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산기도를 가거나 부흥집회를 통해 죄인임을 고백한다. 또 새벽기도회나 목사님 설교를 통해 죄인임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달리셨다는 이 간단명료한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죄인인 것을 모르니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어도 수천번 넘게 들었을 내용이 한번도 가슴을 때리지 않았던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다채롭고 오묘하다. 목사님의 설교도, 부흥집회도 아닌 책을 통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복음의 첫 단계를 밟았으니 그분의 은혜가 어찌 오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작품이 훌륭한 기독교 교육의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통독하며 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와서야 비로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그가 쓴 일기를 통해 알게 됐다. 그 책이 ‘제2의 바이블’로 불릴 만큼 유럽의 지성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니체 바흐 프로이드 루소 바르트 등 문학, 음악, 신학, 심리학, 교육, 철학 할 것 없이 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의 거장을 만나게 됐다.
그 당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는 뜨거운 지성의 열정이 넘쳐나는 은준관 박사와 갓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김중기 박사,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균진 박사 등이 계셨다. 또 대학원장 문상희 목사님의 열정으로 삐걱대는 목조 대학원 건물은 온통 다 타버릴 것 같았다. 대학원생들은 그런 스승님을 모시고 1980년대 데모의 주동이 됐던 연세대의 교정에서 최루탄을 마시면서 공부했다. 특히 대통령의 시해사건,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과 군사정권에 항쟁하는 학생 데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생들이 유치장에 갇히면 문 목사님은 구국지사처럼 찾아가 학생을 구해오기 일쑤였고 대학원생들은 목조건물 채플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곤 했다.
그때의 순수한 열정과 지성으로 나라를 생각하며 진정 크리스천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본 회퍼를 거론하며 상황윤리를 논하기도 했다. 우리가 열띤 토론을 했던 연신원 건물이 그 후 허물어지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섰지만 연신원 본관 건물에는 우리 선배들의 눈물의 기도가 베어 있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서 건물이 허물어진 것이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나는 윤동주의 동상 앞을 돌아 연신원 건물을 들락이며 2년 동안 열정을 태워 공부했다. 이 시기가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시기였다. 사실 철학성과 종교성을 더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만나게 해주셨고, 그 작품을 통해 내가 죄임임을 깨닫게 해주셨으며, 나로 하여금 문학작품이 얼마나 큰 복음의 도구가 되는지를 알게 해주셨다. 또 가진 달란트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이 사명임을 알게 해주셨다.
이로 인해 나의 후반부 인생은 이와 궤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인도해 주셨다.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했다. 참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주옥같은 시를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