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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지방공무원이 되살린 '長沙의 넋'/인천상륙 전야..772명 학도병 사투

영국신사77 2012. 4. 19. 13:19

[태평로] 지방공무원이 되살린 '長沙의 넋'

 

                                                                   문갑식 선임기자   2012.04.18 22:13  조선일보 

인천상륙 전야… 772명 학도병 동해안서 닷새간 목숨 바친 사투
잊힌 지 60여년… 기념 나선 영덕군 勝戰의 역사조차 외면·망각할 수야

문갑식 선임기자

꽃샘바람을 탄 쪽빛 파도가 장사(長沙) 해변에 넘실대고 있었다. 이곳은 고래불과 함께 경북 영덕군이 자랑하는 명품 해수욕장이다. 앞에 광활한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짙은 소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휴양지다.

1950년 9월 14일 새벽 4시 반, 그 해안에 이틀 전 부산을 떠난 2700t급 문산호가 나타났다. 승선 인원 786명 중 학도병(學徒兵)이 772명이나 되는 유격부대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들에게 건 기대는 남달랐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패(成敗)가 기만전술에 있다고 봤다. 어디가 목표인지를 숨기려는 유엔군과 알아내려는 인민군의 정보전이 치열했다. 맥아더는 미 5해병 연대원들에게 군산(群山)이란 이름을 흘리면서 인천에서 작전을 펼치기 하루 전 동해안 장사에서 양동 작전을 편 것이다.

때맞춰 내습한 태풍 '케지아' 때문에 문산호는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학도병들은 배를 바닷가 소나무에 밧줄로 묶고서야 겨우 뭍을 밟았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해발 200m 고지에 포진한 인민군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의 기관총 세례였다. 닷새 뒤인 19일 새벽 5시 LST 조치원호가 구출하러 갈 때까지 그들은 사투(死鬪)를 벌였다.

학도병 772명이 군번 없는 군인이 된 것은 그 20일 전인 8월 24일이었다. 대구에서 뽑은 560명에 밀양에서 200명을 추가 선발해 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유격훈련을 받은 건 이틀뿐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목숨과 기적을 바꿨다. 적 240명 사살, 토치카 11곳 파괴, 교량 2곳 파괴, 포탄 450상자 노획…. 아군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데다 뒤늦게 달려온 인민군 5사단과 맞붙은 것을 감안하면 대승(大勝)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학도병들을 조국은 무엇으로 위로했을까. 중학교 2학년 때 이 전투에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긴 이재근(79)씨는 대학교 3학년 때 다시 군에 입대했다. '군번(軍番)이 없다'는 이유였다. 수원중 2학년 때 피란 중 전투에 나선 이천수(79)씨는 자기 삶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개탄했다. "동의대 사건까지 변상해주면서… 좌파가 말하는 '6·25 참전자는 통일 방해꾼'이란 말을 되씹어본다."

이제 남은 장사 전투 참전자는 50명이다.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노병(老兵)들을 위로한 것은 이들을 '귀찮은 노인네' 취급하는 국방부도, 좌파에게 밀려 청와대 뒷산에서 울던 옆 지역 출신 대통령도 아닌 시골 공무원이었다. 김성락 영덕군청 기획감사실장은 이런 세태에 분개해 국방부를 드나들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자 "우리 힘으로 해보자"고 나섰다.

그 결과로 2007년 9월 14일 '잊힌 사람들'이란 주제로 제1회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반딧불이가 뭉쳐 횃불처럼 주위를 밝히듯 김병목 군수를 비롯한 영덕군 공무원들은 세미나를 열고 백서를 냈으며 전승(戰勝)기념공원 추진에 앞장섰다. 오는 6월 장사 해변에는 꽃다운 청춘을 기꺼이 조국에 바치려던 젊은이들을 싣고 온 문산호 모형이 등장한다. 내년에 4만평의 공원이 완공되면 '잊힌 전투'의 주인공들이 느꼈을 설움이 미흡하나마 위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북한의 '근위 류경수 105땅크사단'을 떠올렸다. 김정일·김정은이 새해 벽두마다 찾는 이 부대는 6·25전쟁 초 잠시 위세를 떨쳤을 뿐 고성·다부동 전투 등에서 대패(大敗)를 거듭했다. 그런 졸장을 북한은 영웅시한다. 반면 우리는 승전의 역사조차 외면하고 망각하고 있다. 장사 해변에서 포효하고 있는 어둠 속 파도 소리가 바닷속 영령(英靈)들의 피울음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