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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과 황진, 이치전투에서 승리 - 금산 이치(상),(중),(하)/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6.17,18

영국신사77 2014. 2. 1. 11:24

김세곤 2010.10.27 01:4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6. 


              권율과 황진, 이치전투에서 승리 - 금산 이치(상)

입력시간 : 2010. 10.27. 00:00


 

광주공원의 권율장군 창의비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영의정 아들 불구 강직성품 뒤늦은 출세

사위 이항복과의 일화 후세에 널리 회자

임금 의주파천후 관군 와해되자 의병모집


"나랏일을 생각하면 

 피를 토하고 눈물 나" 

금산 이치에서 싸운 조선군의 지휘관은 권율(1537-1599)이다. 도원수 권율장군. 그는 해군제독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이끈 육군원수이다. 특히 우리는 그를 1593년 2월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노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권율 장군이 1천500명의 호남 의병을 이끌고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임을 우리는 잘 모른다. 더구나 그가 임진왜란 초기에 광주목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권율은 영의정 권철의 막내아들(다섯째 아들)로서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흔이 넘도록 벼슬을 못하였다. 권율은 아버지가 영의정이었으니 아버지 빽으로 벼슬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광주공원의 권율장군 창의비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영의정 아들 불구 강직성품 뒤늦은 출세

사위 이항복과의 일화 후세에 널리 회자

임금 의주파천후 관군 와해되자 의병모집



"나랏일을 생각하면 

 피를 토하고 눈물 나" 

금산 이치에서 싸운 조선군의 지휘관은 권율(1537-1599)이다. 도원수 권율장군. 그는 해군제독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이끈 육군원수이다. 특히 우리는 그를 1593년 2월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노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권율 장군이 1천500명의 호남 의병을 이끌고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임을 우리는 잘 모른다. 더구나 그가 임진왜란 초기에 광주목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권율은 영의정 권철의 막내아들(다섯째 아들)로서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흔이 넘도록 벼슬을 못하였다. 권율은 아버지가 영의정이었으니 아버지 빽으로 벼슬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권율은 ‘옛날 중국의 강태공은 현명하여도 나이 80세에 출사를 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아직 나이가 마흔 밖에 안 되었고 재덕 또한 그에 비하여 반의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공명을 바랄 것인가’하며 벼슬하는 것을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앉아 글공부를 하는 것보다 영남, 호남, 호서, 관동 지방을 여행하면서 지리 공부에 푹 빠졌다. 금강산을 오랫동안 유람하면서 산수를 즐긴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권율이 벼슬에 뜻을 둔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인 선조 15년(1582년). 이 해에 그는 식년 문과에 합격하여 비로소 승문원 정자가 된다. 이후 그는 예조좌랑, 전라도 도사,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한 백사 이항복(1556-1618)의 장인이기도 하다.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기지와 해학의 대표 인물로서 두 사람은 유성룡 등과 함께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앞장 선 젊은 관료이다.

이항복이 태어 날 때 그의 아버지는 58세였다. 그는 아홉 살 때 형조판서를 한 아버지를 여의었고 16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어 천애고아가 되었다. 한때 그는 골목대장으로 장난꾸러기였으나 열아홉에 권율의 사위가 된 이후 학문에 전념하여 나이 25세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36살의 젊은 도승지(지금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장)였다. 



그는 선조임금을 서울에서 의주까지 모시고 피난을 나선 인물이었다.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가 된 일에 관하여는 재미있는 일화가 여러 개 전해 내려온다. 


이항복이 아홉 살 때 일이다. 어린 이항복의 집에는 오래 된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커다란 가지가 담을 넘어 옆 집 안으로 휘어져 있었다. 


가을이 되자 노란 감들이 열리면 옆집 노비들이 담을 넘어온 가지에 달린 감을 따먹었다. 그런데도 그 옆집은 권세가의 집이라 가세가 기운 이항복 집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지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어린 이항복은 옆집 담을 넘어 권세가 대감의 사랑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창호지 문을 뚫고 주먹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이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라고 대감에게 물었다. 갑자기 웬 주먹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철부지 어린아이의 소리에 다시 한 번 놀란 대감은 “이 손이 네 손이지 내 손이냐” 하였다. 이항복은 “아닙니다. 이 손은 대감님의 방안에 들어 왔으니 대감님 손이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감나무 사건의 사정을 알게 된 대감은 이항복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 옆집 대감이 바로 권율이었다. 이후 권율은 이항복의 똘똘함에 반하여 사위로 삼았다 한다. 

그런데 백사 이항복의 행장에 의하면 이항복을 사위로 삼은 이는 권율이 아니라 권율의 아버지 권철이라는 것이다. 평안도 민담에는 이항복이 장가 간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여기에 권철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영의정 권철이 손녀의 사위 감을 선 보기위해 이항복의 집으로 갔다. 당시 이항복의 집안은 부모도 없이 가세가 기울었다 한다. 가족들은 바짝 긴장하고 권철을 맞이하였다. 허둥지둥 인사를 끝내고 권철이 떠나려던 순간 갑자기 이항복이 일어섰다. “선을 보러 오셨으면 진짜를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이항복은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휙 내렸단다. 이 장면을 본 가족들은 너무나 놀랐다. 한편으로는 무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권철은 매우 흡족해 하며 이항복의 배포가 맘에 들어 그를 손녀 사윗감으로 낙점하였다 한다. 

이항복은 열아홉 살에 권율의 무남독녀 외동딸의 사위가 된다. 이러하니 권율과 이항복은 단순한 장인과 사위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이상의 관계가 되었다. 

1591년, 55세의 권율은 유성룡의 천거에 의해 의주목사로 특진한다. 

이때 이순신도 유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권율을 광주목사로 발령낸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적진이었다. 당직 중인 도승지 이항복은 권율과 작별의 정을 나누면서 “장인어른, 왜 그리 급하게 가시려 합니까”하였다. 이에 권율은 “국가의 일이 급하니, 이제 신하로서 죽음을 바쳐야 할 때이다. 어찌 잠시라도 지체하여 아녀자처럼 슬피 우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후 광주목사 권율은 선조임금이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관찰사 이광과 함께 군사를 모아 서울로 향하였다. 그는 중위장으로 참전하였는데, 6월5일과 6일에 전라·경상·충청 3도 연합군 5만 명이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2천명도 안 되는 와키자카의 왜군에게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선봉장 이지시, 백광언이 전사하는 등 어이없이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행히 광주로 돌아온 권율은 먼저 민심을 수습하고 후방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우선에 약법 10조를 제정 공포하였다. 이를 몇 가지 소개하면 '농사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세금을 잘 낼 것, 무예를 닦고 자제를 군에 응소케 할 것,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 피난민이 오면 힘써 위로 할 것, 관리와 백성이 서로 도와 한 집안과 같이 할 것' 등이다. 

이어서 권율은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무능하고 비겁한 이광이 전혀 움직이지 않자, 권율은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당시 관군은 군사도 몇 명 안 되고 허울뿐이어서 의병을 모집하게 된 것이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운이 막히고 나라가 암흑의 운을 당하여 섬나라 왜놈이 틈을 만들어 백성들이 위급한 때를 당하게 되었다. 늑대의 어금니와 독사의 독이 전국에 깊게 퍼져서 닭소리나 개소리를 사방에서 들을 수가 없으니 삼천리강산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노라. 슬프도다. 2백년 국가 기초가 공고함을 믿을 수 없어 임금은 평안도로 서천하였으니 그 누가 통분하지 않으리오. 단신으로 이곳에 와서 나 또한 조국에 몸을 바칠 뜻이 있으니 임금의 원수를 어찌 잠깐 동안이라도 잊으랴. 신하된 도리로서 함께 물불에라도 뛰어들 각오이다.

호남은 국가를 보위하는 근본이며 왕업이 창건된 곳이다. 도순찰사는 군사를 거두어 움직이지 않으니 국가에 봉사하지 못한 죄를 피할 길이 없다. 백성들은 적을 만나 피해를 입었으니 어찌 어진 사람이 있는 나라라고 하겠는가. 아! 슬프다. 각 고을의 남아들은 모두 나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라. 

나는 언제나 나랏일을 생각하면 피를 토하고 눈물을 지으며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두려움이 전혀 없으나 이리떼와 같은 적의 세력이 더욱 방자하고 광폭하는 이 때 오합지졸로는 적을 간단히 무찌르기 어렵다.

의병을 모집하여 피로써 맹세하고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여 함께 무찌를 것이다. 우리들의 성심을 다하고 우리 선조 대대로 물려온 산천을 맑게 하여 다시 반석위에 사직을 안정케 함으로서 우리의 공명을 길이 역사에 남기자. 나를 따라 왜적을 토벌할 사람은 속히 지정한 날짜에 모여 주기 바란다." 


이러한 권율의 호소에 1천500명의 의병이 모였다. 광주 관내에서 500명, 전라도 인근에서 1천명이 모인 것이다. 

광주공원에서 광주향교로 가는 길 오른편 기슭을 보면 철제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오르면 비석들이 스무 개 정도 있다. 이 비들은 역대 관찰사와 광주목사들에 관한 비석이다. 그런데 맨 앞줄 은행나무 바로 옆에 광주목사 권율과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도원수충장권공 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가 그것이다.

이 비 옆면 두 곳에는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제공 명단이 적혀있고, 뒷면은 권율 장군의 업적이 한자로 간략하게 적혀 있다. 얼핏 읽어 보니 광주목사 시절에 약법 10조와 의병모집, 이치 전투에서 승리, 그리고 행주대첩 등이 적혀 있다. 

뒷면의 비문 글씨는 권율의 11세후손이 썼고 비문은 의금부 도사 송병순(1839-1912)이 지었다. 송병순이면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 자결한 유학자 송병선의 동생이고, 그 역시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실의하다가 1912년에 자결한 사람이다. 비문을 지은 해는 임인년이다. 서기로 환산하니 1902년이다. 1902년이면 우리나라가 외세에 무척 시달린 때이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는 시기이다. 이 때 권율장군의 창의비를 세운 것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고자 하는 일념이 작용하였으리라. 

비 양면에 새긴 참좌 제공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본다. 권승경, 이완근, 박희수, 고인후, 이충립, 김치원, 김극추, 박천용, 정사준, 김제민, 선거이, 표헌, 정사현, 송제민, 정귀세, 권동현, 정지영, 정충신, 이세환, 김경립, 박대수, 김덕령, 박종정, 고성후, 유사경, 정빈 모두 26명이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무등일보

 

 

김세곤 2010.11.03 01:26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7.

 

권율과 황진 장군,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 금산 이치(중)

입력시간 : 2010. 11.03. 00:00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2만 왜군 완파 호남 지켰다

권율 전라도 관찰사, 황진 조방장 승진

이치대첩비 충장사 등 그날 흔적 '생생'


이렇게 1천5백 명의 호남 의병을 모은 광주목사 권율은 1592년 7월초에 전주에서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만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라도 도절제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금산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이치를 방어선으로 정하고, 동복현감 황진의 부대와 합세한다. 황진 부대에는 황박, 공시억, 위대기, 소제, 소황, 노홍, 양응원 등 무인들이 많았다. 


권율은 황진 부대와 함께 이치 전투부대를 편성한다.


대장은 권율, 선봉장은 황진, 후군장은 황박, 기병장은 권승경, 편비장은 위대기와 공시억, 경계부대장은 노인, 병참담당 운량사에는 소황과 소제가 임명됐다. 

권율 장군과 함께 이치에서 싸운 인물은 황진(黃進 1550-1593) 장군이다. 황진은 남원 출신으로 세종 임금 시절에 청백리요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의 5대손이다. 

그는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다. 황진은 27세이던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0년에 그의 삼촌인 조선통신사 정사 황윤길의 무관이 되어 일본에 들어갔다. 왜인들은 통신사 일행을 겁주고 깔보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고 그들의 무술 실력을 한껏 뽐내었다. 



어느 날, 왜인들은 통신사 일행 앞에서 과녁을 세워놓고 그들의 활쏘기 실력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자 황진은 그 과녁 곁에 작은 과녁을 세워놓고 화살을 쏘아 작은 과녁을 명중시키었다. 또한 연달아 두발의 화살을 쏘아 새 두 마리를 한꺼번에 떨어뜨렸다. 왜인들은 감탄 하였다. 조선에 이런 무사가 있다니... 

황진은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주머니를 털어 보검 두 자루를 샀다. 그리고 “머지않아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니 그때 내 이 칼을 쓰리라”하였다. 

1591년에 황진은 동복 현감(지금 화순군 동복면 일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에 그는 소금 수레를 끄는 여윈 말 한필을 샀다. 이 말은 마르기는 하였지만 여포의 천리마처럼 명마였다. 

 

황진은 일과가 끝나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위로 솟구치기도 하며 용맹을 익혔다. 왜적과의 전쟁에 대비한 훈련이었다. 과연 무인다운 모습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용인전투에 참여하였는데, 그의 부대만 온전하게 살아서 전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박, 공시억, 위대기, 처남인 소제, 소황 형제와 함께 권율의 부대에 합류한 것이다.

권율의 이치 전투 대비는 철저했다. 복병은 물론이고 길 가운데와 길가 요소 요소에 목책을 쌓고 함정을 파 놓았으며 마름쇠도 깔아놓았다. 화살과 돌멩이도 많이 준비하였다. 산 정상에는 청백홍황흑 등 5색 깃발을 세워 기세를 높이었고 검은 연기를 피워서 적이 우리의 병력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괭과리, 북, 징, 납새 등 각종 악기를 울려 병사들의 사기도 높였다. 

마침내 1592년 7월8일 새벽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제6군 수 천명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공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거셌다. 왜적은 북을 치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조총을 쏘아대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정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많은 산새와 짐승들이 놀라서 도망을 쳤다.

적이 산위를 집중 공격하자 아군 또한 용맹을 다하여 적을 막았다. 왜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 장군은 나무에 기대어 총탄을 막으면서 활을 쏘았다.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왜적은 크게 패하였다. 왜적의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황진의 부장 위대기도 복병으로 적을 급습하였고, 공시억 또한 최전선에서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왜적을 막았다. 

그런데 선봉장 황진이 물러나는 왜적의 탄환에 맞았다. 이마에 피가 흐르고 황진은 쓰러졌다. 순간 왜적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왜적이 다시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그러자 총사령관 권율이 군사들을 직접 독려하여 싸웠다. 전투는 정말 치열하였다. 밀고 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왜적은 아군의 사기를 꺾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왜적은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어던지고 금산 쪽으로 후퇴하였다. 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시체는 이치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조선군의 압승이었다. 

한편 죽음을 면한 황진은 다시 동복으로 돌아갔는데, 

도중에 전주에서 사람들이 길을 막고서 

“황진장군이 아니면 전주가 어찌 무사 하였을 것인가”

하면서 황진의 공을 칭송하였다. 

일본은 임진왜란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의 전투를 첫째로 친다. 

권율도 행주대첩보다 이치전투를 더 의미 있는 전투로 회고하고 있다. 

이치 싸움으로 말미암아 권율은 광주목사에서 나주목사로 영전하였고, 

나주목사로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황진도 동복현감에서 익산군수 겸 전라도 조방장으로 승진하였다. 

 

 

'권율장군 이치대첩비'를 보러 이치 고갯길을 넘는다. 권율 장군 이치대첩비의 주소는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 79-34이다. 충남 금산에서 전북 완주로 가는 고갯길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이치대첩비를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길 중간 중간에 권율장군이치대첩지 표시가 있다. 

한참을 가니 길 오른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안내판이 하나 있다. 차에서 내려 안내판을 본다. 바로 금산이치대첩지 안내판이다. 이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 본다.

이치대첩은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이다. 임진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적이 군량미의 현지 보급을 피하여 이 배티재를 넘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고 적장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이만 병력을 이끌고 이 재를 넘으려 했다.

이보다 앞서 권율 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천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재를 지켜 왜적의 호남 진출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적은 수의 우세함과 승승장구한 힘을 믿고 단숨에 이 재를 넘으려고 덤벼드는 것을, 장군은 전 병역을 독려하여 결사전을 벌려서 적을 섬멸하여 대첩을 올리니 왜적은 다시는 호남에 진출할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이치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승전지로 국가사적지로 지정 추진 중이며, 그에 앞서 도 기념물 154호로 지정, 성역화 사업을 통하여 새롭게 단장할 전망이다.

안내판 위 언덕에는 사당이 하나 있다. 위쪽으로 올라가니 출입구가 있다. 문 이름은 이치 대첩문이다. 이 대문을 지나 대첩비각을 보았다.
 

그리고 권율 장군의 시호를 딴 충장사도 있다. 충장사 사당에는 문이 잠겨 있었다. 영정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시 대첩비각으로 내려왔다. 거기에도 권율장군 이치대첩비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읽었다. 비는 송병선이 지은 비문을 새겨 1902년에 금곡사에 건립되었다 한다. 이치대첩 당시 싸울 때 나던 쇠소리가, 이치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금성면 상가리 금곡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런데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금곡에 건립되었던 비와 사우가 파괴되었고, 현재 비는 1964년에 다시 이곳에 세웠다 한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여 왕의 동의를 얻었다. 뒤에 다시 대궐에서 왕에게 상소하려다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인 대전 회덕 석촌 마을로 강제 이송 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애국지사이다. 

대첩비각 안에는 비가 세 개 있다.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라고 적힌 비와 '원수권공이치대첩비'라고 적혀 있는 비 위부분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비, 그리고 '대첩비지址 기적비 紀績碑'가 그것이다. '원수권공이치대첩비'는 일제시대에 일본 경찰에 의하여 부서진 비 같다. 

새로 만든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는 앞면에 비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이치대첩 기록이 적혀 있으며, 양면에는 권율 장군과 함께 싸운 여러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한 면 맨 앞에는 황진, 권승경, 노인 이름이 적혀 있고, 다른 한 면 맨 앞에는 정충신, 황박, 김제민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 명단을 모두 세어보니 147명이다. 이 중에는 이치전투와 행주대첩 등에서 싸운 사람들이 섞여 있는 듯하다. 이치 대첩에서 같이 싸운 분은 황진, 권승경, 노인, 노홍, 소제, 소황, 양응원. 신여국 최희열 김율 박흥남, 박기수, 김엽 김두남 정사준 양재현, 정충신, 황박, 김제민, 위대기, 공시억, 정봉수, 정홍수 양대박 나덕명, 최호, 김익수, 김경립, 김율, 김여숙 등이다. 

이들에 대한 이력을 '호남절의록'과 최영희 등이 쓴 '임진왜란과 이치대첩' 책에서 찾았다. 호남절의록은 1799년(정조 23년)에 간행된 책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해 절의한 호남출신 1천460명의 의적을 수록한 책이다. 다행히 최근에 한글로 번역이 되어 이치대첩비에 적힌 분들의 흔적을 찾기가 쉬웠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호남정신 2부18회, 권율과  황진, 이치전투에서 승리(하) 

김세곤 2010.11.10 02:04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8. 권율과 황진, 이치전투에서 승리하다 - 금산 이치(하)
입력시간 : 2010. 11.10. 00:00


             완주 황진장군 이치대첩비. 멀리 대둔산이 보인다.

          1999년에사단법인 전라북도 향토문화연구회에서 세웠다.

1천500명 의병이 日 야욕 막았다

부모형제·일가친척·노비 합심 전라도 보전

위대기·공시억 이치전투서 무공 많이 세워


'도원수 권율 장군 이치대첩비'에 적혀 있는 여러 장수들의 내역을 살펴보자.

권승경(1574-1625)은 권율의 조카인데 바로 넷째 형 권준의 막내 아들이다. 그는 광주의 창의비에도 적혀 있는 인물이고 이치전투에서 기병장을 하였다.

노인(1566∼1622)은 나주 출신으로 권율의 모병에 응한 의병장이다. 당시 27세였던 그는 100여명의 가솔을 이끌고 권율의 진영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1597년 남원 전투에 참여하다가 왜적에게 붙잡히어 포로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끌려가서 지내다가 중국을 경유하여 귀국하였고, 문집으로 '금계집'이 있다.

노홍은 장흥 사람으로 황진, 위대기와 함께 이치에서 싸웠다. 소제와 소황은 황진의 처남으로서 남원사람이다. 소황은 동생 소제와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여 100석의 군량을 모아 황진 진영에 들어갔다. 양응원은 곡성 사람으로서 의병 수십명을 모아 황진 휘하에 들어가서 이치 전투에 참여하였다. 

정충신 (1576∼1636)은 17살에 권율의 모병에 응모하여 그의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이치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이치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권율 장군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로 향하였다. 그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등 적진을 뚫고 선조 임금이 계시는 평안도 의주의 행재소에 장계를 전하였다.

당시에 도승지인 이항복이 장인인 권율이 보낸 장계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선조 임금에게 희소식을 알리었다. 그리고 이항복은 정충신을 예쁘게 보아 자신 밑에서 일하게 하였으며 이후 정충신은 승승장구 하였다. 그는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고 인조 임금의 사랑의 받았다. 광주의 금남로는 그의 이름을 기리는 도로 이름이다.

황박은 전북 함열 사람으로 의병 200명을 모아 웅치전투에 참가한 의병장으로서 황진과 같이 이치전투에도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김제민은 고부출신으로 일재 이항의 문인이다. 그는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화순, 순창, 함양군수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켜 대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호남의병은 3운(運) 즉, 세사람의 큰 인물 중심으로 결집하였는데, 일운이 나주의 김천일, 2운이 담양의 고경명, 3운이 고부의 김제민이었다. 김제민은 세아들 김흔과 김엽, 김안과 함께 거병하여 웅치전투에도 참여하였고 아들 김안은 웅치전투에서 김제군수 정담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어서 김제민은 두 아들 김흔, 김엽과 함께 이치전투에 참가하여 공의 세웠다. 이후 그는 1592년 11월 장성 남문에서 김경수 등과 함께 다시 창의하여 의병과 양곡을 모아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위대기는 장흥 출신으로서 체구가 크고 용맹이 뛰어났다. 창검을 잘 썼고 800 근의 활을 잡아당길 수 있는 정도의 장사였다. 그는 황진과 함께 가장 무공을 많이 세운 장수였다.

공시억은 화순 동복 출신으로 용력이 뛰어 났으며 황진, 위대기와 함께 무공을 한껏 보인 장수이다. 박흥남은 남원출신으로 동생 박기수와 함께 황진 진영에 합류하여 전공을 세웠고, 정봉수는 무안출신으로 고향 사람 정현보와 같이 창의하여 수백명의 의병을 모았으며 이치전투에 참전하였다. 

김율은 장흥 사람으로서 양곡과 병사를 모아서 아들 김여숙 조카 김여건, 김여홍과 함께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참전하였다. 양대박은 광주 출신으로서 1590년에 진사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아들 팽으로 하여금 의병 수백 명을 모아 권율을 종사케 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용인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아비가 살고 아들이 죽는 것은 천지의 역리(逆理)이다”라 하고 사람들을 모아 이치전투에 참가하였다.

양재현(1567∼1592)은 광주 출신으로서 임진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방답진 첨사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과 함께 이치에서 싸우다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보니 이치를 지킨 이들, 전주를 지킨 이들, 전라도를 온전하에 보전한 사람들은 호남 의병들이 대부분이다. 부모 형제가 함께 의병에 나선 사람들도 있고. 일가 친척, 노비가 모두 합심하여 왜적과 싸웠다. 관군이라고는 권율, 황진 등 지휘부 몇 명 정도이다. 호남 의병, 정말 자랑스럽다. 




이치 재를 넘어 대둔산을 간다.

이제 충남 금산을 넘어서 전북 완주 땅으로 들어선다. '인삼 약초산업의 고장 금산'이라고 써진 아치를 지나니 전북 완주 땅이다. 이곳의 주소는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이다. 완주로 들어서자마자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주변은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마치 소공원 같다. 잔디밭을 걸으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황진 장군의 흔적이 있다.

'이치전적지', '이치대첩유허비', 그리고 '무민공 황진장군 이현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이치전적지는 1993년에 세워진 비이다. 이 비에는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의 치밀한 방어진 구축과 주장 황진, 비장 위대기, 공시억 등이 이끄는 호남의병 1천500명이 이치에서 적을 궤멸하는 대첩을 이루었다고 적혀 있다. 이치대첩 유허비는 잔디밭 한쪽 끝에 세워져 있는데 매우 오래 전에 세워진 비 같다. 유허비 글씨가 잘 안보인다. 

'무민공 황진장군 이현대첩비'는 1999년에 사단법인 전라북도 향토문화연구회에서 세운 것인데, 비문은 송준호가 썼다. 비문 전문이 적혀있는 안내판도 별도로 있다. 여기가 전라도 완주 땅이고 황진 장군이 전라도 남원사람이니 그를 기념하는 비를 크게 세운 것 같다. 비문에는 황진장군의 일대기가 임진왜란과 연관하여 적혀 있다. 황진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이치 전투의 공훈과 1593년 6월 하순 진주성 싸움에서의 순절이 적혀 있다. 비문을 읽으니 조선왕조실록에서 읽은 황진의 졸기가 생각난다. 

황진(黃進)은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서 용맹 건장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엄중하고 충신하여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다.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을 때 적의 상황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살피고는 주머니 돈을 털어 보검 한 쌍을 사가지고 돌아와 말하기를, “머지않아 적이 올 것인데 이 칼을 써야 하겠다”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있을 적에 집무가 파하고 나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위로 솟구치기도 하며 용맹을 익혔다. 용인(龍仁)의 패전에서는 황진이 별부(別部)의 장수였는데 그의 부대만 군사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고, 이치의 승첩에서는 공이 제일이었다.

당초 진주에 이르러서는 나아가 밖에서 지원하려고 하였는데, 김천일이 특별히 머물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충청 병사 (忠淸兵使)는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것이 옳겠다” 하니, 황진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창의사(倡義使)와 더불어 공약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名將)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우찬성(右賛成)에 추증되었다.

참고로 황진 장군의 흔적은 더 찾으려면 전북 남원군 주생면 정송리에 정충사를 가면 된다. 이곳에 황진의 묘소와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경남 진주시 진주성 안에 있는 창렬사 사당에도 황진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황진 장군의 이치 대첩비를 구경하고 나서 대둔산으로 향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간다. 케이블카에서 이치 재를 본다. 재는 뱀처럼 굽이굽이이다. 가파른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대둔산 정상에서 이치 재를 내려다보며 권율과 황진이 이끈 이치전투를 생각한다. 호남 의병에 대하여 생각한다. 의를 지켜온 호남 사람들. 그 의리 정신이 국난을 맞아서 호국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호남사람들은 나이, 신분에 관계없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래서 1천500명의 호남의병이 2만여명의 왜군을 막았다. 전라도를 지키고 임진왜란의 전쟁 양상을 바꾸었다. 호남지방을 장악하여 병참기지화 하고자 하는 일본의 야욕을 막았다. 

1592년 7월8일이란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한산대첩으로, 육지에서는 권율과 황진이 이치대첩으로 왜군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전라도가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호남국가지보장(湖南國家之保障!).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