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1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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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피의 혁명가 예후(Jehu) 성경인물 가운데 예후처럼 뜨거운 신앙과 열정으로(왕하 10:16) 야웨의 마음을 시원케 한 지도자도 드물다. 동시에 성자와 폭력배의 양면성을 표출하는 그의 성품과 행동 때문에 그처럼 예언자들로부터 혹평을 듣는 왕도 많지 않다(호 1:4; 왕하 10:31∼33). 그의 부친(여호사밧:야웨가 심판하신다)과 아들(여호아하스:야웨가 붙들어 주신다)의 이름은 물론 예후(그분은 야웨시다) 자신의 이름이 암시하듯이, 그리고 이세벨과 아합의 친 바알 정책으로 야웨종교가 숨을 죽이던 시대에 선지자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예후는 투철한 야웨주의자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바알종교를 척결할 차세대 혁명가로서 그를 지명하자, 비밀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그는 최전방 길르앗 라못에서 쿠데타를 일으켜(9:1∼13) 혁명동지들과 함께 전차를 몰고 노도처럼 이스르엘에 당도, 그곳에서 요양하던 아합의 아들 요람은 물론 야웨주의자들의 철천지 원수 이세벨을 처단하고 문병 중이던 유다 왕 아하시야(아합의 외손자)까지 살해함으로써 야웨의 심판을 거침없이 대행하였다(9:7∼10, 25). 예후는 그 후 또 다른 야웨주의자 그룹인 레갑 족속과 의기투합하여(10:15∼17) 자신을 바알주의자로 위장해 국가적 바알 축제를 공포하고, 사마리아 바알 신전에 모든 바알 신도들을 초청, 80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한꺼번에 학살한 다음 그 신전을 변소로 만들어 바알을 저주한다(10:18∼28). 이와 같은 신속한 바알종교 숙청의 공로로 그는 야웨의 예언자들로부터 4대 동안 이어질 ‘예후 왕조’를 보장받는다(10:30). 예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그의 개혁이 과도했기 때문이다. 그의 바알종교 숙청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예언자 호세아의 평가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의 지나친 잔인성이 문제였다. 왕비(이세벨)가 환관들에 의해 고층건물에서 돌바닥에 내던져지고, 조각난 그녀의 시체가 예후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들개들의 먹이가 되는 상황에서 예후는 태연하게 혁명동지들과 파티를 벌인다(9:34). 특히 바알 신전에서의 학살 장면은 일제가 불 질러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제암리교회 현장을 연상시킨다. 열왕� 저자는 예후의 후반부 치적을 보도하면서 그토록 열성적인 야웨주의자가 초래한 엄청난 정치·종교적 위기 앞에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예후가 두로의 공주와 남유다 왕까지 살해함으로써 아합왕 당시 아람제국의 남하를 방어할 목적으로 체결한 3개국 동맹(페니키아-유다-이스라엘)이 와해되고, 아람의 하사엘이 이 기회를 틈타 요단 동편의 곡창지대를 점령하고 북왕국을 속국화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10:32∼33). 또한 북왕국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정치적 야욕과 정책을 본 받아, 예루살렘행 순례자들을 저지할 목적으로 세운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 제단을 예후가 묵인함으로써 목숨을 걸고 추진해온 자신의 종교개혁을 스스로 무산시킬 뿐만 아니라, 벧엘에서 범한 죄로 인하여 결국 북왕국이 멸망케 되는 비극까지 초래한 것이다(10:31; 17:16; 암 3:14; 4:4). 예후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 볼 때, 우리는 예언자를 통해 예고된 야웨의 심판이 때가 되면 반드시 이행된다는 것과 아무리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일지라도 정치적 야망과 이기주의로 인하여 무의미하게 될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장영일 총장(장로회신학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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