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임해서 첫 월급을 타기 얼마 전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막내 딸 시집가는 것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무엇보다도 첫 월급을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릴 기회를 잃은 아쉬움이
월급을 탈 때마다 두고두고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생활지도주임으로 계셨던 김영숙 선생님(후에 보성여중 교장이 되심)은
“결혼을 하면 정말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룰 수 있을 텐데…”라며
마치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실 것 같으면서도
뜸을 들이시고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위로 언니들은 모두 결혼했고 부모님도 안 계신 나를
주변에서는 예쁘게 보았는지 선 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인연은 다른 데 있었다.
장미꽃이 교정에 만발한 어느 해 6월,
강의를 마치고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아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보다 더 잘 생긴 육사 장교가
멋진 사관 장교복을 입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박제가 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섰다.
순간 그 사람이 김영숙 선생님이 소개한 분이라는 걸 직감했다.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한 채 교무실로 뛰어들어 왔다.
‘콩닥콩닥’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일주일 뒤 굵은 바리톤의 음성이 나를 찾고 있었다.
그는 ‘골든 트레저리(Golden Treasury)’라는 영시집이 필요한데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책을 들고 종로서적 옆 양지다방으로 날아갔다.
그의 서글서글한 눈매는 바다처럼 깊고 그윽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것 저것을 물었는데
주로 교회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교회 다니십니까? 어느 교회를 다니십니까?”
“교회는 언제부터 다녔습니까?”
“중생의 경험이 있습니까? 언제 그런 경험을 했습니까?”
“부모님도 교회에 다니십니까? 직분은 무엇입니까?”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어떤 것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유치원생처럼
또박또박 대답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은근히 화도 났지만,
그 청년이 산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과
바다처럼 깊은 사랑을 간직한 것처럼 느껴져
나의 가슴은 계속 설레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3년쯤 만났고
1972년 6월 10일 조종남 박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충무 바닷가의 충무호텔로 신혼여행을 떠난 그날 밤,
남편은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사랑을 고백한 내용이려니 하고 편지를 펼쳤는데,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고 성경구절만 가득 적혀 있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7)
남편 양영재(전 연세대 영문과 교수) 장로는
그야말로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믿음의 사람’이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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