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들은 경기·이화여고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거기에 끼지 못해 소외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오히려 초동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지방 출신의 설움을 달랬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교회 성가대로 봉사했다. 교회는 언제나 따뜻했고 어머니 품 같았다.
초동교회 성가대는 성탄절이면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성가를 불렀고 우리는 성도들로부터 감사 선물을 받았다. 한번은 장로님이 새벽에 성가대원 모두를 집으로 불러 떡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2층 넓은 마룻방에 꾸며진 성탄트리에 반짝이는 전구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지금도 그날의 정겨움이 눈에 선하다. 그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던 단짝 김남순은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하고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내전이 발생해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남순이는 선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친구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후 나를 부른다고 했는데, 그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론 유학준비도 하고 있었다. 대전 사범학교를 다닐 때 나는 적십자 대표를 맡았었다. 적십자 사무실 옆에 피바디 오피스가 있었다. 당시 피바디 사절단이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갖고 한국에 나와 있었는데, 사범학교를 우선 지원하게 되어 우리학교에 나와 있었다. 나는 그곳을 통해 미국 유학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방학에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이미 담당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린 뒤였고 그 연락처를 아는 교장 선생님마저 전근을 가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다.
앞이 꽉 막힌 것 같은 좌절감을 느꼈다. ‘유학을 가는 게 나의 길이 아닌가.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때 문득 깨달았다. 내게는 시인의 꿈이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학교 도서관 2층 잡지실에 자리를 잡고 현대문학과 기독교사상을 매월 통독하며 브루너 몰트만 니버 등 여러 신학자들을 만났다. 또 시인이 되려면 세계문학전집은 통독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정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은 나 스스로에게 지우는 의무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당시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한 부분이 많았다. 스토리를 따라가며 읽다보면 글이 난삽해 무슨 말인지 몰라 읽다가 팽개쳐 버렸다.
그 책을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후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통해 나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기독교 신자인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세례교인이었으며 한 번도 교회에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죄인이었어도 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언제나 의로웠고 착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늘 칭찬 속에 자랐고 모범생이었으니 내 속의 교만이 나를 덮고 있었던 것조차 몰랐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작중 인물들의 죄성을 통해 비로소 나의 죄를 보기 시작했다. 밤새워 그 작품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이 눈물에 젖도록 심취하며 은혜를 받았다. 러시아적 기질의 첫째 드미트리의 하나님을 모르는 자기 의로움의 선, 둘째 이반의 반신의 합리적 이성주의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죄, 셋째 알료샤의 수도원에 갇힌 믿음이 나의 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강퍅한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죄인 된 나를 깨닫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비로소 내가 기독교에 입문한 것이다. 나의 논문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죄와 구원의 성서적 이해’였다. 그러나 나의 학위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증서였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