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山非野 2010.05.12 16:52
논개(論介)
흔히 논개(論介)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성(晉州城)을 함락시킨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함께 진주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의로운 기생(妓生)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 직후(直後) 바로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倭將)의 이름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논개의 생애
논개는 1574년 전라남도 장수(長水) 주촌마을 출신으로,
성은 주(朱)이며 아버지는 주달문(朱達文)이다.
1578년 아버지 ' 주달문 ' 이 죽자,
논개는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하였으나,
숙부는 어린 조카를 지방 토호(土豪) ' 김풍헌 ' 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하고 금품을 받은 다음 도망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하였다가 체포되어 장수(長水) 관아에 수감되었다.
1579년 장수현감(長水縣監) ' 최경회(崔慶會) '의 심리로 재판이 열리고,
무죄를 선고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어
모녀는 침방의 관비(官婢)를 자청하였다.
( 이러한 이야기가 있지만,
최경회가 장수현감(長水 縣監)을 지내던 시기가 1577~1579년이었고,
이때 1574년 출생한 논개는 불과 4~5세에 불과하였으므로
"민며느리" 설정은 많이 어색하다.)
그 후 1592년 논개의 나이 17세에 최경회의 부실(副室 ..첩)이 되었고,
곧이어 어머니가 죽었다.
바로 그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를 훈련할 때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하였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晉州城)전투를 할 때 성 안에서 전투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倭將) '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 '를 유인하여 끌어안고
함께 남강(南江)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견이 분분하다.
다만 유몽인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기록한 것을 보면
그녀는 진주성의 관기(官妓)이었음은 기록상 분명하다.
그리고 최경회의 부실(副室)이었다는 기록도
근세에 발간된 ' 해주최씨(海州崔氏) ' 문중의 기록일 뿐이므로 확실하지는 않다.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美化)는 피할 일이다.
논개에 관한 기록
논개의 순국(殉國) 사실은 임진왜란 직후에는 민간(民間)에서만 전해지다가
1620년경에 가서야 마침내 문헌(文獻)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에 대하여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은 유몽이(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유몽인(柳夢寅)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미처 그 의(義)로운 죽음이 기록되지 못하고
신분상(身分上)의 문제로 나라로부터 보상(補賞)을 받지 못한 논개(論介)에게 측은함을 느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문집에 실었던 것이다.
논개와 그녀의 가계(家系), 성장과정, 그리고 신분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논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 어우야담 '에는 논개의 가계(家系)와 성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개에 대하여 많은 억측과 이론들이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던 중 1700년 초,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殉絶)을 포양하도록 계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이에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탐문하였으나,
논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포상하지 못하였다.
그 후 꾸준히 논개의 사적조사가 진행되어
1700년대 중반부터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 최공의 시장", "호남절의록" , 호남상강록" , "호남읍지", "동감강목" , "일휴당실기", "매천야록" 등의 문헌과
200년간의 구전설화 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논개의 가계(家系)와 생장과정 등의 행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또한 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 이후
차별받았던 진주지방의 특수한 이해관계
그리고 ' 해주 최씨 (海州崔氏 ..최경회의 본관) '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사료(史料)로서의 객관적 가치는 많이 훼손되고 있다.
논개는 기생이었나?
논개는 기생이었는가? 최경회의 부실(副室 ..첩)이었는가?
논개의 행장을 처음으로 기록한 유몽인은
그의 저서 ' 어우야담 '에서 관기(官妓)로 분명하게 적고 있고,
그 후의 조정에서의 포상 노력도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바꾸는 노력일 뿐이었다.
한편 논개가 최경회(崔慶會)의 해주 최씨 족보에 오는 시기는 1975년부터이었다.
그 전에는 논개가 기생출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당시 ' 해주 최씨 (海州崔氏) ' 문중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다수결로 족보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기록도 엇갈린다.
1905년 송병선이 지은 "동감강목(東鑑綱目)"의 기록에는
" 慶會妻 論介 誘倭將 游南江中巖石上 抱倭將墮水而死 "라고 적혀있다.
지금도 논개는 사실(史實)과 전설의 혼돈중에 휩싸여 있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 빛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논개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과제이다.
논개의 생애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倭將)을 안고 순국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녀만큼 생애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인물도 없다.
그녀에 대한 최초의 문헌사료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순국 28년 후인 1621년(광해군 13)에 쓰여진 것이다.
"논개는 진주의 官妓이었다"로 시작되는이 기록은
그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인식에 일종의 지침서이었다.
그 후의 기록들, 특히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는
" 기생 논개는 장수인(長水人 ..전북)으로 공(公)이 사랑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녀를 사랑한 이는 최경회(崔慶會)라는 장수(將帥)이었다.
그녀에 관한 기록들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추적하려면,
본관으로 추정되는 ' 신안(新安) 주(朱)씨 ' 가문의 구전(口傳) 등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최경회의 행장을 적은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와
해주 최씨(海州 崔氏 .. 최경회의 본관)의 문중 기록이있으나,
이는 논개가 기녀(妓女)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후일 윤색(潤色)되었으므로
믿을만한 기록은 못되고 있다.
논개의 영정. 친일파 화가 김은호가 그렸다고 하여 새로운 영정이 그려졌다.
口傳에 따르면
논개가 태어난 곳은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주촌(朱村)마을로
현재의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이다.
그는 세종 시절에 병조참판을 지낸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아버지 주달문(朱達文)을 일찍 잃은 논개는 어머니 박씨 부인과 함께 살다가
삼촌 주달무의 제의로 살림을 합치게 되었다.
그런데 주달문은 김풍헌이라는 지방 토호의 바보 아들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보내기로 약조하고 돈을 받아 챙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도망가자, 주달무도 도망갔고,
김풍헌을 이들을 관아(官衙)에 고발하였다.
논개의 生年月日
이때 등장하는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바로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이다.
논개는 다른 흔적은 불분명하지만 생년월일만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
1574년 9월3일 밤이 그녀의 출생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기록은 최경회의 행장인 "일휴당실기(日休堂實期)"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일휴당실기"에 따르면 최경회는
46세 때인 1577년부터 1579년까지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재직하였다.
구전(口傳)으로는 논개 모녀에 대한 재판이
논개가 13세 때인 1586년(선조 19) 여름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최경회는 장수현감이 아니라 영해부사이었다.
최경회의 장수현감 재직 마지막 해에 이 사건이 발생했다고 쳐도
논개의 나이 5살에 불과하였다. 민며느리 운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다.
따라서 논개에 대한 구전(口傳)과 최경회에 대한 문헌기록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해 볼 때
너무 정확한 그녀의 생년월일은
꽃다운 스무살에 순국(殉國)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산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구전들은 최경회가 장수현감일 때
논개 모녀가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녀의 나이는 몇 살 더 많았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논개와 최경회의 만남
이 재판에서 최경회는 논개 모녀에게 무죄(無罪) 판결을 내리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재판 후, 모녀의 행적에 대하여는 구전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갈 곳이 없었던 母女가 장수현의 물긷는 급수비(汲水婢)나 관기(官妓)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경회의 아내 나주(羅州) 김씨의 주선으로 내아(內衙)에서 일을 돕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인인 양인(良人)이 스스로 여종이나 관기(官妓)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색하다는 점에서 논개 모녀는 최경회의 안채 살림을 돕는 드난살이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79년 최경회가 무장현감으로 자리를 옮길 때에는 논개 모녀(母女)도 따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최경회는 1582년 영암군수, 1584년 호조정랑,형조정랑,영해부사를 거쳐 1587년에는 경직(京職 .. 서울의 벼슬자리)인 사도시정으로 임명되었다. 구전들은 이때 최경회의 부인 나주 김씨가 병석에 누워 서울로 따라가기 어렵게 되자 논개가 대신 따라가 수발할 것을 권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590년 초봄, 59세의 최경회가 외직(外職 ..지방의 관직)인 담양부사로 임명되자 논개를 부실(副室)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1590년 12월 최경회의 어머니 순창(淳昌) 임(林)씨가 고향 화순에서 사망하자, 최경회는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면서 첩실(妾室) 즉 논개를 데리고 갈 수 없자 논개에게 장수(長水)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말한다.
임진왜란과 최경회
최경회가 고향에서 3년간의 시묘(侍墓)살이를 하던 중인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은 전쟁의 와중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전라우도 의병장에 추대된 최경회는 조정으로부터 송골매부대라는 뜻의 "골자부대"로 공인을 받고, 1592년 9월 중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旻)부대와 격전을 치러 승리를 거둔다.
골자부대
경상우도 순찰사 조종도(趙宗道)가 구원을 요청하자 부하 장수들은 영남 출전에 반대하지만, 최경회는 " 호남도, 영남도 우리나라 땅"이라며 10월 영남으로 향한다. 호남(湖南)에서 거병(擧兵)하여 영남(嶺南)에서 싸우는 드문 이력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견해도 많다.
최경회와 논개의 再會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최경회는 진주 인근에서 왜군의 후방 지원활동을 차단하여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하였고, 이런 활약 덕택에 1593년 4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임명되었다.
최경회는 이 무렵 우병영 소재지 창원에 주둔하였는데, 어느 날 충청병사 황진(黃進)이 논개를 데리고 병영에 나타났다. 논개가 전라도 장수(長水)에서 남자로 변복을하고 최경회를 찾아 오다가 산청에서 왜군에게 붙들린 것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근 2세기 동안 기생(妓生)으로 알려졌던 논개(論介)는 그간 그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들어서 출생(出生)이나 성장(成長)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異說)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논개가 2차 진주싸움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한 ' 최경회(崔慶會) '의 첩(妾)이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戰寺)한 ' 최경회 '의 삶을 기리는 ' 일휴당실기 (日休堂實記) '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公)의 부실(副室)이 공(公)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敵將)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義巖)이라고 부른다 ....
부실(副室)이란 정실(正室) 부인이 아닌 첩(첩)을 의미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최경회(崔慶會)의 첩(妾)이었던 여인을 조사하게 되었고, 이는 호남절의록, 오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考證)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口轉)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論介)라는 인물의 가계(家系)와 일생이 재구성(再構成)되었다.
논개, 烈女에서 義女로
17세기 전반까지 논개(論介)는 나라로부터 그 공(功)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진주(晉州)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제사가 해마다 남강(南江) 변에서 일반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왜장(倭將)을 안고 떨어졌던 남강의 바위에 의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 의암 (義巖) '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이를 보면 당시 진주성 백성들은 진주성 함락 후,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졌던 상황에서 여인의 몸으로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그녀의 복수(復讐)에 통쾌함을 느끼고 승리의 희망 속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결국 왜적(倭賊)을 내몰 수 있는 기운을 준 논개(論介)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18세기 초 경종(景宗) 시절에 가서야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진주성민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 최진한 '이 비변사에 건의하여 논개를 기리고 그 자손들에게 포상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1세기가 넘은 상황에서 논개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뜨워 수소문했지만,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나라에서는 의암사적비(義巖事跡碑)를 세워 그녀의 순국(殉國)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의(義)로운 기생이라 하여 ' 의기 (義妓) '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739년에는 경상우병사 ' 남덕하 '의 노력으로 논개를 기리는 사당(祠堂)인 ' 의기사(義妓祠) ' 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졌다.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1593년 6월15일 진주성에 들어가 왜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은 6월22일 경부터 진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여 왔는데, 그 수는 무려 10만명이 넘었다. 그 중 진주성의 북쪽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는 26,000여 왜군이 맡고 있었는데, 그 일급 부장(副將)이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이었다.
왜군들은 진주성 인근과 각 고을의 요지에 군사를 매복시켜 구원군을 막았기 때문에, 진주성은 고립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 드디어 28일 진주성은 무너졌고, 최경회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과 스스로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논개는 최경회의 투신 자결 소식에 슬픔과 함께 실망을 느꼈다. 장수로서 세불리(勢不利)하면 신라의 화랑처럼 적진에 돌진할 일이지 홀로 투신할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논개는 남편을 따라 목숨을 버리는 열녀(烈女)를 넘어서 왜장을 동반하여 순국하는 의녀(義女)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전황(戰況)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던 성(城)이었다. 진주(晉州)는왜병(倭兵)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던 경상도의 주요한 성(城)일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일본 입장에서는 반드시 차지하고 싶은 성(城)이었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내어주면 안 되는 성이었다.
1592년 10월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은 김시민(金時敏)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인, 의병(義兵)들까지 합세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를 진주대첩(晉州大捷)이라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모든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왜군으로서는 진주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고 호남(湖南)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7월 조선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왜군을 동원한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이때의 조선 중앙정부는 명(明)나라가 진주성을 지키는 원병(援兵)을 보내주지 않기로 하자, 진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義兵)들과 민간인들은 다시 한 번 똘똘 뭉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진줭은 7월 29일 왜군의 거대한 병력이 휩쓸고 들어와 함락되고 말았다.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 논개의 남자이었던 최경회(崔慶會)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官妓)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 게야무라 로쿠스케 '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倭將)을 죽인 후,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왜군도 7일간의 전투 동안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큰 손실을 보아 진주에 계속 점령하고 있을 힘이 없었다.
그들은 어렵게 진주성을 차지하였지만 병력의 손실이 커, 주변 지역 약탈에 그쳤을 뿐 전라도(全羅道) 지역으로 진격하지도 못하였고, 조선군이 거점을 부산(釜山) 방향으로 옮겨가자 이를 막아내느라 서둘러 진주를 떠나게 되었다.
유몽인, 어우야담
1594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유몽인(柳夢寅)은 삼도순안어사가 되어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게 되었는데,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신분이 미천하여 정사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논개가 관기(官妓)라는 이유만으로 광해군(光海君) 9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그녀의 순국사실이 기록되지 않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논개의 순국기록을 1621년 자신이 편찬한 " 어우야담(於于野談) "에 남기게 된다. 논개에 관한 최초(最初)의 기록이다.
유몽인은 어우야담 "권 1" 인륜편(人倫編) 효열(孝列)에 논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인륜편에는 효열, 충의, 덕의, 은둔, 혼인, 처첩, 기상, 붕우, 노비, 배우, 창기 등으로 나누어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논개의 이야기는 처첩, 노비, 창기편에서 다루지 않고, 인륜편에 싣고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었다. 계사년(癸巳年)에 창의사 김천일(倡義士 金千鎰)이 거느린 의병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원래 이름은 危巖이다) 아래는 깊은 바로 깊은 강물 가운데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사람의 혼(魂)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여러 왜병(倭兵)들이 이를 바라보고 좋아하였지만 모두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왜장(倭將)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웃으며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 당겼다.이때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물 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
임진란(임辰亂)을 당하여 관기(官妓)의 경우, 왜놈들에게 욕(辱)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論介)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恨)이다. 관기(官妓)라 하여 왜적(倭賊)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논개가 관기(官妓)이었다는 점과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는 기록만 나온다. ' 해주 최씨(海州 崔氏) ' 문중(門中)에서 발행한 "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 "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데, 최경회(崔慶會)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贈左贊成崔公諡壯)"에 논개 관련 기록이 있다.
공(公)의 부실(副室)이 공(公)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且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裟於江中巖石 誘賊長因而浿墜死 至今人稱義巖
촉석루(矗石樓)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진주성(晉州城)의 누각이다.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즉 남한산성의 서장대와 같다. 1241년 (고려 고종 28), 축성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이때는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촉석루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593년 7월29일 왜군의 파상적인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 촉석루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 또는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것을 1618년(광해군 10)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하였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9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들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논개의 순절로 유명하다.
촉석루와 최경회(崔慶會)
1747년 (영조 23) 1월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崔慶會)가 소지하고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렬사(彰烈祠)에 두고 제(祭)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義烈)을 칭송하였다.
追憶往思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일백년이 지나갔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義烈 촉석루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해 보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兵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以堅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의암(義巖)
1593년 6월 19일 ..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명에 가까운 민관군(民官軍)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진주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되었다.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에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
一杯笑指長江水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않고 흘러가니
波不渴兮魂不死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최경회(崔慶會),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鐘厚) 등 진주성 3장사는
진주성이 함락된 것에 대한 책임을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논개의 결심
논개는 진주성 전투가 한창일 때 성 안에서 최경회의 수발을 열심히 들었지만,
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경회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며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진주성의 함락과 최경회의 순절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마침 칠월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官妓)들을 불러놓고 전승 축하연을 갖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을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일설에는 이때 妓籍에 올랐다고도 한다).
그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옷 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하여 들어 갈 때
천천히 따라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신분이 탄로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며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 쪽을 내려다 보았다.
왠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 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 여인의 정체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 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오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하였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그 왜장을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게야무라 로구시케(毛谷村六助)이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나고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었다. 그후 논개가 죽은지 32년 되던 1629년(인조 7),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의 둘째 아들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이 이곳 진주로 이사를 와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바위에 전서체(篆書體)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오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倭將 게야무라 로구스케 .. 毛谷村六助
2004년, 진주성에 있던 논개비의 뒷면이 깎였다. 의시사(義妓祠) 앞 논개비 뒷면, 논개의 사연 중 논개가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왜장이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라는 내용을 놓고, 일부학자들 사이에서 그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 결과, 진주시에서 뒷면을 깎아내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 주요 논거는 당시 진주성 전투의 왜군 총지휘관은 우기다 히대이애(宇喜多秀家)로, 게야무라 루쿠스케는 이름이 아니고, 게야무라(毛谷村) 출신의 서민 "로쿠스케"라는 뜻이며, 결코 왜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존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찮은 졸병이므로 논개에 대한 모독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일본에서 보는 게야무라 로쿠스케
일본 히코산 고쥬신사(英彦山高住神社) 동쪽 오이타현 근처에 기다 마고베이(木田 孫兵衛)라는 인물의 묘지가 있는데, 이 인물의 낭인시절의 이름이 바로 게야무라 로쿠스케이다. 그는 농부출신으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가 된 후 기다 마고베이로 이름을 바꾸고 임진왜란에 참가하였다.
일본에서는 게야무라가 "오랑카이"에서 전사하였다거나 또는 고향에 돌아와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는 구전이 내려오고 있다. "오랑카이"라 함은 조선말 오랑케를 일본식으로 음차한말로 함경도 근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실제 게야무라가 진주성 의암에서 논개와 죽은 것이 아니라, 함경도 전투에서 전사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일본 전통의 가부키와 전통 인형극 "人形淨溜璃 彦山權現誓助劍"에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효성과 의리가 깊고 용맹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의 칼(神劍)"이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임진왜란 때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로 일본에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았고,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일까?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 결혼
1980년대 초반, 일본의 은퇴한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큐유"는 히코산 기슭에 있는 자기 소유의 밭을 갈던 중 흙속에서 다듬어진 돌을 발견한다. 그 돌은 묘비이었고, 그 묘비의 글에 적힌 글자의 이름이 놀랍게도 임진왜란 때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군으로 알려진 加藤淸正의 선봉장이었던 부장(副將)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역사 한 토막이 그 묘비에 새겨져 있었다.
"우에스케"의 입장에서는 게야무라의 죽음은 일본의 수치이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한국에서는 그렇게 믿고 있는..논개라는 한갖 조선의 기생에게 살해 당하였다는 것은 잊을수 없는 수치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게야무라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은밀한 계획을 추진하는데, 게야무라와 논개를 부부로 만들어주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개가 게야무라를 따라와 일본에서 같이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무덤
우선 우에쓰카는 히코산 기슭 자신의 땅에다 보수원(寶壽院)이라는 사당을 짓고 그 사당에다 논개와 게야무라를 함께 모시기로 계략을 꾸몄다. 이 계략에 당시 진주에 사는 몇몇 인사들이 동조하였다.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 새로운 한일교류 등이 그의 주된 논리이었다.
보수원(寶壽院)의 준공
우에쓰카는 보수원을 짓고, 진주(晉州)와 장수(長水)에서 가져간 모래, 흙, 나무, 돌로 논개의 묘를 만들고 묘비까지 만들어 세워 두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건너와 남강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지는 의식과 건져낸 넋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의식은 일본식으로 준비, 진행하였다.그는 진주 남강 위에 국화꽃을 뿌리고 1,000마리의 종이학을 띄우면서 염불을 하였다. 이러한 우에쓰카의 계략에 넘어간 진주의 몇몇 인사들은 논개의 영혼을 일본으로 보내는 환송의식을 베풀어 주었다. 결국 한국의 동의를 얻은셈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진주 촉석루 옆 의기사(義妓祠)에 걸려있던 논개의 영정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린 영정까지 가지고 갔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논개의 영정은 마치 게야무라의 첩이라도 되는 양, 그의 아내, 처제와 나란히 놓여 있다. 이에따라 " 전쟁 중에 게야무라를 만난 논개(論介)가 전쟁이 끝난 뒤 게야무라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와 함께 해로하다 죽었다..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생겨났고, 심지어는 논개는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 부부관계를 좋게 만들고 아기를 점지해 주는 신(神) "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1976년 음력 6월29일 보수원의 준공식 때에는 그를 도운 진주 몇몇 사람은 부부동반으로 준공식에 참여하였고, 당시 진주시장은 우에쓰카에게 감사장까지 수여하였다. 그 우에쓰카가 1996년 여름에 다시 진주를 방문하였다. 당시 후쿠오까주제 한국 총영사도 참석하였다. 의기사(義妓祠)에 걸려있던 논개의 영정이 친일파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가 그린 것이어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우에쓰카는 자신이 그 영정을 사가기 위해 진주에 온 것이다. 친일파가 그린 영정이니까 그래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법이 아니겠냐면서...
보수원 그후...
해주최씨 종친회는 1998년 4월,정부에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줄 것과 진주 남강(南江)에서 불러간 논개의 영혼, 자웃 지방의 돌로 만든 논개 비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찾아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진주시의 회신을 뜻밖이었다. 일본정부가 아닌 만간인 우에쓰카가 한 일이고, 그의 진의가 역사적 사실이나 논개의 정신을 퇴색시키기 위한것이 아니며, 한일간의 화해와 협력에 나쁘지 않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이었다.
논개 영정을 돌려 받는 일 등 굳이 하고 싶다면 해주최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해결하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장본인 우에쓰카는 "사전에 논개가 최경회(崔慶會)의 부인임을 몰랐다."며 "해주최씨 문중에서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영정을 반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영정 외에 영혼과 비석은 돌려줄 수 없으며, 합동위령제는 계속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논개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는 재일동포 거류민단의 반대로 영정마져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400여년이 걸렸다. 그런데 적장 게야무라와 그 부인들과 함께 있는 논개의 영정과 영혼이 한국땅으로 되돌아와 그가 편안히 잠들 때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인지.....
의암사적비(義巖事跡碑)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 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1722년(경종 2)에 세웠다. 이에 앞서 정식(鄭拭)은 1721년(경종 1)에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으로 하여금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하도록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논개의 순국사실에 관한 전거의 수집과 족속들을 찾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다 하였고, 한편으로는 전 별장 윤적보(前 別將 尹滴輔)를 앞세워 장문(壯文)을 조정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우병사 최진한의 신보(申報)에 의거하여 경종 임금에게 계문(啓聞)하게 하였고, 마침내 경종임금은 예조로 하여금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 급복(給復)의 특전 여부를 시행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官妓에서 義妓로
하지만 이때는 논개가 죽은지 벌써 12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전거가 될만한 문적이나 족속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진한은 뒷날 좌병사로 전임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계청, 논개가 의기(義妓)로 호칭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논개가 죽은지 129년이 지난 1722년(경종 2)부터 관기 논개(官妓 論介)는 의기 논개(義妓 論介)로 호칭하게 되었다.
논개가 죽은지 147년 후인 1740년(영조 16)에 병사 남덕하(南德夏. 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義妓祠)를 창건하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景宗의 교지
논개가 왜적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면서 죽음 보기를 고향 가듯이 하여 ' 의암 (義岩) '이라는 이름이 이제까지 전하여 내려온다 하니 관기(官妓) 가운데서 이처럼 뛰어난 절의(節義)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자손을 찾아가서 별도로 부역(賦役)을 면제시켜 주고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
비문 내용
어우당 유몽인이 야담에 이르기를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었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흩어지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의암기(義巖記)
1593년 6월29일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스스로 빠져 순절한다. 그후 유몽인이 그의 저서 어우야담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최초로 기록한 이후 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정대륭)은 논개가 죽은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새긴다. 그리고 1652년 오두인(吳斗寅)은 위의 의암기(의암기)를 지어 촉석루에 현판하였다.
진양의 성, 촉석의 아래, 남강의 물가에 한 가파른 바위가 있는데 바로 강물 중앙에 들어가 사면이 다 물이다. 뭍으로부터 들어가면 겨우 한 걸음을 용납하여 그 위에 가는 것이다. 만약 반 보만 어그러지면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곳이다. 옛날 만력 (1593년) 검은 이의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창의사 김천일이 결사 병졸 1000명을 거느리고 진양성에 들어가 근거하여 적의 예봉에 항거하였다.
그 힘이 다하여 성이 함락되는 날에 미쳐 성 안의 사람들은 거개 투항하여 삶을 구했지만 당시에 관기 논개가 있었는데, 적과 함께 살아남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죽음에 나아가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보아 화장하고 옷단장하고 초연히 이 바위의 위에 우뚝 섰다.뭇 왜인들은 바라보고 기뻐하고 그 위태로움을 두려워 하여 감히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한 왜인(倭人)이 몸을 떨쳐 바로 나아가 꾀어 나가려 했다. 기생은 이에 웃음을 취하고 맞이하여 마침내 그 왜인을 안고 몸을 강에 던져 죽었다. 그러므로 뒷사람은 슬퍼하면서 의롭다고 여기고 마침내 의암(義巖) 두 자를 새겨서 그 의로움을 표명하였다. 의롭도다 ! 바위여, 어찌 '주역'이 말하는 ' 돌과 같이 홀로 중정하고 자기를 지킨다 ' 그리고 '시경"의 위나라 시가 말하는 '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니 굴릴 수 없다 '가 아니겠는가.
저것은 남방의 한 창기(娼妓)임에도 불구하고 침착히 의에 나아가 그 죽어야 할 곳에 죽었다. 이를 처리한것이 열렬하여 대장부 사업과 같아서 저 당일의 일반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진실로 우리 국의 심혼한 은택이 사람들로 하여금 감발하게 한것에 남쪽 나라 부인들이 문왕의 정치에 교화되어 장강과 한수 지역의 풍속을 변하게 한 것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것을 얻겠는가.
의기사(義妓祠)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7호로, 왜군의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진주시 본성동 촉석루 입구에서 뒷편으로, 정면에서는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1721년 (경종 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崔鎭漢)이 진주지역 주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그후 20년이 지나 1740년 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그후 1779년 정조 3년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 정약용(丁若鏞)에게 "의기사기(義妓祠記)"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1823년 순조 23년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감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봄 가을에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논개의 순절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는 꾸민 것 ???
1. 논개를 "신안주씨 무열공 주몽룡의 후손"이라고 하나, 논개는 주몽룡(朱夢龍. 1563~1633)의 후손이 아니다. 주몽룡은 명종 18년(1563)생이고, 논개(1574. 선조 7) 생이면, 그 사이는 불과1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겨우 11살 아래의 논개가 어떻게 주몽룡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주몽룡이 세종시절에 병조참판을 지냈다고 하나, 그는 세종 때의 인물도 아니고 병조참판을 지낸 사실도 없다. 정동주의 소설 "논개"에 그렇게 되있을 뿐이다.
2. 전라우도 의병장 최경회가 경상우도 순찰사 조종도(趙宗道.1537~1597)의 구원요청에 의하여 영남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조종도는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이었을 뿐, 경상우도 순찰사를 역임한 사실도 없고, 최경회에게 구원을 요청한 사실도 없다고 한다.
3. 논개의 아버지로 주달문, 어머니를 박씨, 삼촌을 주달무, 지방 토호 김풍헌 그리고 민며느리 사건 등의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주달문이라는 이름은 1960년 김상근 장수교육감이, 그 밖의 것은 1982년 장수군에서 발행한 "삼절의 고장"에서 내세운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소설 등에 의하여 사실처럼 회자되었다.
4. 최경회가 장수현감(1577~1579)으로 있을 때 민며느리 사건을 심판하면서 논개 모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고 또한 외직과 경관직에 갈 때마다 어린 논개를 10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니다가, 끝내는 58세의 최경회가 16세의 논개를 1590년 초봄에 담양부사로 임명되자 논개를 부실(副室)로 맞아들였다..고 하였으나 이도 정동주의 소설에만 나오는 이야기이다. 최경회에게는 나주김씨와 여흥민씨 등 이미 두 배위가 있었으므로 부실(副室)을 취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수군지에는 논개가 1591년 봄에 장수현감 최경회의 측실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 때의 최경회는 담양부사로 재임 중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화순의 본가에 있었다. 다시 말해 이때의 최경회는 장수현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5.1799년(정조 23) 광주에서 편찬된 "호남절의록"의 최경회 條에서 " 기생 논개는 장수사람이다. 공이 좋아했다"고 한 대목에 대하여.. 이에 앞서 영조 26년(1750), 최경회의 시호(諡號)를 청원하기 위하여 작성된 " ..최공청시행장"에, 논개라는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그의 천첩은 공이 죽던 날 ..."등으로 말하며, 논개가 마치 최경회의 천첩인 것처럼 주장된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하여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최경회의 청시(請諡 .. 시호를내려줄 것을 요청)에 이용한 것이다.
6. 그런 49년 후 화순의 최경회의 후손들은 "호남절의록"을 편찬할 때 최경회가 장수현감을 역임한 내력에 관련시켜, 기생 논개를 장수사람이라 하고, 최경회가 좋아했다는 등으로 부회한 것이다. 그러나 최경회가 장수현감으로 있은 시기는 1577~1579년 이므로, 이때 논개의 나이는 겨우 4~5세이었다. 이렇게 어린 논개를 최경회가 좋아하였다?? 그런데도 이것이 오늘날 논개가 장수사람이 되고, 최경회의 副室인 것처럼 회자된 것이다.
7.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촉석루에서 전승 축하연을 열었다"고 하였으나, 촉석루는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 소실되고 없었다. 그런데도 1903년 전주에서 편찬된 "호남삼강록"에는 그렇게 주장되어 있다. 이밖의 사료에는 어디에도 없는 주장이다.
8.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에 뛰어들었다"고 하였으나, 게야무라는 임진년 7월에 함경도에서 죽었기 때문에,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는 참가하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9. 논개는 진주사람이다. 1757년(영조 33),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여지도서", 1832년(순조 32)의 '진주목읍지", 1892년(고종 29)의 영남읍지 등에는 논개가 晉州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논개는 조작된 영웅 ?
2007년 3월, 진주에 있는 의기사(義妓祠)에 있는 논개 영정을 강제로 떼어낸 진주시민단체 회원들에 대하여 대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친일 화가 김은호(金殷鎬)가 논개의 영정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정(影幀)을 강제로 떼어낸 것이다. 논개를 국난(國難) 극복의 대표적인 여성 영웅,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하는 일반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과연 논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왜장(倭將)을 껴안고 죽은 것일까? 박노자(朴魯子) 노르웨이 국립오슬로대학 교수는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그는 논개가 왜장(倭將)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것, 전남 장수(長水)가 고향으로 본관은 신안 주씨(新安朱氏)라는 인적사항도 모두 후대(후대)에 조작된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박노자는 논개의 죽음에 대하여 수많은 정치적 미화(美化)가 곁들여졌다는 것이다.
박노자교수
논개와 관련된 최고(最古)의 자료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1621)에는 논개가 " 욕(辱)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것으로 쓰여있다. 유몽인(유몽인)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光海君)을 따라 진주(晉州)에 갔을 당시 들은 목격담을 기록하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논개의 죽음을 "유교 군주의 교화를 입어 차마 나라를 버리고, 적을 따르지 못하는 관기(官妓)의 가상한 충성심 "으로 파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논개의 죽음에 대한 각색
논개의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각색은 18세기 초, 진주지역의 유생(儒생)들과 지방 관료들에 의하여 진행된다. 이들은 조정에 논개에 대한 봉작(封爵)과 사당(祠堂)의 건립을 요청하면서 그저 " 왜군 "으로 묘사되던 " 강간범 (强姦犯) "을 "왜장 (倭將) "으로 승격시키고, 강간범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던 논개를 의도적으로 왜장을 유혹하여 투신해 전공(戰功)을 세운 여성 의사(義士)로 그려낸다. 18세기 중반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진 후에는 출신, 신분이 불분명하던 논개에게 고향과 본관이 생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천첩(賤妾)으로 신분도 승격되었다.
각색의 이유
박노자교수는 논개의 신격화(神格化)를 당시 진주가 차지하던 사회정치적인 지위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이중환(이중환)의 " 택리지 (택리지)"에 따르면, 진주(晉州)는 구례, 남원과 더불어 조선 최대의 옥토(玉土)로 일컬어 지던 곳, 이를 바탕으로 진주의 양반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고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중앙으로의 진출 역시 활발하였다.
진주가 고향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은 이곳에서 유가(儒家)의 실천정신을 중시하며 남명학파(南冥學派)를 이끌었다. 그러나 남명학을 이념적 지주로 삼던 광해군(光海君) 정권이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이후 몰락하고, 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 1728)의 사상적 뿌리가 남명학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진주는 역모(逆謀)의 사상적 고향으로 낙인찍혀 차별을 받기 시작하였다.
박노자교수는 이 때문에 진주의 유생(儒生)과 사대부들이 진주를 충절의 고향으로 승격시키기 위하여 논개의 신격화 작업에 매달렸다고 주장한다. 이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요소까지 덧씌워지면서 논개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박노자교수는 논개의 행동을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논개가 설령 국가와 임금 혹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자신을 지킨 행동이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맺고 있다.
논개의 生家
논개의 묘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芳池)마을에 논개의 묘가 있고, 바로 그 뒤에 최경회(崔慶會)의 묘가 있다. 방지마을에 들어서면 논개묘는 왕릉처럼 웅장하게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는데, 왕릉은 흙을 쌓아 만든 인작(人作)의 경우가 많지만, 논개묘는 천작(天作)으로 만들어진 명당이라고 한다.
신안 주씨(新安 朱氏)
' 신안주씨(新安 朱氏) ' 는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인 주자(朱子)의 후손(後孫)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가문인데, 논개(論介)가 후실(後室)이 되고 일시나마 기적(妓籍)에 올라있어 비록 왜장(倭將)을 껴안고 죽었지만, 문중(門中)에서는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족보(族譜)에서 논개(論介)의 5대조까지 삭제해 버렸다고 한다.
논개가 이곳에 묻히게 된 사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1593년 6월20일부터 열흘간의 치열한전투 끝에 진주성은 함락되고 최경회(崔慶會)는 남강에 뛰어들어 장렬한 순절로 최후를 마쳤다. 이 슬픈 소식을 들은 논개는 승전 연회장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기적(妓籍)에 오른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논개는 촉석루에서 열린 승전 연회장에 참석하여 왜군 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이때 논개의 나이 20살이었다. 최경회의 부하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남강 하류에서 거두어 논개의 출생지인 장수(長水)로 오는 도중에, 선대의 고향이며 신안주씨(新安朱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방지(芳池)마을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러면 전라도 장수사람인 논개와 화순사람인 최경회가 왜 경상도 함양땅에 묻혀 있을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방지마을에 시신을 묻는데도 왜군의 보복이 두려웠고, 한편 주씨 문중에서는 논개가 기적에 오른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시신의 인수를 거절하여, 병사들이 밤중에 아무렇게나 묻어주었다고 한다. 그 후 논개와 최경회의 묘는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졌다.
묘의 발견
그러다가 조선 말기의 장수출신 학자 오덕렴(吳德濂)의 유고문집인 경독재집(耕讀齋集)에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 뒤쪽 골짜기에 안장되었다 (...崔慶會長水縣監 晉州兵使 龍蛇之亂 晉州敗殘長後義兵 收崔兵使義岩屍身運柩 安義縣西上面芳池里 堂山後麗鞍葬...)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묘를 1975년 찾아내고 단장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앞의 묘가 논개, 뒤의 묘가 최경회의 묘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 만해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서있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 논개여 /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느뇨 /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 나는 황금의 칼에 베혀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마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열었다. / 갸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떠릴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 더욱 슬프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굼치에 밟히운, 강 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도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만은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만은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셔요, 논개여
금석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셔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적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이느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鐘)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 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 없는 맹서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데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최경회의 묘
의암별제 義巖別祭
의암별제(義巖別祭)는 매년 음력 6월에 길일을 택하여 논개를 추모하기 위하여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하고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이며,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의암별제의 시작
1868년 고종 5년, 당시 진주목사이었던 정현석은 진주병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다시 중건한뒤,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이었다.
기생들의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았던 정현석은 논개에 대한 불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제의와 가무(歌舞)로서의 의암별제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종묘(宗廟)에서 역대 임금을 제사지낸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미롯하여 중국의 성인들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석존대제(釋尊大祭)를 제외하고서 이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868년 첫 제례 때 300명의 기생들이 연 3일 동안 진행하는 엄숙한 제례의식과 樂歌舞 즉, 의암별제 가무의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정현석 진주목사 자신도 그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무진년 6월에 단을 만들어 향불을 피워 3백명의 기녀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개낭자의 충의와 영혼이 내려오는 듯 하구나" 1893년(고종 30)년 진주성함락 300주년을 맞아 열린 의암별제는 수 천 명의 구경하는 인파가 몰렸다는 기록이 전하다.
의암별제의 폐지
의암별제는 조선시대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 버금가는 종합가무제로, 그 자체가 갖고있는 반일적(反日的) 특성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단절되었으나, 진주검무 인간문화재 성계옥여사의 평생에 걸친노력으로 1992년 그 빛을 보게 되었다 .
문학속의 논개
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 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남콩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입술은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남콩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러니 /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논개 .. 모윤숙
오오! 이 마지막 밤이여! / 어서 나를 몰아가다오 / 나의 성(城), 나의 사람, 시민장군이시여! / 이방(異邦)의 사나이를 껴앉은 채 / 두 몸이 한 몸 되어 / 최후의 길에 올랐습니다 / 서투른 기교로 / 때로는 분노를 억제하며 / 지체 높은 이들의 시중을 들지만 / 그것은 참다운 내가 아니어라 / 뚫을 수 없는 그물에 걸려 / 우리 안에 갇힌 수인 같은 것 / 그것은 참다운 내가 아니어라
밤과 밤을 잇는 몽롱한 순간들이 / 하나하나 항거의 아픔으로 꽃이 되어 / 그의 가슴 안에 피어나게 하리니 / 이 몸 미천한 여인일지나 / 근심 안에 도사린 그 등불을 / 어느 바람에도 꺼지지 않도록 / 이 머리카락들을 바람에 빼앗길지어나 / 저 외람된 왜병의 무리를 향하여 / 마디마디 맺힌 한을 /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 풀어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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