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권율장군

영국신사77 2014. 2. 3. 20:58

 

 

 

 

                                            권율(權慄)

 

 

 

 

 

 

 전쟁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폭력과 참혹한 피해를 수반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교류(交流)에도 중요하게 기여한다. 

그리고 역사상 많은 영웅(英雄)들은 전쟁의 산물이었다. 

이런 모순되는 진실은 인간과 역사의 양면성(兩面性)을 착잡하지만 또렷하게 보여준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란(戰亂)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었다. 

흔히 양란(兩亂)이라고 불리는 '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임진왜란은 

전쟁의 기간, 전장(戰場)의 범위, 피해의 규모, 전개의 과정, 결과와 영향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많이 달랐다. 

병자호란과 달리 임진왜란은 전면적(全面的)이었고, 장기전(長期戰)이었으며 

따라서 피해와 파괴의 결과도 그만큼 거대하였다.   

 

 

 

 권율(權慄 . 1537 ~1599, 62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언신(彦愼), 

호(號)는 만취당(晩翠堂) 또는 모악(摹嶽)이다. 

그의 9대조는 고려(高麗) 후기의 유명한 문신(文臣)인 '권부(權溥)'였다. 

권부는 고위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당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인 이제현(李齊賢)의 장인(丈人)이었다.  

권율의 조부(祖父)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이다.

 

영의정이라는 관직이 상징하듯이, 

'권철(權轍)'은 명종(明宗) 때부터 선조(宣祖) 초반까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신하이었다. 

권율(權栗)의 가계에서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그의 사위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었다는 것으로, 

그는 영의정까지 역임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신(名臣)이었다.   

 

 

                                                    45세에 과거 급제

 

권율(權慄)의 출세는 많이 늦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582년에 

45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당시의 평균 수명(壽命)과 보통 30세 전후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통계에 비추어 

이것은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다. 

성적도 상위(上位)가 아니라 

중후위(中後位)에 걸쳐있는 병과(丙科 .. 11~33 등)이었다.

 

그는 승문원 정자(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감찰(監察), 예조좌랑, 호조정랑, 전라도 도사(都事), 

경성판관 등의 관직을 거쳤다. 


급제한 나이로 보나, 역임한 관직으로 보나 

그의 출세가 그리 화려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당시의 나이로 보면 노년(老年)일 55세 때 

자신의 일생은 물론 

국가의 운명에 거대한 영향을 준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승전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인 1591년, 권율(權慄)은 호조정랑(戶曺正郞)이었다가 , 

서북지역의 최변방인 의주(義州) 목사(牧使)로 발령되었지만, 이듬해에 해직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관직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광주(光州) 목사(牧使)'에 제수되었다. 

아마도 이전에 전라도 도사(都事)이었던 경력이 참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잘 알듯이 임진왜란의 초기 전황(戰況)은 

도성(都城)이 한 달 만에 함락될 정도로 속수무책의 패배이었다. 

왜군(倭軍)의 침략에서 무사한 지역은 전라도(全羅道) 밖에  없었다.

 

권율은 처음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光)과 방어사 곽영(郭嶸) 휘하의 중위장(中衛將)으로 배속되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北進)하였다. 수원(水原), 용인(龍仁) 부근에 이르렀을 때 권율(權慄)은 지공(遲攻)을 건의하였지만, 이광(李光) 등 수뇌부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는 대패(大敗)였다. 권율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光州)로 물러나 기회를 기다렸다.     

 

 

                                               이치 전투(梨峙 戰鬪)

 

이치(梨峙)는 금산군(錦山郡) 진산면 묵산리 대둔산(大芚山)  중허리에 위치한 곳으로 

' 배재 '라고도 불리는 곳이며, 

건라북도 완주군으로 통하는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으로 중요한 곳이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군(倭軍)이 

군량미(軍糧米)의 현지 보급을 위하여 

이 이치(梨峙 ..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고 

왜군이 2만 병력을 이끌고 이 이치(梨峙)를 넘으려 했다.  

 

 

 1천5백 명의 호남 의병(湖南 義兵)을 모은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은 

1592년 7월 초에 전주(全州)에서 전라도관찰사 이광(李光)을 만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된다. 

그리고 금산(錦山)에서 전주(全州)로 넘어오는 이치(梨峙)를 방어선으로 정하고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의 부대와 합세한다. 

황진(黃進)부대에는 황박, 공시억, 위대기, 소제,소황, 노홍, 양은원 등 무인(武人)들이 많았다. 

 

권율(權慄)은 황진(黃進)부대와 함께 이치(梨峙) 전투부대를 편성한다. 

대장은 권율(權慄), 선봉장은 황진(黃進), 후군장은 황박(黃博), 기병장은 권승경, 

편비장은 위대기와 공시억이 임명되었다. 

황진(黃進)은 남원(南原) 출신으로 세종(世宗)시절 황희(黃喜) 정승의 5대손이다.  

 

권율(權慄)의 이치(梨峙) 전투대비는 철저하였다. 

복병(伏兵)은 물론이고 길 가운데와 길 가 요소요소에 

목책(木柵)을 쌓고 함정을 파 놓았으며 마름쇠도 깔아놓았다. 

화살과 돌멩이도 많이 준비하였다. 

산(山) 정상에는 청백홍황흑(靑白紅黃黑)의 5색(色) 깃발을 세워 기세를 높이었고 

검은 연기를 피워서 왜군이 우리의 병력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괭과리, 북, 징, 납새 등 각종 악기를 울려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마침내 1592년 7월 8일 새벽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倭軍) 제6군 수 천명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왜군의 공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셌다. 

왜군은 북을 치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조총(鳥銃)을 쏘아대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정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많은 산새와 짐승들이 놀라서 도망을 쳤다. 

왜군이 산 위를 집중 공격하자 조선군 또한 용맹을 다하여 왜군을 막았다. 

왜군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黃進) 장군은 나무에 기대어 총탄을 막으면서 활을 쏘았다.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왜군은 크게 패하였다. 

왜군의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그러다가 선봉장 황진(黃進)이 물러나는 왜군의 탄환에 맞았다. 

이마에 피가 흐르고 황진(黃進)은 쓰러졌다. 순간 왜군들의 사기(士氣)가 높아졌다. 

왜군이 다시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그러자 총사령관 권율(權慄)이 군사들을 직접 독려하여 싸웠다. 

전투는 정말 치열하였다. 

밀고 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왜군이 조선군의 사기를 이기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왜군은 무기를 버리고 깁옷을 벗어던지고 금산(錦山) 쪽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죽음을 면한 황진(黃進)은 다시 동복(同福)으로 돌아갔는데, 

도중에 전주(全州)에서 사람들이 길을 막고서 

' 황진장군이 아니며 전주가 어찌 무사하였을 것인가 '

하면서 황진(黃進)의 공(功)을 칭찬하였다. 

 

일본(日本)은 임진왜란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친다. 

권율(權慄)도 행주대첩(行州大捷)보다 이치전투(梨峙戰鬪)를 

더 의미(意味) 있는 전투로 회고하였다


이치(梨峙) 전투로 말미암아 권율(權慄)은 

광주목사(光州牧使)에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영전하였고, 

나주목사로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황진(黃進)도 동복현감(同福縣監)에서 

익산군수(益山郡守) 겸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다.           

 

 

                        수원[오산] 독성산성 전투(禿城山城 戰鬪) 

두 번째의 승전은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 전투이었다. 

같은 해 12월 권율(權慄)은 도성(都城)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북진(北進)해 

경기도 오산(烏山)의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였다. 

이곳에서 권율(權慄)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우키다)가 이끄는 왜군(倭軍)과 접전해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권율(權慄)은 도성 수복을 위해 다시 전진하였다. 

그가 선택한 거점은 행주산성(行州山城)이었다.

 

  

1592년 7월 8일, 이치(梨峙)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왜군들이 전라도(全羅道)로 침공하는 것을 막은 권율(權慄)은 

광주목사에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승진한다. 

그러나 나주(羅州)로 부임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전라도순찰사'가 된다. 

권율이 진중에서 '전라감사' 임명을 받자,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이 피난해 있는 서쪽을 향해 

울음을 터트리니 온 군중이 슬퍼했다.  

 

권율은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기율(紀律)을 일신시켰다. 

그리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의논해 말하기를 

'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왜적(倭敵)의 진지가 되어 버렸지만, 

서울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서울을 수복해야 한다 '하고 

군사 2만 명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갔다.  

 

북진(北進)을 하던 권율은 10월에 양호체찰사 '정철(鄭澈)'을 아산(牙山)에서 만났다. 

'정철'은 권율에게 ' 행재소는 길이 멀어 도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임금의 기체가 평안하시며, 명나라 군사가 도착해 

군사는 많고 먹을 것은 적어 군량(軍糧)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고 돌아가서 전라도를 지키라 '고 했다. 

이 명령에 권율(權慄)은 직산에 머물면서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권율은 장계(狀啓)에서 

' 체찰사 정철이 신(臣)에게 명하기를, 

신(臣)에게 호남(湖南)의 도적을 방어하도록 명하고, 

근왕(勤王)은 다른 장수를 시켜 올려 보내겠다..고 했으나 

신(臣)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했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호남을 지키라는 체찰사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고, 

호남(湖南)으로 도망간 자가 1천여 명이나 됩니다 '고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철'의 처사에 대해 심히 불쾌해 했고, 

임금도 크게 화를 냈다. 

 

조정에서는 '권율'에게 명령을 내려 북진(北進)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조(宣祖)는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주며 말을 급히 달려 '권율'에게 주라고 하면서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 '고 어명(御命)을 내려 

권율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드디어 12월에 권율(權慄)은 경기도 오산(烏山)에 있는 ' 독성산성 (禿城山城) '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권율'이 계속 전진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광주목사(光州牧使)'시절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光)을 따라 북상하다가 

용인(龍仁)에서 무리한 공격으로 참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倭軍) 총사령관 '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 우키타) '는 

권율(權慄)이 호남(湖南)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진(北進)해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단절될 것을 염려해 

도성(都城)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수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에 권율(權慄)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왜군(倭軍)은 세 개의 진채(陣砦)를 오산(烏山) 등지에 만들어놓고 날마다 와서 싸움을 걸었다. 

그런데 '권율'은 직접적인 교전(交戰)은 피하고 성곽을 견고하게 방어했다. 

간혹 정예부대를 매복시켰다가 소수의 적(敵)과 진지를 공격해 적의 예봉을 꺾었다.  

 

권율(權慄)은 한 때 왜적(倭敵)의 거센 공격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권율은 날마다 체찰사(體察使)에게 보고하여 위급상황을 알리고 원군(援軍)을 요청하였다. 

체찰사 정철(鄭澈)은 전라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서 

'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해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산성(禿城山城)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道)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봐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세 번씩이나 그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義兵)을 성화 같이 보내 독성산성의 군사를 구하라 '했다. 

그래서 도사 최철견과 의병장 변사정, 임희진 등 의병(義兵)이 독산성으로 달려갔다. 

 

왜군(倭軍)은 조선군이 지구전(持久戰)을 계속 벌이자 

예리함이 차츰 꺾이고 공격에 따른 소득도 별로 없자 

마침내 진영을 불사르고 한성으로 철수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권율'은 1천 여 명의 정예기병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기습하여 

수많은 왜군을 살상하기도 했다. 

결국 독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왜군의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포위전술(包圍戰術)과 유인전술(誘引戰術)을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특히 독성산성 내에는 샘이 없어 물이 부족했는데, 

왜군(倭軍)이 첩자(諜者)를 통해 이런 사정을 탐지한 후 

산성(山城)으로 흘러들어가는 냇물을 차단해 극심한 급수난(給水難)에 허덕이게끔 하려했다. 

그런데 왜군의 계획을 미리 간파한 '권율'은 

며칠 동안 지탱할 수 있는 물을 비축(備畜)하도록 한 다음, 

서장대(西將臺)에 장막을 치고 연회를 크게 벌리고 

군마(軍馬) 몇 마리도 데려다가 물로 씻기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 장면을 본 왜군은 성(城) 안에 말을 씻길 정도로 많은 물이 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냇물 차단을 포기하였다. 

그러네 '권율'이 서장대(西將臺)에서 말을 씻긴 물은 진짜 물이 아니고 ' 흰 쌀 '이었는데, 

말 위에 뿌렸던 쌀이 햇빛에 반사되어 

멀리서 보면 맑은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장대(西將臺)는 세마대(洗馬臺)라 불렀다고 하는데 

권율(權慄)장군의 고도(高度)의 심리전술(心理戰術)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로 경기도의 왜군들은 한성으로 몰리는 형국이 되었고, 

이때부터 의주(義州)에서 호남(湖南)에 이르는 서쪽길이 확보되었으며, 

한성 수복의 가능성도 엿보이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권율(權慄)의 독성산성 진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12월 1일.... 

전라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에 이르자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했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해 경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했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敗)한 것을 징계해 독성(禿城)을 진출해 머물렀다. 

상(上)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 여러 장수들 중에 명(命)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딘하라 '고 했다. 

 

한양의 왜군들이 진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했으나 

권율(權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왜군(倭軍)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하였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기내(畿內)에 주둔하였던 왜군이 모두 한양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여러 의병(義兵)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해 주둔하면서 중국의 원군을 기다렸다.             

 

 

                                        권율 묘(權栗 墓)

 

 

 

 

 

 

 

 

현재 묘역(墓域)에는 권율장군의 묘(墓)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前) 부인 '창녕 조씨(昌寧 曺氏)'와 후(後) 부인 '죽산 박씨(竹山 朴氏)'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비(墓碑), 상석(上石), 향로석(香爐石), 동자석(童子石) 1쌍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을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기존의 신도비 비문(碑文)이 마모되어 

1861년(철종 12)에 장군의 후손들이 새로 세운 것이다.  

 


                                                 행주산성(幸州山城)

 

 

사적 제56호.  해발 125m의 덕양산(德陽山)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해발70~100m의 능선을 따라 부분적인 토축(土築)을 하였는데, 

그 길이는 약 1km에 이른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子)가 조성되어 있다.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급경사로 요새(要塞)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산성의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90년 서울대 박물관 조사에 의하면... 

생토암반을 조성하여 성 내부에 2단의 석렬(石列)을 쌓고, 

성 바깥쪽에는 기둥을 세워  그 사이에 

5~10cm 두께의 점토와 산흙을 겹겹이 다져 쌓는 판축법(版築法)에 의하여 성이 축조되었다. 

대첩비에서 충장사(忠壯祠)에 이르는 

구간의 밑바닥 부분의 너비는 6.3m, 높이는 2.8m,  성벽 정상부의 너비는 2.3m가량 된다.  

그리고 판축토 안에서는 통일 신라시대의 土器片과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성곽의 축조 시기를 7~8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행주대첩(幸州大捷)

 

 

 

행주대첩(幸州大捷)... 

1592년 (선조 25) 7월 권율장군은 충청남도 금산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그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그 뒤 明나라의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北上하다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그리고 권율은 부하 조경(趙儆)을 시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진지(陣地)를 물색토록 하여 , 

1593년 2월에는 서울 서쪽 20리에 있는 이곳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겼다. 

이곳에는 권율의 부대 외에 승장(僧將), 처영(處英)과 그의 승군(僧軍)이 집결하여 

병력은 모두 1만여명이었다.

 

                                                행주대첩(幸州大捷)


이들은 활,칼,창 외에 화차, 수차석포(水車石砲) 등 특수 무기를 만드는 한편, 

조총에 대비하여  토제(土堤)를 쌓고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서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성책을 이중으로 만든 상태였다. 

한편 일본군은 평양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해서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기도하였다.  

일본군은 2월12일 오전 6시 무렵, 3만여 명의 일본군은 

소서행장(小西行長 .. 고니시 유키나가), 흑전장정(黑田長政 .. 구로다) 등의 장수가 지휘하여 

행주산성을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성(성) 안의 관군(官軍)과 승군(僧軍)은 화차, 진천뢰, 총통 등 무기를 총동원하여  맞섰고, 

권율은 직접 물을 떠서 나누어 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차고 있던 재를 뿌리며, 돌을 던지며 싸웠고, 

관과 민,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하였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投石戰)을 벌이는 군사를 도왔다.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斌)이 화살을 가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본 일본군은 사방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권율은 도망가는 적들을 추적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고, 

일본군 장수에 부상을 입혔으며, 

갑옷,칼,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조선군이 추격하여 머리를 벤 수가 130여 급이 되고 

기(旗), 투구), 갑옷, 칼, 창을 버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왜군의 사상자(死傷者)는 수 천명에서 1만 명에 달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에 끌려간 노인(魯認)이 쓴 ' 금계일기(錦溪日記) '에 의하면 

행주산성 전투에서 죽은자가 1만여 명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아무튼 이번 패배(敗北)는 왜군에게는 매우 참담하였다.  

 

왜군(倭軍)은 퇴각하면서 자군(自軍)의 시체를 불태워 없애버렸기 때문에 

노획한 시체는 2백여 구(軀) 밖에 되지 않았지만 타다만 시체는 이루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전투는 김시민(金時敏)의 진주대첩(晉州大捷),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과 함께  임진왜란 3 대첩(大捷)의 하나이다.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고, 

이후 일본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철수를 서둘렀다.  

 

이 전투로 조선 육군(陸軍)은 일거에 명예를 회복하였다.  

2,300명의 군사로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친 쾌거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주대첩(幸州大捷)은 평양성(平讓城)을 찾기는 하였으나,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패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는 명(明)나라 군대에게 자극을 주었다. 

한편 참패를 당한 왜군은 서울 방어에만 전전긍긍하였고 

4월에는 스스로 서울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처영(處英)

 

 

처영(處英)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승려이자, 의승장(義僧將)이었다. 

호는 뇌묵(雷默)이며, 유명한 휴정대사(休靜大師)의 제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을 갔을 때, 

휴정(休靜)은 8도(道)의 승려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의승(義僧)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처영(處英)은 1,000명의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권율(權慄)과 함께 금산(錦山) 이치전투(梨雉戰鬪)에 참여하여 크게 전공(戰功)을 세웠다. 

 

1593년 2월, 권율(권율)과 함께 북진(北進)하여 

수원(水原)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진(陣)을 치고 

왜적(倭敵)  수희다수가(守喜多秀家 .. 우키타)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리고 권율(權慄)이 3,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였을 때, 

700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한 방면을 담당하여 

적병 3만과 대적하여 2만 4천여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내게 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승첩(勝捷)을 거두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그 후 1794년 (정조 18)  왕명으로 휴정(休靜), 유정(惟政), 처영(處英)의 진영(陣營)을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표충사(表忠祠)와 묘향산(妙香山) 수충사(水忠寺)에 봉안하고, 

관관)에서 춘추(春秋)로 제관과 제수를 보내어 향사(享事)하게 하였다.    

  

 

 

 

 

  

                                                       충장사(忠莊祠)

 

충장사(忠莊祠)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의 행주산성(幸州山城)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권율(權慄)의 영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원래는 행주나룻터 안마을에 ' 행주기공사(幸州紀功祠) '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燒失)되어, 1970년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곳에 충장사를 다시 지어 권율의 영정(影幀)을 안치하였다.

  

 

 

 

 

 

 

 

 

 

 

 

 

  

 

                                                  행주대첩비(行州大捷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1593년 권율(權慄)장군이 이곳 행주산성에서 왜군(倭軍)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2년(선조 35)에 설립하였다. 

대리석재의 비(碑)로서 기단부(基壇部)는 묻혀 있다. 

앞면의 상부에 약간의 균열이 있고, 

측면에는 상부에서 하단까지 약 3cm 정도로 쪼개져 있으며, 

마멸이 매우 심하여 부분적으로는 수십 자(字) 밖에는 알아볼 수없는 상태이다.   

  

 

 

 

 

 

  

                                                행주치마(행주치마)

  

 

  

                                            행주대첩 이후 임진왜란

  

이여송(李如松)이 벽제(碧蹄)에서 패배한 직후인 1593년 2월 12일,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이끄는 약 1만의 조선군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애초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한양을 수복하러 나섰던 권율(權慄)은 

행주산성 위에 진을 치고 

주변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3만에 이르는 왜군은 아침 일찍부터 줄기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권율(權慄)과 장졸들은 거의 12시간에 걸쳐 9차례나 이어진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권율 스스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독전(督戰)했하였데다 

높고 험준한 지형(地形)을 적절히 활용한 결과이었다. 

왜군(倭軍)은 결국 시신(屍身)을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운 뒤 물러갔다. 

조선군은 나머지 시신에서 130여 급의 수급을 획득하였다.   

 

 

                                              머쓱해진 이여송(李如松)

 

행주대첩 이후 권율(權慄)은 군사를 이끌고 파주(坡州) 쪽으로 진영을 옮겼는데, 

왜군은 그에게 섣불리 싸움을 걸지 않았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의 패전(敗電)을 계기로 

조선 육군(陸軍)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권율의 승전 소식에 명나라 군사 지휘부는 복잡한 반응을 보였다. 

사대수(柶大壽)는 ' 조선에 진짜 장군이 있다 '고 한 반면, 

머쓱해진 이여송(李如松)은 

자신이 벽제(碧蹄) 전투에서 패전한 뒤 곧바로 회군한 것을 후회하였다.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었던 무렵, 

조선은 서울 도성에 있는 왜군을 몰아내기 위한 방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군은 서울 주변의 각처에서 도성을 넘보고 있었다. 

권율(權慄)을 비롯하여 고언백(高彦白)과 이시언(李時堰) 등이 

파주(坡州) 일대에서 왜군을 차단하고 

여러 의병장들도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와 한강 주변을 드나들며 

왜군을 교란하는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이렇게 서울 주변에서 유격전 등을 통해 교란작전을 펼치자 

도성의 왜군은 ' 멀리 나아가 땔나무를 할 수 없는 형편 '에 처해 있었다.    

 

  

                                           임진왜란의 종결과 권율장군

  

행주대첩(幸州大捷) 이후인 1593년부터 

명(明)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講和)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권율(權慄)은 행주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명원(金命元)의 후임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도원수(都元帥)는 그 명칭대로 전쟁을 총괄하는 사령관이었다. 

권율은 주로 영남(嶺南)에 주둔하였는데,

그 뒤 한성부 판윤(判尹),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로 옮겼다가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이후 권율(權慄)은 뚜렷한 전공(戰功)을 세우지는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명나라 장수 '마위(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으로 진격하였지만, 

역시 명나라 장수인 양호(楊鎬)가 퇴각을 명령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서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역시 전쟁의 확대를 망설이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권율의 죽음


임진왜란의 중심적 장수이었던 권율(權栗)은 

전란(戰亂)이 끝난 직후인 1599년 노환(老患)으로 관직을 사임한 뒤, 

그 해 7월에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전쟁의 영웅에게 수여한 국가의 추숭(追崇)은 성대하였다. 

그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1604년에는 선무(宣武) 1등공신과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841년에는 행주(幸州)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해 그곳에 배향되었다.

그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공훈은 '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 '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권율은 다소 늦은 나이로 출사(出仕)한 문신(文臣)이었지만, 

거대한 전란에서 혁혁한 무공(武功)을 세운 구국의 명장이었다.   


                                             출처;http://blog.daum.net/0118983530/8438436[김규봉...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