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공의의 예언자 아모스
네 명의 주전 8세기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가운데 선두주자인 아모스(Amos)는 이름(짐 또는 짐 진 사람이라는 뜻) 그대로 이스라엘 예언사에서 가장 큰 부담과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아모스는 그의 예언(BC 767∼763?)이 시대적으로 호세아보다 앞설 뿐만 아니라 가장 찬란한 문체의 고전적 예언자(Classical Prophet)라는 점에서도 ‘선두주자’라 불릴 만하다. 이전의 어떤 예언자보다 신랄하고 위협적인 어조로 국가적 멸망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스라엘에게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이었다(암 7:10). 평화를 선언했던 이전의 궁중 예언자들과 달리, 평민 출신(7:14)으로서 최대의 국가적 행사였던 신년축제의 날(주, 야웨의 날, 5:18∼20, 8:9) 벧엘 성전의 관중들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신언(神言)을 선포하는 일 자체가 스스로에게도 버겁고 힘든 짐이었을 것이다.
아홉 장의 짧은 문서 가운데서 ‘남은 자’ 사상(5:3, 15, 9:8) 외에는 어떤 희망적 메시지도 보이지 않는 아모스의 예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한 주석가의 말처럼, 그의 예언은 듣는 자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통곡하며 회개하거나, 아니면 “이놈을 어찌할꼬?”하며 죽이고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여로보암(왕)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쫓겨나리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7:11, 17) 이처럼 반역적인 예언을 견디지 못한 벧엘의 대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가 남왕국(유다) 드고아 출신임을 알고 왕에게 그를 남왕국으로 추방할 것을 청원한다(7:10∼13).
아모스가 진단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 당시의 물질적 풍요에서 비롯된 총체적인 부패상황으로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5:24) 흘려야 하는 원칙이 총체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부자들은 상아침대에 누워 뒹굴며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 다윗을 흉내 내어 노래 부르며 탐욕에 가득한 눈으로 가난한 사람의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 질시, 겉옷을 전당잡고 추위가 와도 돌려주지 않았다. 상인들은 거짓 저울로 부당이득을 일삼고, 궁궐 안에서는 포학과 겁탈이 난무하였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여인들, 그리고 거리마다 가득한 음란풍조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을 두고 왕래하였다. 제사장들은 우상의 신당에서 거둔 벌금으로 술을 구하여 파티를 벌였고, 거창하고 형식적인 예배 참여자들이 3일마다 십일조를 바친다고 떠들어댔다. 야웨께서 이들의 절기, 성회, 각종 제물과 찬송까지도 역겨워하시어 가뭄과 해충과 염병의 채찍으로 징계하셨으나 귀먹은 이스라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모스의 예언이 당시에는 실패했으나 후대의 문서로 살아남은 이유는 우선 그의 예언대로 약 40년 뒤(BC 722)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망하고, 망하기 전에도 일본이 당한 것과 같은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5:8, 6:11, 8:8, 9:1,6)가 예언 직후 2년 만에(BC 765?) 발생함으로써(암 1:1, 슥 14;5) 그 예언의 진정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재난으로 두려워 떨고 있는 일본, 의인을 모두 제거한 자리에 5000개의 김일성 우상을 세워 3대 세습을 도모하는 부패한 북한 공산당, 그리고 온갖 형식주의, 물량주의, 사치향락 가운데 자정 능력을 상실한 한국사회와 교회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공의의 예언자 아모스에게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장영일 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