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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산류씨 화경당 이야기

영국신사77 2011. 4. 11. 13:01

 

 

 

 

 

 

 

 

 

 

 

 

 

 

 

 

 

 

 

 

 

명 칭 :  풍산류씨 화경당(豊山柳氏 和敬堂)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06
건 축 주 :  류도성(柳道性, 1823~1910)
건축시기 :  1862년(철종 13)
소 유 자 :  류영하(관리자 : 류세호)
문 화 재 :  중요민속자료 제84호, 1979년 1월 23일 지정, 일곽

건축 이야기
하회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하회를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하회는 갈만한 곳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회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든, 하회가 우리네 삶이 진행되고 있는 현대 속에 들어와 있는 전통의 암호라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이 암호풀이의 몫은 우리에게 있다. 이 암호를 잘 풀어내어 하회를 볼 만한 곳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이다.

하회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마을 안의 큰 사거리에 이르면 우리의 발걸음은 주저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먼저 향할 것인가? 앞으로 쭉 나아가면 양진당과 충효당에 이른다.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석호종택, 북촌댁이라고 이름 붙여진 크고 넓은 집에 이른다. 입구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양진당과 충효당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은 둘로 나뉘어 진다.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북촌댁은 집이 마을 북쪽 부분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네거리에서 50여m 동향하여 선 집이다. 마치 중국의 집을 보듯, 크고, 높고, 위엄 있는 행랑채를 대동한 솟을대문이 눈앞에 보인다. 통상의 규모에 익숙한 우리는 통상보다 훨씬 높은 대문채 앞에서 약간의 낯설음과 함께 조금의 위압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건축 특징
이 집은 관리가 잘 되고 있으며, 공간도 건물도 매력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이런 집 일수록 쉽게 들어가 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들어가 볼만한 집은 닫혀 있고, 들어가 보기 쉬운 집은 잘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인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건축 구성
안쪽에서 보면 대문채는 7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의 1칸은 대문이다. 북쪽의 3칸 중 대문으로부터 먼 쪽 1칸은 마구간이다. 빈 마구간에는 빈 여물통이 그대로 놓여 있다. 대문 쪽의 2칸은 헛간이다. 대문채의 남쪽 3칸도 헛간이다.

본채는 口자 형상을 갖추고 있다. 口자 형상의 아래쪽 횡선 부분은 사랑과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에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을 두고 남쪽으로 2칸, 북쪽으로 3칸이 일선으로 이어져 있다. 중문은 1칸 규모인데, 두 쪽의 나무판 문이 좀 낮게 붙어 있고, 위쪽으로는 다락이 만들어져 있다. 3층의 석단 위에 올라서 있는데, 두 번째 석단 가운데에는 안마당의 물을 모아 흘려보내는 수구가 마련되어 있다. 앞쪽에서는 중문 위쪽 다락의 창살문이 3면으로 보인다. 중문 남쪽의 두간은 앞쪽에 반 칸 넓이의 마루를 두고, 뒤쪽으로는 중문에서 먼 쪽 1칸의 마루방, 중문 쪽 1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에 딸린 작은 사랑채는 중문의 북쪽으로 붙어 있는데 3칸 규모이다. 중문이나, 중문 남쪽의 건물들 보다는 더 높은 대좌 위에 올라서 있다. 마당이 북쪽으로 향해가면서 더 낮아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작은 사랑채 역시 앞쪽으로 반 칸 넓이의 마루를 두고 있는데, 중문 쪽으로 붙은 두 칸은 방이고, 중문에서 먼 쪽 1칸은 마루방이다. 마루방의 앞쪽 벽은 전면이 네 쪽의 큰 방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중앙에 2칸 규모의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을 만든 전형적인 口자 구조인 듯하였다. 안채는 북쪽 방향으로 측문을 열어두고 있었는데, 측문은 안쪽으로 나무판 벽에 의하여 차단되어 밖에서 안을 잘 확인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다.

사랑채는 본채와 조금 떨어진 북쪽에 본채와는 직각 방향으로, 동서 방향을 축으로 하여 자리 잡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큰 집이다.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각 1칸씩은 누다락 방이 가설되어 있다. 서쪽 끝 1칸의 1층은 부엌이다. 서쪽 끝 1간의 1층은 완전히 누다락의 다리를 올려 세운 것으로, 통나무 따위를 쌓아두고 있었다. 이것은 누각이 집 안으로 들어간 형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양쪽의 누다락 구조의 마루 면은 중앙의 마루 면보다 더 높았다. 중앙의 5칸은 앞에 반 칸 규모의 마루를 두고 있다. 중앙 서쪽의 4칸은 방이다. 방은 2칸 길이로 길쭉길쭉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를 횡으로 갈라서 미닫이 문 등으로 막았다. 그러니까 동서로 2칸, 남북으로 1칸이 약간 안 되는 길이의 방들이 마루 뒤쪽으로 2열을 지어서 전체 4개 배치되어 있는 형상이다. 그 방들은 장짓문을 열면 큰 하나의 방으로 되는 모양이다. 중앙 동쪽의 2칸은 통으로 넓은 마루방이다.

큰사랑채와 본채 사이에는 사당이 뒤로 물러나 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헌춘문(獻春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현판
북촌유거(北村幽居)
바깥 사랑채에 내걸린 현판이다.
수신와(須愼窩)
본채의 남쪽 사랑채에 걸려있다.
화경당(和敬堂)
본채의 북쪽 사랑채에 걸려있다.
헌춘문(獻春門)
사당 들어가는 문에 걸려 있다.

관련인물
- 류도성(柳道性)의 가계
류도성은 호가 석호(石湖)이고 자가 선여(善如)이다. 1823년(순조 23)에 탄생하여 1906년(광무 10)에 타계하니 향연 84세였다. 경상도 도사(都事)를 지냈다. 안내판에 의하면 여기 세칭 북촌댁은 류도성이 1862년(철종 13)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약 150년 정도 된 건물이니, 그리 오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류도성의 장자는 류덕영(柳德榮)이다. 자는 체인(體仁), 통덕랑이다. 1795년(정조 19)에 태어나서 1861년(철종 12)에 타계하니, 향년 66세였다. 배위는 진성이씨이다.

류덕영의 장자는 류기우(柳箕佑)이다. 류기우는 자가 천노(天老)이다. 1887년(고종 24)생이고 1923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진성이씨이고, 후배위는 당성홍씨이다.

류기우의 장자는 류시경(柳時慶)이다. 자는 우현(又顯)이고, 1902년(광무 6)에 태어나서 1963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여강이씨이고, 후배위는 예천임씨이다.

류시경의 장자는 류영하(柳永夏)이다. 자는 몽거(夢擧)이고, 1924년에 태어났다. 배위는 진양정씨이다.

이 집은 가계상으로는 류사춘으로부터 시작되는 풍산류씨 한 계열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집의 건립과 연결시켜서는 류도성의 후인들이 5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류희목(柳希睦)의 가계
류희목은 자가 경발(景發)이고, 통덕랑이다. 1786년(정조 10)에 출생하여 1804년(순조 14)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퇴계 후손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진성 이태순(李泰淳)의 딸이다.

류희목의 부친은 이좌(台佐)이다. 자가 사현(士鉉), 호가 학서(鶴棲)이다. 초명은 태조(台祚)였다. 1763년(영조 39)에 경성의 나동(羅洞)에서 출생하여 1837년(헌종 3)에 향년 75세로 타계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문과 출신으로 내외의 높고 낮은 벼슬을 역임하였다.

류이좌의 부친은 사춘(師春)이다. 자가 계존(季尊)이다. 1741년(영조 17)에 출생하여 1814년(순조 14)에 타계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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