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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이다. 다음은 충효당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기록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을 극복, 나라를 구한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종택이다. 선생은 일생을 청백하게 지내다 삼간초옥에서 별세한 후 그를 흠모하는 유림의 힘을 입어 졸재 류원지(1598~1674) 공이 처음 창건하였고, 그 후 증손인 익찬 류의하(柳宜河, 1616~1698) 공이 확장 중수하였다. 전체 52칸의 목조 와가로 조선시대 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의 집이다. 서애 선생의 유품 중 징비록은 국보 132호, 문헌은 보물 제160호, 유물은 보물 제460호로 각각 지정되어 유물 전시관인 영모각에 전시되고 있다. 충효당의 현판은 명필인 허목의 글씨이다.” 류상조(柳相祚, 1763~1838)는 행랑채를 지었다. |
건축 구성 |
충효당은 하회마을 서남쪽 끝 부분에 양진당과 더불어 나란히 붙어 있다. 양진당은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가 세운 집인데 남향을 하고 있고, 충효당은 양진당 쪽을 향하여 조금 방향을 틀어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남서향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충효당은 사랑채, 충효당과 영모각만 개방되어 있었다. 안채는 작은 문에 의해 차단되어서 내방객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랬던 것이 영국 여왕의 방문 이후 굳건히 닫혀 있던 안채의 문도 열려, 이제는 안채도 잠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안채는 전형적인 반가의 口자형을 하고 사랑채의 오른쪽에 붙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다른 집의 안채들에 비해서 아주 춤이 높다는 것이다. 춤이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높으므로, 상당히 권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안방 위에 다락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이 안채 안방의 높이는 이 口자형 구조의 안채 뜰 주변의 평화로움을 깨쳐서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 점에서 사랑채인 충효당의 작고, 소박하고, 정갈한 분위기와는 다르다. |
현판 |
충효당(忠孝堂) |
바깥 사랑채 건물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이 글씨를 썼다. |
충효당기(忠孝堂記) |
영모각(永慕閣) |
문중 이야기 |
- 하회와 류성룡 |
서애 류성룡은 자가 이견인데, 서기 1542년 의성 사촌리의 외가에서 출생한다.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받았으며, 25세 때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간다. 그는 30세 때 병조좌랑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잠시 여가를 얻어서 돌아왔다. 이때 그는 낙강의 서쪽에 있는 절벽에 서당을 지으려고 했으나, 땅이 비좁아서 결국 짓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서애를 스스로 호로 쓰기 시작하였는데, 낙강의 서애는 훗날 상봉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하회에 집을 세우고자 하는 서애의 노력은 계속하여 이어진다. 처음 결실을 맺은 것은 원지정사라는 5칸짜리 당이다. 서애의 나이 34세 때, 홍문관 교리직을 받았을 때 길에서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하회촌의 북쪽 강기슭에 지은 집이다. 그러나 원지정사는 서애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집을 짓고자 하였던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칠 곳을 갖고자 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서당을 짓고자 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서애가 처음으로 지은 서당은 군위의 선영 남쪽에 세운 남계서당이다. 서애 나이 45세 때의 일이다. 그렇지만 군위는 하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위에 서당을 짓는 것도 그의 목적이 아니라 하회에 서당을 짓는 것이 서애의 목적이었다. 하회에 서당 짓기는 군위의 남계서당과는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하회에 지은 원지정사는 마을로부터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으로부터 북쪽으로 더 나아가 북담에 작은 집을 짓고 노년을 보내며 학생들을 가르칠 꿈을 꾸었다. 탄홍이라는 중이 그 일을 맡아 해 주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래서 10년을 투자하여 완성시킨 것이 옥연서당이다. 역시 서애 나이 45세 때의 일이다. 옥연서당은 서애 만년의 의지처가 된다. 임진란이 끝나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삭탈 관작된 서애는 주로 옥연서당에 돌아와 머물렀다. 「연보」에는 옥연과 관계된 여러 가지 사적이 언급되고 있다. 옥연에서 나와 객을 맞았다던가, 옥연으로 돌아왔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연보」의 60세 조항에 보면, “대부인을 선생의 집에 옮겨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옥연서당 말고 하회에 서애의 집이 따로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57세 때 삭탈 관직된 서애는 58세 때 직첩이 되돌려지고, 63세 때 복직되어 부원군에 봉하여지며, 공신 호가 주어진다. 서애의 나이 64세 때 하회는 수해를 당하므로, 서애는 서미동으로 옮겨 기거하였고, 65세 때는 서미동에 초옥을 지었다. 그리고 66세 때 그곳에서 타계하였다. 시호는 문충이다. 위판은 병산서원 등 여러 서원에 봉안되었다. 병산서원은 원래 서애나 하회의 류씨가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이다. 풍악서당은 서애 이전부터 풍산에 있었는데, 관도 변에 있으므로 조용히 학문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서애가 풍산현의 유자들을 설득하여 현재의 장소로 옮겨 지은 것이다. “풍악서당은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던 것 ……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지방으로 왔을 때 이 서당에서 유생들이 면학하는 모습을 보고서 가상히 여겨서 ‘사패지’와 여러 서책들을 하사 …… 서애가 1572년에 현재 위치인 안동부 풍산현 병산리에 이건하고 이름도 병산서원으로 고쳤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임재해 교수가 하고 있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서애 류성룡이 하회에 직접 지은 집은 원지정사와 옥연서당 밖에 없는 셈이다. 지금의 서애종가인 충효당은 후에 지어진 집이다. |
관련문집 |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이 책은 안동권씨 정남문고에서 소장하던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이다.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시문을 총10책으로 엮어서 1894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
관련유물 |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이것은 풍산류씨 충효당에 소장되었던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의 목판본과 그 인출본이다. |
관련인물 |
- 류성룡의 가계 |
서애 류성룡은 중종 37년, 서기 1542년에 의성 사촌리(沙村里)의 외가에서 출생한다. 서애 선생의 모친은 태중에 꿈속에서 “부인은 귀한 자식을 낳을 것이오.”하는 소리가 공중으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은 4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며, 17세 때 현감 이경(李坰)의 딸 이씨를 부인으로 맞는다. 그가 처음 퇴계 이황을 본 것은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 9월이다. 그는 25세 되던 해에 급제 출신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임된다. 그리하여 영광으로 점철된 벼슬살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타계한 때는 1607년, 그의 나이 66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는 안동부 서쪽의 수동리(壽洞里)에 묻히며, 위패가 병산서원에 봉안되었다. 그에게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류성룡의 초명은 응서(應瑞), 류성룡은 배위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류위(柳褘), 류여(柳袽), 류단, 류진(柳袗) 등 네 아들을 둔다. 류위는 어려서 일찍 타계하였다. 류여는 자가 길보(吉甫)이고 1578년(선조 11)에 태어나서 서울에서 1605년(선조 38)에 타계하였다. 향년 28세로 젊은 나이였다. 통덕랑 벼슬을 제수 받았고, 장수도 찰방을 지냈다. 조산대부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류단은 자가 숙정(叔整), 호가 도암(道巖)이다. 1580년(선조 13)에 상주에서 출생하여 1612년(광해군 4)에 서울에서 향년 33세로 타계하였다. 광국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문집이 있다. 류진은 학행에 뛰어나 주위의 칭송을 들었고 검소하고 소박하였다. 그는 지평에 제수되었고,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다. 호는 수암(修巖)이다. 류성룡 학문을 이은 적전으로 말하여진다. 상주로 옮겨 살았고, 또 류성룡의 큰 제자 정경세가 상주 사람이므로, 류성룡의 학문은 이후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나간다. 서애 류성룡의 가계는 둘째 류여에 의해 이어진다. 류여의 장자는 류원지(柳元之)이다. 류원지의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이다. 1598년(선조 31)에 황주에서 출생하여 1674년(현종 15)에 타계하였으니 향년 77세이다. 통훈대부 진안현감을 지냈고, 진안의 인화서원(仁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또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모셔졌다. 류원지는 조부 류성룡의 유훈을 지켜 나가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1657년(효종 8)에 다음과 같은 류성룡의 유훈을 자손들에게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할아버지의 유훈은 매우 밝다. 임종 때 시를 써서 이르기를 ‘너희 아이들아, 힘을 써서 모름지기 삼갈 지어다. 충과 효 외에는 다른 사업이 없는 것이다.’라 하셨으며, 또 경계하는 말을 남기셨으니 ‘좋은 일은 힘써 생각하고 좋은 일은 힘써 행하라’하셨다.” 그런 류성룡의 유훈과 함께 류원지는 류진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말한다. “사람은 덕행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니 진실로 근본이 없으면 비록 무늬가 비단 같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면서 류진(柳袗)은 매양 충 효 청백(忠孝淸白)으로 가문의 가르침을 다 구현해 나가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류원지의 장자는 류의하(柳宜河)이고, 호는 우눌재(愚訥齋)이다. 사복시 정에 증직되었다. 류원지가 창건하여 류의하에 의해 중축된 서애 류성룡의 종택은 이렇게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인품을 전해 나가는 풍산류씨 일문의 구심점이다. 이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그 가학을 이어 나갔으며, 우리 역사 속에서 임진란의 위험한 시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영의정 류성룡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 모름지기 이름 높은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 자긍심을 자기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 때 진실로 무한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하겠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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