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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영국신사77 2010. 8. 23. 09:16

역사스페셜

 

1903년 12월 24일 일본 히로시마 법정에 조선인 피고가 섰다. 이들은 살인혐의를 받고 있었다(謀殺被告事件). 심문을 끝낸 재판장이 피고 고영근에게 최후 진술을 요구했다.

 

(이미지출처)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30813_30885.html

 

“다른 할 말이 있는가?” ; 재판장

“모살자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讎)화다.”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m=media_view&query1=k07m004002p4.jpg&n=b07m3274b (이미지출처)

 

그는 자신은 단순히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의 목을 베었다고 증언했다. 그가 말한 국모는 8년 전 을미사변으로 목숨을 잃은 명성황후. 이것은 명성황후 복수사건이었다.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http://blog.naver.com/xual/120099150165 (이미지출처)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30813_30885.html(이미지출처)

 

조선의 국모가 자국의 궁궐에서 일본자객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을미사변. 이 을미사변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역사에 커다란 치욕으로 남아 있습니다. 헌데 이 사건이 발생한지 8년 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게 노라고 나선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고영근은 우범선을 암살한 뒤에 을미사변 당시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범선은 명성황후 살해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요. 과연 우범선은 어떤 일을 했기에 암살의 대상이 됐던 것일까요. 역사스페셜 오늘은 명성황후 복수사건의 실체를 추적해 봅니다.

 

일본 후쿠오카 현 쿠시다신사. 이곳엔 100년 전 기증받은 후 외부에 좀처럼 공개하지 않은 귀중품이 있다. 날의 길이만 90cm에 이르는 칼이다.

 

아베 겐노스케 쿠시다신사 궁사

“전쟁이 매우 많았던 시대에 실전용으로 제작된 검입니다.”

 

에도시대 유명한 장인이 만든 칼. 이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나무로 만든 칼집엔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칼의 주인은 암살에 성공한 날을 기념해 글을 새겼다. 그는 후쿠오카 출신의 사무라이 도 가츠아키. 자신이 이 칼로 조선의 왕비를 베었다고 증언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 광화문은 습격당하고 있었다. 궁궐을 방어하던 수비대는 2시간에 무너졌다. 일본 군인과 경찰, 민간인에 조선인까지 포함된 무리들은 경복궁의 최후방 건청궁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왕비였다. 하지만 그들은 왕비 얼굴을 몰랐다.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위협하며 왕비의 소재를 물었다.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자객들은 왕비의 침전을 점령했다. 조선의 왕비는 이럴 타 할 방어도 도피도차도 하지 못한 체 자객의 칼에 사망했다. 한나라의 왕비로 받아야할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죽음이었다.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30813_30885.html(이미지출처)

 

그런데 명성황후가 살해되던 그날 그 현장엔 한 조선인이 있었다. 이 사건을 추적하던 제작진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귀중한 자료를 발견했다. 개인문고실 깊숙한 곳에 보관된 한권의 책. <우범선최후사>다. 책은 우범선과 비슷한 시기 일본에 망명했던 독립운동가 윤효정에 의해 쓰여 졌다. 한자초서로 쓰여 번역이 쉽지 않았다. 제작진은 전문가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을미사변 당일 우범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하영휘 소장 가회고문서 연구소

“이분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그날 그 현장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병사들이 광화문 안으로 반쯤 들어갔을 대 뜻밖에 홍계훈이 병사 몇 명을 데리고 갑작스레 달려왔다.”

 

우범선은 훈련대 병사들을 이끌고 일본자객들과 함께 광화문을 통과했다. 그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진입을 저지하자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다.1) 우범선은 자객들이 건청궁에 진입하자 군대를 풀어 담을 에워싸고 파수를 봤다.2) 그리고 왕비가 살해된 현장에 불려갔다. 그는 낭인들 앞에서 죽은 왕비의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 경복궁의 가장 북쪽 여러 채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건청궁옥호루. 이곳에서 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왕비살해가 일어났다. 왕비는 새벽녘 수십 명의 일본의 자객들에 둘러싸여 치욕의 최후를 맞았다. 이곳에서 일어난 왕비살해 사건엔 조선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관여돼 있었다.

 

그가 당시 무엇을 했는지는 그동안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의 기록에 의해 의존해왔는데 그 내용이 자세하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범선 본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습니다.

 

<우범선최후사>는 상당부분 저자가 우범선 본인에게 들었던 진술을 인용하고 있다. 책엔 우범선이 사건의 뒷수습에 어떻게 관여했는지가 기록돼 있다. 우범선은 왕비의 시체를 확인한 후 부하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린다.3) 왕비의 시체는 옥호루 뒷산인 녹원에서 불태워졌다. 우범선은 그곳에서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

 

“숲처럼 무성하던 민씨 족속, 수백 명의 시녀 신하라며 그녀를 국모라고 부르던 이천만 백성.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한 숨에 목숨이 끊어질 때 오직 한 사람 나 우범선만이 보았네.” (우범선최후사)

 

우범선은 자신의 행동이 조선의 국정을 쇄신 시킬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우범선은 중인의 신분이었는데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민씨 세력의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범선은 명성황후살해에 이용할 조선인들을 찾고 있었던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에게 최적의 포섭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우라가 이용한 사람은 우범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500chosun/1MRZ/42?docid=WGAW|1MRZ|42|20070814224953

 

명성황후 살해는 주한일본공사관에서 주도했다. 당시 일본 공사는 직업군인 출신에 미우라 고로였다. 1895년 9월 21일 미우라는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시겐조에게 왕비살해 계획의 운을 뗀다.

 

“아무래도 한번은 여우 사냥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자네 밑에 젊은 녀석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 ; 미우라 고로

“여러 명 있습니다.”

 

여우는 명성황후. 여우사냥은 명성황후 암살을 의미했다. 일본은 왜 왕비 살해를 계획했던 것일까. 당시 조선의 외교는 왕비민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교 노선은 인아거일(引俄拒日).4)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일본이 전리품으로 요동을 차지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까지 끌어 들여 지배권을 환수한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

“삼국간섭 당시에 러시아의 일갈에 한번 협박하는 바람에 민황후가 보기에 일본은 속절없이 자기네가 희생을 치르면서 얻은 요동반도를 돌려줬단 말입니다. ‘일본 아무것도 아니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니까 과거에 청나라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이권을 러시아에게 주고 친러 정책으로 바뀝니다. 민황후는 실제로 따지면 친러파입니다. 그 당시의 민황후의 방법으로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민황후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일본은 절대 안 되겠고 그러니까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 그 결정을 일본정부가 내렸어요. 이게 민황후 시해의 첫 번째 본질이죠.”

 

10월 3일(1895년) 미후라는 왕비살해 계획에 우범선을 끌어 들인다.

 

“나는 무부요. 특별한 정견은 없으나 즉각 그 黨羽(당우)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떠한 고재양책(高才良策)이 있을지라도 조선을 변개(變改)하기 어렵소.” <한말인물의 회상> 권동진

 

강창일 교수 배재대 일본학과 현 국회의원

“이 훈련대는 1, 2, 3훈련대가 있는데 전부 일본인의 조정을 받는 식의 군대였습니다. 친위대는 반면에 황실의 관할로 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훈련대들을 동원을 해서 가담을 시켜가지고 위장을 하려고 했죠. 조선인들끼리의 싸움이었고 그 와중에 일어난 시해사건이라고 위장을 하려고 했었죠.”

 

갑오경장 때 만들어진 신식군대인 조선훈련대는 해체위기에 처해 있었다. 민씨정권은 왕실 집권의 새로운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훈련대는 반발했다. 우범선은 개혁을 위해선 민씨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종각 일본 주요대학교 겸임강사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저자

“우범선은 중인 출신으로 양반 자제들한테 훈련을 시킬 때도 ‘네 이놈’소리를 들으면서도 수모를 당했고 그 뒤로 우범선은 일본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와서 4개월 정도를 돌아보면서 일본식으로 조선도 근대화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귀국한 후에도 당시 수구파 정권대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또는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측과 힘을 합쳐야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왕비가 살해 되던 날 우범선은 한 유력인사의 가마를 호위하고 경복궁에 들어섰다. 그는 대원군. 민씨 세력에 정권을 빼앗긴 체 사실상 유배돼 있던 처지였다. 미우라는 을미사변 20여일 전부터 수차례 사람을 보내 대원군을 포섭했다. 그는 왕비가 살해되던 날 새벽 강녕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8일 오후 미우라는 본국에 보고를 한다.5) 그는 왕비살해사건을 내분으로 몰아가려 했다. 다음 날 한성신보에 지난밤의 참극이 대대적으로 실렸다.6) 신문은 일본인들은 제외한 체 대원군이 입궐한 사실만을 강조했고 학살사건을 조선인들끼리의 알력다툼으로 보도했다.7)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것을 가능하면 이제 조선인들끼리의 내부 알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죠. 대원군을 마치 고부간의 갈등관계로 몰고 가려고 하는 생각이 하나 있었고요. 또 행동대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행동대원은 훈련대를 활용한 것이죠.”

 

러시아, 미국 등 열강으로부터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제서야 일본은 사건관계자 전원을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하고 군인 8명은 군법회의 회부한다. 살인혐의로 수감된 민간인은 모두 48명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들을 낭인이라고 했다. 낭인은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도는 사무라이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스스로 지사국사를 자칭하며 정탐활동과 정치공작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건의 예심최종결정서에 이들의 이름과 출신지 직업 등이 나와 있다. 사건관련자 48명중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이었고 직업은 기자, 외무성순사, 교원, 저술가 등 다양했다.

 

“민황후를 시해하러 온 사람 중에 시바 시로(柴四朗)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바 시로는 하버드 출신입니다.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一)는 사람은 동경제대 출신입니다.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라는 사람은 나중에 장관이 됩니다. 일본의 대신이 됩니다. 시바 시로도 일본정부의 현직차관으로서 한국에 와서 민황후를 시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갖다가 깡패라고 하면 정말 한심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명성황후 살해사건 가담자의 절반이 왜 구마모토 출신일까. 구마모토 일일신문사 박물관엔 이 신문사 출신 주요 인사들의 사진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중 을미사변에 가담한 사람이 3명이다. 이들의 우두머리 격으로 을미사변에서 행동대장 역할을 했던 아다시 겐조. 그는 우익성향의 정치 결사단체인 구마모토 국권당 창설자의 직계 수하였다. 이들을 지휘한 것은 초슈 출신의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왕비 살해를 지시했다.

 

고마츠 히로시 교수 구마모토 대학교

“이노우에 가오루가 국권당 관계자들을 이전부터 포섭했다고 할까요.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적인 움직임을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노우에 가오루 뒤에는 당연히 초슈벌을 중심으로 한 정부 관계자들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초슈벌이 무조건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초슈벌의 의도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후쿠오카에 위치한 겐요샤(玄洋社) 공동묘지. 이곳엔 낭인 309명의 이름을 적은 명부탑이 있다. 그 중엔 낯익은 이름도 있다. 자신이 왕비를 살해했다며 쿠시다 신사에 칼을 기증한 도 가츠아키다. 겐요사는 조선 침략을 주장하는 극우단체로 을미사변에 가담한 낭인들이 수감되자 구마모토 국권당과 함께 구속자들의 뒷수습을 했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

“정부차원의 계획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인범들을 영웅대접을 할 수 있습니까. 개인차원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여했던 공사관 직원들이 다 나중에는 장관도 하고 외국대사로 나가고 전부 다 영단합니다. 이런 등등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일본정부가 깊이 개입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대원으로 이동당한 우범선. 그는 을미사변 이후 등장한 친일내각이 아관파천으로 무너지자 이듬해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 명성황후살해 주위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친 처지. 당시 이런 망명자들은 대부분 궁핍하게 살았다. 그러나 우범선은 달랐다. 히로시마에서 석방된 미후라는 형무소에서 쓰다 남은 1천엔 가운데 300엔을 우범선 일행에게 보낸다. 우범선은 히로시마(1896년 1월)와 교토(1896년 2월), 도쿄(1896년 8월), 고베(1901년 5월)와 구레(1898년 11월, 1902년 10월~)를 오가며 자유롭게 생활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자국 내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리했다.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500chosun/1MRZ/30?docid=WGAW|1MRZ|30|20070814220844

 

조선인들의 움직임은 <요시찰한국인거동>이라는 제목으로 외무성에 보고됐다. 이 문서에 우범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범선은 일본정부로부터 매달 20엔의 지원금을 받았다. 당시 20엔은 소학교 교사 초봉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쌀 3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8) 일본 서민층의 한 달 생활비를 웃도는 돈이었다. 특별대우는 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여자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던 우범선. 사진 속의 남자 아이가 농학자로 유명한 우장춘이다. 일본정부는 우범선이 사망한 후에도 장남의 학비를 지원했고 차남에 대해선 조선총독이 기밀비에서 학비를 보조했다. 우범선은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가담한 죄를 피해 도망 온 몸이었지만 일본에서의 삶은 마치영웅처럼 당당했다.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미우라는 조선 사람들을 내세워 을미사변을 내분으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동조해 명성황후 살해에 협력한 우범선. 그는 조선인들에게 응당 대가를 치러야할 반역자였습니다.

 

 

(이미지출처)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60830170022020

 

명성황후가 살해 당한지 2년여가 지났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범인을 찾아내 죄 값을 물을 수도 없었다. 황후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통했다. 1897년 11월. 덕수궁엔 긴 상여행렬이 이어졌다.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한 달 뒤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른다.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는 긴 울음을 토해냈다. 그런데 슬픔에 잠긴 황태자를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병마절도사를 지낸 고영근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밤낮으로 통곡하시면서 생모의 원수를 누가 토멸해 줄 것인가라고 한탄하셨는데 나는 오늘에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이 생각된다.”

 

1899년 여름 고영근은 일본으로 떠난다. 그는 구마모토와 고베, 오사카 등을 떠돌았다. 1903년 7월 그는 오사카에서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던 독립운동가 윤효정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윤효정에게 우범선 암살계획을 듣게 된다. 당시 우범선은 구레시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자객을 경계했다. 동서내외와 동거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줄였고 상대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2층에 살기를 고집했다. 그가 살던 곳은 어디였을까. 옛 지도를 찾아 위치를 가늠해봤다.

 

“이 근처입니다.”

“이 근처가 우범선의 집입니다. 우범선 집에서 사건 현장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직선거리고 1km이내입니다.”

 

우범선이 살던 와쇼마치 1508번지 일대는 상가로 변해있다. 종전 후 새로 만들어진 주소는 호도리 二丁目 6번지. 백여 년 전 바로 이곳에 2층 목조건물이 있었고 우범선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1903년 10월 28일. 그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가 고영근이었다. 고영근은 압록강으로 우범선을 유인하자는 윤효정을 뿌리치고 단독으로 우범선을 찾아왔다. 고영근은 뛰어난 언변으로 그의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이곳에 살고 싶으니 방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우범선이 고영근을 위해 찾은 집은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구레시 와쇼마치 2079번지. 현재 와쇼마치 17번지인 이곳에 그가 구해진 방 2칸짜리 집이 있었다. 고영근은 이 집에서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한다.

 

“재일본 한국망명자 우범선을 같은 나라 사람 고연근과 노윤명이 살해한 사건”

 

 

(이미지 출처)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630813_30885.html

 

고영근이 황실로 보낸 편지9)엔 우범선이 을미사변 당시 국모살해에 일조한 역적임을 밝히고 그를 단죄한다는 결심이 들어있다.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가족들을 데려 올 생각이니 더 큰집을 구해달라고 거듭 부탁해 시간을 번 후 그의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새로운 동지를 영입했다. 그는 오카야마에 살고 있던 자신의 노복 노윤명이었다. 노윤명은 고영근과 함께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 1903년 11월 24일 새집에 대한 계약을 마치자 고영근은 이사 턱을 내겠다며 우범선을 초대한다. 고영근과 함께 보낸 지난 한 달 동안 아무 일이 없자 우범선은 고영근에 대한 경계심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1시간 쯤 지났을 때 고영근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범선에 등 뒤로 갔다. 우범선이 낌새가 이상함을 알아챈 순간 오른쪽 목으로 날카로운 금속이 들어왔다. 고영근은 목과 턱을 수차례 더 찔렀고 그 순간 노윤명이 달려들어 쇠망치로 머리를 난타했다. 우범선은 즉사했다.

 

 

(이미지 출처)http://blog.ohmynews.com/historyseek/197448

 

그날 저녁 8시 15분 그들은 인근 와쇼마치 파출소로 찾아가 자수했다. 한국인 동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보기 드문 사건. 일본 언론은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지방지 뿐 아니라 전국지까지도 한국인 망명객 우범선의 살해사건을 보도했다. 사건현장의 도면까지 그려가며 참상을 전했다. 일본 언론은 우범선을 열사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강개의 지사인 우범선이 살해당한 것은 비문명(非文明)의 오욕(汚辱)이라고 보도했다. 우범선은 구레의 한 작은 사찰에 잠들어 있다. 일본인의 묘 가운데에 유일한 한국인 묘다.

 

“우범선의 가족들이 이곳에 오기도 하나요?”

“지금은 없어요.”

 

비석 아래엔 화장한 후 분골한 유골이 매장돼 있다. 사찰 관계자들조차도 얼마 전까지 이곳에 유골이 있는 걸 몰랐다.

 

니시무라 에이쇼 진노잉 관리인

“암살당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 내놓고 싶지 않았겠죠.”

 

 

(이미지 출처) http://blog.ohmynews.com/historyseek/198443

 

비석은 모금을 통해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그가 사망하자 묘지를 만들고 제사를 지낼 비용을 모금했다. 명성황후 시해에 앞장섰던 낭인들과 한국인 망명객을 지원하던 부호 등이 기부를 했다. 그중 스나가라는 부호의 각별했다. 사노시의 있는 사찰 묘켄지. 스나가 가문의 가족묘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 우범선이 있다. 분골의 일부를 이장해 만든 또 하나의 묘다. 우범선을 양자로 삼았던 스나가는 도쿄 아우야마로 이장된 우범선의 묘가 방치되자 자신의 가족묘로 이장해 관리할 만큼 그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1903년 12월 24일 우범선 살해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1심 공판이 열렸다.

 

“다른 할 말이 있는가?”

“모살자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삭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讎)화다. 난 단순히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스스로 갚은 것이다.”

 

판결이 내려졌다. 고영근 사형, 노윤명은 무기징역. 고영근은 끝까지 의연했다.

 

고영근은 암살계획을 세울 당시 이미 사형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목숨을 걸고 명성황후 복수에 나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배후설이 제기돼 왔습니다.

 

우범선 살해 소식은 즉시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외교사료관엔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황후 친정식구들의 감회는 남달랐다.10) 민씨들은 은밀히 축하연을 열만큼 오랜 한을 더는 계기로 여겼다. 하지만 일본은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고영근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우범선을 살해한 것으로 몰아가려 했다. 노윤명을 항변했다. 그는 전부터 궁녀를 통해 황태자에게 복수를 위임 받았고 일본에 오기 전 다시 거듭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고영근은 암살은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모든 복수의 염원은 일본에 오기 전부터 있었다. 위임 여부에 관계없이 신하이기 때문에 원수를 갚은 것이다. 난 오늘 죽어도 여한은 없다.”

 

 

(이미지출처) http://cafe.daum.net/kjminhak/Wwk/344?docid=JEXf|Wwk|344|20070725150335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양국에서 지목한 사건의 배후는 고종이었다.11) 왕비가 살해된 후 고종은 이미 우범선에 대한 참수형을 내린 적이 있었다. 고종은 나라의 변란을 만드는 신하 6명을 지목하고 이들의 목을 벨 것을 명령12)했는데 우범선은 그중 한명이었다. 반역자에 대한 처단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894년 8월 28일 김옥균이 상해이의 한 호텔에서 암살된다. 그를 살해한 사람은 바로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그는 갑신정변 관련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정권이 사주한 인물이었다. 고종은 김옥균의 시체를 능지처참해 대역죄인이란 깃발과 함께 양화진에 걸었다.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과 고종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고영근은 고종과 민왕비의 은혜로 살아가던 신하였다. 그는 하루에 3번씩 궁에 드나들며 왕과 왕비를 알연했다. 고영근13)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민씨 일가와의 인연을 통해 왕과 가까워졌다. 그는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의 겸인(傔人)이었다.

 

이종각 겸임강사

“청지기란 뜻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하는 일까지도 다 맡아서 하는 말하자면 노복, 종과 같은 뜻입니다.”

 

후손들과 함께 제주 고씨 영곡공파의 족보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고영근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왜 겸인이 됐던 것일까.

 

고갑주 고영근 증손

“증조부 고영근 할아버님께서 네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셔서 어려운 시기를 지내다가 민영익 가에 의탁을 하게 됐습니다.”

 

집안에 대대로 유품이 전해지고 있다. 고영근은 두 개의 호패와 같은 수의 명판을 남겼다. 그런데 눈에 띠는 곳이 있다. 상어로 만든 호패의 아패다. 아패엔 정해무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김영복 고문서 감정위원

“당상관 중에서도 2품이 되게 되면 아패라고 해서 상아에 패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상아패는 분명이 이름이 나오고 밑에 생년월일이 나오고 옆에 문과나 무과의 합격해야 거기다 쓰니까 정해면 정해년에 무과에 합격했다는 게 나오고 뒷문엔 아패를 발행한 해와 그 다음에 직인이 찍히게 됩니다.”

 

종2품의 벼슬은 어떤 직책이었을까. 고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5년 후엔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됐다. 그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두터웠다. 1890년 외국상인들의 양품상점으로 시전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14) 원성이 빗발치자 고종은 고영근에게 특명을 내려 시장을 폐쇄하게 한다. 하지만 고영근은 때론 왕의 뜻을 거스르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정부가 외교와 개혁노선이 달라 대립하던 독립협회를 강제해산하자 이를 다시 세우는 운동을 주도했다. 1899년 6월 중추원 의장을 비롯한 수구대신들의 집에 연이어 폭탄이 투척된다.15) 정부는 범인 체포에 천원. 밀고에 500원의 상금을 건다. 고영근이 조선에서 더 이상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서울을 떠난다.

 

정정명 「고영근 연구」논문저자

“자기가 믿고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그런 실천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 시대에 어떡하면 위험을 피해볼까 오히려 지식인들은 뜻을 가지고 있다가고 나중에 변절하고 그랬는데 고영근은 자기가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한 길이라 생각한 건 때론 고종이 왜 내 뜻에 반하느냐고 해도 이것이 바로 임금을 위하는 길이라고 설득해 가면서까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라 생각해요.”

 

고영근은 일본으로 갔다. 그사이 본국의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일본행에 고종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일까. 김옥균과 함께 민씨정권의 암살 대상이었던 박영효는 일본신문과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발언을 한다. 그는 고영근이 출국하는 계기가 됐던 폭탄 사건은 꾸며낸 일이며 일본에 망명해 있는 친일파들을 처단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16)

 

이종각 겸임강사

“당시 황태자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고영근에게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그런 취지의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 보입니다. 따라서 고영근은 일본에 망명하기 전에 후일의 순종으로부터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그런 뜻을 전해 받았기 때문에 일본측 자료나 또는 우리나라의 자료에도 우범선을 살해한 것은 고영근이 고종의 명령에 의해서 또는 한국조정의 명령을 받고 살해했다는 기록들도 많이 있습니다.”

 

고종은 고영근을 살리려 했다.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민영소와 민영환을 하야시 공사에게 보내 선처를 부탁했다. 당시 러일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고종의 협조가 필요했다. 만주 남부와 함께 주전장이 되는 만큼 한국정부의 협조를 얻는 것이 중요한 외교 과제였다. 1904년 3월 서울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종은 직접 고영근의 선처를 당부한다.

 

이종각 겸임강사

“러일전쟁은 주로 조선과 만주 남부에서 전쟁이 상정이 돼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고종의 비위를 맞출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영근을 사형시키지 않는 고영근의 목숨을 살려주는 외교카드로 사용했습니다.”

항소심에서 고영근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수감된 지 8년 후인 1911년 마침내 석방 명령이 내려진다. 그것은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고종의 의지였다.

 

고종이 아관파천 후 우범선에 대한 참수령을 내렸다는 점. 그리고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여러 번 자객을 보냈던 전력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고영근이 끝까지 독자적인 범행이었다고 주장을 했는데요. 평생 나라를 걱정하며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고영근. 그는 이곳 홍릉에서 목숨을 건 마지막 투쟁을 벌입니다.

 

 

(이미지출처) http://blog.daum.net/0118983530/7832316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릉.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돼 있는 곳이다. 일본자객들의 칼에 왕비를 먼저 떠나보냈던 고종은 24년 후 이곳에서 왕비와 재회했다. 1922년 12월 11일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한 노인이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그는 고영근. 홍릉의 능참봉이었다. 고종 사후 2년 능참봉에 자원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곁을 지키고 있던 고영근은 이날 자신이 비밀리에 홍릉에 비석을 세웠음을 공개했다.17) 당시 그의 나이 71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고영근이 세운 비석은 어떤 것이었을까. 홍릉에 능비를 모신 비각. 이 비각에 모셔진 비석은 홍릉이 청량리에 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고영근이 바로 세우기 전엔 홍릉 한 구석에 미완의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이정숙 홍유릉 문화 관광 해설사

“그 당시에는 고종이 생존해 계셔서 고종황제에 대해서는 새겨져 있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태, 지금 보시면 태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당시에는 태자를 새길 수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홍릉 글귀와 명성황후까지만 새겨져 있었던 것이죠. 대한과 동시에...”

 

 

(이미지출처) http://blog.daum.net/0118983530/7832316

 

비석엔 ‘대한홍릉명성황후’란 8글자만 새겨져 있었고 그 사이는 공백이었다. 능비에 ‘존화황제’란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한 일본의 규제 때문이었다. 고영근은 극비리에 인부를 동원해 ‘고종태황제’를 새기고 황후의 존호에도 태자를 넣었다. 그리고 합장을 의미하는 부좌를 추가해 비문을 완성했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

“총독부에서는 공식적으로 황제를 못썼지요. 황제란 말을 안 쓰고 ‘이태황’, ‘이전하’ 낮추었는데...... 총독부 입장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대한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쓰지 못하게 했죠. 왜냐하면 대한이라는 나라는 이미 없어졌고 멸망한 나라의 이름을 쓰는 것은 안돼죠. 총독부 입장에서는......그래서 방치해서 어디에다 쌓아서 치워놨죠. 그것을 다시 수습해서 세우는 게 고영근이죠.”

 

이왕직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장관, 차관 등 간부들은 일본인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세워진 비석을 다시 누이는데 만장일치했다. 고영근은 이를 용납지 않았다.

 

“내게 세우기는 격분한 마음으로 세웠으나 고종태황의 능비를 세운 이상에 내 손으로 다시 누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조선총독부는 차관을 도쿄에 급파해 국내성에 보고했다. 홍릉엔 새로 세워진 비를 보기 위해 연일 인파가 몰려들었다. 급기야 당국은 비석에 붉은 포장을 둘러막기에 이른다.18)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1월 22일 사이토 총독은 일본을 방문해 능비문제를 상의한다. 그리고 다음 날 총독부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한다.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창일 교수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현 국회의원

“3.1운동 이후에 언론도 한국 신문들도 나타나게 되고 이른바 문화통치시대라고 하죠. 이제는 강압적으로 무단적으로 통치만 하고서는 도저히 누를 수 없다. 이것이 한계에 부닥쳤죠. 그래서 3.1운동을 계기로 알게 되죠. 일본사람들이 일본식민자들이 그래서 1920년대부터는 유화정책을 펴면서 회유정책을 펴게 되죠. 풀어줍니다. 그런 속에서 그런 것들을 양념 식으로 풀어주는 거죠.”

 

3월 15일 조선총독부는 임의로 능비를 건립한 책임을 물어 고영근을 능참봉 직에서 해임한다. 하지만 고영근은 승리했다. 한국적 옹고집으로 20여 년간 숨겨져 있던 대한제국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웠다. 능참봉 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왕과 왕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금곡의 숲속에 초가집 짓고 홍릉을 바라보며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것은 그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게 보내는 마지막 충성이었다.

 

이종각 겸임강사

“그는 한말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우국충정을 가지고 또 우국충정을 행동으로 보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영근이 일으킨 우범선 살해사건이라든지 능비건립사건 등등은 현재에 와서 생각할 때도 나라를 위해서 큰 상당한 족적을 남긴 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고영근은 홍릉에 능비를 바로 세운 이듬해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때론 우직하게 때론 용감하게 자신이 믿는 것을 향해 나아갔던 사람. 그는 어지러운 시대 추락한 황실의 명예와 국가의 자존을 세우기 위해 끝까지 의리를 다했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임을 당한지 11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치욕의 역사는 완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사건은 을미사변에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사건은 정작 진범은 단죄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 동족간의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을미사변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에는 어떠한 비극적인 운명이 닥쳐올 수 있는가를 상기 시켜주고 있습니다.

 

※ 이 글의 내용과 이미지는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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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에 관한 자료는 이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면 많은 도움을 많을 것입니다.

http://blog.ohmynews.com/historyseek/category/14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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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의 중간을 끊어 세우고 말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연유를 묻지 않고 즉시 명령하여 그를 죽였다.” ( 우범선최후사)

2) “나는 문 밖에서 파수를 보았다(余在門外把守)”

3) “먼저 장작을 운반하여 쌓아 더미를 만들어 시체를 그 위에 놓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우범선최후사)

4)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막으려는 조선 후기의 외교정책.

5) “왕비의 소재는 아직 미상임. 대원군에 의한 쿠데타”

 

6) “대원군 전하께서 입궐하시다” 한성신보 1895년 10월 9일.

7) “왕궁 안에서 작은 싸움이 있어...”

8) 20엔의 가치

   1900년 소학교 교사 초봉 : 10-13엔

   1902년 백미 10kg : 1엔 19전 <값의 풍속사>

9) “대한의 신하된 몸으로 우범선과 하늘을 같이 할 수 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원수를 갚음을 알립니다.(乙未事變 禹範善 弑國母)”

10) “우범선이 살해됐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지자 궁중에서는 내밀히 민씨 집안들이 모여서 축하의 연회를 열것이라는...” <일본외교문서>

 

11) “고영근은 국왕의 명에 따라 망명자들을 죽이기 위해 처음 일본에 도래 한 자로서...” 고베유신일보 1903년 12월 2일.

12) “역괴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권형진은 불문 장단하고 즉각 참수하여 짐에게 바쳐라.”

13) “고종이 총애하는 사신(私臣)...” <풍운한말비사> 윤효정 저

14) “고종이 한규설과 고영근에게 특별히 밀령을 내려 중상들로 하여금 일률적으로 폐시토록 했다.” <고종시대사>

15) 폭열단 사건

     의장 조용식의 집과 박정양의 집에 폭탄 투척.

 

16) “폭탄사건도 처음부터 조선의 관련자들이 거짓말로 지어낸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는 우리들을 조선에 유인해 내서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주코쿠 1903년 11월 27일

17) “홍릉에 비석봉건참봉 고영근 씨 대죄” 동아일보 1922년 12월 13일.

18) “홍릉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 많이 늘어 당국에서는 붉은 포장을 둘러쳐 볼 수 없게 만들어...”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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