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정문부장군 .. 북관대첩비

영국신사77 2014. 2. 3. 23:16


 非山非野 2009.06.25 19:38

 

 

 

 

 

                                              정문부              鄭文孚

 

 

 

 

 

 

북관대첩을 이룬 정문부(鄭文孚)는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號)는 농포(農圃)로, 1588년(선조21)에 문과에 급제한 후, 한성부참군, 사헌부지평, 함경북도 병마평사를 지냈다.

 

 

 

1592년 7월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22,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격하여 그 일대 1,000리 땅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군은 거의 다 도망가고, 회령(會寧)의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화군(臨和君), 순화군(順和君) 등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황정욱 등을 잡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투항하였다.

 

 

이 때, 이붕수(李鵬壽. 1548~1593)는 의병을 일으켜 당시 북평사(北評事)이었던 정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그의 別將이 되었다.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의병들은 국경인,국세필 등을 포박, 참수하고 그 일대를 수복하였다. 국경인 등을 참수하는 장면은 '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북관대첩             北關大捷

 

 

 

 

 

정문부는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59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행영에서 근무 중에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병마평사'는 정6품 벼슬로 병마절도사의 보좌직으로 임기 2년직이었으며, 평안도와 함경도에만 있었던 관직이었다. 임진왜란 시 함경도 지역은 왜장  '가등청정'이 진군하여 무혈입성하였었다. 

 

 

 

이후 '가등청정'은 일부 병력을 길주에 주둔시키고, 길주 이북의 지역의 각 고을은 현지인 즉, 반란조선인 또는 항복한 조선 관료들에게 맡겨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당시 북평사(함경북도 병마평사) 정문부는 제자 '지달원'의 도움으로 경성의 한적한 해변가 집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만호 고경민(高敬民)이 조정의 소식을 전하면서 ' 곧 명나라 군사가 오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함경도 지역을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한 뒤에는 맨 먼저 함경도 지역을 토벌할 것이다 '라고 전한다. 이는 사실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함경도 지역 주민들은 서로 이 사실을 전하면서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였다. 

 

 

 

 

                                             정문부, 의병을 일으키다

 

 

 

 

이 즈음에 정문부의 제자이며 유생인 '지달원'이 친구 '최배천(崔配天)' 등과 함께 몰래 유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들을 서로 불러모아 '정문부'를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과 장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선두에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경성으로 출동하였다.  이 당시 의병의 병력은 실록에는 대략 수백 명이라 기록하고 있고, 북관대첩비에는 1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성에는 반란민 ' 국세필 (鞠世弼... 국경인의 숙부) '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정문부일행은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를 해서 입성하게 되었다. 북관대첩비 기록에 의하면, 북쪽의 여진족 토벌을 빌미 삼아 힘을 합치자...고 회유하였다고 한다. 당시 가등청정은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마을까지 진격하였으나, 여진족에게 패하고 긴급히 두만강을 건너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여진족은 조선과 왜국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고, 동북 6진 일대에서 마음껏 활개를 쳐서 왜군과 반란군 사이에서도 골치거리이었다.  

 

 

경성에 무사히 입성한 의병들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한다. 당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경흥부사 나정언, 고령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 등이 당초 포로됨을 면하고 숨어 있다가 소문을 듣고 의병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정문부가 종성부사 '정현룡'에게 의병대장이 될 것을 권하였으나, 정현룡이 두려워하여 감히 맡지 못하고, 유생들도 말하기를 ' 본래 의병으로 이름을 삼은 이상 평사의 벼슬이 낮다고는 해도, 많은 사람이 마음 속으로 따르고 있으니, 의병대장이라고 칭하여 통솔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으므로 북평사 정문부가 애써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정문부는 정6품 북평사, 정현룡은 종3품 종성부사이었으므로 정현룡이 상관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임진왜란 당시 史官 출신 문신 '박동량. 朴東亮'이 쓴 일기 '기재사초(寄齎史草)'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군이 공격해 들어오자 종성부사 '정현룡'이 글을 써서 왜군을 맞이하여 항복하고자 하면서,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 撫我則后 虐我則讐 何使非臣 何事非君 ..하면서 판관 임순과 함께 항복하였다.  의병을 모집한 결과 의병과 관군을 포함하여 도합 3천 명의 군사가 모였다. 총대장에 정문부, 부장에 종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 선봉장에 유경천, 척후장에 만호 강문우, 창의별장에 이붕수(선비)로 진용이 갖추어졌다.

 

 

길주에 주둔 중이던 왜군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경성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왜장은 성문 밖에 군사를 배치하고, 성문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 경성 안에들어온 왜장은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이 직접 죽였다고 한다. 이후 밖에 있던 왜군들을 향해 활을 쏘고,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기마병으로 추격,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일부 나은 적들이 도망을 갔다고 한다.   

 

 

 

 

                                       역적, 국경인과 정말수를 참수하다

 

 

 

 

이후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의 주동자 등 13명을 참수하고, 단순가담자는 모두 용서를 하였다. 위의 '기재사초' 기록에 의하면 단순 반란민들도 후하게 대하자. 지난 일을 용서하자...하니 따르는 자가 많았고,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그를 따랐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국경인(鞠景仁)은 함경도 지역에 피란 중이던 宣祖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박하여 가등청정에게 넘겨 준 인물이다. 그 공으로 국경인은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되어 회령지역을 통치하면서 이언우(李彦祐), 전언국(田彦國) 등과 함께 횡포를 자행하다가,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작(吳允迪)의 유인책에 넘어가 붙잡혀 참살되었다. 즉, 밤에 국경인의 집에 불을 질러 밖으로 뛰쳐 나오는 '국경인'을 잡아 죽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반란민 '정말수'가 명천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정문부는 '강문우' 등에게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게 하여,  정말수는 산 속으로 도망을 갔으나, 경성 토병 '진덕인'의 도움으로 정말수와 그의 부장들을 모두 잡아 참수하였다. 결국 함경도 지역의 반란군 주동자들을 토벌한 의병장 정문부는 본격적으로 길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하게 되었다.  

 

 

 

 

 

 

 

 

 

 

 

 

                                             북관대첩            北關大捷

 

 

 

 

 

정문부의 '북관대첩'은 수개월에 걸쳐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 모두를 일컫는 대첩을 말한다. 의병과 관군을 합한 조선군은 1592년 음력 10월30일 기준으로 총병력이 3,000명에 이르렀다. 이에 정문부는 군사를 3개로 나누어 길주성을 포위하고 감시를 시작하였다. 음력 10월30일, 길주의 왜군이 마침내 성에서 나와 노략질을하는데, 명천의 해창(海倉 .. 미곡 창고)을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쪽에 진출시켜 돌아가는길을 지키고 있는데, 왜병이 장덕산 밑에 이르러 의병 '원충서'의 군대 200명과 마주치게 되었다. 조선군이 먼저 장덕산 정상을 점거하니, 왜군이 다투어 오르면서 총을 쏘는데 고령첨사 '유경천'이 철기군을 몰고 내려가 크게 격파하였다.

 

 

만호 '고경민'은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즉각 포를 쏘며 차단하니 왜적이 퇴각하여 계곡으로 들어갔으므로, 관군이 사방에서 모여 애병들을 포위하였다. 이날 밤에 눈이 내리고 추위가 심하여 왜병이 싸우지못하고, 해가 뜰 무렵에 수색하며 공격하여 왜군 600명의 목을 베었는데, 길주성의 왜군은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못하였다. 이날의 전투 기록은 '북관대첩비'에 의하며 왜장 5명을 죽이고 무기, 말 모두를 노획한다. 말 118마리, 왜도와 창과 조총 수십 정 등이다이날 전투 성과는 음력 11월 1일,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

 

 

이후 의병들이 길주성을 토위하니 왜군이 성문에 올라 조총을 쏘면서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에 의병들이 가까이 갈 수 없어 길주성 주위를 포위하고 그들의 땔감 공급로를 차단하였다. 왜군의 한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 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므로 정문부가군사를 돌려 이들을 공격하였다. '북관대첩비'에는 왜군 수백명을 베고, 배를 갈라 창자를 길가에 늘어놓자 왜적들이 두려워 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후 1593년 음력 1월, 정문부의병들은 단천 지역의 왜군을 토벌하였다. 드디어 왜장 '가등청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마천령을 넘어오자 정문부가 영동책(嶺東柵) 외곽에서 그를 맞아 싸웠으나,왜군의 수가 너무 많아 세 번 교전하였으나 모두 패배하였고, 경성으로 후퇴하였다. '가등청정'이 마침내 길주성과 영동책을 모두 불태우고, 군사를 철수시켜 마천령을 넘어 남쪽으로 후퇴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정문부는 즉시 날랜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으나, 가등청정의 주력부대는 이미 함경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후 왜군은 2월 말에 한성에 도착하였다. 이 당시 왜군 전체 병력 22,800명 중 8,864명이 전사(아사, 동사, 실종 포함)하였다고 한다. 

 

 

 

 

 

 

 

 

 

                                            순찰사 '윤탁연'의 허위장계

 

 

 

 

 

다음은 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 1월의 기록이다. 의병장 정문부는 처음에 직급이 낮은 신분으로서 의병대장이라 지칭하고 순찰사 윤탁연(尹卓然)에게 관문을 보내었는데, 순찰사 '윤탁연'이 그의 공을 꺼려하였다. 이 때문에 의병장 정문부가 전후로 세운 전공을 순찰사 윤탁연이 모두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수급을 가지고 관남(관남 .. 함경남도)를 지나면 그가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정문부의 행동이 불궤스럽다고 조정에 아뢰었다.

 

 

정문부가 적을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을 때, 순찰사 윤탁연을 만나보지 않았는데, 윤탁연이 크게 노하여 정문부를 뒤쫓게 하고 말하기를, 평사 정문부가 왜군을 놓아 도망치게 한 죄를 지금 당장 물어야겠으니, 속히 잡아오라 '하니, 정문부가 답하기를, 순찰사 윤탁연이 일부러 왜군을 놓아 보냈기 때문에, 본인도 적을 놓아 보낸것이니 본인은 죄가 없다, 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순찰사 윤탁연은 사신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스스로 변명하였다. 또한 윤탁연이 사대부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제하니 사람마다 칭찬하였으며, 조정에서 파견한관리들에게 모두 옷과 월동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순찰사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로를 종성부사 '정현룡(왜군에게 항복한 인물)'에게 돌려 함경북고 병마절도사에 올려 제수하고, 의병장 정문부는 단지 반란민을 참수한 공으로써 '당상관'에 올려 '길주부사'에 제수하였다. 북쪽 사람들은 정문부의 공덕을 추앙하며 '병마절도사'가 되기를 모두 원하였으나, 정문부는 강개한 성품으로 교제가 적었으므로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허위장계를 올린 윤탁연(尹卓然)은 경기도 관찰사, 한성 부판윤,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선보의 특명으로 함경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시문에 능하며 '조선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은 인물이지만, 위의 실록 기록처럼 비열한 인간이 더욱 출세하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더욱이 비겁한 왕 '선조'이었으니...     

 

 

 

 

 

 

 

 

 

 

 

 

                                                    정문부의 죽음

 

 

 

 

정문부는 비록 北關(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의 功을 시기하던 윤탁연(尹卓然) 등이 조정에 모함하여 오히려 兵權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당시에는 정문부의 功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그 功을 인정받아 여러 벼슬을 지낸다.   

 

 

1612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외직(外職)을 청하였다. 1624년(인조)에 박홍구(朴弘耉) 역모 사건에 무고를 당하여 고문을 당하였으나, 무죄가 밝혀졌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은 그를 풀어주지 않고, 그가 창원부사 당시에 지었던 ' 초회왕시 (楚懷王詩) '로 ' 이괄의 난 '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 끝에 장살(杖殺)시키고 말았다.  향년 60세이었다. 후 신원(伸寃)되었고, 숙종은 그에게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초회왕(楚懷王)은 중국 초나라 '항우'가 추대한 왕이었는데, 나중에 항우에 의해 살해된 왕이다. 이는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仁祖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정문부는 옥사히기 전에 두아들에게 ' 벼슬할 생각은 하지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서 은거하며 살아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매를 맞고 옥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파죽지세로 함경도 연안을 타고 북진하고 있었다.

北으로 피난가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 가 있는데, 그 곳에서 귀양살이하던 아전(衙前)출신인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이 흑심을 품고 반란, 두 왕자를 왜군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병사(兵使)벼슬을 얻어 회령(會寧)과 경성(鏡城)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평사(評事)벼슬의 정문부(鄭文孚)는 義兵의 깃발을 올려 100여명이 피를 나누어 마시고, 국경인,국세필을 비롯 왜군에 붙은 육진(六鎭)의 반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하였다.이에 민심이 결집되어 의병은 7,000명으로 불어났고, 왜군의 퇴로를 막아 섬멸하며 남하(南下), 가토가 지키는 길주성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측 기록인  "고려진각사(高麗陣覺書)"에 보면  " 길주성 이웃에 있는 장덕산에 포진, 공격해 온  鄭文孚부대를 城을 나와 요격하던 일본군은 밤이 되면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는 탓에 성 안으로 퇴각하였고, 성은 완전히 포위 당하였다. 성 안의 일본군은 혹한의 땅에서 가장 중요한 석탄과 채소의 공급이 차단되는 바람에 가토의 오른팔이 무력화 되었다. " ... 패배한 것은 인정하였지만 추위때문으로 돌리고 사상자도 밝히지 않았다. 

 

 

당시 왜군 정예 1,500병력이 배치되어 있던 길주성을 시작으로 이룩한 북관대첩(北關大捷)에 대한 조선측 기록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정문부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은 의병은 왜군을 장덕산 밑에서 만나 대파하였고, 길주 장평에서 만나 습격해서 파하니, 이웃 고을에서도 수만 군중이 일어나 적을 협공 섬멸하였다. 마천령 넘어가는 적을 추적, 단천 말티에서 세번 싸워 거의 베어 죽였다 . "

 

 

 

 

 

 

 

 

 

 

 

 

 

 

 

 

 

                          

 

 

 

 

 

 

 

 

        

 

 

                                

                                         북관대첩비             北關大捷碑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義兵)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이다.  1707년(숙종33)에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 ..지금의 金策市)에 건립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 예비사단 소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가 이 碑石을 발견하고, 일본 왕실에 보고하여 반출하기로 재가를 받았다. 그는 이 비석이 조선 백성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어 일본으로 옮겼다. 1978년 도꾜에 있던 한국연구원장 ' 최서면 '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당시 이 비석은 軍國日本의 상징인 도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최서면과 이 비석에 이름이 적혀 있는 義兵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측은 야스크니신사의 본전 옆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어두침침한 숲 속으로 옮기고,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철책으로 둘러 쳤다.      

 

                                                                                                                                                                                                                                                     박박정희대통령도 그 반환을  추진하다가  1979년 김재규에 의한 암살로 중단되었다. 그 후 참여정부 들어 이해찬총리가 일본에 정식으로 반환을 요청하였으며, 일본의 온갖 방해에도 결국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 온다. 반출된지 100년만에....북한의 양해를 전제한 일본의 반환 결정에 남북이 협의, 원래의 위치인 함경북고 길주시에 다시 세워졌고, 경복궁과 이 곳 정문부 묘소 입구에 그 모조품이 서 있다.

 

 

 

 

 

 

 

 

 

 

 

 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이 굳이 약탈해 간 것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보다는 역사적 치욕을 은폐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필이면 그 대첩비를 일본 군국주의 망령들의 집합소인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한 이유는 당시 북관(北關)에서 죽은 倭軍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북관대첩비의 돌덩어리 

 

 

 

 

 

왜놈들은 한국의 명산(名山) 바위 위에 한국의 정기(精氣)에 쐐기를 박겠다는 듯, 커다란 쇠뭉치를 곳곳에 박아 두었었다.  그 놈들의 치졸함, 옹졸함이란 !! 북관대첩비의 탑신(塔身) 위에도 커다란 돌덩어리를 얹어 두고 있었다. 마치 호국영령의 기상을 제압하려는 듯.. 한국을 영원히 저주하겠다는 듯이....  그래서 왜(倭)이고,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미움을 받는다. 영원히 ...

 

 

 

 

 

 

                                                                        

 

 

 

 

                                                     비문의 내용

 

 

 

 

비문(碑文)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 국세필을 체포하여 처형한 내용과 정문부의 승전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정문부의 전공(戰功)을 이순신과 권율의 전공에 비견하여 월등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즉, 이순신과 권율은 조정의 지원 하에 정식 군대로 전쟁을 이끌었지만, 정문부는 국가의 통치가 마비된 상태에서, 빈 손으로 의병을 모아 왜적에 대항하였고,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최창대          崔昌大

 

 

 

 

이 북관대첩비는  ' 임명대첩비 (臨溟大捷碑) '라고도 하는데, 이 비석을 건립한 최창대(崔昌大)는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명 (朝鮮國咸慶道臨溟大捷碑冥) '에서 .. 이 대첩비를 세우는 것은 그 고장 유지들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특별히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임명(臨溟)은 지금의 길주(吉州...지금은 金策市를 말한다.) 

 

 

나는 고을 유지들에게 말하였다. " 섬 오랑케의 戰禍가 몹시 심하여 세 서울이 함락되고, 八道가 무너졌는데, 이 분들은 죽을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러 우리나라의 발상지로 하여금 끝내 오랑케 땅이 되는것을 면하게 하였다.  변방 사람들이 그 풍모를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 연안에는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事跡)을 적어 그 功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굽어 보고 하거니와 관북의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碑碣) 하나 없으니 어찌 여러분의 수치아니겠는가? "  이에 모두 찬성하였다.

 

 

  

 

 

 

 

 

 

 

 

 

 

 

 

 

 

 정문부의 활약은 왜군에 승리하였다는 의미 외에 나라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던 함경도 땅을 수복하여 우리의 강토(疆土)를 분명히 히였다는 것에 더욱 의미가 크다. 왜군이 공격하자, 끊임없이 북방을 괴롭히던  女眞族도 그 틈을 노려 함경도의 점령을 꾀하였고, 정문부 등 의병들은 그들 조차 물리쳤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正祖 때의 홍양호(洪良浩)는 임명대첩가(臨溟大捷歌)에서 정문부 등의 공적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昔日金尹拓疆土   國威兵力是憑倚  公遭板蕩奮空拳 乞若狂波障一躇 不然不惟豆江以內非吾有  蠶食上國從此始..... 그 뜻은... 김종서와 윤관의 강토 개척은 나라에 위엄이 있고, 군대가 강하여서 이었지만, 공은 혼란할 때 빈 주먹을 휘둘러 미친 물결 버티고 선 지주산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만강 안쪽을 잃어 버리고, 중국에게 땅을 잠식 당하였으리....

 

 

 

 

 

 

 

 

 

 

 

 

 

 

 

 

 

 

 

 

 

                                         창의토왜도             倡義討倭圖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은 고려 예종부터 조선 선조까지 북관 즉, 함경도에서 용맹과 지략으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 또는 일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내용을 글로 설명해 놓은 역사고사화첩(歷史故事畵帖)이다.

 

 

내용은 탁경입비(拓境立碑), 야연사준(夜宴射樽), 야전부시(夜戰賦詩), 출기파적(出奇破賊), 등림영회(登臨詠懷), 일전해위(一箭解圍), 수책거적(守柵拒敵), 창의토왜(倡義討倭) 등 여덟 장면으로 이루어졌는데, 정문부와 관련된 내용은 '창의토왜도'이다. 

 

 

 

 

 

  

 

 

 

창의토왜도 (倡義討倭圖)이다. 18세기 작품으로 작자는 未詳이며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림 윗 부분에는 정문부장군이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 왜적에게 바치고 벼슬을 하는 반역의 죄를 범한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을 참수하는 장면이고, 그림 아래 부분은 정문부의 義兵들이 왜적을 추격하며 격퇴시키는 장면을 담았다.

 

 

 

 

 

                                                 관이전          貫耳箭

 

 

 

 

 

전쟁터에서 군율을 어긴 군사를 처형할 때 쓰이던 화살 또는 그 형벌을 말한다. 사형수의 두 귀를 꿰어 사람들에게 보이던 형벌이다. 모양은 영전(영전 ..군령을 전하는 화살)보다 짧고 살촉이 뾰족하다. 정문부 의병은 국경인, 국세필 등 배신자들을 참수할 때 관이전을 사용하였고, 그들의 목을 베어 백성들에게 효수하였다.

 

 

 

 

                                         鞠景仁과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겪은 이후 우리는 '매국노'하면 이완용을 떠올린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매국노의 상징처럼 지목되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국경인(鞠景仁)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행적을 보였던 인물이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빠르게 북상해 오자, 宣祖는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실은 명나라에의 망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4월29일 파천하기 직전, 선조는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5남 순화군(順和君)에게 함경도로 가라고 지시했다. 태조 이성계 선조들의 근거지이자 왕업의 발상지이었던 함경도로 왕자를 보냄으로써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규합하여 전란을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조치이었다.

 

 

그런데 두 왕자는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는커녕 7월23일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포로가 되는 과정이 충격적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군에 직접 붙잡힌 것이 아니라, 당시 회령에 귀양와 있던 전주 출신의 아전(衙前) 국경인(鞠景仁)에게 포박되어 가등청정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국경인'은 반란을 일으킨 뒤 회령의 객사(객사)를 습격해 두 왕자 부부와 그들의 외척들, 수행하였던 신료들을 모두 결박하여 가등청정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왜 이렇게 엄청난 반역행위를 저질렀을까. '조야첨재. 朝野僉載 '를 비롯한 사료들은 두 가지 입장에서 그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 평소 성품이 간악하였었는데, 전주에서 회령까지 유배된것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 ' 이라며 국경인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 가등청정이 이끄는 왜군이 함경도로 진입하자 주민 대다수가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 '고 해 지역의 분위기가 이미 반정부적으로 돌아선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어느 분석이 맞든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의 위정자들은 함경도를 비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 교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차하면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지역 '이라는 인식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 선조수정실록' 과 '용사일록(龍蛇日錄)' 그리고 재조번방지(再朝藩邦志)' 등에는 국경인의 반역 동기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들어가 회령에 머물며 사나운 노복들을 풀어 백성들을 침학하고 수령들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 거나 순화군의 장인 황정욱(黃廷彧)이 궁노(宮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침탈하고 소란을 피워 인심을 잃고 반란을 재촉하였다 는 기록이 그것이다. 즉 두 왕자의외척들은 지역 수령이나 백성들을 닦달하였고, 그들의 접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궁노들을 동우너해 매질을 자행했다. 이들이 끼치는 민폐 때문에 결국 민심이 돌아서고 '국경인' 같은 인물의 선동이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이같은 분위기를 바꾸고 국경인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 정문부이었다. 애초 함경도의 수령이나 장수들 대부분이 왜군이나 지역의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던 상황에서 평사(北評事) 정문부 또한 붙잡혀 빠져 나오기 힘든 상태이었다. 그런데 '선조실록'에 따르면 ' 정문부는 평소 무장으로 있으면서 형장(刑杖)을 사용하지 않고, 지역의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대문에 제자들의 비호를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 ' 고 한다. 정문부는 왜군과 싸우기에 앞서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을 비롯한 13명의 반역자를 처단하였다. 우두머리급은 제거했지만, 일반 반민(반민)들이저질렀던 죄는 불문에 부쳐 민심을 얻었다. 효과는당장 나타났다. 국세필 등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령 유생 신세준(申世俊)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을 제거하였다. 정문부는 의병을이끌고 명천(明川)을 수복한 뒤 길주(吉州)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을 포위했다. 마침내 가등청정은 길주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충덕사           忠德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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