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금식기도제단은 대구 도심에 생긴 기도원인 셈이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은 날선 검이 되어 원근 각지에서 온 성도들의 심령을 쪼개고 파고들었다. 성령께서 전하고픈 말씀이 내 입술을 통해 선포되고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변화와 영적 각성이 있게 만들었다.
난치병이 낫는 역사들이 이어졌고 성도들뿐 아니라 목사님들도 찾아오게 되었다. 처음엔 성도들이 이곳에서 은혜를 받고 치유를 경험했다니 좀 이상한 곳이 아닌가 우려하며 검증차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정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를 돕는 사위도 공군정훈장교 출신에 침례신학교에서 공부했다니 안심했다.
“기도제단이 교회와 다른 점은 교회가 영적병원이라면 기도제단은 응급실 같은 곳입니다. 급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응답받을 때 기도로 부르짖는 이런 곳이 꼭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엄숙한 경배와 갈멜산상의 애끓는 기도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말에 목사님들이 격려해 주시고 성도들까지 보내주시기도 했다. 난 이곳에서 만 6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집회를 인도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지구력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오랜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성도가 기도하다 깨끗함을 입었고 아기가 안 생겨 애타하던 부부가 기도로 쌍둥이를 임신하기도 했다.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던 환자도 기도로 치유 받았다.
한번은 대구 근교 달성군의 한 산을 찾았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감탄사를 연발했다. 큰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의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곳을 기도원 부지로 매입하고픈 열망이 가득했지만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5000평을 사려고 하니 1989년 당시에 큰 금액인 1억5000만원이 필요했다. 난 믿음으로 계약서를 썼고 3개월 안에 잔금을 다 치르기로 했다. 계약금은 내가 가진 전부인 3000만원으로 치렀다.
난 오직 기도로 잔금을 마련케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밤낮으로 부르짖고 부르짖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자칫 계약금만 떼일 판이었다. 이 무렵 일본 구마모토기도원에서 집회인도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국방부에서 국제기독장교대회를 준비하던 사위에게 요나제단 집회를 맡기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하나님의 땅값 응답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런데 일본 전국 성회로 열린 이 집회가 성령의 풍성한 역사로 끝났지만 내 문제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실망하던 중 후쿠오카 한인교회를 담임하는 이성주 목사님이 이번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며 하루 만이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쿠오카로 이동해 마음이 답답한 상태에서 강단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간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감동이 오며 성령 충만한 시간이 이어졌다. 설교를 마치자 담임 목사님은 나의 대구 기도원 부지 계약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리며 “우리의 고국에 기도처가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하십니다”라며 긴급 광고를 했다.
이날 헌금이 6000만원에 가까웠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지금 드려진 예물로는 이에스더 목사님께서 매입하려고 하는 땅값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S장로님께서 책임지시면 어떨까요?”
그 순간 S장로님도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시원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손길을 통해 하루 만의 반전으로 대구 기도원 부지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일본 후쿠오카한인교회 집회에 가서 기도원 부지 헌금을 응답받아온 이에스더 원장(왼쪽 네번째). 맨 오른쪽이 이성주 담임목사.
이에스더 목사는 항상 기도 가운데 설교를 준비해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 있다. 자신이 정리한 설교 파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 목사.
대구 요나금식기도제단은 이사야 58장에서 금식의 원리를 발견해 시작할 수 있었다.
성경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한다. 금식을 통한 선물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 금식 후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나는 홀사모가 된 뒤 단식하며 기도할 때가 많았다. 이때 체험한 강한 은혜를 바탕으로 에스더와 요나가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으로 부르짖던 ‘3일의 금식’을 나의 단식기도법으로 정립했다. 이것은 오늘날 내가 요나3일영성원을 운영하는 핵심 골격이 돼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부터 나는 1∼3일간 단식하며 기도한 후 물과 부드러운 죽으로 3∼7일간 단계적 보호식을 하도록 한다. 이곳서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마다 건강의 회복과 문제 해결의 급속한 응답을 경험하게 되면서 요나금식기도제단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홀사모’는 소천한 교역자, 목사의 홀로 남은 아내를 뜻하는 말로 홀사모선교회란 이름을 지었다. 내가 특허로 등록한 이름이기도 하다. 나 역시 홀사모로 졸지에 아이 넷을 데리고 사택에서 나와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릿하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며 언젠가 홀사모를 돕는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드디어 1994년 6월 23일 요나기도제단이 있던 대구 달성군 논공읍 노이동에 200평 규모의 홀사모수양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평생을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내조만 하다 어려움을 당한 홀사모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형편이 어려우면 생활비를 주고, 매주 화요일 홀사모 사역자 양성 과정을 열었다.
홀사모는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가 아니라 집안의 가장이자 어머니로 돌아간다. 재산이 없으면 생계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 또 목사가 소천한 것에 성도들이 왈가왈부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역시 남겨진 사모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된다. 나는 사모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고 자녀들이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홀사모 모임을 매월 정기적으로 가지다 1998년 7월 14일 서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홀사모 전진대회 및 위로 행사를 열고 공식 명칭을 ‘세계기독교 교역자 홀사모선교회’로 이름을 지었다. 나는 이 사역을 하면서 그 중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전국 교회에 보내곤 했는데 외면도 많이 받았지만 수고한다고 격려하며 후원금을 보내주는 목사님도 많았다. 참으로 감사했다.
사역을 하면서 의외로 어려움에 처한 홀사모가 많았다. 도움을 주고자 선교회로 오라고 해도 일부는 차비도 없어 못 온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홀사모를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생활비도 전달하곤 했다. 또 해외 교회도 순방하며 홀사모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기도 했는데 한동안 해외 교회의 후원이 이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장 사택을 비우라는 말에 울기만 하던 사모를 찾아 가재도구를 싣고 수양관으로 데려온 경우도 있었다. 홀사모선교회 사역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차원을 넘어 사모들의 잠재됐던 재능을 깨우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서는 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낙담해 있던 사모들에게 연수 과정을 통해 사역의 길을 열어드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성경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한다. 금식을 통한 선물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 금식 후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나는 홀사모가 된 뒤 단식하며 기도할 때가 많았다. 이때 체험한 강한 은혜를 바탕으로 에스더와 요나가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으로 부르짖던 ‘3일의 금식’을 나의 단식기도법으로 정립했다. 이것은 오늘날 내가 요나3일영성원을 운영하는 핵심 골격이 돼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부터 나는 1∼3일간 단식하며 기도한 후 물과 부드러운 죽으로 3∼7일간 단계적 보호식을 하도록 한다. 이곳서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마다 건강의 회복과 문제 해결의 급속한 응답을 경험하게 되면서 요나금식기도제단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홀사모’는 소천한 교역자, 목사의 홀로 남은 아내를 뜻하는 말로 홀사모선교회란 이름을 지었다. 내가 특허로 등록한 이름이기도 하다. 나 역시 홀사모로 졸지에 아이 넷을 데리고 사택에서 나와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릿하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며 언젠가 홀사모를 돕는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드디어 1994년 6월 23일 요나기도제단이 있던 대구 달성군 논공읍 노이동에 200평 규모의 홀사모수양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평생을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내조만 하다 어려움을 당한 홀사모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형편이 어려우면 생활비를 주고, 매주 화요일 홀사모 사역자 양성 과정을 열었다.
홀사모는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가 아니라 집안의 가장이자 어머니로 돌아간다. 재산이 없으면 생계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 또 목사가 소천한 것에 성도들이 왈가왈부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역시 남겨진 사모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된다. 나는 사모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고 자녀들이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홀사모 모임을 매월 정기적으로 가지다 1998년 7월 14일 서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홀사모 전진대회 및 위로 행사를 열고 공식 명칭을 ‘세계기독교 교역자 홀사모선교회’로 이름을 지었다. 나는 이 사역을 하면서 그 중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전국 교회에 보내곤 했는데 외면도 많이 받았지만 수고한다고 격려하며 후원금을 보내주는 목사님도 많았다. 참으로 감사했다.
사역을 하면서 의외로 어려움에 처한 홀사모가 많았다. 도움을 주고자 선교회로 오라고 해도 일부는 차비도 없어 못 온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홀사모를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생활비도 전달하곤 했다. 또 해외 교회도 순방하며 홀사모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기도 했는데 한동안 해외 교회의 후원이 이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장 사택을 비우라는 말에 울기만 하던 사모를 찾아 가재도구를 싣고 수양관으로 데려온 경우도 있었다. 홀사모선교회 사역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차원을 넘어 사모들의 잠재됐던 재능을 깨우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서는 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낙담해 있던 사모들에게 연수 과정을 통해 사역의 길을 열어드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대구요나기도제단을 사역하며 국내외 부흥사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고 신현균 목사의 격려와 지도가 큰 힘이 됐다. 부흥사연수 과정을 마친 이에스더 목사(오른쪽 세 번째).
성경에 다니엘의 세 친구를 화마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 기도원도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일이 있었다. 1999년 3월 22일이었다.
밤에 보일러에 불이 깜빡거려 관리집사에게 잘 챙겨보라고 했는데 새벽 6시께 지나가던 차가 수양관 근처 산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를 깨웠다. 밖으로 나오니 화마가 수양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 주여’라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기도원을 지켜 달라는 기도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19로 신고를 해야 하는데 손이 떨려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웽웽대는 소방차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불길이 잡혔다. 화재를 수습한 소방대원들은 잔 불씨도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소방대원들이 불을 끈 후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불길의 최종 상태로 보아 적어도 서너 시간 동안 불이 번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산불 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새벽 내내 불이 났는데 마치 4시간 동안 자연현상을 정지시킨 것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이었기에 불이 산 위로 세차게 타오르지 못하였고, 게다가 1m도 채 안 되는 보일러 연료통에 불길이 닿지 않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방서로 연락해 준 분이 있었다. 소나무 숲으로 울창한 곳인지라 삽시간에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지만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바람을 잔잔케 하셨고, 다른 손길을 통하여 문제를 처리해 주고 계셨던 것이다. 불길도 피하게 해주신 하나님이셨다.
하루는 학창 시절부터 사랑으로 길러주신 임영재 목사님께서 불러주셔서 시무하시던 독립문성결교회 금요철야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당회장실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예배 전에 만나 볼 사람이 있다고 말하셨다.
밤에 보일러에 불이 깜빡거려 관리집사에게 잘 챙겨보라고 했는데 새벽 6시께 지나가던 차가 수양관 근처 산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를 깨웠다. 밖으로 나오니 화마가 수양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 주여’라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기도원을 지켜 달라는 기도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19로 신고를 해야 하는데 손이 떨려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웽웽대는 소방차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불길이 잡혔다. 화재를 수습한 소방대원들은 잔 불씨도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소방대원들이 불을 끈 후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불길의 최종 상태로 보아 적어도 서너 시간 동안 불이 번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산불 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새벽 내내 불이 났는데 마치 4시간 동안 자연현상을 정지시킨 것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이었기에 불이 산 위로 세차게 타오르지 못하였고, 게다가 1m도 채 안 되는 보일러 연료통에 불길이 닿지 않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방서로 연락해 준 분이 있었다. 소나무 숲으로 울창한 곳인지라 삽시간에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지만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바람을 잔잔케 하셨고, 다른 손길을 통하여 문제를 처리해 주고 계셨던 것이다. 불길도 피하게 해주신 하나님이셨다.
하루는 학창 시절부터 사랑으로 길러주신 임영재 목사님께서 불러주셔서 시무하시던 독립문성결교회 금요철야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당회장실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예배 전에 만나 볼 사람이 있다고 말하셨다.
잠시 후 들어오는 사람은 50대의 여성도였다. 임 집사라고 소개를 하는 그분은 위암 말기의 중환자였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예배시간에 참석할 수가 없어서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해준 뒤 가능하면 대구로 내려와 단식하며 함께 기도하기를 권했다.
철야집회 후 한밤에 고속도로를 질주해 대구로 내려왔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잠시 잠을 취한 다음 아침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제단에 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제 밤에 만나 기도해 주었던 임 집사의 모습이 보였다. 생과 사를 넘는 마지막 선택이었던 탓인지 나보다 먼저 내려와 단식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보여주실 것을 믿으며 집회시간이나 한밤의 기도시간에 강청하는 기도를 함께했다. 어려운 상태였지만 3일의 단식을 잘 마치고 보호식에 들어갔다. 이미 나는 남편목사님이 위암으로 운명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했다. 더구나 위암은 먹지 않는 순간부터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그의 먹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나님의 기적은 보호식을 하는 가운데 일어났다. 물과 미음을 주는 대로 잘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에서 거부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너무나 기뻤다. 임 집사의 병세는 호전되어 강단 앞으로 나아와 찬양을 하기도 하고 간증하면서 눈물로 영광을 돌렸다.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 담임 목사님께 간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며 전화로 감사를 전해왔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이에스더 목사는 기도원 땅값을 지원받은 후쿠오카한인교회의 선교목사로도 임명받아 수시로 일본에 가서 설교를 했다.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영적인 문제로 생긴 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전문의들도 이런 환자를 대하기가 가장 까다롭다. 이것은 본인만이 느끼는 고통이기에 아무리 상태를 설명해도 처방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식기도원에서 이런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병이 오게 된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성경적 원리를 가르쳐 주면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회개를 통해 그 자리에서 낫기도 하고, 귀신이 떠나갈 때 병까지 갖고 나갔기에 온 몸이 기적같이 깨끗해진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오랜 기간 동안 단식과 보호식을 하며 기도할 때 낫는 병도 있고, 때로는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기도 후 그와 상담을 하는 가운데 의사처방이 필요함을 알려 주기도 한다.
간혹 무조건적인 신앙만으로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신자를 만난다. 우선 보기에는 그의 믿음이 훨씬 강해 보인다. 물론 하나님께서 손대시면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그 사람이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의사들은 먼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묻는다. 증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부족하면 오진확률은 높아진다. 왜 병에 걸렸는지 분명하게 알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할 때 그 환자는 치료될 수 있다.
신유기도를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에게 병이 침투한 경로를 깨닫게 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일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기도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으로 믿는다.
의사나 약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신앙적인 문제가 있지만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신앙이 더 문제다. 생명의 근원을 아는 자라면 함부로 자기 생명을 의탁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알리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
성경 속 기적과 신유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해 과학이 발달된 만큼 의료적 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선택을 따르고자 하는 자세를 취할 때에 역사하는 힘이 더욱 강할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한인교회 이성주 목사님은 수시로 나를 초청해 강단에 설 기회를 주셨다. 하루는 한 일본목사님의 사모님이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며 기도요청을 했다. 나는 손을 얹고 기도한 뒤 “이미 의사가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부르심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단식기도를 하면 어떨까요?”라고 했다.
그 사모님은 남편에게 “여보! 소원이니 함께 단식하며 기도해요”라고 하는데 일본목사님은 바쁘다며 거절하는 것에 내가 충격을 받았다. 사모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모님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뒤 얼마 후 이성주 목사님으로부터 사모님이 단식 후 나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도 너무 기뻐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렸다.
다시 일본을 찾았을 때 사모님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남편목사님이 사모가 입원했던 바로 그 병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사모는 “그 때 함께 단식하며 기도해 주지 않아 하나님께서 이 방에 들어오게 하신 것 같다”고 말해 모두들 크게 웃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단식기도원에서 이런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병이 오게 된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성경적 원리를 가르쳐 주면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회개를 통해 그 자리에서 낫기도 하고, 귀신이 떠나갈 때 병까지 갖고 나갔기에 온 몸이 기적같이 깨끗해진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오랜 기간 동안 단식과 보호식을 하며 기도할 때 낫는 병도 있고, 때로는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기도 후 그와 상담을 하는 가운데 의사처방이 필요함을 알려 주기도 한다.
간혹 무조건적인 신앙만으로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신자를 만난다. 우선 보기에는 그의 믿음이 훨씬 강해 보인다. 물론 하나님께서 손대시면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그 사람이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의사들은 먼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묻는다. 증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부족하면 오진확률은 높아진다. 왜 병에 걸렸는지 분명하게 알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할 때 그 환자는 치료될 수 있다.
신유기도를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에게 병이 침투한 경로를 깨닫게 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일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기도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으로 믿는다.
의사나 약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신앙적인 문제가 있지만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신앙이 더 문제다. 생명의 근원을 아는 자라면 함부로 자기 생명을 의탁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알리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
성경 속 기적과 신유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해 과학이 발달된 만큼 의료적 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선택을 따르고자 하는 자세를 취할 때에 역사하는 힘이 더욱 강할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한인교회 이성주 목사님은 수시로 나를 초청해 강단에 설 기회를 주셨다. 하루는 한 일본목사님의 사모님이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며 기도요청을 했다. 나는 손을 얹고 기도한 뒤 “이미 의사가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부르심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단식기도를 하면 어떨까요?”라고 했다.
그 사모님은 남편에게 “여보! 소원이니 함께 단식하며 기도해요”라고 하는데 일본목사님은 바쁘다며 거절하는 것에 내가 충격을 받았다. 사모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모님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뒤 얼마 후 이성주 목사님으로부터 사모님이 단식 후 나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도 너무 기뻐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렸다.
다시 일본을 찾았을 때 사모님은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남편목사님이 사모가 입원했던 바로 그 병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사모는 “그 때 함께 단식하며 기도해 주지 않아 하나님께서 이 방에 들어오게 하신 것 같다”고 말해 모두들 크게 웃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3일 기도의 영적 파워’ 출간으로 집회 요청이 이어졌다. 집회 현장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이에스더 목사(강단 오른쪽)와 사위 장덕봉 목사.
시간이 흐르면서 대구 수양관 주변에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자꾸 들어서는데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기도원 맞은편 정면에 절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일 눈 뜨자마자 절을 마주 본다고 생각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절을 향해 “주여! 저 절을 다른 곳으로 보내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내 기도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절은 점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도만 하고 있던 어느 날, 한 분이 날 찾아왔다. 자신이 건너편 절 주지의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이 절을 사지 않겠느냐는 의중을 물어왔다.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돈도 없지만 전혀 살 의향이 없다고 했다.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부활주일 오후였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난 성도들과 성전 뜰에 나와 있었는데 절 방향에서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퍼졌다. 한 교회에서 절을 매입해 선교사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입주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 교회는 정상적인 매입으로는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고 경매로 매입을 하게 됐다고 했다. 선교사들께 숙식을 제공하고 특수선교사 훈련센터로도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록 시간이 더디어도 하나님은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셨다. 아침마다 ‘저 절이 사라지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곳이 은혜스러운 곳으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1999년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첫 번째 책 ‘주님, 한 손만 잡아주소서’를 통해서는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불기둥을 간증했다. 이 책을 읽고 은혜가 되었는지 추석명절을 앞둔 시기에도 여러 교회의 집회요청이 이어졌다.
안산의 한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인도한 후 대구로 돌아가던 중 사위가 불현듯 “성령께서 수도 서울에 예비된 집회 처소를 찾으라는 감동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해 보자고 한 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란 외마디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마음속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은 기도응답의 징후였다.
그러나 서울 처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인간적으로는 참 답답했다. 하루는 서울에 왔는데 갑자기 총신대학 근처 교회 종탑이 나를 사로잡았다. 차를 세워둔 채 달려가 보았다.
한 교회가 지상 3층 지하 1층의 상가를 통째로 분양받아 리모델링하려는 중이었다. 우리는 분양받은 박모 목사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해 보았는데 그분은 사위의 공군사관학교 3년 선배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사위 장 목사가 입학할 당시 기독생도회장이었고 3년 뒤 사위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인연이 있었다. 군악대장을 역임해 찬양선교에 관심을 갖고 목회자가 된 박 목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곳 일부 공간에 세를 들기로 하고 서울 진입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우리는 박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에서 두 번째 책 ‘3일 기도의 영적 파워’ 출판기념회를 겸한 ‘요나3일 영성원’ 개원예배를 드렸다.
기도의 중요성은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책 ‘3일 기도의 영적 파워’는 적중했다. 무명 저자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 한 해 동안 기독교서점협의회가 선정하는 베스트 북 가운데 한 번도 빠짐없이 이름이 오른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사역해 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축복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일 눈 뜨자마자 절을 마주 본다고 생각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절을 향해 “주여! 저 절을 다른 곳으로 보내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내 기도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절은 점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도만 하고 있던 어느 날, 한 분이 날 찾아왔다. 자신이 건너편 절 주지의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이 절을 사지 않겠느냐는 의중을 물어왔다.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돈도 없지만 전혀 살 의향이 없다고 했다.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부활주일 오후였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난 성도들과 성전 뜰에 나와 있었는데 절 방향에서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퍼졌다. 한 교회에서 절을 매입해 선교사 게스트하우스로 꾸미고 입주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 교회는 정상적인 매입으로는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고 경매로 매입을 하게 됐다고 했다. 선교사들께 숙식을 제공하고 특수선교사 훈련센터로도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록 시간이 더디어도 하나님은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셨다. 아침마다 ‘저 절이 사라지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곳이 은혜스러운 곳으로 바뀌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1999년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첫 번째 책 ‘주님, 한 손만 잡아주소서’를 통해서는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불기둥을 간증했다. 이 책을 읽고 은혜가 되었는지 추석명절을 앞둔 시기에도 여러 교회의 집회요청이 이어졌다.
안산의 한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인도한 후 대구로 돌아가던 중 사위가 불현듯 “성령께서 수도 서울에 예비된 집회 처소를 찾으라는 감동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해 보자고 한 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란 외마디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마음속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은 기도응답의 징후였다.
그러나 서울 처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인간적으로는 참 답답했다. 하루는 서울에 왔는데 갑자기 총신대학 근처 교회 종탑이 나를 사로잡았다. 차를 세워둔 채 달려가 보았다.
한 교회가 지상 3층 지하 1층의 상가를 통째로 분양받아 리모델링하려는 중이었다. 우리는 분양받은 박모 목사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해 보았는데 그분은 사위의 공군사관학교 3년 선배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사위 장 목사가 입학할 당시 기독생도회장이었고 3년 뒤 사위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인연이 있었다. 군악대장을 역임해 찬양선교에 관심을 갖고 목회자가 된 박 목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곳 일부 공간에 세를 들기로 하고 서울 진입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우리는 박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에서 두 번째 책 ‘3일 기도의 영적 파워’ 출판기념회를 겸한 ‘요나3일 영성원’ 개원예배를 드렸다.
기도의 중요성은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책 ‘3일 기도의 영적 파워’는 적중했다. 무명 저자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 한 해 동안 기독교서점협의회가 선정하는 베스트 북 가운데 한 번도 빠짐없이 이름이 오른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해 열정을 갖고 사역해 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축복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