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홍의장군 곽재우

영국신사77 2014. 2. 3. 23:08


非山非野 2009.04.04 11:53

 

 

                                       곽재우                       郭再祐

 

 

 

 

 

곽재우(郭再祐)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이다.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義兵)'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일 것이다. 그 표현대로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起義 .. 의병을 일으킴)하였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紅衣)를 입고 지휘하여 뛰어난 무공(武功)을 세웠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獄死)한 김덕령(金德齡)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戰亂)이 끝난 뒤 의병장(義兵將)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는 했지만 끝내는 은둔(隱遁)하면서 '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고 살았다 .. 벽곡찬송.. 僻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郭再祐)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륙(殺戮)이 난무한 전장(戰場)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하였다.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은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으로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다. 그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 (南溟 曺植)의 외손녀 사위이다. 1585년(선조18), 34세의 나이에 별시(別試)의 정시(庭試)에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수일 만에 전방(傳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전방(傳榜)이란 조선시대  인사(人事)에 관한 일을 신속하게 당사자의 집에 통지하던 일을 말한다.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 처음으로 관원(官員)에 임명된 사람, 수령(守令)에 임명된 사람이 있을 때, 관아에서는 방군(榜軍)을 당사자의 집에 보내 그 뜻을 빨리 알렸다. 과거에 급제한 경우에는 초시(初試) 이상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그 관직 성명을 적어서 전하였다. 

 

 

 

각 관청에 소속된 사령(使令)인 방군(榜軍)은 합격한 자의 집을 찾아가 고성(高聲)을 지르고 집안이 뜰에까지 들어가 떠들어 횡포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크게 환영하여 대접했으며, 주인이 대접하지않을 때에는 제멋대로 집에 들어가 쌀이나 물건을 가져가기도 하였다. 당사자의 집이 지방에 있을 경우에는 방군(榜軍)이 여러명 씩 내려와 술과 음식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선비는 파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후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官軍)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하여 왜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최초(最初)의 의병(義兵)이었다.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가면 곽재우장군의 묘(墓)가 있다.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지만, 본관인 현풍(玄風)이 인접한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였다. 그는 임진와랜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한성부 좌윤 등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혼탁한 조정과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낙동강변에 ' 망우정(忘憂亭) '을 지어 유유자적하다가 조용히 생을 마쳤다. 묘역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봉분이 무너져 내려 초라해 보인다.

 

 

 

 

 

 

 

 

 

 

곽재우(곽재우)는 10대 후반부터 문무(문무)를 함께 연마하였으며,  1575년 ~ 76년에는 의주목사(의주목사)로 임명딘 아버지를 따라 의주(의주)에 살았으며, 15788년에는 명(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은 그 후 임진왜란에서 그의 상징이 된 ' 홍의 (홍의) '의 옷감이 되었다.  선조(선조) 18년인 1585년, 그의 나이 32세 때에 별시(별시) 과거에서 제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선조(선조)는 그의 답안에 불손(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 별시(별시)의 합격을 모두 취소하였다.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곽재우는 크게 낙망하였을 것이다. 불행(불행)은 거듭 찾아왔다. 이듬해 8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곽재우는 선산(선산)인 현풍(현풍)에서 삼년상(삼년상)을 마치고 1588년에 탈상(탈상)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이었다. 

 

 

그 뒤 곽재우는 과거(과거)를 포기하고 의령(의령) 동쪽 남강(남강)과 낙동강(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기강) 근처 둔지(둔지)에 정자(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 망우집(망우집 .. 그의 문집)에 실리있는 ' 년보(년보) '에는 그 2년 동안 ' 재강정 .... 강가의 정자에 있었다 '고만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처사적(처사적) 삶은 세속(세속)과 어느 정도 절연(절연)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없이는 영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일기(광해군일기)에 실려있는 그의 졸기(졸기)에서는 이 당시 그가 그냥 은둔(은둔)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영(농업경영)에 힘써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하였다.  

 

 

 

 

 

 

 

                                     의병 활동                          義兵 活動

 

 

 

 

 

곽재우는 1585년, 34세의 나이에 과거(科擧)에 합격하였으나, 그가 지은 글이 선조(宣祖)의 마음에 안들어 합격은 취소되었다. 곽재우는 과거(科擧)의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가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곳에 은거한지 3년만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고,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곽재우는 같은 달 22일 곽재우는 의병(義兵)을 일으킨다.

 

 

 

 

 

                                                임진왜란 발발 후 9일째 되던 날

 

 

 

 

 

곽재우는 사재(私財)를 털어 고향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9일째 되던 4월22일 고향집 느티나무 ' 현고수 (懸鼓樹) '아래 북을 매달고 북을 치면서 의병을 모았다. 하지만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은 자신의 노비 10명이었다고 한다. 4월22일은 왜장(倭將)  '모리 테리모토 '가 왜군 3만 명을 이끌고 김해, 창원을 점령하고 현풍으로 들어오던 날이었다. 그는 ' 현고수(懸鼓樹) '에 북을 매달고 북을 치면서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후 이불을 찢어서 깃발을 만들고 붉은 관복을 입은 다음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곳간을 열고 사람들에게 곡식을 마음대로 퍼가게 하였다. 곽재우는 평소 눈여겨 본 지략과 담력을 가진 젊은이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설득한 결과 가까스로 수십 명을 모을 수 있었다. 다음은 선조(宣祖) 25년 6월1일의 실록(實錄)의 기록이다.

 

  

 

각 도(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이때에 삼도(三道)의 신하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倭亂)이 일어난 뒤에 병기와 군량을 독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巨族)으로 명망 있는 사림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원근에서 모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그리고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湖西)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군(官軍)이 패전을 거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인심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명망 사족들은 백성들이 주축이 된 의병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 곽재우 '이었다.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그 휘하에 모인 군사가 1,0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평소에 그가 닦아 놓은 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선조 25년 6월28일, 실록의 기록이다.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 곽재우(郭再祐) '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을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의병(義兵)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병장기와 군량(軍糧)을 취득하였다.  

  

 

 

 

 

                                                              최초의 전투

 

 

 

 

 

처음에 그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奴婢) 10여 명으로 출발하였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하여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후 그의 의병은 2천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첫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불리한 전황(戰況)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하였던 그의 부대는 관군(官軍)이 도망하여 비어 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軍糧)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全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아런 행동을 오해(誤解)하여 그들을 토적(土賊 .. 지방에서 일어난 도적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郭再祐) 부대는 그 뒤 의령(宜寧)을 거점으로 현풍, 영산(靈山 .. 지금의 창녕), 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湖南)으로 들어가는 정암진(鼎巖津 .. 경남 의령에 소재한 남강의 나루)를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육지(陸地)에서 왜군과 싸워 조선군이 승리한 최초(最初)의 전투로 왜군(倭軍)의 호남(湖南) 진출을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92년 5월4일, 왜군의 척후선 3척이 남강(南江)을 거슬러 올라온다는 보고를 받고, 곽재우는 선봉장 ' 심대승 '을 비롯한 날래고 용력있는 부하 10명을 인솔하여 거름강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는 강가 갈대밭에 궁수를 매복시키고, 강 속에는 통나무와 밧줄 등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기다리다가 왜적선이 장애물에 걸려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틈을 타 공격명령을 내렸다.곽재우 의병들의 기습 공격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왜군은 모두 죽고 군선도 침몰하였다. 왜군의 보급 루트인 거름강 어귀를 지키며 왜군들을 기습공격하여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 전법은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사용한 전법인데, 이미 곽재우가 구사하였던 것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곽재우는 자신감을 얻었고, 많은 의병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름강'은 현재 창녕군 남지읍과 함안군 칠서면, 의령군 지정면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활동으로 의령, 창녕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왜군의 호남진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왜군의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어 승리로 이끄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정암진 전투                         鼎巖津 戰鬪

 

 

 

 

 

 

 

 

 

 

임진왜란 초기 왜군(倭軍)에게 크게 밀린 조선의 조정은 3대 곡창(穀倉) 지대 중 경상도((慶尙道)와 충청도(忠淸道)를 잃고 남은 전라도(全羅道)는 쌀이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이었다. 왜군(倭寇)도 이를 알고 전라도(全羅道)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宜寧)을 공격하게 된다.  

 

 

 

1592년 6월, 함안을 점령한 왜군 2천 명은 의령을 공격하기 위하여 정암진(鼎巖津)에 도착해서 강을 건너기 위한 도하작전을 시도하였다. 당시 이순신이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육로를 통해 전라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에 곽재우는 의병 50명을 동원하여 남강 북안의 정암진에 매복시켰다. 왜군 병력은 정안진 대안에 도착하여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도하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푯말을 꽂아 표시해 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밤 사이에 의병들을 동원하여 나무푯말을 늪지대에 옮겨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의병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왜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하였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선멸되었고, 주력부대가 남강을 도하했으나 미리 대기하던 의병들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승리를 거둔 곽재우 의병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으로 의령과 산가 두 현(縣)을 곽재우의 지휘 아래 편입시켜 병력이 1000명이나 되었고, '오운'과 '박사제'의 3000명 병력까지 합세하여 총 4000명의 병력이 되었다.      

 

 

 

 

 

 

 

 

 

 

 

 

 

 

왜군(倭軍)의 일방적인 승리로 곧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내륙의 의병(義兵)과 해전(海戰)의 이순신(李舜臣)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長期戰)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황(戰況)의 변화에 따라 곽재우(郭再祐)의 역할도 바뀌었다. 그동안도 그는 왜군(倭軍)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산성(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防禦戰)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1594년부터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가야산의 용기산성(龍起山城), 지리산의 구성산성(龜城山城) 등 경상도 일대의 산성을 정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순신(李舜臣), 원균(元均) 등과 함께 거제도(巨濟道)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중요한 격전지 가운데 한 곳인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임명되었고, 경상도관찰사, 경상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곽재우(郭再祐)는 명(明)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講和協商)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관직(官職)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玄風)으로 낙향(落鄕)하였고, 그곳에서 2년 동안 칩거(蟄居)했다. 승전(勝戰)을 거듭해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落鄕)한 이례적(異例的)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朝廷과의 불화(不和)이었다. 앞서도 그러하였지만 그 후 처사(處四)로 은둔(隱遁)하여 곡기(穀氣)를 끊고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곽재우(郭再祐)는 기본적으로 직선적(直線的)이고 비타협적(非妥協的)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갈등을 일으켰다.

 

 

 

                                                    관찰사 ' 김수 '와의 갈등

 

 

 

그 첫 사례는 전란(戰亂)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관찰사 ' 김수(金粹) '와 관련된 것이었다. 1592년 6월 ' 김수(金粹) '가 패전(敗戰)하자 곽재우(郭再祐)는 그를 패장(敗將)으로 처형(處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金粹)도 곽재우(郭再祐)가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김성일(金誠一)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593년 제 2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와 1594년 거제도(巨濟島) 작전에서도 곽재우(郭再祐)는  전략(戰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나중에 두 사안 모두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反撥)을 초래하였다.

 

 

이런 마찰로 형성된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국왕 선조(宣祖)가 그를 비판적(批判的)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낙향(落鄕)한 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중심으로 그를 다시 기용(起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선조(宣祖)의 반응은 매우 싸늘하였다. '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 .. 선조실록. 1595년 12월 5일 ' 의 기록과 ' 곽재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처사를 보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도체찰사(都體察使)가 격서(檄書)를 보내 불렀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함부로 병권(兵權)을 맡길 수 없다 .. 선조실록. 1596년 2월 18일 '라는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기록 등을 볼 때 선조(宣祖)는 왕명(王命)을 대행(代行)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부름에 곽재우가 따르지 않자 선조(宣祖)는 그가 왕명을 무시(無視)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불신(不信)은 이때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발원은 앞서 말한 김수(金粹)와의 충돌이었다. 그때 선조(宣祖)는 ' 곽재우(郭再祐)가 김수(金粹)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신의 병력을 믿어서 그러한 것은 아닌가 ?  1592녀 8월 7일 ' 고 물었고, 나아가 선조(宣祖)는 '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監使)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後患)이 있을 것 '이라고 까지 말하였다. 권력자 속성 가운데 하나는 의심(疑心)이고, 그런 성향은 위기(危機)의 국면에서 더욱 짙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이순신(李舜臣)에게 그랬듯이, 뛰어난 무공(武功)을 세운 의병장(義兵將)을 보는 국왕 선조(宣祖)의 이러한 태도는 상당한 문제이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郭再祐)는 다시 경상도 방어사(防禦使)에 기용되었다. 일단 그는 현풍(玄風)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수축하여 주둔하다가 창녕의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왜란(왜란)에서 곽재우(郭再祐)의 활약은 여기서 끝나게 딘다. 복상(服喪)때문이었다. 선조(宣祖) 30년인 1597년 8월 계모(繼母) ' 허씨 '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지낸 뒤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피신해 삼년상(三年喪)을 치렀다. 복상(服喪) 중에도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이 몇 차례 내려졌지만 그는 상중(喪中)이라고 거절하였다. 그동안 거대한 전란(戰亂)은 끝났다. 탈상(脫喪)한 곽재우(郭再祐)는 1599년 10월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그지역의 군무를 총괄하였다. 당시로서는 노년(老年)의 초입에 접어든 48세이었다.        

 

 

 

 

 

 

                                       남명 조식                      南冥 曺植 

 

 

 

 

 

의병장(義兵將)들은 대부분이 지역의 명망가로서, 이들을 따르는 농민과 천민들이 자발적으로 합세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지역을 거점으로 게릴라전과 유격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리(地理)에 어두운 왜적들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면서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의병에는 불도(佛道)를 닦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더 잘 알려진 ' 휴정 (休靜) '은 선조(宣祖)의 명을 받들어 팔도(八道)의 사찰(寺刹)에 격문(檄文)을 보내 승병(僧兵) 결성을 독려하였다.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있던 ' 휴정 (休靜)'의 제자 사명당(四溟堂) ' 유정 (惟政) '은 휴정(休靜)의 격문을 받고 다시 사방에 글을 띄워 무리를 모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거의 1,000명이나 되었다. 이들 승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 보다는 경비나 무너진 성(城)의 보수와 같은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아 여러 곳에서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의병(義兵)정신의 뿌리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無能)에 대한 비판과 함께 '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는 자발적 향토방위 조직이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시(國是)로 채택된 성리학(性理學) 이념의 충의(忠義) 정신 또한 한 몫하였다. 의병활동은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왜적(倭敵)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 중기 칼을 차고 다니면서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한 ' 남명 조식 (南溟 曺植) '의 사상적 영향도 큰 작용을 하였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종도, 이대기 등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실천중시(實踐重視) 사상은 이 지역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국난(國難)의 시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합천의 정인홍,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등은 이 지역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남명 조식의 문하이었다. 곽재우는 '조식(曺植) '의 외손녀 사위로서 조식(曺植)에게 직접 병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경상우도 지역 의병의 활약은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호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조선 후기 주요 인물들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 조건은 당쟁(黨爭)이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학문과 혈연(血緣)관계가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었고, 그리하여 그 영향과 파괴력은 넓고 깊었다. 곽재우(郭再祐)도 당쟁(黨爭)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 남명 조식 (南冥 曺植) '의 외손(外孫) 사위라는 혼인관계가 보여주듯이 북인계(北人系)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南人)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란(戰亂) 동안 그를 계속 추천하고 인정한 인물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이원익(李元翼) 등 남인(南人) 계 중신들이었다.  

 

 

 

 

 

 

                                       당쟁와 은거                          黨爭과 隱居

 

 

 

 

 

 

곽재우(郭再祐)의 정치적 시련은 전란(戰亂)이 끝난 뒤에 닥쳤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러하였듯이 , 그 시련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개진하여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선조(宣祖) 33년인 1600년 2월 붕당(朋黨)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파직(罷職)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직(辭職)한 것이었다. 그는 선조(宣祖)의 재가도 받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조(宣祖)는 ' 장(杖) 100대에 멀리 유배(流配)를 보내도 부족하다 '고 하면서 대노(大怒)하였다. 결국 그는 대북계(대북계) 중진인 대사헌 홍여순(洪汝詢)의 탄핵(彈劾)으로 전라도 영암(靈巖)에 3년 동안 유배(流配)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처음으로 겪은 주요한 정치적 시련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되지만, 그가 자신의 당색(黨色)을 남인(南人)으로 자정(自定)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선조(宣祖) 35년인 1602년에 해배(解配)되어 현풍(玄風)으로 돌아온 뒤 익힌 밥을 멀리하고 솔잎만 먹었다.  그리고 영암(靈巖)에 망우정(忘祐亭)을 짓고 은거(隱居)하였다. 이 당시 그의 생활을 '肅然若一道人也 .... 쓸쓸한 도인 같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국왕인 선조(宣祖)의 분노(忿怒)를 산 그가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듬해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는 ' 경상우도(慶尙右道)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 '라면서 공신(功臣) 책봉을 건의하였지만, 선조(宣祖)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將帥)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倭敵)을 막은 것은 양(羊)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이 수전(水戰)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權栗)의 행주(幸州)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등지 못하였다. 그 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하나의 성(城)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 1603년 2월 12일 '고 선조(宣祖)는 곽재우의 전과(戰課)를 폄하(貶下)하기에 급급하였다. 결국 곽재우(郭再祐)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그 후 선조(宣祖) 38년인 1605년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만에 병(病)으로 사직(辭職)한 뒤 중곧 망우정(忘祐亭)에서 지냈다. 1607년 1월에는 영남(嶺南) 남인(南人)을 대표하는 ' 한강 정구 (寒岡 鄭逑) '와 ' 여헌 장현광 (旅軒 張顯光) '이 방문하여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노년(老年)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해평(海平) 부원군으로 좌천성 등을 역임한 당시의 주요한 대신(大臣)이었던 윤근수(尹根壽)는 그가 곡기(穀氣)를 끊은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 곽재우(郭再祐)가 솔잎만 먹는 까닭은 도술(道術)을 닦으려는 것일고 말하지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덕령(金德齡)이 뛰어난 용력(勇力)으로도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자신도 화(禍)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것을 핑계로 세상을 도피(逃避)하려는 것' 이라고 하였다.    

 

 

 

 

 

 

 

 

 

 

매우 불편한 관계이었던 선조(宣祖)가 승하(昇遐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는 말)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곽재우에게는 새로운 전기(轉氣)가 찾아왔다. 광해군(光海君)은 즉위하자마자  곽재우를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하고 상경(上京)을 재촉하였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 병사(兵使) '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각 도(道)의 군사적인 지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설치한 종2품 서반(西班) 관직이다. 도(道)의 국방 책임을 맡아 유사시 군사적 전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광해군과 곽재우 

 

 

 

 

광해군(光海君)이 곽재우의 상경(上京)을 재촉할 당시 곽재우(郭再祐)의 삶은 청빈함을 넘어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교지(敎旨)를 가지고 찾아갔던 금군(禁軍)은 '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草家)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生計)가 아주 초라하였고, 병(病)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하였다 '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곽재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상경(上京)하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타고 말(馬)과 종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벌 옷도 다 해져 날씨가 추우면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광해군(光海君)은 즉시 의복(衣服)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광해군 즉위년 9월 14일.그 후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한성부 좌윤(左尹)으로 임명되어 잠깐 상경(上京)하였지만, 역관(驛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왕명을 무시(無視)하였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落鄕)하였다.    

 

 

 

                                       낙향과 별세                          落鄕과 別世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 용맹하고 고결한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서울에 있는 동안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같은 중신들이 자주 곽재우를 찾아왔고, 사대부들도 그를 만나려고 몰려들어 집에 자리가 모자랄 정도이엇다. 아이들까지도 그를 보려고 거리를 메워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뒤 곽재우(郭再祐)가 별세(別世)할 때까지 그는 계속 망우정(忘憂亭)에 머물렀다. 앞서 말한 빈한(貧寒)한 환경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처럼 ' 강(江)가의 정자(亭子)에 있었다 '는 이 시(詩)는 그의 쓸쓸함을 담고 있는 듯하다.

 

 

타협(妥協)하지 않는 곽재우의 직선적(直線的)인 성품은 그가 별세하기 전까지 한 전 더 표출되었다. 그때 조정의 가장 큰 논란이었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사사(賜死)하라는 문제와 관련해 곽재우는 그를 옹호하는 상소(上疏)를 올린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될 뻔 하였지만, 장령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노쇠(老衰)한 의병장(義兵將)은 4년 뒤에 별세하였다. 1617년 3월 병(病)이 깊어지자 그는 ' 생사(生死)에는 천명(天命)이 있는 것 '이라면서 치료를 중단하였고, 4월 10일 망우정(忘祐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安葬)되었고, 그를 모신 사우(祠宇)에는 ' 예연서원(禮淵書院) '이라는 현판이 내려졌으며, 숙종(肅宗) 35년인 1709년에는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追贈)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좌찬성을 지내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봉된 이호민(李好閔)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곽재우를 칭송하였다.        문도홍의장     聞道紅衣將    들으니 홍의장군(紅衣將軍)은        /        축왜여축견     逐倭如逐犬     왜군(倭軍)을 개쫓듯 한다고 하네          /    위언종륙력        爲言終戮力       그대를 위하여 말하니 끝까지 힘을 다하여         /    수사곽분양     須似郭汾陽    곽분양처럼 되소서

 

 

곽분양(郭汾陽)은 당(唐)나라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로,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책봉된 인물이다. 그는 관원(官員)으로서 성공하였고, 장수(長壽)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번창하여 세속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인물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노년(老年)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자손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 곽분양 행락도 (郭汾陽 行樂圖) '는 성공과 행복의 상징으로 자주 그려졌다. 

 

 

 

 

 

 

 

 

 

 

 

 

 

 

 

 

 

 

                                               충익공               忠翼公

 

 

 

 

 

곽재우는 사후 1709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고, 충익공(忠翼公)으로 증익되었다. 事君盡節曰忠 .. 충은 임금을 섬기는 데 절의를 다한데서 붙여졌고, 思慮深遠曰翼 .. 익은 사려가 깊고 먼데서 붙여졌다.

 

 

 

 

                                                의병장들의 쓸쓸한 최후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을 비롯한 의병장(義兵將)들의 활약은 전국 곳곳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의병장은 활약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의병(義兵)들의 공(功)이 컸다는 것은 관군(官軍)의 역할이 그만큼 미미(微微)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 의병장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戰亂)으로 인한 불만을 틈타 모반(謨反)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에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모반 사건도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세력 규합을 위해 이름난 의병장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어 조정에서는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 김덕령(金德齡)'은 최초의 대표적인 희생양(犧牲羊)이었다. 곽재우가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후 산(山)으로 들어간 것도 현실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전후에 전공(戰功)은 왕을 호위(護衛)했던 공신(功臣)들의 손에 넘어가고 의병장에 대한 대우는 매우 취약하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도 전쟁 초기 경상감사까지 죽이려고 했던 곽재우(郭再祐)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인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감시인을 파견하여 ' 곽재우 '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이에 곽재우는 관직에 뜻을 잃고 현풍(玄風)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 고양이를 기른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이니,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할 일이 없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 ' 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들어간 곽재우는 이곳에서 도가(道家) 사상에 심취하여 단곡(斷穀 .. 곡식을 끊는 도가의 수련법)에 몰입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전란 후에 선조(宣祖)는 전쟁 승리의 최고 공로를 조선을 도와준 명(明)나라 군대의 공으로 돌렸고, 이 과정에서 선조(宣祖)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 대신(大臣)들이 전쟁의 최고 공로자로 보상을 받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실제 임진왜란 유공자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를 수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86명이나 책봉된 데 비하여, 전공(戰功)이 있는 사람에게 준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에 지나지 않았다곽재우(郭再祐)는 추천을 받았지만 생존해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공신의 책봉 과정에서도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격하(格下)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 자신의 책무를 다했던 김덕령, 곽재우 등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말로(末路)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이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연상시키고 있다.     

 

   

 

 

 

 

 

 

 

 

 

                                         낙향과 별세             낙향과 별세

 

 

 

캐스트

 

 

 

 

 

 

                                              현고수             懸鼓樹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2008년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었다. ' 현고수(懸鼓樹) '란 '북을 매단 나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곽재우가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면서, 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쳤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크기는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7m, 높이 15m에 달하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곽재우는 이곳에서 매부인 허언심(許彦深)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家財)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근처에 있던 곽재우의 생가터는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생가를 복원하였다.

 

 

 

 

 

 

 

 

 

 

 

                                     곽재우 유물                    郭再祐 遺物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에 위치한 충익사(忠翼祠)에는 곽재우의 여러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사용하였던 장검(長劍), 마구(馬具) 및 평소 사용하였던 포도연(葡萄硯), 사자철인(獅子鐵印), 화초문백자팔각대접(花草紋白磁八角大摺), 갓끈 등 모두 6점인데, ' 곽재우장군의 일괄 유물 '이라 하여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 671호

 

 

 

 

 

 

 

 

 

 

 

 

 

                                               장검                    長劍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이 장검은 길이 86cm, 너비 3cm, 자루 16cm의 크기로서, 칼과 칼집이 한 쌍으로 되어 있고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인데, 손잡이 부분은 나무로 되어 있고, 겉은 가죽끈을 교차하여 감았으며, 칼등은 위로 조금 휘어져 있고 칼집은 윗부분이 약간 부식되어 떨어져 있기 때문에 1973년에 마광(磨光) 처리하여 보관하고 있다.칼집의 윗부분 일부가 부식되어 탈락되었고, 그 아래 간격을 두고 2개의 구리테(銅製環)를 돌렸는데, 그 상부에는 각각 여의두형(如意頭形)의 고리가 붙어있어 끈을 묶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집 맨 하단부에는 반원형의 구리장식이 부착되어 있고, 그 앞뒷면을 화형문으로 선각장식하였다.  

 

 

 

 

 

                                                      마구      馬具

 

 

 

 

 

 

곽재우가 타고 다니던 말안장(鞍裝)으로서 부식상태가 심하여 1973년 8월에 완전 살균처리를 한 후 보관하고 있다.

 

 

 

 

 

 

                                                 포도연         葡萄硯

 

 

 

 

 

 

 

 

세로 31.5cm, 가로 21cm, 두께 3cm 크기의 이 벼루는 흑요암(黑瑤岩)으로 만들었으며, 벼룻물을 담는 연지는 초승달 모양으로 그 주변은 포도와 덩굴무늬를 입체감 있게 새겨 넣었다. 거북무늬가 8각으로, 그 윗부분 두 곳에 작은구명이 뚫려 있는 직사각형의 연적(硯滴) 역시 흑요암으로 만들었다. 벼루와 함께 곽재우가 그의 부친과 함께 중국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사자철인          獅子鐵印

 

 

 

 

 

 

 

높이 3cm, 지름 3.5cm의 사자 철인는 철제로 만들어진 작은 인장으로, 손잡이 윗부분에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갓끈

 

 

 

 

 

 

갓끈은 금파와 대나무, 호박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모두 4종류이다. 각각 길이가 75cm, 25cm, 165cm, 168cm의 길이이다.

 

 

 

 

 

                           화초문백자팔각대접                   花草紋白磁八角大蝶

 

 

 

 

 

 

 

 

이 유물은 백자로 된 소형의 팔각 대접으로 높이 6.5cm, 윗지름 21.5cm, 밑지름 12.5cm 크기에 팔각의 각 면마다 풍경과 화초무늬를 그렸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조인물고                       국조인물고

 

 

 

 

 

 

 

 

 

 

공(公)의 휘(諱)는 재우(再祐)이고 자(字)는 계수(季綬)이며, 성은 곽(郭)씨로 관향은 현풍(玄風)인데, 성균관 사성(司成)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양강씨(晉陽姜氏)이다.  명종(명종) 7년인 1552년 8월 21일에 공(公)이 태어났다.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독서를 즐겼다. 27세에 아버지를 따라 경사(京師)에 들어왔는데, 관상을 보는 사람이 공(공)을 보고 말하기를 '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입니다 '고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의 제2명(第 二名)에 발탁되었으나 글귀에 말한 바가 왕(王)의 뜻에 거슬렸기 때문에 급제자를 전부 파방(罷榜)하라 명하였다.

 

 

다음 해에 부친이 돌아가자, 상사(상사)를 마친 뒤에는 과거(과거)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강가에서 낚시로 소일하였다. 임진년 난리에 왜적(왜적)이 모든 성(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그 기세를 몰아 한달 만에 서울을 침범하니, 임금은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공(공)은 사재(사재)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하고 의령(의령)에서 기병(기병)한 다음, 먼저 신번(신번)의 곡식을 점거하고 요해처를 지키면서 연전연승하였지만 또한 적(적)을 참살한 것을 공(공)을 삼지 않았다.

 

 

 

 

 

 

                                      곽재우 생가                           郭再祐 生家

 

 

 

 

 

 

 

 

 

 

                                                  망우정                      忘憂亭

 

 

 

 

 

 

 

 

 

 

 

망우정(忘憂亭)은 곽재우가 만년을 보냈던 곳이다. 곽재우는 1600년 봄에 병을 핑계 삼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사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2년 동안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현풍(玄風) 비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가 1602년, 지금이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강가에 ' 망우정 '을 짓고 기거하였다.곽재우는 망우정에 기거하면서 중간에 벼슬을 제수받아 임지로 오고 감은 있었으나, 말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내다 1617년 4월10일 66세의 나이로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품은 큰 뜻을 역사속에 펼쳐보지 못한 채 속세를 떠난 것이 못내 가슴에 한이 되었을까 .. 전하는 애기로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 뇌성벽력이 크게 치고 비가 많이 쏟아지고 붉은 기운이 하늘을 덮어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사헌부의 탄핵

 

 

 

곽재우는 48세 되던 선조 32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10월19일 울산본영에 부임하였다. 군사가 4천여 명이 있었으나, 대다수가 수군이나 순찰사에 소속되어 있었고, 자신의 지휘 하에 움직일 수 있는 군사는 겨우 4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적은 군사로는 왜적의 재침을 막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왜군의 가등청정이 쌓아놓은 조산성(鳥山城) 수축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왜적이 침입하여도 군사 2천명 정도면 '조산성'에서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군(水軍)도 중요하지만 수군일변도(水軍一邊道)의 군사운용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육군의 확충도 필요하다는 건의도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곽재우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맡은바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臣이 재주도 갖추지 못하고 병사라는 중요한 자리에 올랐으니 ... 죽음을 아끼지 않고 성을 지키려 하였사오나 .. 형세가 손을 묶인 것과 같아서 .. 신(臣)은 나이도 이미 늙고 병도 있어 기력이 쇠퇴하고 ... 속히 신의 직책을 갈고 무용이 뛰어난 장수를 택하여 보내시어 ... 라는 사직서를 올리고 조정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군영을 떠났다. 이 일이 시비가 되었다. 사헌부에서는 이를 문제 삼아 곽재우를 탄핵하였다. 대사헌 홍여정(洪汝諪)이 곽재우를 ' 독만 ...瀆慢 '이라는 죄명으로 탄핵하여 결국 곽재우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유배)었다. 전라도 영암에서 2년간 귀양살이를 마치자  경북 현풍의 비슬산에 들어가 잠시 은둔하며 지내다, 이곳 영산현 남쪽의 창암진(蒼巖津 .. 지금의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강사(江舍)를 짓고 망우정(忘祐亭)이라는 편액을 걸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가 1602년으로 곽재우가 51세 되던 해다. 망우당(忘憂堂)이라는 자호(字號)도 이때부터 불려진 것이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바지에 숨은 듯 앉아 있다.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뒤에는 1789년과 1991년에 세운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다. 원래 ' 망우정(忘憂亭)'은 경남 마산에서 창녕군 영산으로 통하는 낙동강의 나루터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풍광이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며 뱃놀이나 낚시하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없어지고 주변의 환경도 변하여 이전만큼의 경치는 아닌 것 같다. 

 

 

 

 

 

 

 

 

 

 

 

                                                          잊어야 할 근심 ?

 

 

 

 

망우(忘憂)란 근심 걱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곽재우에게 잊어야 할 근심은 무엇이었을까 ? 일찍이 과거(科擧)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의 내용이 선조(宣祖)의 미움을 사 합격(合格)이 취소(取消)되는 불운(不運)을 겪은 이후 출사(出仕)의 뜻을 접었던 곽재우는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 최초(最初)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功)으로 무려 29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 받았다. 이 중에서 14번은 고사하고, 15번은 출사하였으나, 이마저도 곧 사직하고 마침내는 이곳 망우정(忘憂亭)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도 끝끝내 사정하는 광해군(光海君)의 청을 못 이겨 두어 번 임지로 나갔으나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 망우정에서 곽재우는 모든 곡기(穀氣)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이수광(李粹光)은 그의 저서 ' 지봉유설(芝峯類說) '에서 '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선 장군들 중에 유독 이순신과 곽재우의 공(功)이 제일 '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한 곽재우가 고향인 의령(宜寧)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다 집을 짓고 말년(末年)을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  그의 행적에 관하여 다소 신비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를 들여다 보면 정말 신선(神仙)이든 도인(道人)이든 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선조(宣祖)가 왕이 된지 24년이 되는 해이었다. 역대 조선의 왕들 중에 선조(宣祖)처럼 무능(無能)할 뿐만 아니라 시기(猜忌)와 질투로 좁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조(宣祖), 이러한 왕 밑에서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큰 전란을 맞아 나라를 지키려고 일어났던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불운이었고, 나라를 위해서는 비극이었다.    

 

 

 

 

 

 

 

 

                                             유허비                           遺墟碑

 

 

 

 

 

 

 

유허비(遺墟碑)는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이를 계기로  그를 기리고자 세워두는 비(碑)이다. 유허(遺墟)란 유지(遺址), 유적(遺跡), 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 또는 '옛 터'의 의미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나거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 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忘憂亭 에서  與賢亭 으로

 

 

 

 

 

 

 

 

이 망우정은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후 1972년 ' 벽진 이씨(碧珍 李氏) '  후손들이 중수(重修)하였고, 1979년 창녕군에서 전면적인 보수를 시행하였다. 곽재우는 죽기 전에 외손되는 벽진이씨 이도순(李道純)에게 망우정을 물려 주었는데, 그후로 정자의 이름이 여현정(與賢亭)으로 바뀌었다.여현정(與賢亭)이라는 이름은, 곽재우와 벗하며 지내던 조선 중기의 학자 간송당 조임도(趙任道)가 '이도순'에게 제안한 이름으로 ' 곽재우가 어진 이에게 물려준 정자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사연은 망우정 내부에 걸려 있는 '여현정기(與賢亭記 ... 아래 사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