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김덕령장군

영국신사77 2014. 2. 3. 23:11


非山非野 2009.04.20 09:29

 

 

 

                                            김덕령                         金德齡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從軍)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全州)에 있던 광해군(光海君)의 분조(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리고 1594년 의병(義兵)을 정돈하고 선전관(宣戰官)이 된 후, 권율(權栗)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군(倭軍)을 격파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義兵)을 모집, 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回軍)하였는데, 이몽학(李夢鶴)과 내통(內通)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誣告)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拷問)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獄死)하였다.

 

 

 

 

 

 

 

 

 

역사적(歷史的) 사실과 설화적(說話的) 이야기가 혼합되어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알려졌으나, 그 능력을 미처 발휘하지 못하고 무고(誣告)하게 죽음을 맞이한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義兵將)이었다.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경수(景樹)이다. 김덕령은 아버지 붕섭(鵬燮)과 어머니 남평반씨(南平潘氏) 직장(直長) 계종(繼宗)의 딸 사이에 둘째 아들로 석저촌(石底村 .. 현,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8세에 증조 김윤제(金允悌) 밑에서 공부하였고, 17세에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그는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그는 동북의 석교촌(石橋村)에 까지 가서 물고기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18세에 첨정(僉正) 이대록(李大祿)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20세에 형(兄), 김덕홍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25세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무등산과 김덕령

 

 

 

무등산(無等山)은 광주(光州)와 담양군(潭陽郡), 화순군(和順郡)과 경계에 있는 산(山)으로 무악(武岳), 무진악(武珍岳), 서석산(瑞石山), 입석산(立石山)이라고도 한다.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무등산은 해발 1,186m의 잔구(棧丘)로서 나주평야를 내려다보는 산중에는 많은 명승고적이 있다. 무등산 일대에서는 김덕령(金德齡)을 비롯 많은 선열, 지사(志士), 문인, 예술가, 정치인 등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무등산의 정기(精氣)는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  무등산 정상 가까이에는 원기둥 모양의 절리(節理)가 발달하여 기암괴석의 경치가 뛰어나다. 동쪽 경사면에서 정상을 향하여 입석대(立石臺), 서석대(瑞石臺), 삼존석(三尊石), 규봉암(圭峰庵) 등이 있고, 정상 부근에는 수신대(隨身臺)가 있다. 무등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忠孝洞)에는 환벽당, 소쇄원, 식영정 등의 정자가 있다.

 

 

 

 

 

 

 

 

 

무등산(無等山)을 말할 때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만큼 무등산의 돌 하나, 봉우리 하나에도 그의 전설이 담겨 있다. 광주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영웅이요, 영원한 벗이다. 무등산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충효마을 (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난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글과 무술을 익혔다.  무등산 ' 제철유적지 '는 김덕령이 임진왜란 당시 ' 칼과 창을 만들었다 '는 뜻의 주검(鑄劍)으로 불린다. 1788년 돌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전하고 있다. 원효사 계곡 상류에 있으며, 시기념물 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제철유적지 내에는 속칭 쇠똥이라 불리는 철 찌꺼기가 산재한 것을 확인 할 수 있고, 이곳에서 300m가량 올라가면 주검동(鑄劍洞)이라고 불리는 바위에 '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 충장공 주검동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만력(萬曆)'은 1573년부터 1620년까지 사용했던 중국 연호(年號)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고 팔도의병장(八道義兵將)이었던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인 ' 충장사 (忠壯祠) '가 있다. 여기에는 위패와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과 묘, 의복과 관을 보관한 유물관도 있다. 또한 김덕령의 생가, 취가정 등 관련 유적들이 즐비하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정쟁(政爭)의 소용돌이에서 음모로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은 광주(光州)에 살던 민중들의 가슴 속에 살아 전해진다. 광주시가 금곡동에서 원효계곡을 따라 제철유적지까지 연결된 3.5km 구간 옛길을 정비하여 ' 무등산 의병길 '이라 이름하였다. 이 길 주변에는 김덕령의 누나가 치마로 감싸 안았다는 ' 치마바위 '도 있다.  

 

 

 

 

 

 

 

 

 

 

 

 

 

                                           씨름 한 판으로 벼슬길 오른 김덕령

 

 

 

 

 

우암 송시열(尤巖 宋時烈)의 문집 ' 송자대전 (宋子大典)'에는 김덕령의 용력(勇力)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전하는 김덕령이 씨름으로 출세한 이야기는 이러하다. 이정귀의 아버지 이귀(李貴)는 장성현감으로 있을 때 단오날 인근 수령들을 불러 예전부터 하던 대로 관아 마당에서 씨름판을 열었다. 그날 어떤 장사가 판막음을 한 뒤 큰소리를 쳤다. ' 나와 겨룰 사람이 없느냐 ? ' 이때 김덕령은 관아(官衙)로 막 들어오는 참이었다. 수령들이 김덕령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고 싸우라 권하였다. ' 자네가 저 사람을 이긴다면 정말 통쾌할 걸세 ' 그러나 김덕령이 이를 사양한다. ' 저는 본디 글 읽는 선비로 몸이 허약한데, 어떻게 저 장사를 이긴단 말입니까 ? ' 김덕령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이 강권하여 드디어 김덕령은 그 장사와 맞붙게 되었다.  그의 작은 체구를 그 장사가 놀리자, 김덕령은 ' 그대는 반말을 말라, 힘만 겨루만 그만 아닌가 ' 라고 말하였다. 장사가 김덕령을 잡아 돌리다 땅에 팽겨쳤으나 김덕령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시 맞붙어 장사를 휘둘러 쓰러트렸다. 장사가 다시 겨루자 하니, 김덕령은 범처럼 눈에 불을 켜고 소리를 질러 장사를 죽이려 하였고, 좌우에서 겨우 말려 떼어 놓았다. 김덕령의 이름은 이 일로 세상에 알려졌고, '이계'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씨름 한 판으로 출세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 ' 이귀(李貴) ' 등의 천거로 선조(宣祖)로부터 형조좌랑의 벼슬에 임명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의병활동                       義兵活動

 

 

 

 

 김덕령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兄),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그는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주(全州)까지 갔다. 그러나 그의 형 " 김덕홍 '이 노모(老母)를 봉양해야 한다는 타이름을 받고 귀향하였다. 형 김덕홍은 1592년 7월, 금산성전투에서 '고경명 (高敬命)'과 함께 왜군과 전투하다가 순절하였다. 김덕령은 다음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복상(服喪)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생 '김덕보'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그의 의병 거의(擧義)에는 자부 김응회(金應會)와 송제민(宋齊民)의 권고와 협조, 처남  이인경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다. 담양부사(潭陽府使) ' 이경린 (李景麟)'과 장성현감(長成縣監) ' 이귀 (李貴)'가 김덕령을 전라감사 이정암에게 천거하였고, 이정암은 다시 그를 조정에 천거하였다.

 

 

 

 

                                             익호장군                         翼虎將軍

 

 

 

 

김덕령은 담양에서 3천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도원수 권율(權慄)은 1593년 12월 김덕령에게 초승(超乘)이라는 군표를 내렸다. 전주에 있던 광해군 분조(分朝)에서는 그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조정에서는 홍문관 교리 '권협'을 파견하여 충용장(忠勇將)의 군호와 함께 그의 기병을 격려하는 교서를 내려 주었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난 타개를 바라는 조정의 열망과 기대가 컸음을 의미하고 있다. 김덕령은 의병을 이끌고 담양을 출발하여 순창, 남원을 거쳐 영남으로 향했다. 이때 그는 담양,순창,김해,동래,부산을 지나 동해바다를 건너서 대마도와 오사카까지 진군할 것이라고 하여 전쟁에 임하는 그의 웅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는 남원에 잠시 머무를 때 최담령(崔譚齡)을 부장으로 삼아 부대를 정비하였다. 그는 의령에 머무르고 있던 '곽재우'에게 글을 보내 상호협력체제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또 그는 조정에 상서(上書)하여 호남출신의 군사 이외에는 각자 고향에 돌려보내고 필요시 영남의 정병을 뽑아 적을 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였다. 이는 왜군과의 싸움이 교착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많은 군사의 통솔과 부족한 군량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조정에 받아들여졌다. 

 

 

 

 

                                                 27세, 전국 義兵을 통솔, 지휘

 

 

 

 

김덕령이 진주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선조는 전국의 의병을 김덕령이 지휘하는 충용군(忠勇軍)에 통합하도록 조치하였다. 김덕령은 27세의 나이에 전국의 의병을 지휘통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적진을 기습공격하여 조선인 포로 50여 명을 구출하였다. 그는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그가 의병을 지휘통솔하며 왜적과 싸울 기회를 찾았으나, 왜군들은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왜군들은 거제도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순신, 원균, 곽재우, 김덕령 등은 조정의 명을 맏아 거제도에 머물고 있던 왜군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수륙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김덕령은 선봉장이 되어 거제도 장문포를 공격하였지만, 왜군이교전을 피하여 왜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 1595년 왜군이 고성에 상륙하려는 것을 김덕령이 곽재우군과 연합하여 기습공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무고, 투옥                       무고, 투옥

 

 

 

 

임진왜란이 장기간 동안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김덕령에 대한 무고(무고) 사건이 발생하였다. 1595년 1월, 김덕령은 전첩의 전달을 지연시킨 죄목으로 예하 역졸을 곤장을 때려 죽게 하였다. 이는 김덕령이 군율(군율)을 엄하게 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대해 막료와 군졸들사이에 김덕령에 대한 불만이 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1596년 7월, 김덕령은 도망간 군졸을 대신하여 그의 아버지를 잡아 가두었다. 이것은 도망간 군졸을 잡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도망간 군졸의 아버지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종이었다. 윤근수는 자신의 종(종)이 갇힌 것을 알고서 김덕령에게 석방을 요구하여 그 종을 풀어주었다. 김덕령은 윤근수가 돌아간 후에 다시 종을 체포하여 장살(장살)하였다. 이에 윤근수는 김덕령이 신의가 없으며, 장살(杖殺 .. 때려 죽임)을 좋아하는 신의가 없는 장수라고 하며, 그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덕령을 시기(시기)하고 미워하던 인사들이 그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김덕령은 투옥되었지만, 영남 유생들의 상서(上書)와 정탁의 옹호, 사면 요청으로 선조(선조)의 특사령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후 김덕령은 석방되어 다시 의병활동에 복귀하였지만, 의병활동을 재개하기도 전에 7월, 이몽학의 난(이몽학의 난)이 발생하요, 그 진압에 투입된다.      

 

            

 

 

 

 

 

 

 

                                                       김덕령의 죽음

 

 

 

 

김덕령은 기병하여 전국의 의병을 지휘통솔하였지만,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에 왜군에 대해 적극적인 공격을 취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화의가 진행 중이라 하여 거부되었다. 왜군도 전투를 피하기는 마찬가지 이었다. 한편 김덕령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를 음해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그는 왜적과 싸워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적과의 싸움보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인사들의 무고와 싸워야 했고, 결국 무고때문에 죽어야 했다.  임금, 선조도 매우 용렬하였다. 그의 불행이었고, 나라의 비극이었다.

 

 

 

 

                                         이몽학의 난                        李夢鶴의 亂

 

  

 

 

1596년(선조 29) 7월, 종실의 후예로서 속모관(粟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인 이몽학(李夢鶴)은, 그가 조직한 '동갑계' 회원 700명을 사주하여, 임진왜란 후의 대기근으로 굶주린 농민을 선동해서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켜 현감을 가두고 이어 임천(林川)을 함락하였다. 농민은 ' 왜적의 재침략을 막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 '는 명분에 크게 호응하여 삽시에 수천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정산, 청양, 대흥을 휩쓸고 서울로 향하던 도중에 홍주(洪州 .. 지금의 홍성)을 공격하였다.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명을 동원하여 이들을 반격하는 한편, 이몽학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 반란군의 분열을 꾀하였다.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과 임억명(林億明)은 전세가 불리함을 느끼고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으며,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던 배후의 인물 한현(韓絢)도 체포되어, 한 달이 못되어 반란은 평정되었다.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한다. 도중에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드고 김덕령은 回軍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화근)이 되었다.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김덕령은 체포되었다. 이몽학과 내통하고 군사를 되돌렸다는 즉, 회군하였다는 혐의이었다. 이에 정탁(鄭琢)과 김응남(金應南) 등이 김덕령의 다음 詩를 인용하며, 죄가 없음을 간하였으나, 끝내 악형을 견디지 못하고 장독(杖毒)으로 죽게 되었다. 정탁, 김응남 등이 인용하였다는 '김덕령'의 詩는 다음과 같다.

 

 

 

 

                                      絃歌不是英雄事       현가불시영웅사

                                      劍舞要須玉帳遊       검무요수옥장유

                                      他日洗劍歸去後       타일세검귀거후

                                      江湖漁釣更何求       강호어조갱하구 

 

 

 

노래하고 가야금 타는 것이 영웅이 할 일이던가  /  칼춤 추며 모름지기 옥장에서 놀아야지  /      훗날 칼을 씻고 돌아가면  /  강호에서 낚시나 하면 되지 무얼 더 구하겠는가.

 

 

 

이몽학(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 권율(권율)'은 김덕령을 보내어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가 진주(지누)에서 운봉이 이르자 이몽학의 난(이몽학의 난)이 자중지란으로 평정되었다.그는 고향인 광주(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진주로 돌아갔다. ' 이몽학 '의 잔당을 문초(문초)한 후 충청도의 관찰사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장계를 올리면서 ' 김덕령 '의 이름이 나오는데,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장계에 포함시켰다. 결국 김덕령은 신경행, 충청병사 이시언,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무고(무고)로 진주목사 ' 성유문 '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때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 등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우의정 정탁(鄭琢),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지중추 이정암 등이 김덕령을 적극 변호하였다.그러나 김덕령은 20일 동안 여섯차례나 혹독한 국문(국문)을 당하여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선조(선조) 앞에서 국문(국문)을 당할 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즉, 그는 이몽학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그의 잘못은 계사년에 어머니상(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지 못하고 일천지수(一天之讐)의 분통을 이기지 못하여 상복(상복)을 군복으로 바꿔 입고 칼을 지니고 나섰으니, 수년간 촌공(寸功)을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충성(忠誠)도 없으면서 효의(孝義)마저 어겼다고 자책하였다. 이어서 그는 자신을 죽일지언정 그의 부장 ' 최담년 '은 죄가 없으니 용서해달라고 선조(선조)에게 호소하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옥중에서 '춘산곡. 春山曲 ' 지었다. 여기에서 그는 억울함을 함축적으로 담았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글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질투의 화신, 宣祖

 

 

 

 

임진왜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선조 26년(1593) 10월, 영의정으로 복귀한 '유성룡'이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법(束伍法) 제도 같은 개혁입법들을 강행하면서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宣祖도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진왜란 초에는 개혁입법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선조의 생각은 달라졌다. 먼저 '전쟁 영웅'의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첫번 째 희생양이 육전의 영웅 '김덕령'이었다.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 김덕령이 가담하였다 '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한 예단을 갖고 있던 선조는 '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일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면서 직접 친국을 하였다. 이리하여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여섯 차례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조수정실록'은 ' 소문을 들은 南道의 군민(郡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선조29년 8월 1일 ' 기록하고 있다. 5,000명의 의병을 거느렸던 김덕령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는 '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고 폄하하였다.

육전의 영웅 '김덕령' 죽이기는, 수전의 영웅 '이순신'의 제거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김덕령이 체포되기 한 달 전쯤 선조는 '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선조실록 29년 6월26일 '고 이순신을 폄하하였던 것이다.       

 

 

 

 

                                                          김덕령 부인의 순절

 

 

 

 

정유재란 때,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는 추월산 보리암에 숨어 있다가, 왜적이 가까이 오자 천길 낭떠러지에 몸을 던졌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조(正祖)는 김덕령이 태어난 마을에 그 이름을 내렸으니, 지금의 충효동(忠孝洞 ..예전의 충효리)이 그것이다. 후일 이를 기리는 비(碑)를 마을 앞에 세우니, 바로 충효비(忠孝碑)이다.

 

 

                                           

 

                                                              사후 관직

 

 

 

김덕령은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모략을 받고, 그리고 비열한 선조의 묵인 하에 20여일 간에 걸친 6차의 형문(刑問)과 수백회에 달하는 혹독한 고문으로 정강이 뼈가 부러지고 몸의 피부는 완전히 벗겨진 끝에 1596년 9월15일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그의 사후 1661년 현종 2년에, 김덕령이 죽은 지 65년만에 그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권되었고, 1668년에는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778년 정조 12년,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김덕령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石底村)을 충효의 고을이라 하여 충효리(忠孝里 .. 지금의 충효동)로 바꾸도록 하였다.1789년 정조(정조) 13년, 김덕령은 의정부 좌찬성에 가증(加增)되었다. 1975년 2월, 김덕령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국가와 후손들이 무등산에 '충장사'를 세우고, 그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공주 중심지의 상징 도로인 충장로 입구부터 광주일고를 지나 경열로에 연결되는 도로를 ' 충장로 '로 부르게 되었다.  

 

 

 

 

 

                                                              김덕령의 묘

 

 

 

 

 

 

 

 

 

김덕령의 묘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충장사 뒤 선영의 묘소 아래에 있다. 처음에는 북구 금곡동 배재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1974년 11월19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묘응 조성한지 378년이나 지났는데도, 육탈이 되지 않았고, 매장 당시에 입었던 수의(壽衣)와 목관(木棺)이 그대로 출토되어 충장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의 한이 서린 것이라고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담으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사진기를 묘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관련 유물          關聯 遺物

 

 

 

1965년 7월에 광주광역시 무등산 이치(梨峙)에 있던 충장고 김덕령의 묘를 이장할 때에, 16세기 말 선조 때, 즉 400여년 전의 복식(服飾)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었는데, 철릭(帖裏) 2점과 장옷(長衣) 1점, 과두 3점 그리고 여자 저고리(赤古里) 1점과 사폭바지(唐衿) 1점 등 모두 8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관곽(棺槨)이 거의 원형 그대로 출토되었다.

 

 

 

 

 

 

 

철릭은 2점이 출토되었다. 한 점은 '모시홑철릭'이고 다른 한 점은 솜과 무명 안감만 남은 '솜누비철릭'인데, 솜누비철릭은 현재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모시홑철릭은 상태가 양호한 편인데, 길이가 121.8cm이다. 철릭은 상의와 치마가 연결된 옷이므로 각각의 길이를 보면, 상의 길이가 50.3cm이고 치마 길이는 71.5cm이다. 상하의 비례는 1:1.4가 된다. 허리에는 큼직한 맞주름이 드문드문 잡혀 있다. 화장은 110cm이며, 진동은 30cm인데, 좌우 소매 모두 탈착식이며, 분리된 소매의 길이는 71cm이다. 겨드랑이에는 사각접음무가 달려 있다. 깃은너비가 12cm인 칼깃인데 동정은 없다.

 

 

 

 

 

 

 

                                                           철릭

 

 

 

철릭은 조선시대 무신이 입던 공복(公服)으로서 직령(直領)이다. 취음(取音)하여 천익(天翼)이라고 쓴다.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형태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는 주름을 잡았다. 소매는 두리소매이고 고름을 달았으며, 곧은 옷깃을 왼쪽에서 오른족으로 교차시켜서 앞을 여미었다. 당상관(堂上官)은 남색을, 당하관(堂下官)은 홍색을 입었다. 철릭과 주립(朱立)으로 된 군복을 융복(戎服)이라 하여, 주로 무신이 입었으나, 문신도 전시에 왕을 호종할 때에는 입었다.

 

 

 

 

 

 

 

 

 

장옷은 지정 당시 '직령포'로 명명된 유물 중의 하나이었으나, 다시 조사를 통하여 '무명 솜누비 장옷'으로 변경되었다. 겉섶과 안섶이 모두 두 조각으로 이루어져 잇으며, 동정이 달린 목판깃은 좌우의 섶 안으로 들여 달렸다. 겨드랑이 아래에는 커다란 사다리꼴 무와 겨드랑점의 사각접음무가 달렸다. 또한 소매 끝은 접어서 입도록 되어 있다.

 

 

한편 '직령포'로 명명되었던 나머지 3점, 즉 '백무명겹유직령포'와 '백무명겹남의직령포' 그리고 '명주직령포'는 다시 조사를 통하여 큰 저고리에 해당하는 '과두'로 변경되었다. '무명 솜누비 과두'는 얇게 솜을 두고 0.8cm 간격으로 곱게 누볐다. 뒷길이는 107cm이며 화장은 85cm이다. 칼깃에 동정은 없으며 겉섶은 이중섶이 달려 있다. 겨드랑이에는 커다란 사디리꼴무와 작은 사각접음무가 달려 있다. 가는 고름이 달렸던 흔적도 남아 있다. '백무명겹납의직령포'로 명명되었던 옷은 누비가 아닌 '무명 겹과두'로, 뒷길이는 108cm이며 화장은 85cm이다. 칼깃에 동정은 없으며 겉섶은 이중섶이다. 겨드랑이에는 커다란 사다리꼴무와 작은 사각접음무가 달렸다.

 

 

저고리는 1점이 출토되었는데, 풍성한느낌의 '무명솜저고리'이다. 안감은 거친 삼베이다. 뒷길이는 69.5cm이고 화장은 76cm, 품은 74cm이다. 진동은 28cm이며 수구는 27cm이다. 깃너비가 10.4cm인 목판깃이 달렸는데, 겉섶에는 내어달렸고 안섶에는 반 정도 들여 달렸으며 동정은 없다. 겨드랑이에는 사다리꼴 무만 달려 있다. 저고리릐 길이가 길면서 옆이 막힌 여자 '견마기'로 추정되고 있다.

 

 

바지는 1점이 출토되었다. 현재 옷감은 소실되어 바지의 세부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는 없다. 바지 형태의 솜만 남아 있는데 훼손이 심하여 굵은 무명실로 솜을 꿰매어 놓은 상태이다. 윤곽선과 허리말기 등으로 보아 임진왜란 후 착용하기 시작한 남자 사폭바지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사폭바지 유물이 된다.     

 

 

 

 

 

 

 

 

 

 

 

                                                           김덕령 설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김덕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문헌에 전하는 설화로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동야휘집(東野彙輯), 풍암집화(楓巖輯話), 대동기문(大東奇聞) 등에 전하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김덕령의 뛰어난 용력에 대한 일화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내용은 문헌이나 구전 자료 모두 일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문헌보다는 구전설화 쪽이 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전승을 보이고 있다. 특히 도술을 통한 능력의 현시(顯示)와 죽을 때의 신이성(神異性) 등이 구전설화에서 부각되고 있는데, 현재 구전되는 김덕령 설화는 대부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구전과 문헌 자료를 종합하여 그 설화를 정리해 보면 출생, 용력 발휘 및 공을 세우는 것 그리고 억울한 죽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김덕령의 출생 과정   ....    

 

 

 

 

 

 

 

 

 

 

 

 

김덕령의 출생과정에 대한 설화는 풍수지리와 관련되어 있는데, 김덕령의 비범성은 명당의 기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중국 地官이 보아 둔 땅을 김덕령의 부모가 몰래 조상이 묘지로 썼지만, 쓰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구전설화에만 나타나고 있다.

 

 

                                                             김덕령의 용력 ..... 

 

김덕령의 용력에 대한 설화는 풍부하여, 맨 손으로 호랑이를 잡거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백근의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왜장은 김덕령의 화상(怜像)만 보고도 두려워서 군대를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구전과 문헌에 모두 나타난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부친의 복상을 입게 되어 어머니의 만류로 출전할 수 없었지만, 답답하여 싸움구경을 나갔다가 왜장의 진중에 들어가 도술로써 그들을 두렵게 하여 물러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김덕령은 忠과 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경험한다. 이 부분은 구전설화에 나타난다.   

 

 

                                                             김덕령의 죽음 

 

 

 

 

 

 

 

문헌에서는 김덕령의 죽음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당한것으로 기록하여, 실제 행적과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구전설화는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이 용력이 있으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라 죽이려고 하였으나 죽일 수가 없었다. 이때 김덕령이 '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라는 비를 써달라 '고 요구하여 그대로 하자 '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때리면 죽은다 '고 알려 주어 죽음을 당했으며, 죽은 뒤 비문의 글자를 지우려고 해도 더욱 또렷해지자 그냥 두었다고 한다.

 

 

 

김덕령설화는 역사와 설화의 관계를 여러가지 변이를 통해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양유층의 동정은 실제로 김덕령이 가졌던 용력을 과장하여 도술의 차원으로까지 확대하며, 그의 죽음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와같은 다양한 모습은 소설 '임진록(壬辰錄)'의 여러 이본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록'의 김덕령은 문헌설화보다는 구전설화와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전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따라서 김덕령설화는 ' 아기장수설화'로 대변되는 좌절당한 영웅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영웅의 면모까지 겸비한 민간영웅담으로서 이 유형설화의 뚜렷한 맥락을 잇고 있는 중요한 설화이다.    

 

 

 

 

 

 

                                                     김덕령, 관련유적

 

 

 

 

 

 

김덕령(김덕령)은 65년동안 역적(역적)이었다. 선조(선조)는 김덕령(김덕령)을 역적(역저)으로 몰아 장살(杖殺 .. 죽을 때까지 매질하는 형벌)시켰지만, 남도인남ㄷ인)들은 그를 설화(설화)나 전설(전설)을 통해 영웅(영웅)으로 재탄생시켰다. 광주와 담양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김덕령 생가                    金德齡 生家

 

 

 

 

 

 

 

 

 

 

 

 

 

 

 

                               충효동 정려비각                    忠孝洞 旌閭碑閣

 

 

 

 

충장공 김덕령(충장공 김덕령)과 그의 부인(부인) '홍양 이씨' 그리고 그의 형 '김덕홍(김덕홍)', 그의 아우 ' 김덕보(김더고)' 등 일가족의 충효(충효)와 절개(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비각)이다.

 

 

 

 

 

 

 

 

 

이 비(비)는 정조(정조) 13년(1789)에 세운 것으로 높이 220cm, 너비 68cm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고 삼문과 담장을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 열, 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아니라 ' 충효지리 (忠孝之里) '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장사                     忠壯祠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사당으로, 충장공 김덕령(충장공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2월에 조성되었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영정)과 교지(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恩輪碑閣) 그리고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김덕령의 '의복'과 묘에서 출토된 관곽(棺槨),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묘)가 있다.

 

 

 

 

 

 

 

 

 

 

 

 

 

 

 

 

                                             은륜비                     恩綸碑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이다. 1842년 (헌종 8), 당시 광주목사이었던 조철영(趙徹永)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비석 전면과 측면, 후면 모두 40행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69m, 폭은 62cm, 두께는 35cm의 크기이다. 대석은 가로 1.02m, 세로 73cm이다. 원래 충효동 배재마을에 있었다가, 충장사가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취가정                        醉歌亭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즉,  충장공 김덕령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에 그의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었으나 1955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변 정자들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 보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을 향하여 세웠다.

 

 

 

 

 

 

 

 

 

 

 

 

 

 

 

 

 

취가정(醉歌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송강 정철의 제자이었던 석주 권필 (石州 權필. 1569~1612)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은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뱆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김덕령의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억울한 누명을 쓰고 29세의 아까운 나이에 혹독한 고문 끝에 장살(杖殺) 당한 김덕령이 어느 날 당시의 저항 시인 ' 석주 귄필(石州 權필) '의 꿈에 나타나 한맺힌 노래 한 수를 불렀다. 이것을 취해서 부른 노래라 하여 취가(醉歌) 또는 취시가(醉時歌)라고 하는데, 김덕령의 후손들이 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으면서 그 꿈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취가정'이라고 하였다.  

 

  

 

 

                                             취시가                   醉時歌

 

 

 

 

 

 

 

 

 

취하였을 때 노래 부르니  /  이 노래 듣는 사람이 없구나  /  꿏과 달 아래에서 취하는 것도  /  나는 바라지 않고  /  공훈을 세우는 것도  /  나는 바라지 않네  /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 구름이요  /  꽃과 달 아래에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일세  /  취했을 때 노래하노니  /  다만 바라옵기는  /  긴 칼 잡고 명군을 받들고자 함이네

 

 

 

 

석주 권필(석주 권필)이 지은 시(시)의 제목은 길다. 다음과 같다.  ' 꿈 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었는데, 바로 김덕령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의 제목이 취시가(취시가)인데, 나도 두 세 번 읽어 보았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너무나 서글퍼서 그를 위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석일파금파

                                    壯志中催奈命何          장지중최나명하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영령무한한

                                    分明一曲醉時歌          분명일곡취시가

 

 

 

 

장군께서 지난 날에 창 잡고 일어났지만  /  장한 뜻 중도에서 꺾여지니 다 운명인 걸 어찌하리요  /  지하에 계신 영령이여, 그 한스러움은 끝이 없지만  /  취했을 때 부르는 한 곡조는 아직도 분명하여라

 

 

 

 

 

 

 

 

 

 

 忠貫日月     氣壯山河      醉歌於地       聲聞于天     /        충성은 해와 달을 꿰었고    기개는 산하를 덮었는데    취하여 땅에서 부른 노래     감동하여 하늘이 들었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이 정자는 뒤쪽이 방이고, 앞쪽이 마루이며, 마루 앞의 기둥에는 누구의 詩인지는 모르지만 김덕령의 한을 달래려는 듯 4언시(四言詩)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큰나무들이 서 있는 둥그런언덕 위에 청계천을 뒤로 하고 외따로 자리잡은 이 정자는 부근의 여러 정자들이 모두 청계천을 내려다보는데 반하여, 반대편에 널리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고 있다.

 

 

 

 

 

 

                                              풍암정                            風巖亭

 

 

 

 

 

 

 

무등산 충효동 분청사기 전시관 앞을 지나 오솔길을 한없이 따라가다 보면 단풍나무 가로수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깊은 산골짜기도 아니련만 제법 심산유곡의 운치가 느껴지는 곳이다. 계곡이 그렇고 노송이 그렇다. 오솔길을 걷다 보면 풍암저수지가 너오는데, 크지는 않지만 가득 찬 물이 산그림자를 안고 있어 비취색 빛깔의 물빛이 인적 없는 깊은 골짜기에 들어온 듯하다.  

 

 

 

 

 

 

 

 

 

풍암정은 그렇게 계곡을 건너 바위등을 밟고 올라서면 참으로 단아하게 서 있다. 소나무와 바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모습 때문일까. 여느 정자보다 작고 아담안 모습이 보는 이를 사로 잡는다. 조선시절, 선조와 인조 때 활동하던 김덕보(金德普)는 그의 큰형 김덕홍(金德弘)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작은 형 김덕령(김德齡)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매질을 당하여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를 슬퍼한 김덕보(金德普)는 무등산 원효계곡을 찾아와 풍암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학을 양성하고 시인 묵객들과 더불어 은둔생활을하며, 여생을 이곳에서 마쳤다. 풍암정에 걸려 있는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등의 시문은 그가 여기에서 수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풍암정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 김덕보(金德普)는 ' 늘그막에 단풍나무 우거진 벼랑에다 두어 칸 정자를 짓노라 '라고 풍암정 내력을 몇 자 시(詩)로 지었다. 정홍명이 쓴 '풍암정기'에는 '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암괴석의 사이마다 단풍나무 무성히 자라고 있어 시내의 물빛이 붉을 정도이다 '라는 글을 남기었다. 그래서 '풍암'이라고 했다는 설과 김덕보의 '호(號)'를 인용하여 풍암정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김덕보                      金德普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風巖)이다.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의 동생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라도 각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큰현 ' 김덕홍 '이 1592년 금산(錦山)전투에서 전사하고, 작은 형 '김덕령'이 1596년 모함을 받아 죽자, 의병활동을 그만두고 향리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57세의 나이로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전투에 참가히지 못하고 죽었다.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큰형 ' 김덕홍 (金德弘) '과 함께 포상되었다.

 

 

 

 

 

 

 

 

 

 

 

풍암정의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한식 기와를 올렸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풍암정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시냇가 바위 위에 지어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풍암저수지가 있고, 왼쪽으로는 무둥산 마루와 함께 절경을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많이 알려져 등나무 의자와 돌계단의 휴식공간을 마련하였다. 풍암정에는 ' 풍암정사 '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 정사 (精舍)'란 공부를 가르치는 공간의 의미를 갖고 있다. 풍암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좌우 1칸의 온돌방이 있고 큰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보이는 원형 기둥을 세웠다. 문은 띠살문이며 우물마루를 구성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천장의 중앙은 우물천장이다. 우측에 거실 1칸을 두고 정면과 좌측은 판자마루로 올렸다.여기저기에 있어 앉아서 가깝고 먼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가로등(街路燈)도 세워 밤에도 풍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마르지 않는 계곡의 물도 풍암정을 아름답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정경이다. 졸졸 흐르는 물이 비가 오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룰 것이다. 바위에 부딪쳐 하얀 물보라를 이루면 그 또한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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