일동 방매댁 아주머니의 시동생 집이었다.
신발가게를 하는 그 시동생은
그런 대로 끼니 걱정은 안하고 지낼 만큼 비교적 잘 사는 편이었다.
해방 정국이었던 당시는 끼니 걱정 안한다는 것만도 대단한 행복이었다.
그 집에선 내가 일자리를 잡을 때까지 며칠간은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줬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다.
거듭 독하게 마음을 먹으려 해도,
고향과 아버지, 친구들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슬픔을 억누를 방법이 없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며 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감정이 한껏 차올라 오면,
하늘을 보며 간구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깜깜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한바탕 울고 나서
“나를 도와 주세요” “나에게 힘을 주소서”
하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기도였다.
하나님이 뭔지, 예수님이 뭔지, 믿음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그랬다는 건,
내게 신앙인의 소양이 많은 탓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부산 생활 열흘째에 좋은 선물을 주셨다.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그랬다는 건,
내게 신앙인의 소양이 많은 탓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부산 생활 열흘째에 좋은 선물을 주셨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⑶] 美장군 운전 통역병으로 발탁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 우리말로 하면 급사 내지 사환 정도가 될 것이다.
숙소 청소에서부터 군인들의 구두 닦아주기, 심부름 하기 등
부대의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다.
비록 천하긴 했지만, 그 일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었다.
사고무친의 객지에서 일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때에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더구나 그 생활로 인해
앞으로 내 인생의 고비마다 도움을 받게 될 영어를 배우게 됐으니,
하나님의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소개해준 방매댁 아주머니의 시동생은 내게 은인이다.
나는 부산 범일동에 주둔해 있던 미군 통신부대에서
생애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말이 ‘보이’이지, 어른들이 대부분인 하우스 보이들 사이에서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일했다.
특히 영어 배우기에 유달리 관심이 많아,
항상 영어사전을 끼고 다녔다.
그 덕분에 미군들 사이에서도 ‘김용복’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모습을 기억하는 부대장 하일라인 소령은
나를 부대장 숙소 담당으로 옮겨주었다.
소년의 가여운 운명을 알고 배려라도 해주려는 듯,
그는 나를 ‘Son’이라고 부르며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일과후에는 운전교육도 받도록 해줬다.
하우스 보이 생활 1년쯤 지나자,
나는 제법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거기에다 운전면허까지 따게 돼,
부대장의 운전사 겸 통역으로 발탁됐다.
주위에서는 출세했다고 부러워했고 월급도 상상외로 많았다.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년여동안 모으자 제법 큰 돈이 됐다.
그러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밀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공부를 하고 싶어진 것이었다.
‘이 돈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내가 원하던 대로 광주 서중학교에 들어가자.’
그러나 호기롭게 찾은 고향은 내가 그리던 곳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예전의 다정했던 아버지가 변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나의 귀향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듯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을 못 정하고 있던 차에,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용복이가 객지에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는 소문이 났는지,
질이 좋지 않은 동네 청년들이 나를 노름판에 끌어들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진 돈을 홀랑 털리고 말았다.
‘그래, 떠나자. 이제는 크게 성공한 다음에 고향을 찾자’
라는 말을 되뇌며 다시 고향을 떠났다.
이번에는 부산이 아닌 광주로 갔다.
부산 미군부대에서 열심히 배운 영어실력을 내세워,
상무대 군사고문단 수송부 통역관으로 취직됐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한 시절이었지만,
스무살도 채 안된 나이에 통역관이라는 귀한 자리를 얻게 됐다.
6개월정도 근무하니 6·25 전쟁이 끝나
우리 정부도 피란살림을 청산하고 환도했다.
내 나이도 만 스무살을 넘겨 당당한 성년이 됐다.
막연히 동경해오던 서울로 올라왔다.
본격적으로 험난한 세상과의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역시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위력이었다.
어렵지 않게 미군 제45공병단 민간인 운전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2년여 미군들과 부대끼다보니, 영어실력은 더욱 다듬어졌다.
6·25 이후 도입된 군 의무복역제도에 따라 내게도 입영 통보가 왔다.
마침 군 기술병 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지원, 5군단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또 다시 영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아,
미 군사고문단 수석고문관 케시 장군의 운전병 겸 통역병으로 발탁됐다.
1958년 어느덧 만기 제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마침 미군을 위한 민간 기술지원회사인 빈넬사에서
운전기사를 뽑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케시 장군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러자 그는 나를 위해 뭔가 도움줄 일을 찾고 있었다는 듯이
주저없이 추천해 주었다.
용산의 빈넬사에서 운전기사로 일자리를 잡고
회사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내 인생에서 ‘최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나의 영원한 동반자 이순례 권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은 그때 내게 최대의 축복을 내려주셨다.
앞으로 여러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아내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짠하며 표현키 어려운 미묘한 감정에 휘말린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⑷] 출근길에서 평생의 반려자 만나
과거를 돌이켜보면
사람의 힘이 아닌,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뤄졌다는 느낌을
유달리 갖게 되는 일들이 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곧잘 쓰지만,
이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다.
내 인생에서는 아내를 만난 게 대표적인 경우다.
내가 아내를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보면,
주권자인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출근길에서 한 여성을 마주친 뒤,
미래의 운명을 감지하고서
상식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결혼까지 성사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랴.
거기다 결혼 후 여러 차례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낸 40여년의 장구한 세월을 어떻게 설명하랴.
서울 용산의 빈넬사 운전기사로 일하던 1958년 어느 날,
출근길에 나는 한 아가씨와 마주쳤다.
이성에 별 관심이 없던 당시, 내 가슴속에 단숨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이전에 전혀 느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이후 그 아가씨는 내 머릿속을 완전히 점령했고,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 드는 순간까지 심장은 마냥 쿵쾅거렸다.
“저,차라도 한잔…할 이야기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가끔 길에서 만나는 그 아가씨를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녀의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순간적으로 ‘됐다, 하나님이 도우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와의 관계는 순조로웠고,
1년여동안 사귀면서 결혼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결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녀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완강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운전기사에게 딸을 줄 리 만무였다.
거기다 내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떠돌이로 살아온 것까지 알고 있으니,
강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결국 우리 둘은 처가 어른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1959년 운현궁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큰 죄를 범한다고 여기면서도,
앞으로 두고 두고 처가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우리의 부부됨을 받아들여준 처가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본 적이 없다.
원효로에 신방을 꾸민 나는, 평소 꿈이었던 대학 진학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졸업장도 없는 처지에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검정고시 제도도 없던 시절에 백방으로 방법을 찾다가,
국회에서 실시하는 속기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대학 입학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3개월 과정의 속기사 양성소를 수료한 뒤,
자격증을 따고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1960년 2월 비로소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됐다.
종로구 낙원동에 있던 건국대 2부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들어가고 보니 내 나이가 서른이 거의 다 됐던 때로
신입생중에서 최고 연장자였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된 대학생활은 한마디로 악전고투였다.
한참 뒤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채소를 재배하기 위해 밤을 낮 삼아 일한 적도 있지만,
대학생활도 그에 못지 않았다.
신길동 집과 영등포 회사, 종로5가 학교를
버스로 이동해가며 해내는 1인3역의 생활은
가히 초인적인 노력을 필요로 했다.
아무리 젊은 몸이라지만, 결국 탈이 났다.
지나치게 혹사당한 몸은 결핵이라는 병으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당시만 해도 망국병이라 불릴 정도로 무서운 질병이었다.
특히 미국인들은 결핵이라면 주위에 오는 것조차 거부했던 터라,
직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좀 풀리려는가 싶던 내 인생이 또 시련의 늪으로 처박히는 듯했다.
몸도 그렇지만, 경제적 여건상
아무래도 더 이상 대학공부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같았다.
그러나 아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면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내 병 간호에 온갖 정성을 쏟으면서도
온갖 궂은 일을 닥치는 대로 해내며 생활을 꾸려간 아내 덕분에,
나는 병 치료와 함께 학업을 이어가,
2년만에 결핵도 완치하고 졸업까지 하게 됐다.
1964년 2월 학사모를 쓴 날 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정식으로 신앙을 가지지 못한 때였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역경의 열매―김용복 ⑸] ‘혈기’ 못이겨 위험한 월남땅으로
사람의 성품은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내면 속에 감춰져 있다가 어느 계기를 맞아 표출되기도 하는가 보다.
나는 내 내면에 엄청난 혈기나 객기, 배짱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는 줄 몰랐다.
매사에 성실하다는 건 주위로부터도 인정받고 있었고,
다소의 추진력이 있는 줄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만학으로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그 감춰진 성품이 나타났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면서
‘지금부터는 내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일었다.
일단 직업을 가지고 보자는 생각에
미군 7사단 도서관장 보좌관 채용시험에 응시, 합격했다.
잠깐 근무하다 다시 미8군사령부 교육처장 보좌관 시험에도 합격,
주한 메릴랜드대학 서울분교 교무과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 일도 이미 왕성하게 일어난 내 혈기를 채워주기엔 부족했다.
그 때 미국 빈넬사에서 월남에 파견할 노무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월남에는 한국 군인들이 대거 파견돼 있었다.
‘위험이 많은 곳엔 기회도 많을 것’이라는 내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 월남행을 결심했다.
주위에서 난리가 났다.
아내의 반대야 당연하다 싶었지만,
직장상사였던 미국인 교무처장까지
“장학생으로 추천해 줄테니 차라리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면서
월남행을 극구 말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누구도 꺾기 어려울 정도의 혈기나 객기로 무장돼 있었다.
“전쟁터라고 다 위험한 것은 아니지 않소.
더구나 군인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기도가 있으면 하나님이 보살펴 주실 거라 믿어요.”
무엇보다 아내를 설득해야만 했다.
아내도 나의 결심이 워낙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는 길게 반대하지 않았다.
1965년 7월12일. 마침내 나는 월남땅을 밟았다.
근무지인 캄란만은 해군항이 있는 외딴 섬으로
사막처럼 모래바람이 자주 불어치는 곳이었다.
월급 450달러의 최말단 잡역부로서 미군들의 오물을 치우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학력과 영어실력에 성실성까지 인정받아
수송부대 배차계로 옮겼다.
이어 배차계장, 보급창 행정계장을 거쳐,
한국인으로는 최고 직위인 행정감독관까지 승진했다.
그런데 당시 회사 내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자주 발생했다.
질이 좋지 못한 한국인들이 음주와 도박, 폭력 등으로 허다이 말썽을 일으켰고,
미국인들은 이런 한국인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간 충돌이 심심찮게 생겼다.
점점 골치가 아파지자 주월 미국군사령관과 한국군사령관, 주 사이공대사 등
최고 책임자들이 만나 해결책을 찾다가,
‘한국인협의회’란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자체적으로 한국인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필요시 서로간 협상 창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다.
어느새 나는 한국 민간인들중 ‘의식있는 강골’로 자리매김돼 있었다.
한국인들의 추태가 있을 땐 그를 만나 나무라기도 했고,
미국인의 차별엔 앞장서 항의했다.
월남 땅을 밟은지 3년만에 나는 제4대 한국인협의회 회장에 피선됐다.
빈넬사 3,900여명 한국인 노무자들의 대표가 된 나는,
당당하게 일처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국익을 손상시키는 언행을 거듭하는 한국인에 대해선
한국대사관과 상의해 가차없이 귀국조치하고
한국인들의 권익옹호에도 대차게 나섰다.
이러다 보니 내 일처리를 신뢰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불만을 품는 이들도 생겨났다.
“네 목은 여러개냐?”하며 위협을 가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제로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다.
잠을 자다가 뭔가 섬뜩한 기운을 느껴 눈을 떠보니
코 앞에 시퍼런 칼이 들이대져 있었다. 등
줄기가 오싹해졌다.
군수물자를 상습적으로 빼돌려 팔아먹다
나로 인해 그 짓을 할 수 없게 된 이였다.
겁이 났지만 순간적으로
“이럴 때일수록 담대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당신, 나를 잘못 봤다.
이 정도에 굴복할 것 같았으면 월남땅에 오지도 않았다.
나를 죽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싶으면 어서 찔러라.…”
내가 워낙 강하게 나가자 그가 오히려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내친 김에 나는 아예 일장훈시까지 했다.
그러자 그는 무릎을 꿇고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제게도 처자식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나쁜 짓 안하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하고 빌었다.
나는 4대에 이어 5, 6대 회장을 연임했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⑹] 사장님 꿈 이루자 교만 함정
<여보, 이국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고국에 있는 저와 명화(딸 이름)는 당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생하며 벌어서 보내온 돈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친정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서울 인근의 땅을 사뒀는데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당신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귀국했으면 합니다.>
빈넬사와의 계약기간 5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내에게서 편지가 왔다.
머릿속에서 금방 느낌이 왔다.
아내는 내 월급을 거의 쓰지 않고 땅을 사뒀는데,
최근 일고 있는 영동(현재의 강남지역)개발 바람으로 땅값이 껑충 뛴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지긋지긋한 월남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돌아가 꿈을 펼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은 어느새 큰 부자가 돼 있었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 미군들의 오물을 치우며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게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슬그머니 발목을 붙잡기도 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월남생활 5년이
내 인생에서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인협의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겼었던 갖가지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막상 청산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미련이 생겼다.
또 그에 못지 않게 귀국 결심을 흔들리게 한 것은
과외활동으로 캄란중고등학교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친 일이다.
이 학교 구엔 반 안 교장과 우연히 친해져,
그의 요청으로 선생님 노릇을 한 것이다.
당시 전교생이 300여명인 그 학교에서 한국어 교재를 직접 만들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칠 때 느꼈던 기분은 보람과 행복감 그 자체였다.
그때 일은 한국인협의회보를 비롯, 한국어로 된 여러 간행물에서 두루 소개됐다.
그러나 현지 교육위원회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다고 통보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부탁해 다시 교단에 섰다.
그때 제자는 대부분 중년 아주머니들이었는데, 학습태도가 무척 진지했다.
몇년전 베트남을 다시 찾았을 때,
당시의 교장 선생님과 제자 몇 명을 만났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내 가르침을 받던 월남인들,
지식과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가
차츰 동족처럼 친숙하게 대해주던 그들의 모습이 가슴 벅차도록 정겨웠다.
요즘 지자체나 사회단체,대학 등에서 가끔 강연 요청을 해와
대중 앞에 설 때면 그 때의 일이 떠오른다.
또 그 경험으로 인해 교직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보람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나 나는 감정에 붙잡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큰 성공을 꿈꾸는 천하의 김용복이가 이런 생활에 안주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 굳어 있었다.
귀국길에 올랐다.
포부가 지나쳐 헛된 꿈까지 꾸면서 월남땅을 떠났다.
[겸손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나는 비서까지 대동하고 화려하게 돌아왔다.
퇴직금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을 거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고 있던 엑스포70까지 구경하고 고국땅을 밟았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마치 천하을 얻은 듯 의기양양했고
얼른 무슨 일이든 벌이고 싶었다.
사업 구상에 골몰하던 중, 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포장재를 만드는 일이었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던 시기라,
수출품을 포장하기 위한 폴리백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국제수출포장공업사]. 마침내 김용복이 사장이 됐다.
아내가 사둔 영동땅을 모두 처분해, 꿈에도 그리던 내 회사를 차린 것이다.
명패를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푹신푹신한 의자에 앉으니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어깨에 힘이 있는 대로 들어갔고 주위의 시선도 끌고 싶었다.
다행히 사업도 잘돼 나갔다.
-그래,누가 하는 일인데…-
자신감을 넘어서서 자만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해진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⑺] 사업 잇단 실패…전재산 날려
우리는 주로 ‘사랑의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등
베푸시고 감싸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엄격하신 하나님’이 먼저 떠오른다.
인간이 교만해지는 등 주님의 뜻에서 많이 멀어지면,
가차없이 ‘옐로 카드’를 꺼내 드시거나
심하면 ‘채찍’도 드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월남생활 5년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뒤
한동안은 하나님께 많이 밉보였던 시기였다.
제대로 되는 일도 없었고 시련의 연속이었다.
물론 내탓이었지만, 그때는 시련이 너무 가혹하게만 여겨졌다.
나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내가,
갑자기 부자가 됐다는 생각이
시쳇말로 하면 내 정신을 완전히 돌게 만든 것이었다.
1970년 5월30일 고국땅을 다시 밟은 나는
너무 들뜬 마음을 조절할 수 없었다.
금싸라기로 변한 영동지역의 땅이
무려 1만여평이나 내 소유로 돼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먼저 아내에게 감사를 표하고,
차분하게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나가야 할 것이었지만,
그때의 내게는 앞뒤를 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당장 말죽거리 일대의 땅 한 필지를 팔아
승용차를 비롯해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고가품들을 구입했다.
‘김용복이가 이제 부자요!’하고 과시하려는 심정이 다분했다.
전형적인 졸부의 행태였다.
‘국제수출포장공업사’도 나의 교만심이 팽배해 있던 상태에서 만들어진 회사였다.
그 방면에 아무런 경험도 없이,
땅을 모조리 처분해 공장을 짓고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정신없이 회사를 세웠다.
말 그대로 ‘독불장군’이었다.
회사를 세운 뒤에라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하나 잘 풀어갔으면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회사 운영도 그런 식으로 해나갔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으리라.
어느날 아침, 기숙사로 직공들을 부르러 갔던 식모아이가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직공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기숙사로 달려간 나도 새파랗게 질렸다.
밤사이 직공 5명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빈사상태에 있었다.
서둘러 병원으로 옮겨 치료했지만, 2명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망자에 대한 보상비에다 몇 개월에 걸친 생존자들의 치료비 등으로
액수도 산정할 수 없는 엄청난 재산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너무 커다란 낙심과 충격에,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하고픈 생각이 없어졌다.
영업부장에게 헐값으로 공장을 넘겨버렸다.
그것도 현금이 아닌 여기저기 널려 있던 외상값을 받아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얼마 동안을 허송세월했을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해봐야지 하던 차에,
실뱀장어 양식이 쏠쏠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일본인들이 한국산 실뱀장어를 모두 수입해간다는 것이었다.
마침 사업 실패로 서울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때라,
얼마 되지 않은 전 재산을 끌어모아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양식장을 만든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논을 구입, 논바닥을 파서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일도 시작하기 전에 또 한번의 참혹한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산보다 값싸고 맛도 뛰어난 중국산 실뱀장어가
일본시장을 잠식하는 바람에 수출길이 끊겼다는 것이었다.
가진 것을 모두 투자해 만든 양식장에서,
단 한마리의 실뱀장어도 길러보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다.
월남생활 5년의 내 청춘도 아깝지만,
허리띠 졸라가며 영동의 땅을 사모은 아내의 정성이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제서야 경솔함을 깨달은 나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언젠가는 영동지역의 땅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농장을 일구면서
이름을 ‘서울 영동농장’으로 지은 것도,
그리고 현재 회사를 강남 로데오거리에 세운 것도 그때의 결심 때문이다.
요즘 주위에서 “그렇게 마음이 아팠습니까?”하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의 내 심정은 마음이 아팠던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⑻] ‘약속의 땅’사우디서 새인생 출발
실의 좌절 절망 패배주의 자포자기….
세상의 잘못되고 부정적인 건 모두 나와 동행하는 듯했다.
도무지 희망의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삶의 의욕조차 없었다.
뭐든 누구보다 잘하고 성공할 자신이 있었는데,
실낱같은 자신감도 없어졌다.
포장재 공장과 실뱀장어 양식장의 실패는 실로 내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렇게 많던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가까이 하지 않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는 것이 아니라 퍼부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약도 사 모았다.
그런데 지옥같은 그런 상황에서도 내 옆에는 ‘천사’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도,
마지막까지 믿고 함께 해줄 그런 천사가 있었다.
나의 영원한 반려자 아내였다.
“여보, 당신은 절대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예요.
나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의 저력을 믿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요. 다시 시작합시다.”
그랬다. 나에게는 아내와 딸 명화,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들 태정이가 있었다.
정신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그러나 뭘 해보려고 해도 막상 밑천이 없었다.
아내의 결혼 패물을 비롯해, 조금이라도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내다 팔았다.
그래봐야 모두 100만원도 채 안됐다.
아무리 물가가 쌀 때였다고는 하지만, 그 돈으로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서울에서는 안될 것같아 경기도 성남으로 흘러들었다.
당시 성남은 서울의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해 살고 있는 신생도시였다.
그곳에서 거의 문 닫기 일보 직전인 허름한 설렁탕집을 전세낼 수 있었다.
가게에 딸린 방에서 네 식구가 살면서
아내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주방과 홀, 카운터를 오가며 중노동을 했고,
나는 배달과 카운터일을 맡았다.
열심히 했다. 하지만 도무지 돈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역시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만 굳어갔다.
거기에다 일하면서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겪을 땐 정말 참기 힘들었다.
특히 내가 보는 앞에서,
술에 취한 손님들이 아내를 희롱하는 것을 볼 때면 미칠 것만 같았다.
‘150원짜리 설렁탕 배달 인생’에 대한 회의가 끝없이 밀려왔다.
다시 술을 입에 댔다.
가게문을 닫으면 술병을 꺼내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리곤 다짜고짜 울분을 토했다.
그러다 간혹 아내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소리도 퍼부었다.
“당신도 이젠 나란 놈에게 희망을 버려. 이 지랄같은 세상 살기도 싫어.
무슨 얼어죽을 놈의 하나님이야…”
이 정도면 대개 부부싸움을 할 만도 했지만,
천사같은 아내는 어려움에 처한 남편의 넋두리로 치부하고 잘도 참았다.
그럴 때 희망의 불빛을 발견했다.
1975년초 지독히도 춥던 겨울날 아침,
식당에서 신문을 들춰보는데, 큼지막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빈넬사의 광고였다.
나를 월남으로 가게 했던 그 빈넬사였다.
참 끈질긴 인연이다 싶으면서,
패배감의 늪에 빠져 있는 나를 구해줄 것같은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야,이제 살았다!”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 길로 해외개발공사로 달려갔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아직도 서울 서교동의 그곳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막상 달려가보니 그 일대가 인파로 뒤덮여 있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월급을 최고 1,500달러까지 준다는 광고의 효과는 대단했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어렵사리 원서 한 장을 손에 들었다.
이미 빈넬사에서 중요 직책을 맡아봤고 영어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조건 안전운행이 최고라고 생각,
하위직인 월급 375달러의 행정보조직을 지원했다.
무난히 합격됐다.
아직 중동건설 붐이 일기 전, 김용복이 먼저 중동 정벌에 나서게 됐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오.
앞으로 10년을 기한으로,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고생스럽더라도 나를 믿고 참아주시오.”
“당신의 앞날을 위해,
아니 우리 가족의 앞날을 위해 하나님께 더욱 많이 기도할게요.”
나와 아내는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1975년 4월23일 뜨거운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의 나라이지만,
내게는 꿈과 미래가 있는 약속의 땅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역경의 열매―김용복 ⑼] 동포인부 봇물…김치사업 번뜩!
가슴 가득 희망을 안고 날아간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시사철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1970년대 중반 우리가 찾았을 때는
막강한 오일달러의 위력을 등에 업고 근대화가 한창이었다.
내게 그곳은 희망의 땅이었다.
싸구려 설렁탕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술로 울분을 달래던 내게,
사우디 진출은 새로운 돌파구였다.
비록 월급 375달러의 빈넬사 최하위직 행정보조원이었지만,
내 가슴에는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꿈틀거렸다.
열사의 땅으로 날아가기 전,
경기도 성남 산꼭대기의 지하 단칸 사글 셋방에
가족들을 밀어넣고 울음으로 맹세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또 1974년 4월23일 단돈 7달러를 손에 쥐고
김포공항에서 사우디행 비행기를 타면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면서 다짐했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당시 해외취업자에게 허용된 외화 소지 한도는 20달러였지만,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은 7달러밖에 안됐다.
아마 같이 떠난 123명의 동료 기능공 중에서 내가 가장 돈이 적었을 것이다.
후에 내가 ‘70만평 농장의 종자 돈은 7달러’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사우디의 리야드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곧바로 사우디 민병대를 훈련시키는 미군사 고문단에 배속돼
고문관들을 도와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주일쯤 지난 뒤, 나는
동부지역 담맘의 군수품을 취급하는 파견대에 배속됐다.
미국인 2명, 요르단인 1명과 함께 모두 4명이 한 조인 우리의 임무는
담맘 부두나 다란 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군수물자를
민병대 사령부가 있는 리야드까지 수송하는 일이었다.
외근도 했지만
행정보조라는 직책상 사무실 내근시간도 상당히 많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지냈지만,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보니 마음속에 슬슬 엉뚱한 생각이 스며들었다.
‘인간 김용복이 이런 일로만 지낼 순 없지.
뭔가 획기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똬리를 트는 것이었다.
역시 뜻이 있는 데 길이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시간 나는 대로
현지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을 챙겨 꼼꼼하게 읽었는데,
어느날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읽었다.
사우디 정부 차원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전국에서 많은 대형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 이 대형 프로젝트에 편승하면 큰 돈벌이가 있을거야.’
내 머릿속은 바빠졌다.
‘이 공사들이 시작되면 분명히 한국의 업체들이 진출할 것이고,
그러면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도 들어올 것이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들을 상대로 사업을 벌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끙끙 앓았을까,
아이디어 하나가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쳤다.
‘ 바로 이것이다. 아, 하나님…!’
희한하게도 언제부터인가 내게는 크게 흥분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는 습성이 생겼다.
사실 당시만 해도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때였다.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김치였다.
한국인이 외국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식생활이고,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뗄 수 없는 것이 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0여년 전 월남에서 일어났던 한국인 노무자들의 폭동사건이 회상됐다.
당시 월남에서 근무하며 기름진 음식에 질린 수천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회사에 김치를 달라고 요구하다,
안되니까 태업과 파업까지 벌였던 것이다.
더구나 사우디는 음식이나 기후 등 모든 조건으로 볼 때,
한국인이 지내기에 월남보다 조금도 낫지 않았다.
답은 나왔다. 이제 공식만 만들면 된다.
나는 앞으로 사우디에 진출할 한국 건설업체들에
김치를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⑽] 배추키울 ‘약속의 땅’찾아 삼만리
"여보,어려운 형편에 애들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소.
나는 지금 사우디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소.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데, 쉽지만은 않구려.
당신도 나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길 바라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같소….”
내 머릿속은 온통 김치 생각밖에 없었다.
간간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항상 그 이야기를 썼을 정도이니 그 집념이 실로 대단했다.
‘사우디에서 배추와 무를 키워내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명히 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 토양이 중요할까, 아니면 물이 중요할까, 아니면 종자가 우선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채소 재배 가능성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사막을 뜨거운 열기와 거친 모래 등
죽음의 땅이라 단정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 ‘알팔파’라는 사료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이 있었고,
그 작물 사이에서 잡초가 자라는 것도 보았다.
잡초가 자라는데, 배추나 무가 살지 못하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재배법만 터득하면, 사우디의 사막이 죽음의 땅이 아닌
꿈을 키워내는 옥토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갈수록 굳어져 갔다.
사막에 배추와 무를 키운다는 내 생각은 점점 깊어져,
거의 미쳤다고 할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시간만 나면 농장을 만들 만한 땅을 찾아다녔다.
주말만 되면 사우디 전역을 누볐다.
전문적인 연구기관에 자문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6개월에 한번씩 한국으로 나오는 휴가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사막의 흙과 물을 비닐봉지에 몇 개씩 담아가지고 나왔다.
토양과 수질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국내 여러 기관에 검사를 의뢰했지만, 번번이 부정적인 결과만 나왔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쉬울 것 같았으면 지금까지 누가 했어도 했지…’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계속 사우디의 흙과 물을 담아왔다.
그러다보니 김포공항에서 밀수꾼으로 오해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때 해외취업자들이 귀국할 때에는
대부분 미제나 일제 전자제품, 화장품 등을 사오는데,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과 흙만 갖고 오니 수상하게 여길 수밖에.
세관에서는 흙속에 무슨 귀금속이라도 들었을까
정밀검사를 하고 몸수색도 더욱 치밀하게 했다.
애초 1년6개월의 고용계약을 마치고
다시 1년을 연장해 빈넬사에 근무하면서
나만의 지루한 연구작업이 이어지던 중,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됐다.
1976년 빈넬사와 한국의 대한통운이
담맘 부두 하역작업 입찰에 참여,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대한통운에 필요한 정보를 살짝 전해준 것이 계기가 돼,
대한통운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했을 일인데도,
대한통운측에서는 계열사인 동아건설 부장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미 김치에 빠져 있던 데다
직장생활보다 내 사업을 꿈꿔왔던 나는,
그 제의 대신 동아건설의 식품납품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쪽에서도 좋다고 했다.
1977년 그간 알뜰하게 모은 돈과 동아건설의 도움으로,
사우디에 ‘김식품’이라는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김식품 운영의 어려움
그런데 회사 운영이 쉽지 않았다.
사우디 국법상 외국인은 국내에서 사업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소말리아 출신 사우디인 알리씨를 대표로 영입하고,
서울에서 16명의 인력을 데려왔다.
나는 빈넬사와의 계약을 어길 수 없어,
낮에는 빈넬사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김식품에서 일을 보는 이중생활을 했다.
김식품은 현지에서 두부를 만들면서,
여러 가지 식품을 동아건설에 독점 납품했다.
그러면서도 시험적으로 야채 재배도 시작했다.
김식품을 착실히 운영하면서,
그걸 기반삼아 꾸준히 시험재배를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복안을 품었다.
그러나 배신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데려간 한국인들의 배신으로 인해,
야채재배는 커녕
김식품까지 홀랑 들어먹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⑾] 직원들 농간에 ‘김식품’빼앗겨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믿었던 회사 직원 몇명에게 감쪽같이 당하고 말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김식품’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고스란히 회사를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들을 너무 믿은 게 화근이었다.
빈넬사와의 고용 계약기간이 남아 있어
직원들에게 김식품을 운영케 했는데,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 된 것이었다.
평소 직원들 중 두어명의 품행이 의심스러워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설마 했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날 창고를 점검하면서였다.
이것저것 물품을 살피고 있는데,
평소 취급하지 않던 이상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심지어 회교국인 사우디에서 거래할 수 없는 위스키 등 주류도 있었다.
곧바로 조사를 해보니
직원들이 대표인 나를 기만하고 술장사 등을 해왔고,
거기다 납품용으로 들여온 캘리포니아산 쌀과 참기름 등 고가의 식품을 훔쳐내,
다른 회사에 팔아먹기까지 하고 있었다.
불법행위를 지금까지 공공연히 해온 것이다.
아무리 돈을 벌기 위해 사막에까지 왔지만,
내 회사를 통해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이 나쁜 놈들, 나는 너희와 함께 성공해서 잘 살아보자고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쁜 짓을 일삼았단 말이야?
가담한 놈들은 모두 감옥에 쳐넣어버리겠어. 각오해!”
나의 불같은 성격에 가만 있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마음같아선 힘껏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때부터 모든 일을 직접 챙겼다.
아울러 이들에게 이른 시일 내에
사표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도 종용했다.
비자 갱신차 귀국동안의 직원들 배신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1978년 2월 빈넬사와의 2차 고용계약까지 완료돼,
비자를 갱신해야 할 시기였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들어갔다 올 수밖에 없게 됐다.
2주일쯤 걸린 나의 한국 나들이는,
그들에게 역모를 꾀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들이,
형식상 대표인 알리씨를 구슬러
그때까지 내가 해준 수익분배비율 6대4를 3대7로 해주고,
그외 많은 혜택을 주겠다며 나를 사우디 땅에서 축출시킬 흉계를 꾸몄다.
한국에서 서둘러 일을 마치고 사우디에 들어가보니,
이미 일은 벌어져 있었다.
내가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건장한 현지인 6∼7명이 다짜고짜 쳐들어와 내 여권을 빼앗고는,
당장 오늘 밤으로 서울로 되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미스터 김, 우리 말대로 하지 않으면 사우디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소.
우리는 그동안 당신이 저지른 불법행위를 다 파악해 놓았소.
먼저 알리씨와 맺은 6대4 동업비율은 우리 사우디법에 위배되는 것이오.
또 한국인 16명을 데려올 때 지다 공관에 뇌물을 줬다고 증언해줄 사람이 있소.
뇌물공여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단 말이오.
또 지난 몇개월간 당신이 빈넬사와 김식품에서
이중으로 돈벌이한 것도 위법으로 몰아갈 수 있소.”
산만한 덩치에 콧수염이 유난히 짙으며 험악해보이는 사람이,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한 듯 나를 거세게 몰아붙이며
자기 말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당시 사우디에서는 뇌물수수의 경우,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중벌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내가 문제가 되면,
한국 공관의 공무원들까지 얽혀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아,하나님! 내가 이렇게도 죄많은 사람입니까?
제게 주는 시련이 너무 가혹합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굴곡 많은 내 인생,
특히 많은 고난의 파도가 넘실댔던 사우디 생활의 시련이 비로소 시작됐다.
어쨌든 나는 그때의 교훈으로,
지금까지 사람의 능력보다 성품을 항상 우선시한다.
또 사람을 잘 살피며, 거의 정확하게 판단하는 안목을 키웠다.
비자를 갱신해 사우디로 간지
사흘만에 다시 서울로 쫓겨온 내 손에는,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려 있었다.
지난 30개월간 일한 보수도 전부 김식품에 투자했으니
완전히 빈손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온 나는 다시 밑바닥 생활로 떨어졌고,
그 와중에 생애 가장 귀한 순간을 맞게 된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원본:국민일보]
자료출처:한사랑농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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