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스크랩] 풍산류씨 양진당 이야기

영국신사77 2011. 4. 11. 12:58

 

 

 

 

 

 

 

 

 

 

 

 

 

 

 

 

명 칭 :  풍산류씨 양진당(豊山柳氏 養眞堂)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24
건 축 주 :  류운룡(柳雲龍, 1539~1601)
건축시기 :  1600년대
소 유 자 :  류상붕(관리자 : 류상붕 / 류지하)
문 화 재 :  보물 제306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1동

건축 특징
뒤 울에는 두 채의 사당이 나란히 서 있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과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건축 구성
양진당은 口자 형식의 건물이 나란히 횡으로 두 개 붙어 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바깥채와 안채가 횡으로 붙어 있는 것이다. 그 각각의 건물은 따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지고 있고, 또 서로 통하는 측문도 열려 있다.

안채의 한가운데에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안마당이 있다. 안마당의 한가운데는 사각의 시멘트 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위에는 크고 작은 독들이 죽 늘어서서 대갓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마당에 서서 보면, 높이 보이는 마루의 끝 쪽으로 처마 끝에 난간을 달아매고 그 위에 30여 개의 일인용 반들이 죽 모로 올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아직도 제의가 있을 때 사용하는 반이라 한다. 그것은 아직도 이 집안 속에서는 조상 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의례들이 생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표징이다.

마루에서 보면, 서쪽에는 밑에 빈 공간을 두고 위에 다락방 같은 형식의 마루방이 가설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다락방의 마루 끝은 높은 뜰의 한 쪽과 단층을 이루고 있어서, 그곳을 올라가려면 뜰 끝에서 마루방의 난간 끝을 잡고 크게 발을 걸쳐 올리고는 용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안채는 깨끗하고 반듯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안채의 구석구석에 집주인의 손길이 빈틈없이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판
입암고택(立巖古宅)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호가 입암이다.
숭실재(崇室齋)
숭실재는 능동 골짜기에 있는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재사이다.
양진당(養眞堂)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이다.
영모루(永慕樓)

 

문중 이야기
- 종부의 삶
겸암공파의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부, 선산김씨(善山金氏)이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 머리칼은 지금은 숱이 풍부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에는 달랐을 것이다.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 오똑하면서도 날카롭지는 않은 콧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깊지 않은 주름살, 커다란 키, 날씬하면서도 강건한 몸체, 활달한 태도 …… 90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그러한 할머니의 덕목들은 젊은 날 할머니의 모습을 상당히 매력적인 것으로 추상하게 하였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예순다섯에 영감과 사별하였지요. 그때 영감은 예순넷이었어요. 그 양반 그래도 복은 있어서, 맏며느리 보고 맏딸 치우고, 손자까지 보고 세상을 떴어요.”

“자제 분은 몇 분이나 되십니까?”

“이리저리 뒤엎어서 8남매지요.”

할머니의 남편은 류한수(柳漢秀)로 1916년에 나서 1980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류광하(柳光夏)에게서 태어나, 28세로 타계한 백부 통덕랑(通德郞) 류필하(柳珌夏)의 양자가 되었다. 그의 자는 문숙(文叔)이다.

“하회로 시집올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할머니가 말하였다.

“우리 고모가 하회로 시집왔는데, 분재를 80마지기 해 왔는데도 잘 살지 못했거든요. 그래 하회는 못사는 곳, 시집 갈만하지 않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 밧노친(부친)은 다른 데 시집보낼 요량이었지요. 다른 데 혼인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데 조부가 하회로 결정을 하였지요. 그 일로 밧노친하고 부자분이 갈등을 하고 ……. 조부께서 시조부하고 결정을 하신 것이지요.”

할머니의 시조부는 류시만(柳時萬)이다. 풍산류씨 가계로 치면 26대, 겸암 류운룡의 12대손이다. 류시만은 모하당파(慕河堂派) 류직우(柳稷佑)의 아들인데, 겸암 11대 종손인 류명우(柳命佑)에게 양자와서 겸암 12대 종손이 되었다. 류명우는 1825년에 태어나 1858년에 타계하였으니, 향년 33세였고, 슬하에 딸아이 하나만을 두었다. 류시만은 자가 원일(元一)이고, 1863년에 태어나 1933년에 타계하니, 향년 71세였다. 그는 1900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영릉참봉(永陵參奉)이 되며, 1906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승(秘書監丞)이 된다.

“조부께서는 시조부하고 대궐에서 상감 앞에서 다투었다고 해요. 조부께서는 류승지하고 이번에 맺힌 것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억지로 하회하고 혼인을 결정하셨던 것이어요.”

그러니까 김씨 할머니는 일종의 정략결혼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 명의 승지가 임금 앞에서 다투었다고 할 때, 무어 그리 크게 원한 살 말들을 하였을 것이겠는가? 더구나 그 딸이 이미 하회로 시집을 와서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에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은 아마도 내세운 핑계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하회에 그 손녀를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만큼 김승지의 마음속에는 하회의 풍산류씨 가문이 좋게 보였으리라는 점을 이것을 통하여 추측하여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여자 벼슬은 불천위 가문의 대종부만한 것이 없다. 남자 정승 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며느리를 얻을 때 사돈이 그 딸, 그러니까 할머니의 며느리에게 들려준 것이라 한다. 세월이 달라져서 종부로 시집보내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는데도 며느리의 아버지는 그런 말로 달래며 딸을 풍산류문으로 시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비단 할머니의 사돈이 그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필시 할머니의 조부이신 김승지의 마음속에도 담겨져 있었던 말일 것이다. 혼인이라는 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며, 가문과 가문이 인연을 맺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의식은 어떤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할머니는 조부에게 떠밀리다시피 하회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이 집의 젊은 종손 류상붕(柳相鵬)은 자가 서익(瑞翼)으로, 1951년생이다. 그의 아내는 진성이씨 이윤덕(李潤悳)의 딸이다. 『세보』에 의하면 그들은 슬하에 류현준(柳絃準)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고 있다.

“요객으로 오기를 모두 피해서 조부가 요객을 왔어요.”

할머니가 말하였다. 부친을 비롯하여 선산김씨 가문의 남자들은 다 이 결혼을 끝까지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안노친 돌아가시면서 내 몫으로 남긴 열다섯 마지기 하고, 한 사․오십 마지기 분재를 해가지고 왔어요.”

할머니의 친가는 넉넉한 살림살이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친정이 있는 들성에서는 남의 땅 밟지 않고 살 정도였다는 것이다.

“나는 평생동안 친정에 다섯 번 밖에 못 갔어요.”
할머니는 손가락을 꼽듯이 짚어 나갔다.
“근친을 갔고, 조모상 치르고 3년 날 때, 아버님 대상 때, 맏동생이 죽었을 때 ……”

할머니는 말머릴 돌렸다.
“자랑은 아니지만 하회 같은 데는 없어요.”
자랑은 아니라는 사족을 달았지만 김씨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하회 자랑을 해볼 심산인 모양이었다.
“종가에 대한 향념, 불천위 제사 …… 여러모로 봐서 뽄 볼 것이 많아요. 첨에 딱 여기 오니 어른들이 날 보러 오는데, 두루막만 입고 오는 사람이 없어요. 종부 보러 오는데, 도포 안 입고 오는 사람이 없어. 친정 가면 그 자랑은 해요. 하회가면 풀잎이 떨고 시집살이 되다 하더니 뽄 볼게 많다, 다들 갓 쓰고 도포 입고 온다, 그렇게 말이요.”

미상불 김씨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하회의 풍산류씨 겸암공파 종가의 종부라는 자리가 어떤 무엇보다도 커다란 무게를 갖는 것으로 놓여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나누어 주지는 못하지만 지손들한테 마음을 다합니다.”

할머니는 90세 주변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정정하였다. 꼿꼿한 자세와 힘이 실린 목소리 등이 그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아직도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예의 그 대가댁 살림살이를 이끌어가는 종부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도 남을 듯한 느낌을 주었다.
- 만인적선
하회에서 만난 류시주가 들려 준 이야기이다.
“지금의 양진당 옆에 입향조께서 기지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순조롭지 못했대요. 기둥을 세우면 쓰러지고, 또 세워도 쓰러지고 했답니다. 마침내 현인의 현몽이 있었는데, 네 터가 아니니 공을 더 들여야 한다고 하여서, 하회 2동 밭 한가운데 솥을 걸고 만인적선을 하고 나서 기둥을 세우니 그제야 바로 섰다는 것이지요.”
- 능동재사
능동의 숭실재(崇室齋)는 안동권씨 재사 뒤편 산기슭에 있다. 풍상부원군 류중영의 묘제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능효사(陵孝寺)가 여기 있었다. 능효사의 일부 전각을 재사로 꾸민 것이 숭실재이다. 숭실재의 주차장에 서면 동서로 길게 뻗은 목조 건물이 우리의 시선을 압도한다. 서쪽 다섯 칸, 동쪽 다섯 칸의 두 건물이 일선으로 이어져 있다. 중앙에 반 칸 규모는 두 건물을 이은 부분이다. 둘 다 2층 건물이고, 벽면 전체가 목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건물이 서쪽 건물보다 지붕 하나 정도로 춤이 높다. 이 건물이 영모루(永慕樓)이다. 영모루의 1층은 대문 양 옆으로 고방이 마련되어 있고, 2층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마루이다. 안마당 쪽으로 쪽마루를 달아내고 난간을 세웠다. 서쪽 건물은 부속 건물이다. 두 건물은 안에서는 경사길을 송판으로 만들어서 연결시켰다.

영모루는 조금씩 터진 부분이 있는 ㄷ자형 건물이다. 동쪽 방면은 별도의 집이 막아서 있다. 안채는 안마당 북쪽으로 물러나서 높은 대좌를 짓고 건물을 올렸다. 안채의 중앙 부분에는 부엌이 있다. 그 좌우로는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머무는 방이다.


관련문집
- 겸암선생문집(謙菴先生文集)
『겸암선생문집(謙菴先生文集)』은 원래 만력 연간(1573~1619)에 류성룡이 간행하였으나, 을사년 홍수로 유실되어 그 부분과 연보를 더하여 임술년에 다시 중간한 것이다.
- 겸암일고(謙菴逸稿)
이『겸암일고(謙菴逸稿)』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문집이다. 이 시문집의 권두(卷頭)에는 1742년(영조 18)에 쓴 이광정(李光庭)의 서문과 1743년에 정종노(鄭宗魯)가 쓴 서문과 목록이 있다


관련유물
- 우헌선생문집(寓軒先生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류세명(柳世鳴)의 시문집이다. 8권 4책의 목판본으로, 종6대손 류의목 (柳懿睦)이 교정, 정사(淨寫)해놓은 유고를 1833년(순조 33)에 간행하였다.

 

관련인물
- 류운룡(柳雲龍, 1539~1601)
겸암 류운룡은 중종 34년, 1539년에 하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응견(應見)이고, 처음의 자는 이득(而得)이었다. 그는 6세 때부터 학업을 시작하여 15세에 이르면 소학, 사서, 그 밖의 여러 경(經)과 사(史)에 통달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16세에 참봉 이용(李容)의 딸, 철성(鐵城)이씨를 아내로 맞이한다.

17세 때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 들어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익히기 시작한다. 29세 때 그는 입암(立巖)의 위쪽 경치 좋은 곳에 겸암정사(謙巖精舍)를 짓는데, 그 편액은 퇴계 이황이 써 주었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사용하게 된다. 이즈음에 그는 과거보는 일과 고요하게 마음을 닦는 일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겸암집』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이때 그 문제를 퇴계 이황에게 서신으로 묻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퇴계 이황은 친절하게 답신을 보내 그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가 아주 벼슬살이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크고 작은 벼슬자리를 역임하였다.
“병자년 5월에 의금부 도사를 제수받는다.”
『겸암집』「연보」의 기록이다. 이 때 겸암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러나 겸암은 6월에 병으로 벼슬자리를 내놓고 귀향한다.「연보」는 이 부분에 대하여 겸암이 벼슬아치의 생활을 좋아하지 않아서 달을 채우지 않고 사직하여 돌아왔다고 설명하여 준다.

43세 되던 해 겸암은 안동의 복호(復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겸암의 청원은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겸암은 의금부 경력(經歷)으로 승차하게 된다. 그 사이에 한 번 조정에서 불렀어도 부임하지 않았던 겸암이 이때는 다시 벼슬길로 나가게 된다. 이때의 벼슬살이는 약 2년간 계속된다. 그 뒤에도 그는 간헐적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간다. 그의 벼슬은 통정대부 원주목사에 이르고, 그에게는 증직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이 주어진다. 그는 63세 되던 해, 1601년에 타계하며, 천등산 기슭에 묻힌다.

“겸암 선생 쪽으로는 불천위가 2위입니다.”
류시주가 말하였다.
“겸암 선생과 그 부친이신 입암 선생이 불천위이지요. 내외분이니까 4위가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는 셈이지요. 서애 선생 쪽으로는 서애 선생 내외분만이 불천위이지요.”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은 1515년(중종 10)에 군위 어량곡(於良谷)에서 태어나 1573년(선조 6)에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1540년(중종 35)년 식년 문과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배위는 안동김씨이다. 류중영은 입향조 류종혜의 4대 손이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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