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12)~(22,끝)]김용복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이사장

영국신사77 2017. 6. 2. 16:09

                        

[역경의 열매―김용복⑿] ‘뼈저린 배신감’에 술로 나날

 

                                                       

                                                

  

 

 

 

 

  ‘성공하지 못하면 사막에 뼈를 묻으리라 다짐했는데….’

 

직원들의 배신으로 단돈 10원도 챙기지 못한 채 2년6개월만에 사우디에서 돌아온 나는 

가족을 대할 염치도 없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만 가슴속에 가득 했다. 

특히 배신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치솟아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몸도 정신도 극도로 황폐해져 갔다. 오래도록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다시 찾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술병부터 찾았고 만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셔댔다. 

내가 생각해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절망의 끝까지 다다른 것 같았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음의 안식을 택하자’는 생각으로 수면제를 사 모으기까지 했다.

하루종일 밥 대신 술만 퍼마시고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울부짖는 내 모습이 

가족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 아무 말 없이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아내의 고통은 나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막다른 길인 듯했다. 

런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이 생겼다. 

바로 내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용복이를 방치하면 안되겠구나’ 싶으셨던지, 

어느날 조용히 내 마음에 들어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셨다.

절망을 벗삼아 술에 절어 있던 어느날, 

소식을 전해들은 외사촌 형수 최옥초 집사와 외사촌 누이동생 박오자 집사가 

나를 전도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하나님을 만나면 대판,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싫은 기색을 했지만, 두 사람은 며칠동안 계속 나를 찾아왔다.

“하나님이 있다구? 웃기지 마라. 

하나님이 있다면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나를,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리 없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앞으로 나를 찾지 말아.” 

나는 나를 도와주려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아내가 나섰다. 

“여보, 당신의 억울함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하잖아요? 

새롭게 힘을 얻을 계기를 만들어 봅시다. 

벧엘교회 박덕종 목사님께 안수를 한번 받아봅시다.” 

아내는 내게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다.

아내의 애원에, 아무 생각 없이 아내를 따라나서 목사님을 만났다. 

그 이전까지 나는 막연히 하나님을 찾긴 했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목사님과의 첫 대면에서, 왠지 모를 서러움이 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나는 내가 지내온 과거를 울면서 털어놓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고서 범벅이 된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고 보니, 

눈앞에 성경책이 펼쳐져 있고 시편 126편 5∼6절 말씀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는 말씀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게 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머릿속이 정돈되는 것같아 가만히 눈을 감으니 하나님의 음성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용복아,용복아,너 무엇을 하느냐. 다 내게 맡기거라”하는 말씀이 귓전을 울렸다.

집에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술에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 뵙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서부터 갖가지 상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내 눈을 가득 채웠던 시편 구절과 하나님의 목소리 등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아울러 공식적으로 크리스천이 됐다는 책임감과 함께, 

지금까지보다 훨씬 매사에 조심해야겠다는 다짐과 두려움도 생겼다.

다음날부터 내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다시 한번 시작해서 반드시 성공의 열매를 따내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사우디로 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아는 사람을 통해 간신히 사우디행 비자를 손에 쥐었다. 

‘나를 배신했던 그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이다. 

본래 꿈꿨던 대로 기어코 사우디에서 야채 재배를 해내고 말 것이다.’ 

나는 거듭 다짐을 하면서 또다시 사우디 탐험에 나섰다.

 

                  

[역경의 열매―김용복⒀] 다시 사우디행…농사짓기로 결심

 

                                                          

                                               

         

 

 

  “실례지만 형씨는 몇 살이나 됐소?”

 

   “아,예. 30대 중반입니다.”

   “기술은 어떤 걸 갖고 있소?”

 

   “뭐,이것저것 다합니다.”

1978년 6월20일 사우디행 대한항공 여객기 안. 

직원들의 배신으로 ‘김식품’이란 회사를 강탈 당하고 사우디에서 쫓겨난지 3개월만에, 

나는 다시 사우디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시간상으로 3개월이야 별것 아니지만, 

그 3개월동안에 나는 30년 이상 세월에서도 이루기 어려운 사연들을 엮어냈다.

 

삶을 자포자기한 가운데서 우연하게 이뤄진 하나님 영접,

그로 인해 달라진 세상에 대한 안목과 생활방식….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잘 짜인 각본에 의해 연출된 한 편의 드라마같았다. 

분명 하나님의 주도였다.

비행기 안은 한국인 기술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13시간여의 비행시간이 지루하다보니, 초면이더라도 옆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내 나이 46세. 대부분이 20대와 30대인 이들 사이에서, 

굳이 튈 필요가 없을 것같아 거짓말을 했다.

사우디 시간으로 새벽 4시30분 리야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눈에 많이 익은 공항이었건만 처음인 양 생소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나를 추방시킨 알리 일행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 길로 쫓겨나야 할 판이었다. 

마땅히 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나는 애써 담맘쪽을 피했다.

다행히 예전에 알고 있던 청화기업 관계자의 도움으로,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조그마한 방 한칸을 얻었다. 

어디 소속된 곳도 없이 오직 혼자 힘으로 

이 열사의 땅에서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비장감이 들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지금 내게 해당하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막 도착했을 때의 불안감도 금방 사라졌다. 

이 땅에서 야채를 키워 팔겠다는 나의 목표만 더욱 또렷이 부각될 뿐이었다. 

너무나 절박한 심정이어서 불안하거나 초조해할 여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예전과 달리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원군이 버티고 있었다. 

“용복아,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 내 버팀목이 돼주시고 있었다.

땅을 찾아 나섰다. 농사 지을 만한 땅을 구하기 위해, 

낮에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헤매고 다녔고, 

밤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한 다음에는 저절로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를 나직이 불렀다.

얼마를 돌아다녔을까, 괜찮은 땅을 찾았다. 

리야드와 알카라지 중간쯤인 그곳은 

국내 삼호주택 한신공영 진흥기업 삼익건설 경남기업 등 

여러 건설업체들이 공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공사를 마치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한국인들이 들어와 생활할 것이고, 

이들에게 야채를 재배해 팔면 

단번에 부자가 되겠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이뤄졌다. 

무엇보다 근처에 알무트래프라는 사우디인이 운영하는 

알팔파 농장이 있다는 것이 내 맘을 끌었다. 

이미 식물을 키우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야채 재배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농장의 땅을 빌리고자 마음을 먹고 알무트래프씨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10여일이나 찾아가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격식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농장의 땅을 조금 빌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내 제안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리곤 “의욕은 좋지만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조언’까지 해줬다.

“임차료를 달라면 줄 것이고, 합작투자를 하자면 할 것입니다. 

나는 성공할 자신이 있고 확실한 계획도 있습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다음날까지 계획서를 가져와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 거창한 사업계획서를 꾸며 다음날 그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내 계획서를 검토한 그는, 아랍인들의 지독한 장삿속을 내보였다. 

변호사를 비롯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 5명을 배석시킨 가운데, 

임대가 아닌 합작투자 형식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한푼도 투자하지 않고 땅만 빌려주는 대신, 

농사가 될 경우 이익금만 나누겠다는 심산을 드러냈다. 

그러나 어쩌랴, 사정이 딱한 건 내 쪽인 걸.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약을 했다.

                                                          

 

 

 

                       

[역경의 열매―김용복 ⒁] ‘사막에서의 풍년’그 믿음으로

 

                                                      

                                                      

 

 

 

내 마음에는 용광로가 펄펄 끓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같았다. 

내가 사막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는 것을 믿어주지 않았다. 

어떨 때는 너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을 찾았다. 

가장 좋아하는 405장을 비롯한 찬송가 몇 곡을 부르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농사를 시작하려니 어려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어렵사리 사우디인 알무트래프씨와 땅 계약을 마치고 나니, 

인력을 데려오는 문제가 대두됐다. 

사우디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았다. 

물론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꺼내자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계속 송출허가서를 노무관에게 가져갔지만, 

그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다. 

안되겠다 싶어 유양수 대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도 곧바로 

“이곳에서 한국 사람이 농사를 지어요?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라는 대꾸가 나왔다. 

마치 맨손으로 거대한 성을 공격하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떼쓰기 작전’이었다. 

노무국장 집으로 찾아가 “반드시 성공한다”고 울면서 매달렸다. 

그래도 안 통했다. 

최후의 수단을 썼다. 

송출허가를 내줄 때까지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면서 응접실에 드러누워 버렸다.

예상밖의 사태를 맞은 노무국장이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나도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방으로 들어가 어딘가와 한참 전화통화를 하고 나온 그는, 

“알았다. 내일 대사관에서 좋게 해결하자”고 말했다. 

아마 대사와 내 문제를 상의하면서, 

한국인들을 데려와 나쁜 짓 할 사람은 아니라는 걸 공감하고 

송출허가를 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송출허가서를 받고 보니, 때마침 3개월의 비자 만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의 작업은 더 어려웠다. 

각종 씨앗과 농기구를 준비하면서, 

인부를 모집하는 일을 혼자 하려니 얼이 빠지는 것같았다. 

더구나 직원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 터라, 

인선에 신중을 기하다보니 어려움이 더욱 컸다.

전국을 돌아다녔다. 

고등채소를 재배한다거나 특이한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들리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농사에 대한 식견과 함께, 

오락거리가 없는 사우디 땅에서 견뎌낼 강한 정신력을 갖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서부터 강원도까지 휘젓고 다녔다. 

그리하며 모두 8명의 일꾼을 뽑았다. 

그들 본인은 물론 부모님이나 부인 등 가족들에게도, 

일일이 내 꿈과 고생할 각오를 밝혔다.

인선을 마치고 나니, 이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 문제는 자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자금 문제였다. 기본적인 경비에다, 

최소한 직원들 월급 서너달치는 있어야 했다. 

친척에서부터 아는 사람은 다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후에 꼭 보답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사막에 배추와 무를 심어? 그럴 돈이 있으면 술이나 사 먹지.”

 “김용복이가 드디어 미쳤어. 

  고집불통에다 돈키호테이긴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돌아버렸어.”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렸다.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면 비난과 험담이나 하지 말지. 

인간사 비정함이 새삼 실감됐다.

 

그러나 그 정도의 말들에 기가 죽을 내가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하고서부터, 나는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들로선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내 자존심을 자극해 성공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게 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전혀 뜻밖에서 돈 문제가 해결됐다. 

같이 가기로 한 일꾼 중에 공직자 출신이 1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은행에 맡겨 논 퇴직금 400여만원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나를 믿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도 배수의 진을 치고 이 일에 임하겠다는 각오라고 했다.

이제 국내서도 모든 준비를 끝냈다. 

전쟁터인 사우디 사막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사우디에서 1개월 안에 보내주기로 한 비자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리야드의 아는 사람들과 전에 빈넬사 근무 때 친했던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사우디 기온으로 11월이 파종 적기인데, 

12월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 1979년 1월 하순이 돼서야 비자가 도착했다.

 

 

                             

  [역경의 열매―김용복 ⒂] 비장함 앞엔 막막한 현실만… 

                                              

                                                         

 

전쟁터로 나서는 병사들의 심정이 우리만큼이나 비장할까. 

1979년 2월4일 우리는 옷가방 1개와 삽 한자루씩을 쥐고 김포공항에 모였다. 

이 삽으로 사우디 사막을 일궈 

반드시 초록의 평원으로 가꾸겠다는 열의가 우리 가슴에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리야드 공항에 도착한 첫날부터 

우리는 앞날이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막상 도착은 했지만,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당장 갈 곳조차 없었다. 

오직 나 하나만을 믿고 따라온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려움을 각오하고 왔지만, 

이국땅에서의 첫날 잠자리도 해결할 수 없었으니 무척 난감했다.

모래벌판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니, 

한 건설회사가 사무실 복도에서 찬 이슬을 피할 수 있게 해줬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나는 농장 계약을 한 알무트래프씨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국제전화로 간신히 연락하니, 

그는 당분간 독일인 기술자들이 기거하는 온실에서 같이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독일인들은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을 거절했다. 

숙식문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던 차에 농장측에서 소형 트레일러 하우스 3개를 마련해줬다. 

흡사 개집 같이 생긴 트레일러는 너무 작아, 기다시피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영락없는 강아지네”하는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했지만, 

나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식생활 문제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먹어야만 힘을 내 일을 할텐 데, 끼니 때우기조차 쉽지 않았다. 

한국인 식당이 있었지만, 

20∼30리얄을 내야 겨우 냉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비싸 우리는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예멘인이 운영하는 불결한 식당을 이용했다. 

각국에서 몰려온 영세한 노무자들이 모이는 그 식당에서는 

위생이나 맛을 따지지 않고 5리얄이면 한 끼를 거뜬히 때울 수 있었다.

 

숙식도 큰 문제였지만 물이 없어 계속 세수를 할 수 없는데다, 

밤이면 모기를 비롯한 온갖 벌레들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모기향은 엄두도 못내고, 벌레에 물리면 침을 발라가며 괴롭게 잠을 청해야 했다. 

차마 사람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의 생활이었다. 

그런 거지생활에서도 가끔씩 인근 한국식품회사에서 고기를 보내줘 영양보충할 때면 행복했다. 

사막지역인 그곳에선 아무리 냉동보관을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고기를 폐기 처분해야 하는 데, 

이왕 버릴 것 선심이나 쓰자며 닭고기 쇠고기 등을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상황은 상한 고기라도 기꺼이 받아 먹어야 할 처지였다. 

석회질이 많아서 외국인들은 입에도 대지 않는 사우디 수돗물을 

우리는 끓이지도 않은 채 벌컥벌컥 마셨으니 상한 고기인들 못 먹었을까. 

그러고도 별탈없이 지낸 걸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후의 영광을 안겨주시기 위해 

담금질을 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당시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이 큰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적당한 땅을 찾아 

빨리 씨앗을 뿌리는 일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우리는 농장 여기저기 땅을 물색하다 

마침내 야채 재배 적지를 찾았다. 

야자수를 끼고 있는 데다 땅이 기름져 보이는 곳이었다.

 

막 삽질을 시작하려는데 웬 훼방꾼이 나타났다. 

농장관리인이 와서는 그곳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차에 태우더니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농사를 짓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 정녕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막에서 야채를 재배해내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 

갈수록 시련이 가혹합니다. 

농사가 될 것같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라고 하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십시오.”

어려운 상황에서 가끔 내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기던 일꾼들도 

차츰 나의 기도에 덩달아 눈을 감고 기도에 힘을 실어줬다. 

이른바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근처에 교회가 있었다면 모두 함께 찾아갔을 것이다. 

후에 내가 야채 재배에 성공하고 어느 정도 돈이 생겼을 때, 

교회부터 만든 것도 그때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김용복(16)] 첫싹 틔울 지혜·용기를 주소서                                             

                                                        

 

 

실패했다. 우리의 첫 작품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사막을 정성스럽게 갈아 씨를 뿌리고 정성껏 관리했지만, 

땅에선 작은 싹 하나 틔워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 되리라 여기진 않았지만, 막상 실패하자 실망감이 대단했다. 

같이 노력한 일꾼들에게 죄인이 된 것같았고, 

편의를 봐주지 않은 농장주 알무트래프씨가 야속하기도 했다.

사실 사우디아라비아인 농장주의 비양심에 대한 불만은 도착한 날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다. 

공항에 마중을 나오지 않은 것에서부터 숙소도 마련해 주지 않았고 

당초 계약사항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차량 1대를 제공하고, 농업용수를 쓸 수 있는 관정을 

마련해 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선 나몰라라 식이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1979년 2월16일. 

농장주를 원망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첫 파종을 한 날이다. 

인근 양계장에서 닭똥을 사다 거름을 주고 물을 져날라 뿌리고 하면서, 

하루 두세시간씩만 자면서 일에 매달렸다. 

파종하고 1주일 뒤, 5명의 직원이 서울에서 날아와 합류, 더욱 힘을 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나도 그랬지만, 같이 일한 직원들의 실망감은 더한 것 같았다. 

낮에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는 불볕에, 

밤이면 2∼3도까지 떨어지는 기후 조건에다,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누런 모래바람이 덮쳐오는 속에서, 

죽기 살기로 일한 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사장님,이곳에서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날 밤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이 나를 찾아와선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그의 말은 단번에 내 분노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당신들 여기 관광 왔어? 

당신들은 실패해도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서 죽는 수밖에 없어. 

그럴 바에야 다 같이 죽자고. 

어떻게 한번 실패로 포기를 한단 말이야….”

길길이 날뛰는 나를 보고 직원들이 말렸다. 

그들은 너무 힘들어서 불쑥 한 말이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며 나를 진정시켰다.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그리곤 모두 실패의 원인을 찾아보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했다. 

여건이 되었다면, 아무리 돈이 없지만 

그 날은 직원들끼리 한바탕 회포라도 풀고 싶었다.

실패를 하고 난 뒤, 사막에서 야채를 재배하려면 

그에 맞는 특별한 농사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특수비료의 배합, 관수시설이야말로 필수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직원들도 모두 내 생각에 공감을 표했다. 

모두가 농사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다는 이들이었지만, 

안일한 생각과 혈기만으로 덤볐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그러기로 한 직원들의 태도가 전과 달랐다. 

처음 죽기살기로 하려고 할 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내가 너무 심하게 한 탓인가 싶어, 

되도록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매일 묵상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어느날, 일을 마치고 들어가 

혼자 차분히 앉아 마음을 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옛날의 교훈을 상기해라”

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직원들의 마음자세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너무나 열악하고 가혹한 조건에서 인지상정인 것같았다. 

인간성에 호소하다, 안되면 다소의 강압도 필요할 것 같았다.

사막에서 야채 재배에 매달리기 전에, 

먼저 직원관리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고민을 거듭하다, 

만약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하실 것인지를 생각했다. 

짧은 성경 지식으로 예수님의 여러 행적들을 더듬어 봤다. 

예수님도 12명의 제자 등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숱한 인간적인 고뇌를 겪고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이지 않은가. 

그분처럼 포용과 사랑으로 이 난관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이럴 땐 어쩔 수 없어. 

김용복 스타일로 나가야 할 것같아. 

정신이 많이 풀어져 있는 직원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선

충격요법을 써서 정면돌파하는 수밖에 없어.’

 

                          

  [역경의 열매―김용복(17)] 실패후 뿌린 씨앗 드디어 첫싹                                

                                                      

  

 

“하나님, 용복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직원들의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이 악조건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강한 정신력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식할 정도로 강압적인 방법도 쓰겠습니다.”

 

‘사람을 잘 쓰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은 뒤, 

며칠을 곰곰 생각한 나는 사막과의 전쟁에 앞서 

직원들과의 전쟁에서부터 이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벌써 지쳐버린 몇몇 직원은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도 내비쳤다.

 

직원 8명을 모두 밖에 불러세웠다. 

나는 삽 한 자루를 들고 그들 앞에 섰다.

“우리는 지금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처음 겪는 실패지만, 

나는 이보다 더한 시련을 수없이 겪어왔다. 

벌써 포기니 뭐니 하는 건 죽는 것보다 못하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성공하지 않으면 여기에 뼈를 묻을 작정이다.

지금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정말 이 삽으로 사생결단을 내겠다. 

당분간 서로 인격같은 건 접어놓자.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내가 먼저 하겠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격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들은 내 단호한 말투와 광적인 눈빛에 질려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당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리더십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김용복이가 이렇게까지 악랄한 놈인가’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그들 옆에 있을 수 없어, 

농장의 고물 픽업 트럭을 몰고 리야드 시내로 가서, 

혼자 서러움의 눈물을 마구 쏟아내며 방황했다. 

밤이 이슥해서 숙소에 돌아오니, 

어디선가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이들이 나를 헐뜯고 있거나, 아니면 집단행동이라도 모의하지는 않나 불안했다. 

용기를 내 그들 쪽으로 가보니,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나를 보자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사장님,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두어명은 눈물까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아, 하나님! 이렇게 저를 도와 주시는군요”하는 말이 나왔다. 

이내 나는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아까 나도 모르게 감정에 북받쳐 격한 말을 하고서, 

맘이 불편해 혼자 많이 울다가 왔습니다. 

우리 다시 도전합시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여러 말을 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몇 가지 케이스 별로 각기 다른 방식의 재배법을 시행하면서, 

우리 나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밤을 낮 삼아’란 말은 그때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농사법에 대한 생각과 이론을 바탕으로 토론도 벌였다. 

사람이 여럿 있으면 다 같을 수는 없는 법이라, 

한두명이 요령을 피우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걸 느꼈으나 겉으로는 모르는 체했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에게도 희망의 빛이 보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곧잘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말하지 않던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신 것인가.

 

싹이 돋아났다. 

붉은 모래사막, 모든 것을 불 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햇볕 아래의 메마른 땅에서 

우리가 뿌린 씨앗이 싹을 틔웠다. 

모래땅을 비집고 초록색 여린 싹이 돋아난 것을 본 우리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내가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자 

직원들도 일제히 “하나님,고맙습니다”고 따라 외쳤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이미 기적은 일어났다. 

우리는 여기 저기 돋아난 싹들을 살리기 위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특히 물 공급과 밤과 낮의 기온차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새싹들도 우리의 정성에 보답하듯 잘 자랐다.


 “사장님,이것만 보고 있으면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르네요.”

 “나는 말이야, 우리집 늦둥이 키울 때보다 더 신경쓰이고 더 예뻐 보여.”

 “지금 내 삶의 희망이고 내 존재의 이유가 이놈이야.”


직원들이 새싹을 돌보면서 한 마디씩 하는 말들에 

나는 괜스레 흥분되고 감동까지 느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말의 불안감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워낙 척박한 토양과 건조한 기후라, 

그 연약한 싹들이 언제 말라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역경의 열매―김용복(18)] 배추재배 성공 소문에 주문량 폭주

                                                                                    

 

 

1979년 4월20일은 내 개인적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사우디 사막에서 야채를 재배해 처음으로 돈을 벌어들인 날이다.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희망의 싹들이 

내게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사우디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들은 

역시 예상대로 김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직원들이 모두 김치를 달라고 아우성인데, 

공급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무나 배추를 한국에서 배로 운반해오기도 했지만 수송 도중 상하기 예사였고, 

무사히 도착했다고 해도 신선도가 떨어졌으며 가격도 금값이었다. 

이렇게 배추와 무가 귀하다보니, 

기업마다 직원들에게 먹일 김치 확보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경남기업 후생담당자가 우연히 농장 옆을 지나 가다가 

우리가 재배하는 무와 배추를 발견했다. 

헐레벌떡 나를 찾아온 그는,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야채를 자기가 모두 사겠다고 흥정을 해왔다. 

수확할 때 보자고 했더니, 

그는 다짜고짜 ㎏당 5리얄씩 주겠다면서 

빳빳한 현찰로 2,500리얄을 내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돈은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으니, 

꼭 자기에게 최소한 무와 배추 500㎏ 이상은 줘야 한다며 

몇번이나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내 감정이 묘했다. 

내 손에 들린 돈뭉치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간 고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4년전 사막에서 야채를 재배,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빠져들어 

주위의 온갖 반대와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부렸던 것에서부터, 

직원들의 배신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한국으로 쫓겨갔던 일, 

인력 송출 허가를 받기 위해 노무관의 집에 쳐들어가 드러누웠던 일, 

보관 기간이 지나 폐기처분될 고기로 영양보충을 하며 버텼던 일 등등….

눈앞을 스쳐가는 추억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했다. 

특히 내 시도를 비웃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니 통쾌한 감정까지 생겼다. 

수질과 토양검사를 의뢰했던 기관의 관계자들에서부터 

몇몇 친지들, 심지어 농장을 빌려준 알무트래프씨조차 믿지 않았던 야채 재배를, 

내 손으로 해냈다고 생각하니 

밀려오는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나마 믿어준 사람들이 있다면, 

나와 함께 사막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따라와 준 8명의 직원들이다. 

이들이 느끼는 감격도 나에 못지 않은 것같았다. 


그날 밤 직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순간을 만끽했다. 

몇몇 직원은 나를 끌어안고는 

“사장님, 우리가 해냈어요. 

 사장님의 집념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어요”

하며 엉엉 목놓아 울어댔다. 

그렇게도 싹이 트지 않아 애를 태우던 날들에 

아껴뒀던 눈물들이었다.

한번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법. 

첫 수확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여기저기서 폭주하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야채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한번 싹을 틔운 사막 땅은 

잇따라 싱싱한 초록색 야채들을 생산해줬다. 

새벽이면 리야드 시내로 나가 

실업자 집합소에서 현지 인부를 수십명씩 데려와 인력을 보충했다. 

매일 들어오는 돈을 세기에 바빴다. 

농장은 계속 번창해 나갔다. 

쉼없이 들어오는 돈을 한국으로 송금하기 위해, 

하루에 한번씩은 농장에서 43㎞나 떨어진 리야드 시내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돼, 

생애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 

그것도 사우디 왕족이나 탈 수 있다는 ‘벤츠 500’을 샀다. 

부자가 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해 성탄절에 직원들에게 거액의 보너스를 안겼다. 

해마다 성탄절에 고국의 가족들에게 전화 한 통 못하며 우울하게 보냈지만, 

1979년 성탄절에는 직원들과 함께 이국땅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맘껏 축하하며 즐겼다. 

리야드 시내에서 케이크까지 사와 빙 둘러앉아 

기도하고 캐럴도 부르며 정말 오랜만에 멋진 성탄절 밤을 보냈다.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번지는 웃음을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사우디에서의 내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탈바꿈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들 생각이 났다. 

그때 아들 태정이는 초교 3학년이었고, 딸 명화는 18세를 넘기고 있었다. 

사우디 국법상 만 18세 이상은 성인으로 취급, 

자식이라도 초청해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명화 역시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게 새 인생의 단초를 제공해준 박덕종 목사님께 간곡한 편지를 띄웠다.

 

 

 

 

                             

[역경의 열매―김용복(19)] ‘녹색혁명’극찬 왕궁서도 초대                                                          

                                                                   

 

나는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인 모양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우리 가족에서 목사님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게 될 딸 명화가 

신학대에 다니는 예비목사와 결혼을 약속하게 됐다. 

명화를 부탁하기 위해 박덕종 목사님께 편지를 띄웠는데, 

박 목사님은 바로 당시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김광철 군을 소개해줬고 

둘은 금세 친해져 결혼을 약속했다.

김군은 매우 온유하고 성실하며 심지가 굳은 젊은이였다. 

우리가 사우디에 있을 때, 서울 영동농장 서울사무소장의 책임을 맡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일처리를 해줬다. 

특히 내 딸을 언제나 변함없이 아끼고 사랑해주면서 

좋은 목사로서 생활하고 있으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도 면목동에서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

 ‘소명교회’라는 이름대로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히 사역하고 있으니, 

장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애정과 존경을 표하고 싶다.

어쨌든 한국에 남아 있는 딸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하고서, 

아내와 아들 태정이를 데리고 사우디로 들어가 

오랜만에 가족의 정을 나누며 살게 되니 비로소 사람 사는 기분을 느꼈다.

농장은 그야말로 번창일로였다. 

‘서울영동농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나니, 내 소문이 사우디 전역에 퍼졌다. 

그들은 내 이름 앞에 ‘녹색혁명을 일군 기적의 사나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 

속으로 ‘기적만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 농장은 사우디의 명물이 됐다. 

사우디 농림부 장관을 비롯해, 

농업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은 모두 찾아와 극진하게 예우해줬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됐고, 

한국 정부 고위인사들도 사우디를 방문하면 꼭 우리 농장을 시찰했다.

그러던 중 1981년 뜻밖의 방문객이 나타났다. 

‘이브라힘 알 나무라’라는 사우디인이 

우리 농장에서 35㎞쯤 떨어진 자신의 농장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찾아간 그의 농장은 커다란 관정을 4개나 갖춘 50여만평의 거대한 규모였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의 농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사우디인들의 횡포에 데인 바가 있는 터라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돈만 벌게 해주면 된다면서 

내게 아주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는 통사정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음이 트인 사람인 것같아 

계약을 하고 ‘서울영동농장 제2농장’으로 이름붙였다.

운영하는 농장이 수십만평에 이르렀고 직원도 100여명이 됐으나, 

나는 멈추지 않고 농장을 계속 확장, 5개의 농장을 거느렸고 

사우디 정부의 숙원이었던 대규모 밀 경작까지 성공했다. 

그때 사우디에서도 밀이 생산되긴 했지만, 

1982년 내가 제2농장에서 무려 11만㎏의 밀을 수확, 

전량 사우디 농림부에 납품하자 일약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들은 거액의 밀 대금을 내게 안겨주면서, 사우디 왕궁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내 이야기는 농업계를 중심으로 크게 번져나가는 듯했다. 

거기다 적지 않은 외화를 계속 국내로 들여보내다보니 

금융계서도 내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다. 

5공화국 때인 1982년 석탑산업훈장을 받은데 이어, 

여기 저기서 각종 상을 안기고 방송 등에서도 출연 요청을 해와 

나 자신도 얼떨떨할 정도로 됐다. 

누가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져 있더라’고 했는데 내가 그에 해당됐다.

그때부터 머릿속에는

 ‘아,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됐나’하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결단을 내리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내 스타일이 나왔다.

 

1983년 9억원을 들여 고향인 전남 강진의 간척지 70여만평을 사들였다. 

귀국해 새롭게 내 꿈을 펼칠 또 하나의 싸움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장학회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추천을 받아 어려운 여건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청소년 몇 명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눈물로 고향을 떠나며 맹세했던 것들을 조금씩 실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만석지기가 돼 고향을 찾고 

나처럼 돈 때문에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을 돕겠다’던 그 맹세였다.

 

                       

[역경의 열매―김용복 (20)] 귀국후 평생의 꿈 장학사업 펼쳐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기로 했다. 

내 인생의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 무대가 됐던 그곳을 과감히 등지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이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소년시절에 품었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고, 

참담한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 땅을 떠난다 싶을 때의 감정이 오죽했겠는가.

현지인들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한국인들로부터 당한 배신 앞에서 치를 떨기도 했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사력을 다해 버텨내기도 했다. 

또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 

작열하는 사막의 태양보다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땅은 결국 내가 노력한 만큼 정직한 대가를 지불해 주었다. 

죽음의 땅, 불모의 땅으로 불리는 그곳이 내게는 생명이 꿈틀대는 희망의 땅이었다.

사우디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989년 12월31일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모든 준비를 해놓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내가 일할 여건도 만들었고, 

사우디에서의 정리 절차도 마쳤다. 

특히 뒤끝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타적인 아랍인들이 감동할 정도로 깨끗이 마무리했다. 

모든 장비와 시설물을 모두 무상으로 현지인들에게 넘겨주고, 

심지어 간판까지 영어와 현지어로 깨끗하게 다시 만들어 세워주었다.

숱한 추억이 서린 사우디에서 

직원 몇명과 함께 하나님께 송년예배 겸 송별예배를 드린 그해 연말. 

우리는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고생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지 않던 경우도 많았는데,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좋은 결과를 맺도록 해준 은혜를 잊지 않고, 

앞으로는 더 착하고 믿음직한 백성이 되겠다는 다짐도 했다.

십수년을 중동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다행히 별로 어색한 구석은 없었다. 

몇년동안 사우디와 한국을 오가며 ‘두집살림’을 해온 영향이었을까. 

그보다는 ‘서울영동농장’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내 보금자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우디에서 귀국하기 2년전인 1987년 

나는 이미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5층짜리 사옥을 지어 놓았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사업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다 

순식간에 잃어버린 서울 영동(강남지역)의 넓은 땅을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내 땅이 있던 그곳에 사무실과 집을 마련했다.

고국에 돌아온 뒤,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내 오랜 숙원인 장학사업을 펼치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때 월사금을 못내 퇴학당한 후, 

“돈이 없어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이 없게 하겠다”며 

울면서 다짐했던 맹세를 어떤 식으로든 실천해야 했다.

20억원으로 ‘용복장학회’라는 재단법인을 만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몇몇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학사업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알차게 운영되고 있다. 

91년 사법고시 합격생과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를 동시에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의사 법관 군장성 등이 여러 명 배출됐다. 

또 150여명으로 늘어난 장학생들 중에서 미스코리아가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이 각종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면 정말 가슴이 뿌듯하다.

그런 와중에 무엇보다 기쁜 일이 생겼다. 

외아들 태정이가 서울대 농대에 최고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때까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만석지기의 꿈’을 실천하는데 

아들이 힘을 보탤 수 있게 됐다 생각하니, 

아니 그 일을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아들이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 아비의 심중을 미리 헤아리고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아들과 함께 만석지기의 꿈을 이뤘다. 

황량하기만 했던 강진의 간척지를 거대한 농장으로 일궈, 

가을이면 황금물결로 출렁이게 했다. 

거기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일선의 전문 농업인으로 나선 아들은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농법으로 최고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철저하게 환경을 배려하면서, 

클래식과 신나는 풍물가락을 듣고 자란 농산물은 

이미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태정아, 고맙다.” 서울영동농장이 

또 다른 성공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 걸 지켜보면서 

아들에게 고마움과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역경의 열매―김용복(21)] 일흔의 나이에 ‘새 일’을 꿈꾼다

                                        

 

 

참으로 멀고도 먼 길을 돌아서 왔다. 

옆구리에 달랑 보자기 하나 끼고서 눈물을 쏟으며 홀로 떠났던 14세 소년이 

70을 넘긴 나이에 다시 고향을 찾았다. 

눈물 대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랑하는 가족과 용복장학회 출신의 늠름한 젊은이들을 대동하고 

전남 강진 고향땅을 찾았다. 

그러나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70여만평 농장을 둘러보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감회에 이내 눈시울을 적시고야 만다.

그랬다. 정확히 70성상을 채운 올해, 

가족과 장학생 몇 명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 

내 인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다. 

군데군데 후회스러운 구석들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내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오래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내 앞에는 또 다른 일들이 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얼마나 허락해주실지 모를 내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한가하게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해서도 

지금 못지 않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성실히 알차게 살고 싶다. 

무엇보다 어릴 때의 꿈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보살피고, 또 다른 의미있는 일들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일선에서는 물러날 생각이다. 

대신에 지금까지 내가 신경을 쓰지 못했던 부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다.

 

특히 뒤늦게 알게 됐지만, 

내 운명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꿔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또 냉혹한 세상에서, 내가 오늘의 성취를 이루기까지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하고 은혜를 갚는 데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싶다.

많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평생을 통해 이룬 재산과 사업체를 정리하기로 했다. 

강진의 농장은 아들 태정이에게 거의 인계했다. 

대부분의 운영을 아들에게 맡기고, 

나는 필요하다 싶을 때 간간이 조언이나 해주기로 했다. 

워낙 성실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잘 해나갈 것으로 믿는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나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에 많은 힘을 쏟고 싶다. 

설립된지 20여년이 돼가는 용복장학회에서 

서서히 맺어지는 결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젊은이들 앞에서 자주 강연하는 것도 그런 취지의 일환이다. 

얼마전 숙명여대 총학생회 초청으로 

많은 학생 앞에서 내 삶과 생각들을 진솔하게 밝힌 뒤, 

많은 편지와 이메일을 받고 무척 즐거웠다.

그리고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원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데다 

나 자신을 천상 농사꾼이라고 여기고 있기도 하지만,

농업을 통해 오늘의 성취를 이룬 때문인지 

농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시간이 나는 대로 전국의 농촌을 돌면서 내 생각을 계속 전할 생각이다. 

올해 100억여원을 출연해 세운 ‘농촌문화재단’도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어느 정도의 도움은 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올해 들어 맡은 건국대총동문회장 등 내게 지워져 있는 몇몇 직책도, 

‘김용복이 맡아 그르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잘 꾸려나갈 생각이다.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한 후 많은 곳에서 도움을 청해 왔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 정중히 거절했다. 

현재는 그런 식으로 베풀 여력도 없을 뿐더러, 

힘이 된다 하더라도 내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낮고 천한 곳에서 빛도 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여러 분야의 작은 등불들을 찾아, 

기름을 부어주고 비바람을 막아주고자 한다.

한 친구에 말에 따르면, “세상은 ‘무엇을 소유했느냐?’고 묻고, 

그리스도는 ‘어떻게 썼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 친구의 말처럼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썼나이다”

고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대답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김용복(22회,마지막회)] 믿음/사랑이 포기없는 삶을 인도

                                                                                                 

 

 

어느 누군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힘들고 아팠던 시절이 없을까마는, 

나의 과거는 수없는 좌절과 절망, 시련, 고난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월사금을 못내 중학교를 퇴학 당하고, 

고향을 떠다 어린 나이에 숱한 밤을 가슴이 찢기는 듯한 외로움에 흐느꼈고, 

자립에 대한 열망으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헤치고 다녔으며, 

사시사철 불구덩이같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서 악전고투했다.

많이도 힘들어하고 아파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 순간을 넘기려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은 적은 있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결코 나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렵고 벅찰 때마다 더 악다구니를 하고 오기를 부렸다. 

자랑같기도 하지만 결코 자랑거리는 아니다. 

다만 피곤하고 지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교훈거리는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 토막의 이야깃거리는 될 것이다.

지금 나는 당당하다. 

언제나 사랑과 믿음을 주는 아내가 변함없이 곁에 있고, 

훌륭하게 가정을 꾸려가는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자 손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따뜻하게 격려해주는 많은 친구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과분하게 칭찬해주는 지인들도 있다. 

그리고 사랑과 질책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깊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분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음을 부인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크나큰 은총을 내려주신 것도 분명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분과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으니 머리를 들기 어렵다. 

정말로 감사한다. 

특히 두 분에게는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감사 인사로 받들고 싶다. 

새롭게 인생의 좌표를 잡아준 하나님과, 

사랑하는 아내 이순례 권사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꽃처럼 곱디고운 모습으로, 누가 봐도 한참 부족한 나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아내는, 

갖은 고생 속에서도 항상 기도로 나를 일깨워준 영원한 은인이자 반려자이다. 

내가 흐트러졌을 땐 가장의 역할을 했고, 

내가 모성애에 목말라할 땐 따뜻한 어머니의 품이 돼줬다. 

아내로 인해 나는 외롭지 않았고, 아내로 인해 나는 아픔을 덜 수 있었다. 

아내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나는 기를 쓰고 그 팔불출이 되고 싶다.

그리고 하나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첫번째 실패를 경험하고 귀국해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저주 속에서 술에 파묻혀 지낼 때, 

살며시 다가와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준 그 분은, 

이후 내 삶의 버팀목이 됐다. 

힘들고 아플 때마다 위로와 힘을 북돋워 주시기도 하면서, 

교만에 빠질 때는 채찍도 마다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지극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덧붙여서 내 딸 명화에게도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다. 

어려운 환경에서 대학에 보내지도 못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아비를 이해해 주고 올바르게 자라서 

목사 사모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충실하게 살고 있는데 대해 

애정과 격려를 표하고 싶다.

나는 지금 간밤의 무서리를 견디고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운 뒤 조용히 거울 앞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2003년이 지나면서 또 하나의 나이테를 보태는 내 인생에도 

황혼이 점점 짙게 깔려가고 있다. 

하지만 희미한 석양마저 사라지고 어둠이 천지를 뒤덮는다 해도, 

나는 언제나 마지막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다하면 다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새롭게 솟아오를 찬란한 태양을 기다리며,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노을이 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즐겨 암송하는 시편 126편 5∼6절 말씀을 소개하고 연재를 마칠까 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

 

                                                                                                                                                   [원본:국민일보]

                                                                                                                                자료출처:한사랑농촌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