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징비록 (懲毖錄)

영국신사77 2014. 2. 3. 23:06

非山非野 2009.05.14 18:23


                                                                 징비록(懲毖錄)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宣祖) 때 영의정이었던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이 

임진왜란 7년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저자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恨居)할 때 저술한 수기(手記)이다. 

징비록 2권,

근포집(芹포集) 3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軍門騰錄) 2권

녹후잡기(錄後雜記)

로 구성되어 있다.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戰況)을 기록한 것이다. 


근포집(芹포集)은 저자가 올린 소차(疏箚 ...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및 

                                     계사(啓辭 ... 죄를 논하는 글)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辰巳錄)은 임진년(壬辰年. 1592)으로부터 계사년(癸巳年. 1593)까지 

                      종군(從軍)하는 동안의 장계(狀啓)를 수록하고 있다. 

   *장계(狀啓) ...관찰사나 왕의 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올리는 글.


군문등록(軍門騰錄)은 1595년부터 1598년까지 저자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재임 중의 문이류(文移類 )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自敍.... 자신이 쓴 서문)와 자발(自跋)이 들어 있다. 

                    *문이류(文移類 ... 상급관청과 하급관서 사이에 오가는 공문)


이 책의 처음 간행은 1633년(인조 11), 

서애 류성룡의 아들 ' 유진(柳袗) '이 

서애집(西涯集)을 간행할 때 그 속에 수록함으로써 비롯되었고, 

10년 후에 다시 16권의 징비록(懲毖錄)을 간행하였으며,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재간행되었다. 

원래는 16권 6책이었으나, 

1책(15~16권)이 빠진 14권 5책만 남아 있다.   

 

 

                                                               국보 제132호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여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은 아니다. 

기록문학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자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징비록'은 신뢰를 받고 있다. 

 

애초에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공론정치의 활성화라는 목적에서 시작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선조(宣祖) 때부터 소모적인 당쟁(黨爭)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집권층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으며, 

임진왜란을 불과 1년 앞둔 1591년에는 

집권 동인(東人)이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뉘어 조정의 공론을 분열시켰고, 

그에 따라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 역시도 동인(東人)의 일원인 남인(南人)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능(無能)이나 전술의 부재로 인해 

전투를 그르친 일부 장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객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징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상대 정파에 의하여 탄핵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였지만, 

전란을 회고하는 이 노정객의 안타까움과 반성의 심정은 

당파적 증오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징비록'의 저술 연대를 보여주는 명확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유성룡이 징비록의 저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史料)나 공문서들에 대한 검토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이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사망 이후 책장에 묻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아들 '진(袗)'에 의해서, 

생전에 쓴 글들을 엮은 '서애집(西涯集)'과 함께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안동의 하회종가(河回宗家)에 보관되어 있는 유성룡의 친필(親筆) 초본과 더불어, 

초판을 기초로 하여 간행된 16권본과 2권본 등 두 가지 판본 또한 전해지고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징비록'에는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日本)에까지 전해져 간행되기도 했다. 


'징비록'은 1695년 일본 교토의 야마토야에서 중간(重刊)되었는데, 

당시 숙종 임금은 이 책의 해외 유출을 우려하여 

일본 수출을 엄금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전란을 대비하는 선견지명

 

징비록(懲毖錄)에서 유성룡은 전황(戰況)에 대한 경과뿐만 아니라 

전란(戰亂) 발생의 원인과 조정의 대응(對應)에서 드러난 문제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 사신이 보인 오만한 태도나, 

'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 假道入明 ' 라는 일본의 국서(國書)는 

일찌감치 전란을 예고하는 징조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일본(日本)과의 교류가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며 

어떻게 하면 그 파장을 축소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현실화 되어가는 전란(戰亂)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즉, 1591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선조(宣祖) 임금이 전쟁의 가능성을 묻자, 

통신사 대표 김성일(金誠一)과 황윤길(黃允吉)은 상반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황윤길과 상반된 답변을 한 이유를 따져 묻는 장면이 '징비록'에 나온다.

 

"황윤길(黃允吉)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狀啓)를 올려 왜국(倭國)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고 말했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복명(復命)을 할 때 

임금께서는 그들을 불러 보시고 일본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黃允吉)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 신(臣)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씁니다 '고 하며 

다시 ' 황윤길이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더러는 황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 

또 더러는 김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 때 나는 김성일(金誠一)에게 묻기를 

'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 ..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兵禍)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 '하니, 

그가 말하기를 

' 나도 역시 어찌 일본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고 장담하겠습니까 ? 

다만 황사(黃史)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 '고 하였다.  

 

국난(國亂)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도 

지배층 내부의 당파적 증오(憎惡)로 인해서 

조정의 국론(國論)이 분열되고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을 목도한 유성룡은 

전란을 대비하는 그 나름의 계책을 선조(宣曺)에게 건의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조정의 인사정책 등에 반영되어 

훗날 전란 극복에 커다란 보탬이 되기에 이르렀다. 


유성룡은 정읍현감이던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수사에 

그리고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던 것이다. 


결과론적인 평가이기는하지만, 

이는 전란을 대비한 유성룡의 용인술(用人術)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더불어 

유성룡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정책은 바로 ' 진관체제(鎭管體制) '로의 복귀였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립된 일종의 지역적인 방어체제인 진관(鎭管)체제는 

각 도(道)의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의 직책을 겸임한 채 주진(主鎭)에 있으면서, 

도내 각진의 유군과 수군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진(主鎭) 밑에는 거진, 제진 등이 있어서 

지역의 수령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지방의 진지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건국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병역기피자(兵役 忌避者)들이 증가하였고, 

그 때문에 병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기점으로 '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란, 

전투가 발어질 경우 수령들이 휘하의 군사들을 전장으로 인솔해가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군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체제이었다. 

따라서 이 체제는 대규모의 적군과 정면 대결할 때의 병력운용 개념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기동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군지휘관이 전장(戰場)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급변하는 전세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체제이기도 했다. 

유성룡은 일찍이 '제승방략제'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관체제(鎭管體制)로의 복귀를 강력히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이 '징비록'에 들어 있다.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는 각 도(道)의 군사들을 모두 진관(鎭管)에 나누어 붙여서, 

사변이 생기면 진관(鎭管)에서는 그 소속된 고을을 통솔하여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정돈하고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경상도를 말하자면, 김해, 대구, 상주,경주,안동, 진주가 곧 여섯 진관(鎭管)이 되어서 

설사 적병이 쳐들어와 한 진(鎭)의 군사가 패한다 할지라도 

다른 진(鎭)이 차례로 군사를 엄중히 단속하여 굳건히 지켰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허물어져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군제가 제승방력(制勝方略) 체제로 편성되어 있기에 

비록 진관(鎭觀)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사오나, 

그 실상은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으므로, 

한번 경급을 알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이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장수가 없는 군사들로 하여금 먼저 들판 가운데 모여 

장수 오기를 천리 밖에서 기다리게 하다가, 

장수가 제 때에 오지 않고 적의 선봉이 가까워지면 

군사들이 마음 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대중이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때는 비록 장수가 온다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싸움을 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다시 조종 때 마련한 진관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성룡의 거듭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제승방략'체제가 오랜기간 문제 없이 사용되어온 전술임을 들어 

그의 건의를 끝내 묵살해 버리고 만다.

훗날 개전(開戰) 초기, 관군(官軍)의 잇단 패배의 원인이 

도성(都城)에서 파견된장수를 기다라다가 지친 지방의 군인들이 

왜군(倭軍)의 접근에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린 데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지놘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유성룡의 선견지명은 정확한 것이었다.              

 

 

                                       왕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서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1592년 4월 13일, 대마도를 거쳐 바다를 넘어온 왜군(倭軍)의 공격에 

부산포를 비롯한 영남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전쟁 발발 후 나흘이나 지나서야 

왜군의 상륙과 잇단 패전을 알리는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고 

조정은 수습책을 찾지 못한 상태로 혼란에 빠져든다. 


조정에서는 대표적인 무장 신립(申粒)과 이일(李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이일(李鎰)은 상주에서 적을 피해서 도망치고, 

신립(申粒)은 충주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친 채 왜적과 맞섰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도성(都城)으로 향하는 관문인 충주(忠州)에서의 패배가 서울로 전해지자, 

조정과 백성은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선조(宣祖)는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좌의정(左議政)이던 유성룡 역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 나섰다. 

왜적의 서울 입성이 임박하였다는 긴박한 보고가 속속 전해지는 가운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도성을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쫓아와서 호종하였다. 벽제관에 이르니 비가 더 심하게 내려 일행이 다 비에 젖었다. 임금께서는 역(驛)으로 들어가셨다가 조금 뒤에  나와 떠나셨는데, 여러 관원들이 여기에서 도성(都城)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시종(侍從), 대간(大諫)들이 가끔 뒤떨어져 오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 비가 물 뭇듯 쏟아졌다. 궁인(宮人)들은 말을 타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을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밭에서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삽니까 ? '고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러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에 오르신 뒤에 수상(首相)과 나를 부르시기에 들어가서 뵈었다. 강을 건너고 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물체의 빛깔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 후 왜적들은 삽시간에 평양성(平讓城) 부근까지 육박하였다. 

이처럼 왜적이 급속하게 북상(北上)해오자 피난길의 조정은 다시금 경악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피난길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동요와 민심(民心) 이반(離叛)의 심각성이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배신감이 극에 달해 있어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가라앉히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전란(戰亂) 이전부터 백성들은 지배계층의 수탈(收奪)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임시 행궁(行宮)을 정한 평양성(平讓城)의 백성들 사이에서 

임금이 평양성마저 버리고 피난을 떠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심은 조정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들고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 곤욕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성(城) 안의 아전(衙前)과 백성들이 난(亂)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그 길을 막고는 함부로 쳐서 묘사(묘사)의 신주를 땅에 떨어뜨렸다. 또한 따라가던 재신(宰臣)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 너희는 나라의 녹(祿)만 훔쳐 먹다가 이제와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느냐 ? '고 하였다. 나는 연광정(練光亭)에서 임금이 계시는 행궁으로 달려가면서 길 위에 있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성난 얼굴로 머리털을 곤두세워 소리를 지르기를, ' 성(城)을 버리고 가시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속여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우리들만 적의 손에 넣어 어육(魚肉)으로 만드십니까 ? ' 하였다. 궁문에 이르니 난민들이 거리를 꽉 막았는데, 모두들 팔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무기와 뭉둥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막치며 시끄럽게 어지럽혔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재신(宰臣)들과 성문 안 조당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뜰 안에 서 있었다."   

 

 

이와같은 민심의 심각한 이반(離叛) 현상을 기술하는 대목은 

'징비록'의 이곳저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평양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날 것을 재촉하였으며, 

선조는 아예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피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임금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평양성에서 왜적을 맞아 항전하기로 결정을 이끌어냈다. 

대신들도 더 이상 민심의 이반을 방치해서는 위험하다는 정세판단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평양성에서의 소요는 진정되었다. 

조정이 항전(抗戰)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유성룡이 선조 앞에서 백성들의 의지를 믿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항전을 벌인다면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해 볼 수 있지만,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떠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대목이 있다.   

 

 

                                            원병의 도착과 전세의 역전

 

 

유성룡은 '징비록'의 내용 상당량을 명나라 구원병에 관한 기록에 할애하고 있다. 

내용의 분량이 증언하듯이, 

개전(開戰) 초기 관군(官軍)의 잇단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선조(宣曺)와 조정의 대신들에게 

명나라의 구원병은 실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 천병(天兵) '이나 다름 없었다. 

명나라의 원병(援兵)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남해에서 거둔 이순신(李舜臣)의 승전과 각지의 의병(義兵) 봉기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주와 선천을 거쳐 국경에 인접한 마지막 피난지인 

의주(義州)까지 내몰렸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명군(明軍)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차질없이 조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전란 앞에서 조정의 권위가 무너져 

인력과 물자의 동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흩어진 관군(官軍)을 다시 규합하여 

명군과 함꼐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평양성(平讓城)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왜군(倭軍)의 전력에 크게 놀란 명나라 장수들은 전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명나라 군대의 총사령관 이여송(李如松) 역시 왜군의 습격 소문에 두려워하여 

평양성 이남(以南)을 수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당시 유성룡은 체찰사(體察使)의 직분으로 

명군에 대한 보급과 협의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종사관을 통해 명군이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이여송(李如松)에게 전달했다. 

거기에는 도성 수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사 항전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첫째로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 안에 있는데, 

지금 왜적들이 있는 곳에 빠졌으므로 귀신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것이고, 


둘째로는 경기도 이남에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구원병이 오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 왜적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로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자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로는 우리 장병들이 비록 힘이 약하다 하더라도 

명나라 구원병의 힘에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려고 도모하는데 

후퇴하자는 명령을 듣게 되면 필시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다섯째로 구원병이 물러간 뒤에 왜적들이 그 뒤를 타서 덤벼들면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 하였으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이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징비록에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인 이여송(李如松)과 유성룡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부관의 어이없는 모함 때문에 이여송이 유성룡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려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왜적과의 강화(講和)를 반대하는 유성룡이 명군과 왜군 사이에서 화친(和親)을 의논하는 사자(使者)들의 왕래를 방해하기 위하여 임진강(臨津江)의 배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그것이 모함임을 알게 된 이여송(李如松)이 한동안 겸연쩍어 했다는 이 일화는, 지원군의 입장이면서도 실은 점령군(占領軍)이나 다름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던 명나라 군사 앞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표현 그대로 울며 애원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조정의 뼈아픈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하겠다.

 

 군세(軍勢)를 수습한 관군과 의병의 활역은 눈부셨다. 행주산성에서 권율(權慄)이 거둔 승리와 남해 바다 이순신(李舜臣)의 거듭된 승전 그리고 각지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義兵)들의 유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조금씩 바꿔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4월 30일, 왜군이 떠나버린 도성에 명나라 군사가 진입하면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 역시 명나라 군사들을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전란 발발 초기에 아무런 경황도 없이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도성(都城)이었으니 그 감격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겠으나, 유성룡의 눈에 비친 200년 도읍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남은것은 오직 거대한 폐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모습뿐이었다.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로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굶주리고,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얼굴색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씨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 관청과 여염집 할 것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崇禮門)에서부터 동쪽으로 남산 밑 일대에 왜적들이 거처하던 것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宗廟)와 세 대궐 및 종루(鐘樓), 각사(各司), 관학(館學) 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먼저 종묘(宗廟)를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다음으로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문안하려고 온 여러 사람들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도성 수복의 여세를 몰아 한강 이남의 왜군을 추격하고자 했던 조정과 유성룡의 의지는 

명나라 군사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선조(宣祖)가 평양성에서 서울로 돌아올 무렵, 

명군과 왜군 사이에는 종전(終戰) 협상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조선의 강화(講和) 반대 목소리는 배제시킨 상태이었다. 

더구나 협상안에는 왜군이 조선 영토를 분할점령(分割占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는 물론 조정의 대신들은 

명나라와 왜국 사이의 이와같은 움직임에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명나라 지원병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왜군을 격퇴하기에는 군사적 역량이 너무도 부족하였다. 

더구나 그동안 명나라 군대의 군수품을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백성들에게 부과한 징발과 부역은 한계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징비록에 기록된 유성룡의 민생 현장에 대한 묘사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만연하였으며, 

명군이 먹을 군량(軍糧) 운반에 동원된 노인과 아이들이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대다수는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아비와 아들, 남편과 자식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러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신호가 켜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종전의 뒤안길에서

 

도성을 수복한 관군과 명군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 성(城)을 쌓고 지구전(持久戰) 태세로 본격적으로 돌입한 왜군(倭軍) 사이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과 숨막히는 첩보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하옥(下獄)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순신의 하옥(下獄) 관련 부분은, 그 후반부에 소개된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에 관한 유성룡의 극진한 평가와 비교할 때, 자신의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일어난 사건의 경과 위주로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물론 이순신에 대한 원균(元均)의 비판이 모함이었다거나 조정이 이중간첩(二重間諜) '요시라'의 꼬임에 속아 넘어 갔다는 내용은 들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순신(李舜臣)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다름 아닌 유성룡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적극적인 구명(救命)활동이 '징비록'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의아스럽게 비춰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순신에 대한 옹호(擁護)가 

선조(宣曺)의 화를 돋우어 이순신에게 더 큰 화(禍)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였거나, 

유성룡과 이순신 두 사이의 사적(私的)인 친분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의 후반부에서 이례적(異例的)이라 할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인물됨과 능력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순신의 전사(戰死)와 관련하여 유성룡이 밝힌 다음의 소회(所懷)는,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단순히 

훌륭한 수군(水軍) 사령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순신(李舜臣)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놓은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며, 

무릇 시집 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딸을 보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 경륜(經輪)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1598년 7월, 왜군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함에 따라 남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은 전의(戰意)를 상실한 채 본국으로 귀환을 서둘렀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종전(終戰)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왜군의 대규모 함대를 맞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이순신은 전사(戰死)하였으며, 이 싸움을 기점으로 순천을 점령하고 있던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하여 부산, 울산, 하동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전체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조선 조정은 7년 전란(戰亂)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공허(空虛)한 영광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커다란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징비록' 서문에서 유성룡이 토로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화(戰禍)가 몰고 온 참혹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견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어지러운 난리를 겪을 때 중요한 책임을 맡아서, 그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하였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유성룡의 모습은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어쩌면 때늦은 후회로 밖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 '는 시경(詩經)의 구절로 

자신의 책 제목을 대신한 유성룡의 마음가짐만큼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