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교회를 더 열심히 다녔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조창석 목사님이 선화감리교회(현 하늘문교회)에 시무하셨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성탄절을 맞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맞춰 무용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주님은 내게 더 없는 요람이요 평강의 품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잃고도 학업에 정진하며 모범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전사범학교 전기 시험을 보았다. 사실 떨어지기를 바랐으나 수석으로 합격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사범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곳에서 시의 첫 스승인 한성기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범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은 나의 기본적인 인간의 틀을 세우는 좋은 전인교육이었다. 그러나 3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초조해졌다. 일반 고교에서는 대학 입시 전형을 위한 특별교육에 들어갔지만 사범학교에서는 입시 과목인 영어, 수학보다는 교육사 교육철학 아동심리 예체능 과목 위주로 교과과정이 짜여 있었다.
여름방학의 어느 날, 나의 정체성과 장래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새벽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교회로 향했다. 강대상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어깨에 크고 부드러운 손이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조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은 이유를 물으셨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으로 용기를 더해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