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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조선 건축)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영국신사77 2011. 4. 9. 00:42

 

충효당 (조선 건축)  [하회충효당]
출처: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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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상류주택.
충효당 /충효당(1650경), 보물 제414호, 경북 ...
보물 제414호. 이 주택은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집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장자인 여()가 재건한 것을 증손 의하(宜河)가 확장·중수했다. 집의 구조는 남향하여 일자형 행랑채(12칸)가 있고 그 안쪽으로 口자형 안채와 일자형 사랑채가 붙어 있으며 그뒤로 사당이 있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바로 보이는데, 사랑채는 보수공사 때의 개작(改作)으로 보이는 견치석(犬齒石)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사랑채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8칸의 대청 뒷면에 온돌방을 두어 6칸으로 되어 있으며 앞면과 옆면에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안채는 사랑채에 이어진 중간 행랑채의 중문을 통해 드나들도록 되어 있으며, 이 건물도 견치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대청 전면은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안채도 역시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바닥은 우물마루인데 마루보다 방의 면적이 훨씬 넓다. 이 건축물은 상류층의 주택이면서도 모든 부분이 기능적으로 처리되고 방의 면적이 커지는 등 민간형을 따른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하회마을의 서애선생과 충효당| 아름다운글
흰구름박순화 조회 1 |추천 0 | 2011.04.07. 06:31

하회마을의 충효당과 서애마을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회마을의 해설사 박순화라고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을 충효당에 모시고 잠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충효당은 서애선생의 종택으로 내외벽을 중심으로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의 공간인 내당채와 사당과. 선생의 유품과 유물을 보관한 영모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충효당은 서애선생의 유시로서 사람이 나서 할일은 "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해서 충효당이라 했으며  허목 미수선생님의 친필인  전서채 현판이 사랑채에  걸려있으며 선생이 계실땐 지금의 바깥마당에 초가집에서 살다가, 그가 돌아간뒤에 손자 졸재 류원지와 유림에서 안채와 사당을 짓고 증손자 류의하가 사랑채와 아랫채를 지었으며, 서애의 8대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군사들이 머물수 있도록 급하게 고친 대문채를 비롯하여  형님 겸암 류운용과의 형제애가 유난히 두터웠음을 말하기라도 하듯이 길을 사이에 두고   대종택인 양진당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택으로 지금의 54칸의 큰 규모를 이루게 된 종택이다.

 

지금은 14대손인 류영하 종손어른이 기거하며 하루에도 수백명의 방문객과 관광객을 맞이하면서  봉제사 접빈객을 몸소 실천하는  종택이다. 

 

서애선생의 유품과 유물을 보관한곳으로 중요교지와 문집 그리고 유서통과 서안등이 보관되어있는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인 영모각이 있으며. 특히 1999년도  가장 한국적인 마을이라 해서 영국의 엘리자베쓰 2세여왕이 4월21일 73세 생일날  방문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여왕도 여성이므로 사랑채에 오르지 못하고 내당채의 박필술 맏종부님과 안방에서 차를 한잔하고 마당에서 김치와 고추장을 담는것을 감상하기도 했으며 최초로 여왕이 신발을 벗은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여왕의 한걸음의 광고효과가 5억이나 된다는 점이 재미있다. 물론 조선중기때부터 서애 류성룡과 형님 겸암 류운용  형제의 높은학문으로 하회마을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1999년도에 여왕의 방문으로 관광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해 작년 8월1일자로 유네스코 즉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에 따라 지금은 주말이면 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있는 실정이다.

 

서애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 ) 이며 의성 사촌 외갓댁에서 출생하여 24세에 과거급제에 합격하면서 도체찰사와  영의정에 오르며  1592년 임진왜란때 이순신과 권율장군을 천거하여  7년간의 국난의 어려움을 승리로 슬기롭게 이끈 하늘이 내린 제상으로 거듭나게되며, 낙향하여 탄홍스님이 10년간 탁발을해 지은 "옥연정사"에서 임란일기 "징비록"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여 훗날의 미래를 대비한다"는 국보를 남기며 심신의 지친 마음을 달래고 한평생 청빈으로 거듭나고 싶음에 학가산 밑 서미동 농환재에서  나물죽으로 삼년간 살다가 66세의 일기로 별세해 풍산수동리의 묘소가 있으며 불천위(국천)로 모시고 있다.

 

일찍이 퇴계선생은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 말햇듯이 그는 하늘이 내린 제상답게  도학과 문장, 덕행,  글씨, 병술에도  뛰어나   병산서원.호계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공이며 저서로는  서애집과 근폭집이  있다.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고 했듯이 지금 국내외적으로 힘이들때 더욱 생각나는 재상이기도 합니다.

 

하회마을에서의 천혜의 경관과 국난을 위기를 슬기롭게 이끌어내신 서애선생의 위대한 정신과 혼불을 가슴가득히 담아가시길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