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16-20

영국신사77 2016. 4. 13. 19:33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16-20

 

 

총신 신대원 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Ⅳ| ……──大名 지리
조회 50 | 07.05.17 14:29 http://cafe.daum.net/dm3179/PZ0/501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6) 1859년 웨일스 부흥 운동


1859년 북아일랜드 얼스터에 이어 웨일스 지역에서도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발흥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줄기차게 영적 각성을 경험한 웨일스에 또다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부흥은 없었다”고 토머스 필립스는 증언했다.

1859년 웨일스 부흥의 전문가 필립스의 말대로 이 부흥은 1857년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기도운동을 통한 부흥운동과 아일랜드 얼스터 부흥운동에 적지 않은 자극과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웨일스 부흥운동의 포문을 연 사람은 감리교 목사 험프리 존스와 칼뱅주의 감리교 목사 데이비드 몰간(1814∼83)이었다. 27세의 젊은 목사 존스는 미국에서 영적 각성 운동을 경험한 후 자신의 조국에도 이와 같은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웨일스로 돌아왔다.

존스는 1858년 9월부터 5주 동안 카디건셔(Cardiganshire) 스파티 스트위트에 있는 교회에서 오전·오후·저녁예배 때 설교를 통해 영적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자 곧 교회가 깨어나고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체 주민이 불과 76명밖에 되지 않는 시골이었지만 존스의 사역을 통해 1858년 10월까지 6개월 동안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칼뱅주의 감리교 목사 몰간이 존스를 초청해 교제하면서 웨일스의 부흥이야말로 가장 긴요하고 시급한 과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둘은 185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자신들의 교회에서 번갈아가며 2∼3개월 동안 기도회를 열었다. 참석자 중 200명이 회심했다. 첫 6개월 동안 이들의 노력으로 카디건셔에서만 9000명이 주께 돌아왔다. 1859년에 접어들면서 존스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몰간이 부흥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우리는 웨일스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에드워즈 목사의 안내를 받으며 몰간의 부흥의 흔적을 찾아 그가 사역했던 스파티 스트위트로 향했다. 스파트 스트위트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한국의 산골을 지나는 것 같았다. 그가 잠들어 있는 무덤,그가 오랫동안 목회하던 첫 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스파트 스트위트 지역을 알리는 안내판에는 1859년의 부흥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다.

“1859년 감리교 대부흥 운동을 점화시킨 데이비드 몰간이 이 마을 교회 뜰에 묻혀 있다. 데블 브리지의 보드콜 밀에서 태어난 몰간은 이 마을 목수였고 건축도급업자였으며 매스글라스(Maesglas) 교회 목사였다. 1858년 그는 영향력 있는 클랜진베린의 감리교 설교자 험프리 존스에 의해 영감을 받고 전도여행에 나서서 웨일스 전역을 누볐다. 그는 3만6000명을 회심시켰다고 한다. 1859년 웨일스 부흥은 그후 몰간의 이름과 긴밀한 관련을 맺어왔다.”

몰간과 1859년 부흥운동의 관계를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몰간을 통해 1859년 8월 남웨일스의 많은 교회가 부흥운동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스파트 스트위트에서 사역했던 조지프 몰간(Joseph Morgan)은 “목사가 설교하는 동안 그 어떤 찬양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다만 조용히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뜨거운 ‘아멘’ 소리만 회중 여기저기서 들려왔다”고 증언했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혹은 기도회나 성찬식이 거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기쁨이 충만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당시 ‘부흥’(Revival)지가 보도한 것처럼 은혜의 역사는 아일랜드에서 나타났던 현상과 유사했다. 어떤 사람은 비명을 지르고 부르짖으면서 땅에 쓰러졌고 어떤 이들은 한두 시간씩 기도에 몰입했다. 1859년 아이니스고(Ynusgau)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를 목도한 에번스 존스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 땅은 목말라 있었고 하늘은 은혜를 퍼부어주셨다…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예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다.”

1859년 웨일스 부흥을 경험한 이들은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인생으로 거듭났다. 부흥이 임하자 술주정꾼 욕쟁이 도박꾼은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기도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웨일스 교회는 다시 한 번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1858년 10월에서 1860년 10월까지 불과 2년 사이에 9만명이 새로 교회로 영입됐다. 전체 111만명의 웨일스 인구 중에서 9만명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부흥의 현장에 서 있었던 한 목회자의 증언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1세기 동안 이루신 것보다 더 많은 일을 지난 2주 동안 이곳에서 이루어주셨던 것이다.

아쉽게도 1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 1859년 부흥의 생명력은 웨일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이곳이 그토록 줄기차게 부흥을 경험한 지역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스파트 스트위트를 찾았을 때 1874년에 건축된 제2 매스글라스 예배당은 철거됐고 데이비드 몰간이 사역했던 그 영광스러운 첫 교회마저 개인주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수리 중이었다. 오 주님! 웨일스에 1859년의 영광을 다시 허락해주옵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6) 웨일스 전역에 성령 임재

1859년 3월 트레베카 대학에서 열린 성찬식 때 학생들이 강력한 성령 임재를 경험했다. 두세 명의 학생이 자신들의 교회에서 은혜를 받더니 얼마 후 학교 성찬식에 참석한 학생들이 모두 큰 은혜를 경험했다. 참석자들은 성찬식이 끝났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찬송과 중보기도를 드렸다. 북웨일스 산악지대 슬레이트 채석장에서는 채석장의 일꾼 500명이 점심 식사 후 모두 산꼭대기로 올라가 흐느끼며 기도했다.

1859년 웨일스 부흥운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진행된 기도의 부흥이었다. 웨일스 전역에서 연합기도회가 열렸으며 열기가 매우 달아올랐다. 부흥이 임하자 성령의 임재 속에 어린 아이 청소년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도회 시간에 흐느껴 울었다. 기도의 영이 광부 목회자 젊은이들뿐 아니라 채석장의 일꾼 등 모든 사람에 임했다. 어른들은 직장에서,아이들은 가정 집 학교 길거리 등에서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어느 공립학교에서는 교장이 기도회로 조회를 시작했는데 기도의 영이 그들 가운데 임해 선생과 학생 모두가 정오까지 계속하는 기도하는 일도 벌어졌다.

웨일스 전역에서 연일 기도회가 열렸고 그럴 때마다 부흥의 역사가 기도의 영과 더불어 놀랍게 임했다. 1859년 2월 교파를 초월해 침례교 독립교회 웨슬리안 감리교 국교회뿐 아니라 칼뱅주의 감리교회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연합기도회에서 여호와께서는 마치 오순절 날처럼 하늘에서 자신의 영을 기쁘게 쏟아부으셨다.

남웨일스 카디켄과 카마덴에서도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국교회 독립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는 물론 칼뱅주의 감리교회를 비롯,웨일스의 모든 교회가 부흥을 경험했다
.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7) 수많은 영혼 깨운 설교

스펄전이 서는 곳마다 잠자는 영혼들이 스펄전의 메시지를 듣고 깨어났다. 1859년 3월1일 휘필드 교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해 7월10일에는 1만 명이,다시 그달 20일 열린 첫 웨일스 집회에서는 9000에서 1만 명이 노천에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

스펄전이 한 세기를 넘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는 원동력은 복음에 대한 불타는 열정,어거스틴과 칼뱅,청교도들과 휘필드를 통해 계승된 칼뱅주의 부흥운동의 복고에 있었다. 스펄전은 “칼뱅이 전파했던 그 옛 진리,그리고 어거스틴이 전파했던 그 옛 진리는 나 자신이 오늘날 전파해야 할 바로 그 진리”라고 외쳤다. 스펄전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면전에 계시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동기”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스펄전의 설교의 주제는 매우 다양했지만 그 중심은 항상 구원,그리스도,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목회의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대부분 설교 사역은 청중을 구원하기 위해 의도된다… 우리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영광은 성도들의 교육과 죄인들의 구원을 추구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한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로 오랫동안 목회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쳐왔던 크리웰은 스펄전을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사도 바울은 영감된 말씀을 기록했다. 그리고 찰스 스펄전은 내 가슴에 가장 풍요한 의미로 그것을 해석했다. 하늘 나라에 가서 나는 주님과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만나 본 다음,스펄전을 만나 보기를 원한다. 내게 있어 그는 지금까지 실존했던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7) 스펄전의 케임브리지


만일 내가 일천 번의 생을 살 수 있다면 나는 그 일천 번의 생 모두를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보답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고 느낍니다.” 19세기 말 칼뱅주의 부흥을 견인한 찰스 스펄전(1834∼1892)의 고백이다. 그의 가슴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가 휘필드 이후 ‘설교의 황태자’라고 평가받은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1859년 1월4일 화요일 저녁 24세의 스펄전은 엑스터 홀에서 ‘신앙 전파’(De Propaganda Fide)라는 주제로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했다. “지금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만약 성령께서 이 밤에 여기에 모인 이들 위에 그리고 모든 회중 위에 임하신다면 얼마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 설교는 청중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그가 부흥의 필요성을 호소한 지 얼마 후인 1859년 봄 광범위한 영적각성운동이 북아일랜드와 웨일스에서 시작됐다. 그해 여름엔 부흥이 북아일랜드 얼스터에서 스코틀랜드로 번져나갔다. 메마른 런던에도 부흥의 기운이 돌고 있었다. 1859년 말 스펄전은 “주의 임재로부터 도래한 갱신의 시대가 드디어 우리나라에 임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스펄전은 이 땅의 교회가 다시 한 번 거룩한 꿈을 꾸도록 도전을 주었다. 그가 역사 속에 사라진 지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의 영향력은 사라질 줄 모른다. 헬뮤트 틸리케는 이에 대해 “이 옛날의 런던에 나타났던 (불붙은 떨기나무)는 지금도 계속 타고 있으며 다 타버렸다는 징후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무디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칼뱅주의 영적각성운동을 견인한 스펄전은 1834년 에섹스 켈베돈에서 출생했다. 그는 1850년 침례교인이 되었고, 그해 케임브리지에서 멀지 않은 한 작은 집에서 첫 설교를 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케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 침례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그가 일생 동안 사역했던 중심 무대는 케임브리지와 런던이었다.

1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케임브리지와 런던에는 스펄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스펄전이 16세 때 성령 충만한 가운데 가득 모인 회중에게 첫 설교를 한 케임브리지 근처 한 작은 집에는 어느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 집 벽에는 ‘1850년 스펄전이 첫 설교를 한 장소’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비록 2년 동안이지만 스펄전이 첫 사역을 했던 워터비치 침례교회에는 스펄전의 향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워터비치 교회는 영국의 여느 교회와 달리 성도들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었다. 교회 사무실에는 스펄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교회 2층 한 곳에는 스펄전이 목회할 때 사용하던 성경,찬송가,그의 저서 여러 권이 쌓여 있었다. 책을 펼치자 그 안에 스펄전의 사인이 있었다.

1854년 4월 스펄전은 런던에 있는 유명한 뉴 팍 스트리트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 받았다. 스펄전이 처음 부임했을 때 1200명이 모일 수 있는 규모의 교회에 단지 200명 미만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부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교회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다. 1855년 2월 교회는 2500∼3000명 규모의 엑스터 홀로 옮겨야 했다. 그 공간도 곧 비좁아졌다. 이어 마련한 예배 공간 가든 뮤직 홀에는 1만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공간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 교회가 건축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다. 이 때 스펄전은 매주일 10번의 메시지를 외치며 메마른 심령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얼마 되지 않아 영국 전역,아일랜드와 웨일스로 번져나갔다. 1859년까지 스펄전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영국에서 설교했다.

1859년 부흥의 해에 스펄전은 가든 뮤직 홀에서 에스겔 36장 27절에 근거한 ‘성령 사역의 필요성’을 비롯한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일련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핵심은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의 사역 없이는 구원도,성도의 삶도,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스펄전이 일생 동안 사역했던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여전히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겉에서 볼 때도 규모가 대단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 복도에 스펄전의 대형 초상화가 한 쪽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 세기의 세월이 흘렀어도 스펄전의 체취가 느껴졌다. 본당은 한 번에 수천 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본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 넓은 교회당을 가득 메운 청중이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1세기를 넘는 지금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선명한 메시지를 통해 메마른 심령에 부흥의 불을 지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라고 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교회에서 일관되게 실천했다. 위대한 설교는 인간적인 기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8) 1904년을 덮은 부흥의 힘

1904년 10월31일. 저녁집회 이후 로버츠가 인도하는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다. 그해 11월1일 모리아의 지교회 피스가 저녁집회,그 다음날 열린 인근 고르세이논의 리바누스 교회 저녁집회에는 수많은 청중이 로버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첫째,만약 지금까지 고백하지 않은 과거의 죄들이 있다면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없다. 둘째,만약 우리의 삶에 어떤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셋째,성령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켜야 한다. 넷째,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이 있어야 한다.”

리바누스 교회 저녁집회는 ‘굉장한 집회’였다. 11월10일 카디프의 웨스턴 메일지는 “놀라운 종교적 부흥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며 흥분했다.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고백됐고,묵은 빚이 청산됐으며,극장이 문을 닫아야 했고,광부는 물론 무신론자들이 회심하고,술주정뱅이 도둑 사기꾼들이 구원을 받았고,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다.

11월말과 12월에 접어들어 부흥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로버츠가 남웨일스에서 활약하는 동안 북웨일스에서는 20세 된 교사 에번스 로이드 존스가,뉴키의 남쪽 도시에서는 조지프 젠킨스와 중년의 농부 부인 메리 존스가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고 있었다.

1904년 웨일스 부흥에서 찬양은 말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버츠가 인도하는 집회의 4분의 3이 찬양이었다. 부흥이 임한 곳마다 마치 회중 전체가 천사들의 찬양대를 결성한 것처럼 아름다운 찬양이 울려퍼졌다.

부흥이 진행되면서 불과 5주만에 2만명이 주께 돌아왔다. 1년 사이에 칼뱅주의 감리교회에 2만4000명이 새로 영입되었고 웨슬리 교회에는 4000명이 증가했으며 회중교회에는 2만6500명의 교인이 늘어났다. 웨일스 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1년 동안 늘어난 교인 수는 8만3936명이었다. 웨일스 전체 인구가 100만명을 약간 상회하던 상황에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부흥의 영향력은 단순히 수적 증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부흥은 개인의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각성과 사회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술주정뱅이와 도박사들이 악습에서 벗어났고 가정불화가 치유되었으며 술집이 텅텅 비었다. 글러모건에서 음주와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사람이 1903년에는 1만528명이었으나 1906년에는 5490명으로 줄어들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8) 웨일스 제2부흥

17세기부터 영적 각성 운동을 여러 차례 경험한 웨일스 지역에 1904년 또 다시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이 부흥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가장 강력한 성령의 현시 가운데 하나였다.

부흥이 도래하기 직전 웨일스에는 다윈의 진화론,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인본주의적 심리학,회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상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 시대 의식 있는 웨일스인은 “부흥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일”이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1903년 웨일스 클랜드린도드 웰스에서 열린 웨일스 첫 케직사경회와 웨일스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모임,뉴키의 칼뱅주의 감리교회에 다니던 플로리 에번스라는 한 소녀의 간증이 1904년 웨일스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지프 젠킨스,세스 조수아 같은 부흥에 목마른 지도자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웨일스 북부와 남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잠자던 웨일스의 영혼들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26세의 젊은 청년 이반 로버츠가 1904년 부흥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모리아 칼뱅주의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부흥을 꿈꾸던 로버츠는 그해 가을 특별한 환상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웨일스 남서부에 위치한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의 예비신학교에 진학했다. 1904년 9월29일 목요일 로버츠는 18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칼뱅주의 감리교 전진운동의 루이스와 세스 조수아가 인도하는 블래나너크 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경험하고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쓰임받기 시작했다. 이날 ‘심판 날의 무시무시한 공포감,울부짖음,자신을 압도하는 구원의 은총,평화의 파고’가 그의 가슴에 흘러넘쳤고 웨일스 전역을 돌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그후 로버츠의 생애는 웨일스 부흥을 위해 바쳐졌다. 1904년 10월31일 월요일 저녁,그가 생전 처음 인도한 고향 모리아 채플 기도회는 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참석한 17명 모두가 주님을 영접했다.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이다.

1904년 웨일스 부흥의 흔적을 찾아 웨일스를 방문했을 때 로버츠가 출석했던 고향 모리아 교회는 100년의 세월 속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교회 입구에는 로버츠의 상이 새겨져 있었고 교회 뜰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묻혀 있었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1904년 웨일스 부흥운동 사진 자료와 책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로버츠가 은혜 받은 블래나너크 예배당 역시 10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로버츠가 은혜를 받은 자리에는 그의 회심을 기념하는 표지가 붙어 있었으며 지금도 로버츠가 자신을 굴복시켜 달라고 성령께 간구하는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어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해안도시 뉴키였다. 1904년 웨일스 부흥을 촉발시킨 플로리 에번스의 간증, 1904년 웨일스 부흥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프 젠킨스가 시무하던 뉴키 장로교회는 아름다운 해변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반 로버츠가 다녔던 예비신학교가 위치한 뉴캐슬 에믈린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영적 물줄기가 줄기차게 흘러내렸던 뉴캐슬 에믈린 거리를 걸으며 1세기 전 웨일스 부흥을 꿈꾸며 이 거리를 활보했을 로버츠를 생각했다.

1904년 웨일스 부흥 소식이 전 세계로 타전되자 부흥의 현장을 직접 목도하기 위해 독일과 미국,영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영국 노르웨이 프랑스 스페인 아프리카 등지에서 기도를 요청하는 편지가 답지했다. 부흥의 불길은 아일랜드 인도 마다가스카르 유럽 아프리카 호주 미국 한국 중국에까지 이어졌다.

이런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1904년 웨일스 부흥에 약점이 있었다. 그 이전의 부흥에 비해 주관주의적 경향,감정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에이비온 에번스가 지적한 대로 확실히 로버츠의 연속적인 환상 체험은 말씀 중심의 사경회를 배경으로 한 이전의 부흥과 차이가 있었다. 왜 웨일스 부흥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안타깝게도 로버츠의 고향교회 모리아 예배당,그가 회심을 경험했던 블래나너크 예배당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쓸쓸하게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날 웨일스는 영적으로 황폐화되었다. 과연 이곳이 20세기 초엽까지 영적 물줄기를 줄기차게 뿜어내며 근대 영적 각성 운동을 견인했던 지역인지 의심스러웠다. 오 주님! 하웰 해리스,대니얼 롤랜즈,윌리엄 윌리엄스,데이비드 몰간,그리고 이반 로버츠를 배출한 웨일스를 긍휼히 여기시고 살려주소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9) 존스 첫 사역 베들레헴교회

처음부터 그의 목회는 남달랐다. 그의 첫 사역지인 웨일스 샌드필즈 베들레헴 교회에서부터 그의 능력은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그가 부임한 후 교회는 계속해서 급성장했다. 1927년 처음 부임할 당시 불과 50명이었던 교세가 1927년 말 145명,30년 말에 311명,그러다가 33년 말에 이르러 520명으로 늘어났다. 부임 6년 만에 교세가 10배로 성장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볼 때 특별한 성장이라고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베들레헴 교회가 위치한 샌드필즈 지역,당시 거의 모든 교회가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던 웨일스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 위대한 힘은 그의 설교에서 나왔다. 능력의 메시지,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이 수반된 존스의 설교를 목도한 오순절주의 설교자 조지 제프리스는 “그 설교를 여기에서만 선포해온 것은 죄악이었다”고 토로했다. 그토록 대단한 설교가 더 많은 회중 앞에서 선포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한 것이다. 샌드필즈 베들레헴 교회에서 그의 설교 위력은 단순히 청중의 수적 증가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설교를 들은 이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변화는 도시 변혁으로 이어졌다. 그곳을 방문했던 사우스웨일스 신문 그리피츠 기자는 이렇게 소감을 피력했다.

“아베라본의 샌드필즈는 죽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태양이 떠올라도 모래밭은 황폐해보이고 운집한 가옥들은 침울하고 희망이 없어보였다. 그처럼 절망적인 세상에 젊은 의사 목사가 설교하기 위하여,그리고 복음으로 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도 역시 그 고장을 둘러보고 아찔했다. 하지만 젊은 의사는 무서울 정도의 확신감을 가지고 설교했다…기독교는 이제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서 약동하는 실제적인 종교다. 작은 베들레헴 교회가 가득 차고 넘쳤다…회의론자들,그리고 희망에 찬 사람들과 성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19) 로이드 존스의 영성 각성지 웨일스

에밀 브루너부터 제임스 패커에 이르기까지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로이드 존스는 1981년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타트는 이제 “영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설득력 있던 복음주의 대변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며 존스 죽음 이후 영국 복음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1904년 웨일스 대부흥 이후 웨일스 교회가 오랫동안 영적으로 피폐했을 때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목마른 갈증을 해소해준 인물이 존스였다. 그의 설교는 매우 논리적이고 지성적이면서도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다. 메시지는 성령으로 불타올랐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수반돼 청중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능력의 사역은 존스의 뚜렷한 회심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1년 6개월 동안 고민하다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체험한 후 장래가 보장되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27세 때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장래가 보장되는 화려한 의사직을 포기하고 목회의 길에 들어선 것은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진 일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비록 정상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청교도와 칼뱅주의 서적들을 섭렵하며 신학적 지식을 축적해나갔다. 청교도 신앙과 웨일스 칼뱅주의 감리교 신앙이 평생 그의 사역을 받쳐준 두 기둥이었다.

우리 일행이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 기파드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간 존스가 11년간 사역했던 샌드필즈 베들레헴 교회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였다. 1996년 부임한 대니얼 풀스 담임목사는 우리 일행을 안내하며 존스가 시무하던 옛날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파이프 오르간,2층으로 된 교회당과 강단을 향해 배치돼 있는 내부 좌석들은 영국 여느 교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당 안에 들어섰을 때 젊은 시절 피를 토하며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전하던 존스와 그 설교를 듣기 위해 귀를 곤두세우고 강단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킨 청중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1938년 5월,11년의 사역을 마치고 베들레헴 샌드필즈 교회를 사임한 존스는 그해 늦은 가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 담임으로 부임했다. 캠벨 몰간이 사역했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존스가 부임하면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그곳은 잠들어가는 런던을 깨우는 영적 각성의 보루였다. 1968년 존스가 은퇴할 때까지 30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채플에는 수많은 회중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 존스는 1시간 이상의 긴 설교를 통해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존스가 시무했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평범한 교회였다. 예배당 외벽 작은 게시판에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쓰인 성경 말씀이 한눈에 들어왔다. 교회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 우리는 교회 내부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교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부흥의 현장을 찾아 한국에서 온 신학교수라고 신분을 밝히자 문을 열어주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였다. 1650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예배당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강단에는 북과 악기들이 놓여 있었으며 스크린도 설치돼 있었다. 40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지금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존스가 사역했을 때와는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아직도 옛날의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30년 동안의 사역을 통해 그가 남긴 영향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 그는 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을 성경적인 영적 각성의 메시지를 통해 생생하게 제시했고 설교와 목회 사역,목회 철학 전반을 통해 부흥의 중요성을 늘 새롭게 환기시켜주었다. 그처럼 부흥을 신학적 성경적으로 선명하게 정리한 사람도 드물다. 그가 말하는 부흥은 교회 성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성령의 비상한 간섭을 의미한다. 그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부흥이라고 강조했다.

존스만큼 일생 동안 부흥을 사모하고,부흥을 설교하고,부흥을 위해 줄기차게 기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가 안타깝게 외친 것처럼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흥해야 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부흥의 주제가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지역을 초월해 메마른 심령에 부흥의 불을 지폈다. 그의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웨일스 지역에는 존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의 저술을 통해 웨일스뿐 아니라 전 세계에 부흥을 사모하는 무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아마도 지난 수년간 존스만큼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참된 부흥을 사모하는 무리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존스 때문이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20) “에드워즈는 누구?”

조너선 에드워즈는 예일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727년 24세 때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트가 시무하는 매사추세츠 노스햄프턴 교회에 부임했다. 그리고 1년 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교회 담임을 맡았다.

W 쿠퍼가 기술한 것처럼 부임 당시 신대륙의 영적 상황은 비참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황금의 소나기 아래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다. 에드워즈는 타락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회를 향해 경고의 나팔을 높이 불어댔다.

에드워즈는 흔들리지 않고 시들어가는 미국 기독교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죄악이 가득 찬 사회에 회개를 촉구했다. 그의 설교는 잠자는 영혼들을 흔들어 깨웠고 그를 통해 위대한 영적 대각성 운동이 발흥했다. 2세기반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가 세인들의 존경과 예찬을 받는 것은 영적 침체의 시대에 보여준 그의 거룩한 삶,시대적 지리적 환경을 초월해 이룩한 놀라운 학문적 영적 진보,신학과 복음 전도의 완벽한 균형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가장 빛나게 만든 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경험한 거룩한 영적 체험이었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은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였다. 그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했고 하나님과 지속적인 영적 교통에 충실했다. 그에게 신앙이란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마음에 속한 것이며 체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설교는 강의식도 아니었고 단순한 본문에 대한 주석도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경험한 생명의 메시지를 뜨거움과 열정으로 선포했다. 이 때문에 그의 설교는 힘이 있었고 진지했으며 청중의 가슴을 울렸다. 게다가 지성과 명철이 설교에 빛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메시지는 영적 각성의 물꼬를 텄고 노스햄프턴 교회를 영적 각성 운동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1740년 조지 휘트필드의 노스햄프턴 방문은 영적 각성의 강도를 한층 더해주었다. 방문이나 사업차 노스햄프턴에 온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0) 조너선 에드워즈 1차

1740년 전후 놀라운 영적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발흥했다. 1차 대각성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신앙운동은 가장 강력한 18세기 성령 역사였다. 1차 대각성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주역이었던 조너선 에드워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기술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비범했다. 죄의 각성,많은 이들이 체험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빛,사랑,그리고 기쁨의 정도에서 비범한 역사였다. 또한 각성의 범위,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확산되는 과정도 신속했다…평소 같으면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고 일상적인 축복을 다 사용해 1년간 일해야 이룰 수 있었던 사역이 단 이틀 만에 완수되었다.”

이 영적 각성의 진원지는 매사추세츠 노스햄프턴이었다. 놀라운 부흥의 현장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그 발자취를 좇아 노스햄프턴으로 향하는 여정은 무려 6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노스햄프턴에 도착했을 때 받은 첫 인상은 어떻게 이런 시골 소도시에서 그런 위대한 부흥 운동이 발흥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만큼 도시가 작다는 느낌이었다.

비텐베르크가 루터의 도시이고,제네바가 칼뱅의 도시라면 노스햄프턴은 에드워즈의 도시였다. 이곳에는 그가 시무했던 교회,그를 기념하는 교회,그의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트가 살았던 집,그리고 에드워즈와 그의 가문이 잠들어 있는 무덤들이 거의 3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에드워즈가 사역했던 1차 대각성 운동의 진원지 노스햄프턴 제1교회였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교회는 한눈에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임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전역을 흔들어 깨웠던 영적 각성의 진원지답게 외관에서부터 영적 분위기가 물신 풍겨났다. 이곳은 지금 연합그리스도교회와 미침례교회가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교회 앞에서 6∼7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하십니다’는 피켓을 들고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다. 구원을 상실한 이 시대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외치는 그들은 에드워즈가 18세기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세대를 향해 원색적인 복음을 선포하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성령 충만하면서도 이지 지성 신학에 있어 탁월한 이해력을 갖춘 ‘아주 빼어난’ 인물이었다. 누구도 그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고 사상가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차 대각성 운동이 미친 영향은 참으로 대단했다. 사람들은 비참한 상태를 의식하면서 각성되었고 다양한 은혜를 경험했으며 분명한 변화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오직 하늘나라로 향했다. 다가올 진노를 피해 달아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과거에는 세속적인 것이 대화의 주제였으나 이제는 어떤 모임에서든 신앙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대화의 소재가 영적 문제였다.

사람들이 주의 날에 모이기를 힘썼고 예배가 살아났다. 모든 청중이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들은 슬픔과 고뇌로 울었고 어떤 이들은 기쁨과 사랑으로 울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웃들의 영혼에 대한 염려와 동정으로 울었다.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린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을 주민들 중 영원한 세계의 위대한 일들에 대해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영혼들이 집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려왔다.”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교회는 주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부흥 후 6개월 사이에 300명 이상의 마을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얻었으며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이 620명에 달했다. 그것은 사실상 그 마을의 성인을 거의 망라하는 숫자였다. 그 전에도 교회가 아주 컸지만 부흥으로 인해 사람들이 떼 지어 교회로 몰려들었다.

부흥의 불길은 주변 지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주변의 다른 여러 마을에서도 똑같은 역사가 뚜렷하게 일어났다.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린다면 “과거 몇 차례 성령이 이 마을에 부어졌을 때에는 마을 밖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부흥에서는 그것이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사우스 해들리,서필드의 서부,그린 리버,해트필드 남부에서도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외에 서부 스프링필드와 롱메도,엔필드,노스필드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얼마 후 이 불길은 뉴잉글랜드 전역을 휩쓸었고 급기야 뉴잉글랜드를 넘어 크로스 목사가 목회하는 뉴저지의 산악지역,윌리엄 테넌트와 길버트 테넌트,그리고 프릴링 휘슨이 목회하던 뉴저지로 확산되었다.

확실히 1차 대각성 운동은 성령의 임재,놀라운 회심,부흥의 확산에 있어서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를 환기시켜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와 공동체의 각성과 변화로 이어졌다는 점에도 유사했다. 1차 대각성 운동 이후 뉴잉글랜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워졌다. 특히 파당정신이 눈에 띄게 줄었고 청교도 정신이 회복되었으며 연합정신과 기독교 민족의식이 태동되었다. 이것은 훗날 미국 독립정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이후 미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다.

 

 

-----------------------------------------

보충 자료임.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0) 조너선 에드워즈 1차

국민일보 | 입력 2006.08.30 15:34

 





1740년 전후 놀라운 영적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발흥했다. 1차 대각성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신앙운동은 가장 강력한 18세기 성령 역사였다. 1차 대각성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주역이었던 조너선 에드워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기술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비범했다. 죄의 각성,많은 이들이 체험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빛,사랑,그리고 기쁨의 정도에서 비범한 역사였다. 또한 각성의 범위,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확산되는 과정도 신속했다…평소 같으면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고 일상적인 축복을 다 사용해 1년간 일해야 이룰 수 있었던 사역이 단 이틀 만에 완수되었다."

이 영적 각성의 진원지는 매사추세츠 노스햄프턴이었다. 놀라운 부흥의 현장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그 발자취를 좇아 노스햄프턴으로 향하는 여정은 무려 6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노스햄프턴에 도착했을 때 받은 첫 인상은 어떻게 이런 시골 소도시에서 그런 위대한 부흥 운동이 발흥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만큼 도시가 작다는 느낌이었다.

비텐베르크가 루터의 도시이고,제네바가 칼뱅의 도시라면 노스햄프턴은 에드워즈의 도시였다. 이곳에는 그가 시무했던 교회,그를 기념하는 교회,그의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트가 살았던 집,그리고 에드워즈와 그의 가문이 잠들어 있는 무덤들이 거의 3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에드워즈가 사역했던 1차 대각성 운동의 진원지 노스햄프턴 제1교회였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교회는 한눈에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임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전역을 흔들어 깨웠던 영적 각성의 진원지답게 외관에서부터 영적 분위기가 물신 풍겨났다. 이곳은 지금 연합그리스도교회와 미침례교회가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교회 앞에서 6∼7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이 당신을 구원하십니다'는 피켓을 들고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다. 구원을 상실한 이 시대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외치는 그들은 에드워즈가 18세기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세대를 향해 원색적인 복음을 선포하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에드워즈는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성령 충만하면서도 이지 지성 신학에 있어 탁월한 이해력을 갖춘 '아주 빼어난' 인물이었다. 누구도 그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고 사상가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차 대각성 운동이 미친 영향은 참으로 대단했다. 사람들은 비참한 상태를 의식하면서 각성되었고 다양한 은혜를 경험했으며 분명한 변화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오직 하늘나라로 향했다. 다가올 진노를 피해 달아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과거에는 세속적인 것이 대화의 주제였으나 이제는 어떤 모임에서든 신앙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대화의 소재가 영적 문제였다.

사람들이 주의 날에 모이기를 힘썼고 예배가 살아났다. 모든 청중이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들은 슬픔과 고뇌로 울었고 어떤 이들은 기쁨과 사랑으로 울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웃들의 영혼에 대한 염려와 동정으로 울었다.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린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을 주민들 중 영원한 세계의 위대한 일들에 대해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영혼들이 집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몰려왔다."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교회는 주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부흥 후 6개월 사이에 300명 이상의 마을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얻었으며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이 620명에 달했다. 그것은 사실상 그 마을의 성인을 거의 망라하는 숫자였다. 그 전에도 교회가 아주 컸지만 부흥으로 인해 사람들이 떼 지어 교회로 몰려들었다.

부흥의 불길은 주변 지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주변의 다른 여러 마을에서도 똑같은 역사가 뚜렷하게 일어났다.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린다면 "과거 몇 차례 성령이 이 마을에 부어졌을 때에는 마을 밖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부흥에서는 그것이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사우스 해들리,서필드의 서부,그린 리버,해트필드 남부에서도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외에 서부 스프링필드와 롱메도,엔필드,노스필드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얼마 후 이 불길은 뉴잉글랜드 전역을 휩쓸었고 급기야 뉴잉글랜드를 넘어 크로스 목사가 목회하는 뉴저지의 산악지역,윌리엄 테넌트와 길버트 테넌트,그리고 프릴링 휘슨이 목회하던 뉴저지로 확산되었다.

확실히 1차 대각성 운동은 성령의 임재,놀라운 회심,부흥의 확산에 있어서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를 환기시켜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와 공동체의 각성과 변화로 이어졌다는 점에도 유사했다. 1차 대각성 운동 이후 뉴잉글랜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워졌다. 특히 파당정신이 눈에 띄게 줄었고 청교도 정신이 회복되었으며 연합정신과 기독교 민족의식이 태동되었다. 이것은 훗날 미국 독립정신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이후 미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다.

<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위 파일은 박용규교수님 홈피(한국교회사연구소)에 개별적 파일이 있네요.

미리 참조 하실 분 보세요.

이곳에 게시물은 다른 곳(국민일보)에서 개별적으로 다운 받아 게시자가 편집한 것이며

나머지도 계속 편집 중임.


 

 

 

 

 

 

 

 

복구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