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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11-15

영국신사77 2016. 4. 13. 19:32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11-15

 

 

총신 신대원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Ⅲ| ……──大名 지리
조회 26 | 07.05.17 14:28 http://cafe.daum.net/dm3179/PZ0/500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1) 조지 휘트필드·글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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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휘트필드(1714∼70)는 18세기 칼뱅주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고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을 이끌었던 주인공이었으며 바울 사도 이후 가장 위대한 전도자,설교자의 황태자로 불릴 만큼 시공을 초월하여 추앙 받는 가장 훌륭한 부흥 운동 지도자였다.

휘트필드의 고향 영국 글로스터는 그의 체취로 가득했다. 비텐베르크가 루터의 도시,제네바가 칼뱅의 도시였다면 글로스터는 조지 휘트필드의 도시였다. 그가 태어난 집이 있는 그곳에는 그가 세례와 안수를 받고 처음 설교했던 고향 글루스터 교회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국 여러 곳을 방문하였지만 이렇게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도 드물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설교자의 황태자,영국과 미국에서 복음전도,아동 보호와 교육 분야의 개척자,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동료 조지 휘트필드는 크립트 스쿨을 다녔고 1736년 6월27일 본 교회에서 그의 설교사역을 시작했다”는 기념벽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고향 교회 설교 강단 옆에는 “조지 휘트필드는 글로스터 사람이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고향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였는가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듯했다. 고향 교회 강단에는 휘트필드가 첫 설교를 했다는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270년 전 휘트필드가 외쳤던 그 강단에 올라가 불꽃 튀기는 그의 설교 모습을 연상하며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고향에서 설교 사역을 펼친 지 3년 후 1739년 휘트필드는 옥외설교를 시작했다. 그가 외칠 때마다 수많은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운집했다. 브리스틀에 있는 핸엄 마운트(Hanham Mount)에서는 그가 외칠 때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휘트필드와 그곳에 모인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회심을 경험,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1740년 두번째 미국을 방문한 휘트필드는 약관 25세에 조지아에 보육원을 설립하고 미 전역을 돌면서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했다. 휘트필드의 순회전도는 미국 1차 대각성 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기간 조너선 에드워즈가 시무하는 노샘프턴 교회에서 능력의 설교를 통해 놀라운 부흥의 불을 지핀 것도 휘트필드였다. 1740년 10월18일 토요일 휘트필드의 일기에는 그날 그가 외친 설교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오후 4시에 에드워즈의 회중에게 설교를 했다. 나는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했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다. 회중 가운데 메마른 눈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주일 오전예배와 오후예배 때 성령의 역사는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에드워즈는 휘트필드의 설교를 듣는 동안 내내 흐느껴 울었고 교인들도 같은 감동을 받았다. “설교 때마다 교인들은 전에 없이 녹아내렸다. 거의 온 교인들이 설교 시간 내내 울고 있었다.” 휘트필드가 다녀간 후 노샘프턴 교회에 4개 모임이 너무도 은혜롭게 진행되었고 교인들이 첫사랑을 회복했다. 노샘프턴의 영적 각성은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역사 중 가장 강력한 부흥 운동을 태동시켰다.

휘트필드가 얼마나 능력 있게 설교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휘필트드의 설교를 듣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보육원 기금 마련에 처음엔 동전 몇 푼을 기부하기로 마음이 움직였으나 설교 중반쯤에 이르러서는 은전을,그리고 마지막 휘필트드의 설교에 일격을 당한 후에는 자신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 헌금했다.

그의 설교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의 거장 새뮤얼 데이비스와 길버트 테넨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가서 몰래 조지 휘트필드의 설교를 들은 후 이렇게 증언했다. “그 사고의 구성과 배열에 있어서 그의 설교는 매우 빈약했고 결함이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설교였다. 하지만 그 설교에 수반된 기름 부음은 너무도 놀라워서 은혜로운 감화를 받기 위해 대서양의 무서운 파선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어둠과 죄악성을 얼마나 잘 들춰냈던지 사람들은 겁을 먹고 놀랐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고뇌를 느끼지 않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설교를 통해 영국 브리스틀 글로스터 일대에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휘트필드의 설교를 더욱 능력 있게 만들어 준 것은 자신은 끝없이 낮추고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을 높이고 동료를 존중한 거룩한 성품이었다. 한번은 감리교 운동으로 웨슬리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여긴 휘트필드를 따르는 사람이 그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웨슬리를 볼 수 없겠지요?” 그러자 휘트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올시다! 그는 너무 주님 가까이 있고 우리는 거기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웨슬리를 볼 수조차 없을 것이오.”

일생 동안 변함없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휘트필드,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설교를 외치며 근대 부흥운동의 불을 지폈던 휘트필드는 22세에 부름을 받아 55세 때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구하며 자신의 온 생애를 불태웠다. 그는 비록 웨슬리만큼 큰 평가를 받지 못했고 웨슬리처럼 한 교단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근대 부흥 운동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가셨겠지만 아마도 수 세기 동안 그렇게 강력한 부흥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1) 휘트필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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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휘트필드는 영국 글로스터의 벨인(Bell Inn)에서 중산층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18세 되던 1732년 11월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룩 칼리지에 진학,홀리클럽 멤버가 되었다.

학문적 열등감과 사회적 열등감 때문에 활발한 교우관계를 갖지 못하고 한없이 움츠려 있던 휘트필드에게 홀리클럽 회원과의 만남은 새로운 기회였다. 옥스퍼드 재학 중 웨슬리 형제와 함께 홀리클럽에 참여하며 거룩한 신앙의 삶을 추구하던 휘트필드는 1735년 3월 뚜렷한 회심을 경험했다. 죄 용서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이 그를 온전히 지배하기 시작했다. 1736년 대학을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후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다. 고향 글로스터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736년 6월27일 고향 교회에서 그가 외쳤던 첫 설교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적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휘트필드는 1736년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난 후 177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3년 동안 복음에 불타는 가슴을 안고 하루에 3∼4회 설교를 했다.

그동안에 휘트필드는 영국 전역을 누볐고 웨일스를 자주 방문했으며 스코틀랜드를 5회,아일랜드도 두 차례나 방문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이들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무려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하여 뉴햄프셔부터 남부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혼을 잠에서 깨웠다. 웨슬리보다 더 뛰어난 영성을 지닌데다 연기력이 뛰어나고 우아하며 열정적이었던 휘트필드의 설교에 사람들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게다가 사려 깊고 심오한 칼뱅주의적 성경 해석에 기초한 그의 설교는 그의 영성을 한층 더 고양시켜주었다. 그가 외친 말씀의 핵심은 “당신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외침이 수많은 심령들을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만들었고 나아가 미국 1차 대각성 운동을 발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2) 웨슬리 회심이 부흥 불지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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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조지아 주에서 돌아온 1738년 5월21일 올더스게이트가 모라비안 교회 집회에 참석한 존 웨슬리는 그날 놀랍고도 특별한 영적 회심을 경험했다.

누군가가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서문을 읽어줄 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던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을 경험했으며 그가 나의 죄,심지어 나 자신을 용서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이 사건은 웨슬리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주었다. 어느 감리교회 역사가 말대로 웨슬리 복음주의 부흥과 루터의 종교 개혁이 만난 것이다 .

회심한 지 얼마 후 웨슬리는 홀리클럽 동료 조지 휘트필드의 부탁을 받고 브리스톨 근교 킹스우드로에서 첫 옥외 설교를 시작했다. 옥외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관 때문이었는지 1739년 3월31일(토) 웨슬리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나는 낯선 설교 방식으로 처음에는 좀 어색했다.” 하지만 첫 설교 산상수훈을 외친 후 곧 그의 시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옥외 설교가 성경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웨슬리는 주저하지 않고 모여드는 군중을 향해 담대히 설교했고 설교를 들은 무리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1주일 후 자신의 일기에 기술한 대로 웨슬리는 킹스우드 한함마운트에 모인 1500명에게 설교했다. 주일 아침에는 무려 5000∼6000명이나 되는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영국 사회와 문화는 물론 세계의 역사를 바꾼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2) 존 웨슬리와 감리교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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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과 견줄 수 있는 강력한 감리교 부흥운동이 영국에서도 일어났다. 이 부흥 운동이 영국의 사회와 문화,종교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부흥을 이끈 주역은 감리교 운동의 지도자 존 웨슬리(1703∼91)였다. 그는 필립 샤프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등과 견줬을 만큼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영국은 웨슬리의 나라로 불릴 만큼 거의 3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런던을 비롯하여 곳곳에 존 웨슬리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의 생전의 위치 때문인지,그를 따르는 이들의 노력 때문인지 몰라도 웨슬리의 체취를 영국 전역에서 느낄 수 있다. 웨슬리가 다녔던 명문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옥스퍼드의 홀리클럽,첫 사역을 했던 브리스톨의 감리교회,그가 노방 설교를 했던 한함마운트,그리고 마지막 사역을 했던 런던 감리교회에 이르기까지 웨슬리와 감리교 부흥의 유산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영국국교회를 상징하는 성 바울교회 안에 웨슬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그가 마지막 사역을 했던 런던의 웨슬리 기념교회와 그가 극적으로 회심을 경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였다. 시티가 49번지에 위치한 웨슬리 기념교회에 들어서자 웨슬리 동상이 입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웨슬리 동상 오른쪽에는 웨슬리가 살았던 집이 있었고 웨슬리가 사역하였던 교회 안에 들어서자 그의 체취가 가득 풍겨났다. 기념교회는 2층 구조로 청중이 강단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다. 나무로 된 의자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교회 의자였다. 다만 오래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웨슬리가 사용하던 설교 강단도 그대로 잘 보존돼 있었다. 그 강단에서 웨슬리가 외치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그가 강단에서 두 손을 불끈 쥐고 영국 교회의 부흥을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교회 구석구석을 둘러본 뒤 기념교회 지하에 마련된 웨슬리 박물관으로 내려갔다.

박물관은 웨슬리의 사역과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고 웨슬리의 강대상,초상화,그가 앉아서 설교했던 의자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웨슬리 기념교회 바로 옆에는 그가 살았던 집이 놀랍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웨슬리 형제가 사용하던 지팡이 의류 등 개인 소장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이어 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게이트가를 찾아갔지만 전혀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웨슬리가 회심을 경험한 모라비안 교회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올더스게이트가를 알리는 표지판만 말없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정신없이 그 거리를 거닐었다. 웨슬리가 모라비안 교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을 경험했던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 역사적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 웨슬리를 만난 느낌이었다.

감리교 부흥이 시작된 킹스우드의 한함마운트에는 웨슬리가 남긴 명언 “세계는 나의 교구다”는 말이 생생하고 또렷하게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1주일 전 방문했던 런던의 웨슬리 기념교회의 웨슬리 동상 밑에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와 함께 나의 뇌리에는 270여년 전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모습과 웨슬리가 불타는 열정으로 피를 토하며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킹스우드 한함마운트에서 시작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은 웨슬리가 가는 곳마다 계속되었다. 처음 브리스톨과 런던을 중심으로 시작된 부흥은 무어필드와 케닝턴,그의 고향 엡워드까지 이어졌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백명에서부터 1만5000명에 이르는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복음에 목말라 있던 무리들은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으며 웨슬리의 설교에 놀랍게 반응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는 통회의 소리,죄 사함의 감격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로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웨슬리가 패역한 세대를 향해 죄의 관영과 개인과 공동체,사회의 타락을 지적하자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강도가 어찌나 강했던지 사람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다.

이후 웨슬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동반된 설교,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으로 외치는 설교,죄의 각성과 회심의 역사가 이어졌다. 웨슬리 듀웰의 말대로 웨슬리 부흥은 성령 충만한 설교에서 시작된 ‘설교의 부흥’이었다. 웨슬리는 1735년 원고 없이 설교를 시작한 이후 평생 성령에 의존하여 설교했고 거의 모든 설교에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나서 그 재능을 갈고 닦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슴에 설교하셨던 것이다.

웨슬리의 설교가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우고 강력한 도전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했으며 말을 타고 다니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일과에서 손을 떼고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씀과 경건,기도가 어우러진 신앙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웨슬리의 불타는 가슴이 평신도 순회 전도자들에게도 옮겨붙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의 역사적 현장을 확인하고 영국을 떠나면서 웨슬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왠지 무거웠다. 그 화려했던 감리교의 영광과 쇠락해가는 오늘날의 영국 감리교의 모습이 너무 대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주여,제2,제3의 웨슬리를 보내셔서 감리교의 옛 영광을 속히 회복시켜 주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3) 칼뱅주의 감리교협회

 

하웰 해리스는 부흥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되었으나 기성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기 위해 칼뱅주의 감리회를 웨일스 전역에 설립했다. 감리회를 지도하는 기본 방향은 분명했다. 그래서 “감리회 모든 회원은 반드시 영국 국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 그들은 1주일에 한 번 편한 장소에서 모여 서로 성결을 격려하고 도모한다. 논쟁적이고 유익하지 않은 일들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736년 말 빌드웰스 인근 베르노스 농가에서 첫 칼뱅주의 감리회를 조직했고 1739년 말까지 남웨일스 지역에 50개 이상의 감리회를 조직했다. 해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743년 1월5일 워터퍼드에서 첫 칼뱅주의 감리교협회가 결성되었다. 존 세닉,조지프 험프리스,존 포웰,윌리엄 윌리엄스,조지 휘트필드,대니얼 로랜드,하웰 해리스 등 7인은 웨일스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운동을 견인하는 주역이 되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3) 하웰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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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는 근대 영적 각성 운동의 진원지였다. 근대 칼뱅주의 영적 거장 로이드 존스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토머스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에서는 1740년대,1859년,1904년에 대부흥이 일어났다. 특히 1740년대 전후에 일어난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은 조너선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영국의 웨슬리 부흥운동,조지 휘트필드의 칼뱅주의 부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매우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인공은 하웰 해리스였다.

해리스가 세상을 뜬 지 200년이 됐던 1977년 로이드 존스는 해리스야말로 “기독교회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해리스만큼 18세기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운동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인물도 드물다. 해리스의 발자취를 찾아 웨일스의 트레베카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트레베카로 가는 길의 웨일스 풍경은 왠지 낯익었다. 넓은 구릉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진 웨일스 지역에는 울창한 숲 대신 1월임에도 초록색의 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그 초원에서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크고작은 구릉과 광활한 푸른 초원이 잿빛 하늘과 대비를 이루며 펼쳐진 웨일스의 시골 풍경은 이색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흩어져 있는 양들을 우리에 모으는 일에 숙련된 웨일스인들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도 강렬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웨일스 부흥을 설명하는 웨일스 부흥운동 연구의 권위자 에이비온 박사,웨일스복음주의신학교 학장 얼 데이비스 박사,교수 기파드 박사에게서 부흥을 사모하는 열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로이드 존스와 뜻을 같이 하며 수십년을 한결같이 웨일스 부흥을 위해 기도해온 웨일스 출신 신학자들이다. 18세기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한 칼뱅주의 감리교 후예들이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칼뱅주의 감리교 운동의 주역 하웰 해리스의 체취가 가득한 트레베카였다. 18세기 초 영적으로 침체된 웨일스에 놀라운 각성 운동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 해리스가 마지막 사역을 했던 탈가스 근처 트레페카 칼리지에는 해리스의 흔적이 아직도 짙게 배어 있었다. 하월 해리스는 1714년 트레베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773년 세상을 떴다. 트레베카에는 그가 태어난 고향,그가 다녔던 학교,그가 사역했던 학교에 이르기까지 해리스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해리스 기념판에는 “그의 능력이 충만한 설교는 수많은 영혼을 회심시킨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며 웨일스 전역에 신앙의 각성을 일으켰다”고 기술돼 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강대상과 기물들이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하웰 해리스는 웨일스의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인물이었다. 21세 되던 1935년 봄 갑자기 찾아온 그의 극적인 회심은 거대한 칼뱅주의 부흥 운동의 사실상의 출발점이었다. 이것은 그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학교 교사로 일하며 탈가스 교구 교회에 참석하던 1735년 봄 교구 목사가 광고 시간에 한 한마디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 “만일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면 기도하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하다면 죽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입니다.” 이 광고가 해리스의 잠자는 영혼을 깨웠다. 비록 죄된 생활 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해리스는 교구 목사의 그 한마디에 영적 가책을 느꼈다.

다음 주일 성찬식 예배에 참석한 그는 죄의식을 깨닫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 같은 현상은 5월25일 성령강림주일 성찬식 때까지 거의 2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이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은 그를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인도했다.

1735년 6월18일 해리스는 랭커스터 교회의 종탑 안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다가 또 한 번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갑자기 내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내 영혼 속에서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아바 아버지’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나는 그의 자녀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을 알았다.”

영적 각성은 강하고 깊었다.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해리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후 모든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순전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의 가슴은 복음으로 충만했고 은혜의 세계를 사모하는 열정이 그의 전인격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이후 해리스는 새벽 2시까지 취한 사람처럼 혼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도저히 반항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강력한 급류처럼 주께서 그를 압도하시는 것을 경험했다.

강력한 성령 임재와 충만을 경험한 해리스는 곧 로이드 존스가 표현한 대로 ‘불타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심령은 성령 충만을 경험한 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원 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삼킬 만큼 강렬했다. 구령의 열정으로 그의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고 성령 충만한 해리스가 외치는 설교는 놀라운 능력과 권능이 수반되었다.

그가 외치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임했다. 해리스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주께서 능력으로 임하셨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이제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우리집으로는 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말씀을 전할 때 큰 능력이 함께 임하여 그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1737년 하웰 데이비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해리스의 설교를 듣고 죄를 각성하고 회심을 경험했다. 윌리엄 윌리엄스도 1738년 탈가스 교회 뜰에서 하웰 해리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웨일스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 전파에 헌신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의 불길은 웨일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1750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웨일스에서는 화려했던 그 옛날의 영광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18세기 칼뱅주의 감리교 부흥을 이끌었던 다니엘 로랜드,하웰 해리스,윌리엄 윌리엄스가 섬기던 교회는 2세기 반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 보존돼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영광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토록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교회가 이토록 영적으로 메마를 수 있는 것인지 정말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는 웨일스에 다시 한 번 그 옛날의 영광이 재연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4) 스코틀랜드 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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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강도에 있어서는 19세기 아일랜드나 웨일스 부흥에 비견할 수 없지만 1839년 스코틀랜드에서도 부흥했다. 1859년 아일랜드와 웨일스 부흥이 미국의 기도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진행되었다면 스코틀랜드 부흥은 독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부흥의 시기도 1859년으로 대변되는 아일랜드와 웨일스의 부흥보다 20년이나 앞선 1839년이었다.

스코틀랜드 부흥은 성공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부으심이 동반된 전형적인 부흥이었다. 킬싯과 던디,퍼드에 집중된 이 부흥의 주역은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과 찰머스 번스(Chalmers Burns)였다.

우리는 맥체인의 부흥의 발자취를 찾아 던디로 향했다. 그가 사역했던 던디의 성 베드로 교회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시신은 교회 옆에 묻혀 있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 그가 사역했던 당시의 강대상과 의자 일부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성 베드로 자유교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데이비드 로버트슨 목사가 사역하고 있었다. 로버트슨 목사는 우리 일행에게 성 베드로 교회가 스케치된 우편엽서를 건넸다. 그 엽서 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던디 세인트스트리트에 소재한 성 베드로 교회는 1836년 건립되었다. 제1대 목회자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스코틀랜드가 지금까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설교자와 유능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이며 29세 때인 1843년 세상을 떴다.”

1836년 23세의 나이에 성 베드로 교회에 부임한 맥체인은 신?구약성경을 균형 있게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면서 논쟁적이기보다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성격의 메시지에 집중했다. 곧 맥체인의 리더십 아래 성 베드로 교회는 역동적인 교회로 바뀌었다. 그는 주일예배 외에 성경공부 시간을 가졌고 화요일 저녁에 청소년들에게 신앙교육을 실시했으며 목요일에는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던디에 놀라운 부흥이 임했던 1839년 2월에 이르러 맥체인의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인근 4000명의 주민 가운데 3000명이 교회에 출석했고 그 중 반이 성 베드로 교회 교인이었다. 매주일 1200명이 교회에 출석했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수였다.

이 놀라운 부흥의 비결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경건 생활에 있었다. 그는 매일 정기적으로 성경 말씀을 묵상했고 매일 6시30분에 일어나 2시간을 개인기도와 묵상으로 보냈으며 아침 8시30분부터 10시까지 가족과 아침기도회를 가졌다. 어느 날 그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얼굴을 아직 목도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 사역을 시작할 수 없다.” 마치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 그는 매년 그가 처음 부임했던 11월에는 이사야 61장 1∼3절 말씀,‘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를 가지고 설교했다.

맥체인의 능력 있는 목회 사역은 스코틀랜드 부흥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1839년 맥체인은 이스라엘 성지 여행을 떠나면서 번스에게 그동안 강단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선교사역을 준비하던 번스에게 멕체인의 요청은 스코틀랜드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였다. 1815년 출생,17세 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번스는 1834년 애버딘 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1839년 3월 강도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그 다음 달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다. 그의 첫 설교는 첫 설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우 힘이 있었고 능력으로 충만했다.

번스는 1839년 7월16일 아버지의 성찬식 집례를 돕기 위해 킬싯에 갔다가 월요일에 시편 110편 3절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때 회중이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며 죽은 사람들처럼 바닥에 쓰러지는 역사가 나타났다. 번스는 성령의 강권하심 속에 3주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집회를 계속 이끌었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강하게 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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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8일 수요일 던디로 돌아온 번스는 킬싯에서의 부흥이 던디에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 킬싯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킬싯에서의 부흥 소식은 이미 던디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번스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예배가 끝난 후 킬싯에서 일어난 일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남으라고 말했다. 약 100명이 남았다.

“갑자기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듯 모든 사람이 통회하기 시작했다. 다음 저녁 교회에 기도회가 있었다…많은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몇몇 사람은 절규하고 울부짖으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면서 바닥에 엎드러졌다.”

이 같은 역사는 그 후 수주간 매일 저녁 번스가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계속되었다. 성지 여행에서 맥체인이 돌아왔을 때 영적 각성은 더욱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부흥 현상은 인근 성 데이비드 교회와 힐타운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이 같은 집단적인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맥체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애버딘 노회에 부흥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39년 8월까지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거나 일반적인 움직임은 없었으나 킬싯에서 주의 사역이 시작된 후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들 가운데 놀랍게 임했다…1839년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다. 우리는 가버나움에서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그 이상으로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을 경험했다. 나는 스코틀랜드가 경험했던 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어느 나라가 부흥을 경험했는지 알 수 없다.”

지역 교회 성도들이 연합으로 참여하는 거대한 성찬식이 거행되었고 그곳에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다. 이 부흥은 스코틀랜드 에반젤리컬 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감리교와 독립교회도 동참했다. 1839년 시작된 이 부흥은 맥체인이 세상을 떠나던 184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중심에 성 베드로 교회가 있었다. 성 베드로 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영향은 던디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이후 던디는 종교개혁자 존 칼뱅이 제네바를 거룩한 도성으로 바꾼 것에 비견하여 북부의 제네바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후 맥체인과 번스는 1839년 스코틀랜드 부흥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1세기 반이 훨씬 지난 지금 스코틀랜드 던디에서는 옛날의 영광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하나의 희망을 보았다. 40대 초반의 젊은 스코틀랜드 목회자 로버트슨이 그 영광을 재연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1992년 부임 당시 7명이었던 교회가 현재는 1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한국 교회 실정에 비추어보면 매우 미약하지만 스코틀랜드 상황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이 메마른 스코틀랜드에 1839년 맥체인의 영광을 재연하는 부흥의 불씨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4) 혁신적 목회자 맥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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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체인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불꽃처럼 살다간 부흥운동 지도자였다. 1813년 5월21일 영국 에든버러 더블린가에서 태어난 맥체인은 18세 되던 1831년 11월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조너선 에드워즈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전기를 읽으며 영적 훈련과 신학 훈련의 균형을 추구한 맥체인은 신학을 시작한지 정확히 4년 후 1935년 11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맥체인은 이듬해 스코틀랜드 던디로 갔다. 그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스코틀랜드의 주요 도시들이 그랬던 것처럼 던디 역시 급속한 산업화,교통 발달,인구 증가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맥체인이 사역을 시작할 즈음 던디는 사회적 조건,교육과 문화,정치적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맥체인은 교회 인근 3400명의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완전원고를 작성해서 설교하는 일반 목회자들과 달리 메시지의 핵심을 정리,암기한 후 교인들의 눈에 맞춰 설교했다.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한 그의 설교는 놀라운 능력을 수반해 청중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5) 북아일랜드 아호힐·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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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북아일랜드에서 세기적인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북아일랜드 부흥이 일어났던 1859년은 윌리엄 깁슨이 ‘은혜의 해’(the Year of Grace)로 명명했을 만큼 전설적이다. 북아일랜드 얼스터의 작은 마을 켈스에서 시작된 이 부흥은 1859년 6월29일 4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벨파스트 보타니 가든에서 열린 집회에서 절정에 달했다. 부흥의 불길은 놀랍게 곧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59년 부흥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 북아일랜드로 향했다. 부흥이 가장 활발하게 시작된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역. 이 중에서도 얼스터 부흥의 진원지 볼리메나의 아호힐과 켈스에서 직접 1859년 북아일랜드 부흥을 확인하고 싶었다. 한 세기를 대변하는 부흥의 현장을 찾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이지젯 항공기에 오른 것은 지난 1월 중순이었다. 역사적 현장을 찾아가는 나의 마음은 무척 설렜다.

우리 일행이 단숨에 달려간 곳은 1859년 북아일랜드 부흥의 진원지 얼스터의 켈스였다. 미국 전역에서 기도회 운동을 통해 부흥이 일고 있던 1857년 9월 이에 자극 받은 4명의 아일랜드 청년들이 얼스터 엔크림 카운티,코너의 켈스라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매주 기도회를 가졌다. 이들은 아일랜드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역과 벨파스트 전역을 불태운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우리 일행이 그곳을 찾아갔을 때 아일랜드 부흥의 불씨가 된 학교 건물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놀랍게도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건물에 살고 있는 60대 여인은 우리에게 1859년 북아일랜드 부흥 이야기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며 4명의 젊은이 기도가 아일랜드 부흥을 위해 어떻게 쓰임 받았는지를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비록 한 세기 반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일랜드 부흥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던 젊은이들의 기도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나의 심장은 박동하기 시작했다.

시골 학교에서 시작된 이들 젊은이들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기도의 불길은 곧 얼스터의 켈스와 아호힐 장로교회로 옮겨붙었고 아일랜드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는 놀라운 속도로 주변으로 확산되어 1858년 말엽에 이르러 교회 수가 100개에 달했다. 놀라운 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놀라운 부흥의 현장,얼스터 지역 켈스 장로교회와 아호힐 제일교회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켈스 장로교회 보이드(W B Boyd) 담임목사는 주일에 세 번 모임을 가지며 수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 정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어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역 교회는 영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신앙이 살아숨쉬고 있었다.

아호힐 제일교회 커크(A L Kirk) 담임목사의 안내로 현장을 둘러보면서 1859년 북아일랜드 부흥이 얼마나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집회 기간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2층을 받치던 교회 기둥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약간 내려앉았다. 기둥이 바닥에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의 교회에 일어난 부흥을 설명하는 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교회는 영적으로 살아 있었다. 아호힐 제일교회에는 지금도 400명의 교인이 모였다. 우리 관점에서 규모는 별로 크지 않지만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통틀어 이만한 규모의 교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별로 크지 않은 북아일랜드 시골 도시에 이만한 규모의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구나 주변에 이 같은 규모의 교회가 세 곳이 더 있었다. 현재 이들 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만 합쳐도 1200명을 넘었다. 도시 인구 절대 다수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일 오전예배와 오후예배,수요기도회가 있었고 주중에는 성경공부도 진행되었다. 영적으로 쓰러져 가는 유럽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왜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지역의 교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커크 목사가 들려준 답은 예상 외로 간단했다. 이곳에서는 예배가 살아 있고,복음이 생명력 있게 외쳐지고 있으며,신학적 입장이 분명하다는 것.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그대로 견지되고 있었고 지금도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가르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와의 관계를 묻자 커크 목사는 “너무 자유주의로 흐르고 말았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직도 서구에 이 같은 교회가 있다는 사실에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존 스타트가 일생 동안 사역했던 교회(All Soul’s Church) 근처 런던 시내 한복판을 막 지나는데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확인해보니 영적으로 죽어가는 런던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하는 얼스터 지역 교회에서 온 목회자였다. 나는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오 주님! 1859년 얼스터에 임하신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영국 전역을 다시 뒤흔드는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5) 아호힐 교회의 성령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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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3월14일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얼스터 지역 볼리메나 아호힐 교회에서 열린 부흥 집회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큰 소리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그 현장에 있던 깁슨은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때의 강력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의 현상을 연상케 했다.

부흥은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순식간에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역은 물론 벨파스트와 북아일랜드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1만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벨파스트 지역의 옥외 집회에서는 목회자들이 강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회중과 함께 새벽 2시까지 통회하며 기도했다. 더블린에서 열린 아일랜드 장로교 총회에서는 부흥을 경험한 목회자들의 간증이 계속되자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교회로 돌아가 기도회를 열려고 하는 바람에 총회를 3개월 동안 연기해야 했다.

1859년 6월로 접어들자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독립교회 침례교회를 초월한 연합집회가 매 주일 열렸고, 벨파스트 보타니 가든에서 4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일랜드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 부흥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남녀노소,학식 유무,빈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였다. 교회마다 회심자들로 가득 넘쳤고 영적 및 도덕적 수준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매춘업이 사라졌고 소송이 줄어들었으며 은행 저축이 늘어났고 정치적 시위가 중단되었다. 알코올 중독,범죄 행위,불경스러운 언사,불화와 반목,사기?부정직한 행위,가정 불화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신자들은 새로운 능력을 체험했고 사람들은 근면해져 가난이 눈에 띄게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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