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다니엘서

★다니엘서 9장 70 이레 예언<박상훈 목사>

영국신사77 2009. 1. 8. 23:45

 

100     제99강 마지막 한 이레(9:27)     관리자     2006.05.2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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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제97강 칠십 이레가 지나면(9:24)     관리자     2006.05.2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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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제95강 기도의 근거(9:15-19)     관리자     2006.05.21     22  
  95     제94강 말씀에 순종합시다(9:12-14)     관리자     2006.05.21     24  
  94     제93강 축복의 길로 갑시다(9:7-11)     관리자     2006.05.21     21  
  93     제92강 징계의 이유(9:5-6)     관리자     2006.05.21     20  
  92     제91강 기도하는 자의 자세(9:3-4)     관리자     2006.05.21     24  
  91     제90강 말씀과 기도(9:1-2)     관리자     2006.05.21

 

 

 

 

 

 (1) 제90강 말씀과 기도(9:1~2)  

9:1~2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서 9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1∼19절로서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그의 기도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아울러 자신과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기도 가운데서 본받아야 할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후반부는 20∼27절로서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의 기도에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에 속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이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단 9:1∼2은 다니엘이 기도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바벨론이 멸망한 이듬해인 BC 538년경]에."

바벨론의 벨사살 임금 때에 바벨론 제국은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에게 나라가 넘어갔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 나타난 내용과 같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보았던 신상의 금머리 시대는 지나가고,

그 대신 은으로 만든 두 팔과 가슴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이 7장의 이상 가운데 본 그대로,

사자같이 생긴 짐승이 곰같이 생긴 짐승에게 먹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울러 8장에서 보았던 두 뿔 가진 수양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메대 사람 다리오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서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지움을 당했습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졌던 왕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메대 사람 다리오였습니다.

왜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던지움을 당했습니까?

다니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나있는 창을 활짝 열어놓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할 경우에는

사자굴 속에 던지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명을 어겨가면서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2절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말하는 서책은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대와 바사가 들어서면서,

다니엘은 자기가 이상에 보았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민족의 장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다니엘은 자신이 읽고 있는 서책을

단순히 인간이 기록한 책으로 보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성경이 비록 인간의 손으로 기록된 책이지만,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니엘은 여기서 하나님의 칭호를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가

다니엘서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쓰여졌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칭호 가운데

특별히 언약적인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도록 정해놓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다니엘 자신이 잡혀온 기원전 605년부터시작된 70년 포로 기간

다음해인 다리오 재위 2년째인 BC 537년에는 끝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고 초조해졌을 것입니다.]


렘 25:11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무한히 계속하는 것이 아니고,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 뒤에

다시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넘어가서 렘 29:10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칠십 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게 하실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렘 29:11의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재앙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인 우리가 평안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되,

언제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까?


렘 29:12의 말씀입니다.  
"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렘 29:13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뜻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예레미야서를 읽는 가운데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서 본문으로 돌아가서 잠시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니엘은 자기가 기도할 때

왕명을 어긴 결과가 되어 사자굴 속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기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교훈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기도할 때, 무엇에 입각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윗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윗사람의 의중과는 전혀 상관도 없이,

내 할 말만 다하면 그 얼마나 무례한 사람입니까?

내가 말하기에 앞서서,

윗사람의 말에 공손히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야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중은 무엇인지,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먼저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내 육신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또 우리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소망스러운 삶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침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십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짐을 잊지 마십시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하시면서, 오늘 하루도

복된 삶,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는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제91강 기도하는 자의 자세(9:3~4)  

9:3~4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다니엘은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칠십 년만에 끝내고

고국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임을 뜻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울러 다니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3절 끝 부분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결심하고."

무엇을 결심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칠십 년만에 끝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 뜻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니엘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3절은 다니엘이 어떤 식으로 기도를 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기도를 하면 다리오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사자굴 속에 던짐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생명을 걸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3절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4∼19절은 다니엘이 실제로 기도한 내용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다니엘이 어떠한 자세로 기도했는지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왜 다니엘이 금식을 했습니까?

"내게는 육체적인 욕구보다도 영적인 갈급함이 중합니다.

나는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러한 뜻으로 그는 기도하는 동안에 음식을 끊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옷을 입고"라고 했습니다.

극심한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죽으면 슬픔과 애통을 표하기 위해서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베옷을 입었습니다.

 

"재를 무릅쓰고."

더러운 재를 자기의 몸에 덮어썼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더러운 인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심정으로 재를 자기의 몸에 뿌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기도와 간구를 위한 준비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넓게 사용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도에는 찬양, 회개, 간구가 다 포함됩니다.

간구는 특별한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는 기도할 때에 다니엘처럼 금식하지 않습니다. 베옷을 입지도 않습니다. 재를 무릅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다니엘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속히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다니엘의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여호와입니다. 바벨론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들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다니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다니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성호가 언약적인 칭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4∼19절의 말씀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4절 하반부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14절에서는 자기와 자기 민족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15∼19절에서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원을 아뢰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 순서는 맨 먼저 찬양, 그 다음으로 회개, 그리고 마지막이 간구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와 같은 순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깨끗이 설 수 있도록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4절 하반부에서 다니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는지 그 모습을 보십시다.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 할 주 하나님."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지요. 피조물인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에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서 마땅히 경외를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부르고 난 뒤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다니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다니엘은 그의 삶을 통해서 이 사실을 체험적으로 겪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내린 왕명을 거역했습니다.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니엘을 지켜주셨습니다. 높이 들어 사용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 때 다니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벨사살을 준엄하게 질책했습니다. "당신이 부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있었던 일을 알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할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당신의 나라와 함께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지켜주셔서 벨사살 임금으로부터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 때,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 속에 던짐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세 번씩 변함없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왕명을 어긴 결과로 사자굴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봉해주셔서 다니엘이 조금도 다치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해서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주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십니다. 우리를 자신의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십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먼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시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잘못된 것과 불충성했던 것 등을 회개하십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을 지키시는데 나는 하나님과 맺었던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십시다. 그리고 난 뒤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이 아침에도 다니엘이 보여준 기도의 모습을 본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그가 드린 기도의 내용도 본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다니엘처럼 기도의 응답을 다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제92강 징계의 이유(9:5~6)

 

  9:5~6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찬양과 회개와 간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회개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다니엘은 이 말씀 가운데서 예루살렘이 칠십 년 동안 황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섯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까? 1)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며, 2) 패역했기 때문이며, 3) 행악했기 때문이며, 4) 반역하였기 때문이며, 5)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기 때문이며, 6) 주의 종 선지자들이 말씀한 것을 귀담아 듣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 결과 예루살렘은 그 기간 동안에 황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이 어떤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우리"입니다. 6절 말씀도 어떻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누구를 탓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나라의 왕들을 탓하지도, 지도자들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상숭배를 했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다니엘은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도 범죄한 이스라엘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섯 가지 죄악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범죄"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을 통해서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동화되어 이방의 헛된 신들을 섬겼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삶의 기준에 맞추어서 거룩한 삶을 살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목표에서 그들은 크게 빗나가고 만 것입니다.


  둘째로 "패역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적 상태가 바르지 못하고 굽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바르지 못한데, 어찌 그들의 삶이 바르게 나타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셋째로 "행악하며"라고 했습니다. "패역"이 내적 상태라면, "행악"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 행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넷째는 "반역하여"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만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약속을 깨뜨리고 다른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다섯째는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법도"는 정해진 원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규례"는 법도를 상황에 적용시킨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이것은 법도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 가지 안식일에 관한 규례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나무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든지, 불을 피워서도 안된다든지, 오락을 금한다든지 하는 등등의 것들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열왕들도 그리했습니다. 방백들도 그리했습니다. 열조들도 그리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온 국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할 수밖에 없지요?


  이 시간 우리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섯 가지 이유들을 되새겨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범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삶이 곧 범죄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여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들과 똑같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둘째로 우리의 마음은 바르게 되어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패역입니다.


  셋째로 행여 행악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을 지금도 은밀한 가운데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속히 악한 행위에서 떠나십시다.


  넷째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잘 지키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결코 저버리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인 우리를 지금까지 자신의 눈동자처럼 늘 지키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의 걸음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늘 그 사랑 안에서 살면서 딴 길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할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지막 여섯째로 지금도 하나님은 그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과연 우리는 그 말씀을 진지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을 읽을 때나,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 말씀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언제나 진지하게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기도할 때도 무턱대고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묵상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먼저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진지한 마음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오늘 이 하루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결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제93강 축복의 길로 갑시다(9:7~11)  

 
9:7~11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니엘은 계속하여 자신과 민족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7절 제일 끝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8절 끝 부분을 보세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9절 끝 부분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10절 끝 부분 말씀입니다.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11절 끝 부분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다니엘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서 회개의 깊은 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이미 200년 전에 이미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받아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제는 유다 백성들도 범죄한 연고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께는 공의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징계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가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에는 수욕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방 나라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북방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방 유다의 백성들은 그보다 더 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범하였음이니이다."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던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축복의 땅에서 오래 살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연고로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심은 그대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8절에서 다니엘은 똑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를 망라한 온 백성이 수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말을 통해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깊은 회개의 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하나님께 자신과 민족을 위해서 감히 용기를 내어 기도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입니까?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원문에는 "긍휼"과 "용서하심"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쓰여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은 풍성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긍휼히 여기십니다. 심히도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주홍빛보다 붉다할지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흰 눈보다도 더 희게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하나님은 그 종들, 곧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전하는 율법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다." 설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권위를 인정했다하더라도, 그들은 진지한 자세로 말씀을 받으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지 못했습니다. 세상 소리를 듣느라고 바빠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이 세우신 법, 곧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할텐데, 그들은 율법에 반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셈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2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평안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들에게는 저주가 내려서 그들에게 약속된 땅이지만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남을 입고 말 것입니다." 그 맹세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축복의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앞길에도 축복의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축복의 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이 형통합니다.

 

  그러나 저주의 길은 하나님이 떠나신 길입니다. 그 길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축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신28:1∼14에 기록된 모든 복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제94강 말씀에 순종합시다(9:12~14)  

  9:12~14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찬양과 회개와 간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여기서 말하는 큰 재앙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며, 그로 인해 예루살렘이 칠십 년 동안 황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재앙이 임했습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의 범사가 형통케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들에게는 복 대신에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임할 저주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들의 공격을 받아 그 땅에서 길이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습니다. 그 결과 저들에게는 큰 재앙이 임했습니다. 축복의 땅을 대적에게 내어주고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12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시겠습니다.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여기서 재판관은 나라의 방백들, 즉 나라의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에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축복의 땅에서 오래도록 형통한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그 땅에서 쫓겨나는 큰 재앙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2절 끝 부분입니다.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2절 말씀의 끝 부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예루살렘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는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고, 사람이 살  수도 없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황폐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2절 첫 부분에서도 재앙이라는 단어 앞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모세의 율법에 해당되는 신28:15∼68에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범죄하면, 그들에게는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뭄, 기근, 염병 등 여러 가지 재앙들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대적의 공격을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나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그 모든 재앙이 급기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저들을 치셨습니다. 때로는 가뭄으로, 때로는 기근으로, 때로는 질병으로 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지진으로 치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저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3절 하반부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지금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죄악을 떠나고"입니다. 먼저 지금까지 저질러오던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죄악된 길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지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 동안 범죄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자복하면서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도 받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온전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참된 회개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 14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가뭄으로 치시기도 하시고, 기근으로 치시기도 하시고, 염병으로 치시기도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대적을 들어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쳐서 멸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고 예루살렘은 황무해졌습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조금도 틀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행한 그대로를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재앙이 임한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그들은 멸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복을 내려 주시고 우리의 걸음걸음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기록된 대로 이런 저런 징계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앞에는 행위의 책이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그 책에 빠짐없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고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건전하고, 성결하며, 깨끗한 생각들로 가득 채우기 바랍니다. 말 한 마디라도 신중하게 조심해서 합시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갑시다.


  제가 어제 어떤 책에서 읽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 교회의 교육관이 너무 오래 되어 낡았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교육관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직회에서 이것을 결정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으신 장로님 한 분이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한다고 반대했습니다. 결국은 그 장로님 때문에 제직회에서 그 뜻이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장로님이 그만 심장마비에 걸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장로님의 말 그대로 눈에 흙이 들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뒤에 그 교회는 교육관을 새롭게 잘 지어서 자녀들 교육을 훌륭하게 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말을 하면 하나님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또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제직들이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하도록 정했습니다. 기껏해야 몇 달에 한 번 기도의 순서가 돌아올 것입니다. 집이 멀더라도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정 새벽에 오기가 힘들면 그 전날 교회에서 철야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무슨 심통이 나셨는지 자기는 도저히 못하겠으니까 순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사무실로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며칠이 지난 뒤에 그만 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원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 한 마디라도 하나님의 뜻에 거역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이지 "아니오"라는 말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할만 하니까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하실 때는 아멘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우리가 주를 위해서 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언제나 예"라고 대답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제95강 기도의 근거(9:15~19)  

  9:15~19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찬양이고, 둘째는 회개, 셋째는 간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 세번째 부분인 간구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했던 애굽 땅에서 강한 손으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손으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습니다. 그 강하신 손으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또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강하신 손으로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열조에게 계속해서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지금 다니엘이 본문에서 그 옛날의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우리의 열조에게 그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옵소서. 우리는 지금 약속하신 땅에서 쫓겨나서 이와 같이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리라고 하신 그 땅에 속히 우리가 되돌아가게 하옵소서." 이런 뜻으로 다니엘은 하나님께 출애굽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출애굽 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명성을 얻게 되셨습니까?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요, 살아 계셔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와 같은 명성을 얻게 되셨을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열조에게 약속하셨던 땅에 대한 축복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따라서 죄 값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 값을 충분하게 받았다면, 이제는 주의 분노를 그만 멈추어달라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값을 받을 만큼 다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고통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의로운 일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40:1-2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자기들의 죄 값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칠십 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했으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겠느냐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예루살렘을 무엇이라고 묘사를 했습니까? "주의 성"이라고 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서 있는 시온산을 "주의 거룩한 산"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황무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니까 이제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거두어달라는 간구입니다.


  16절 끝 부분입니다.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범죄한 연고로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예루살렘은 황무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결국 하나님의 도성이요,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 사람들이 큰 재앙을 당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신이고, 또 자기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예루살렘도 황무한 채로 그대로 내버려두는 힘이 없는 신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수치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은연중에 말하면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다니엘이 16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이어서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한편 다니엘은 4절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높였습니까?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 할 주 하나님."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우리는 낮아져야 하겠습니다.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기도는 넓은 의미이고, 간구는 좁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의 기도에서 본 것처럼 기도에는 찬양,  회개, 간구가 포함됩니다. 많은 경우에 감사도 포함됩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한편 간구는 특별한 제목으로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황폐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누구를 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까? "주를 위하여." 지금 이방 나라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보고서는 무엇이라고 비웃고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보다도 더 힘이 없는 무능한 신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황폐해진 주의 성소를 곧 다시금 재건해 주셔야 되지 않겠느냐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좀 자세히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다니엘 자신이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를 위해 어떻게 했었습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의 기도에 귀를 좀 기울여 들어달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 조롱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을 바랐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능한 신이다. 우리가 믿는 바벨론의 신보다도 능력 없는 신이다." 이방인들의 이 조롱 소리도 들어보시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아뢰고 있습니까?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종살이를 해왔습니다. 그 동안에 전연 예루살렘 성과 그 안에 있는 성전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뜨시고 그 황폐된 상황을 좀 자세히 보아달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예루살렘 성을 세 번 공격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가 수산궁에 있을 때, 조국을 다녀온 사람이 예루살렘 성의 황폐된 모습을 그에게 이야기해 줄 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황폐한 모습이 너무나도 비참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18절 중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의롭지 못했습니다. 불의할 뿐이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될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까?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하나님의 큰 긍휼, 무한하신 긍휼을 바라보며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마지막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이 때는 다니엘이 그의 벅차 오르는 가슴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19절에는 "주여"라고 하는 말이 몇 번 나옵니까? 세 번 나옵니다. 흐느끼면서 드리는 기도이니까 문장도 간단합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주님의 크신 긍휼하심 밖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주여 들으소서."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긍휼하심으로 자기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주여 용서하소서." 비록 자기들의 죄악이 너무나 막중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용서하심으로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의 포로 생활이 끝나게 하시고, 또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지체치 마옵소서." 하나님께서 징계하기로 작정하셨던 칠십 년이 이제는 다 지나갔으니까, 더 이상 지체치 마시라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택하신 백성들에게 회복의 역사를 속히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두 가지에 근거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다니엘은 감히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또 예루살렘도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지금 당하고 있는 수욕을 씻어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감히 내놓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오늘 이 하루 동안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잘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행여라도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하지 않도록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오늘도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충만케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7) 제96강 은총을 입은 자(9:20~23)  

   9:20-23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20∼27절 말씀까지 계속 되어 집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다니엘은 어떻게 기도를 했습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과 민족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곤궁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 및 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내 죄와." 먼저 다니엘은 자기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니엘서 6장에 보면 다니엘은 메대 사람 다리오 왕 때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두 총리와 방백들 가운데 몇 사람이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해서 그를 엿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아무런 틈과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다니엘은 의롭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자백했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르게 살아온 다니엘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놓고 볼 때에 자기도 역시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정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대신 자복했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적인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하나님께 간구를 했습니다.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다니엘은 하나님께 시온 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그러니까 기도하던 바로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21절 이후의 말씀이 그때에 이루어진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아직도 다니엘이 기도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다니엘이 19절에서 무엇이라고 기도를 했습니까?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과연 하나님은 지체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할 때부터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다니엘은 천사 가브리엘을 가리켜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천사를 사람이라고 칭했을까요?


  8:15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사람 모양 같은 것이 내 앞에 섰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천사 가브리엘이 사람의 모습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빨리 날아서." 사람은 날 수가 없지만,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하기 위해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날아왔습니다.

 

  그것이 언제였습니까?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을 하던 바벨론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성전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다니엘은 제사를 드리는 시간을 기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저녁 제사 시간은 오후 세 시였습니다. 오후 세 시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시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단번에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천사 가브리엘은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에 다니엘에게 날아왔습니다.


  22절 말씀에서는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날아온 목적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다니엘은 7장에서 네 짐승에 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8장에서는 수양과 수염소에 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몇 백 년 뒤에 되어질 예언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명석한 다니엘일지라도 그것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서 날아왔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이상들이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혜와 총명을 받아야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기도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그때가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이미 하나님은 다니엘의 간절한 마음을 아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이 19절에서 "지체치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던 대로 하나님은 지체치 아니하셨습니다.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니엘에게 날아온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백부장 고넬료가 기도하다가 이상 가운데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고넬료야!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너는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서 그곳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오도록 해라."

 

  또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쇠사슬을 풀어주고, 옥문도 열어주었습니다. 이렇듯 성도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응답으로 천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천사보다도 훨씬 더 귀하신 분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시니까요. 성삼위 가운데 한 위이신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늘 내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도 해 주시고, 또 우리가 힘들 때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천사가 따로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2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은혜 은(恩)에 사랑 총(寵)입니다. 다니엘은 크게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또 사도 요한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다니엘의 나이가 80대가 훨씬 넘었습니다. 외모로 보아서는 아무런 볼품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금식까지 했습니다. 많이 말랐을 것입니다. 옷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또 몸에는 재를 무릅쓰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외모에는 전혀 볼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께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에 나오시면서 여자 분들은 화장도 제대로 못하셨지요? 아마 남자분들 가운데는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신 분들도 없지 않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깨우면서 달려나온 우리의 작은 정성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크게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시는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그 민족의 앞날에 대한 이상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 시간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은총을 입은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가지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이 시간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모두 드릴 수 있는 복된 아침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제97강 칠십 이레가 지나면(9:24)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칠십 이레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에 속합니다. 그러나 22절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칠십 이레의 예언을 깨닫게 하시려고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네 백성과." 다니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들입니다. 다니엘은 7장과 8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상들을 보았습니다.

 

  7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네 짐승들을 보았습니다. 사자와 같이 생긴 짐승, 곰 같이 생긴 짐승, 표범 같이 생긴 짐승,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무섭게 생긴 짐승을 보았습니다.  이 네 짐승은 세상 나라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메대와 바사, 헬라,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이들 네 나라들은 모두 이방 나라들입니다.

 

  8장에서는 다니엘이 두 짐승을 보았습니다. 수양과 수염소입니다. 수양은 메대와 바사이고, 수염소는 헬라 제국을 의미했습니다. 역시 이방 나라에 대한 이상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 나타난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유대인들을 위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여기서 "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에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으니까, 이곳을 "거룩한"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한 것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한 것임을 먼저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이레라고 하는 말은 우리 나라 말로 무슨 뜻입니까? 찬송가 56장에 "지난 이레 동안에 예수 인도했으니"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레는 칠일, 곧 한 주간을 뜻합니다.

 

  그래서 칠십 이레라고 하면 마치 칠십 주를 뜻하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레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래 뜻은 단순히 일곱이라는 수치를 가리킬 뿐입니다. 칠십 번이 일곱이면 모두 몇입니까? 사백 구십입니다. 그러니까 사백 구십 일이 될 수도 있고, 사백 구십 주가 될 수도 있고, 사백 구십 달이 될 수도 있으며, 사백 구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서 사백 구십 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됩니다.


  본문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하게 된 시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밤에 잠이 안 와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까?


  9:2의 말씀을 보십시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서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칠십 년이었습니까? 오십 년이나 백 년으로 하지 않고, 칠십 년으로 정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을 방황했습니다.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사십 일 동안 그곳을 정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인 열 명은 이스라엘 회중에게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벌로 그들이 정탐했던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 것도 그 수치에 무엇인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겠습니까?


  대하36:20-21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칠십 년을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땅은 황무해서 "안식년을 누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안식년은 토지를 육 년 동안 갈고 일년 동안 쉬는 것을 뜻합니다.


  레25:1∼4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넘어가서 레26:34∼3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육 년을 경작하고 일년을 쉬도록 되어 있는 안식년의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레26:43입니다.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들이 살았던 가나안 땅은 안식을 누린 것입니다.

 

  그러면 칠십 년 동안 안식을 한꺼번에 누린 것이 몇 년의 기간에 대한 안식입니까? 사백 구십 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그동안 칠십 이레, 즉 사백 구십 년이 흐르기까지 안식의 규례를 지키지 못해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칠십 년 동안 이스라엘 땅이 안식을 누리도록 황무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오늘 본문에서 과거의 그 기간에 해당되는 만큼, 칠십 이레로 이스라엘의 앞날에 대한 기한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칠십 년이 있고, 그 앞에 칠십 이레와 그 뒤에 칠십 이레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칠십 이레는 사백 구십 년으로 해석을 해야 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칠십 이레의 기한, 즉 사백 구십 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여섯 가지를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세 가지의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그 대신 세 가지의 긍정적인 요소가 오게 됩니다.

 

  우선 이것을 설명하기에 앞서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을 받은 지도 이미 이천 년이 더 흘렀건만, 어떻게 사백 구십 년으로 모든 역사가 설명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2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칠십 이레는 세 시기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5절에 있는 대로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 이 둘을 합치면 육십 구 이레가 지나갑니다. 육십 구 이레가 지나가고 나면, 27절 말씀에 있는 대로 마지막 한 이레가 나옵니다.

 

  그러나 26절 말씀에 보면 육십 구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계산되지 않은 중간 부분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중간 부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차차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나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세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집니다.


 

   첫째는 "허물이 그치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나면, 저들은 자신들이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죄가 끝나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통해서 다른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히려 이방 나라들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방신들을 문란할 정도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칠십 이레가 지나가면 이러한 죄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셋째는 "죄악이 용서되며"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행해온 모든 불의한 일들도 사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했으니까 죄악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다 영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칠십 이레가 지나면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그 대신 긍정적인 세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불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입니다. 이상과 예언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도 그때는 성취될 것입니다.

 

      셋째는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옛날에 기름부음을 받는 직분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인정치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나면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받들어 섬기면서 그 앞에 저들의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상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은 칠십 이레 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이 마쳤습니다. 죄도 끝났습니다. 죄악도 용서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매순간마다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경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감사와 감격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제98강 마지막을 사는 지혜(9:25~26)  

  9:25~26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천사 가브리엘은 먼저 다니엘에게 당부했습니다. 주의를 집중해서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듣고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일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 가운데 주로 두 가지를 간구했습니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칠십 년 동안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재건토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니까, 다니엘은 먼저 주의를 집중해서 들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주어집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칠십 이레가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입니까?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칠십 이레가 아직까지는 시작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이 말씀을 받았을 때는 주전 500년대였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중건을 명할 때가 주전 400년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일 백년 뒤에 칠십 이레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공생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때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합치면 육십 구 이레입니다. 이것은 몇 년을 뜻하지요? 사백 팔십 삼년을 뜻합니다.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BC 465~425 재위, 40년간)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가 재위 20년 째인 주전 445년[느 1:1, 2:1]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삼십 세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30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기간을 합치면 대략 육십 구 이레가 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일곱 이레 동안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면서 겪었던 많은 곤란을 볼 수 있습니다. 도비야, 산발랏을 위시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첫 일곱 이레가 지났을 때,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드디어 중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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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여기서 "거리"는 사람이 사는 주거지 사이로 난 길을 가리킵니다. 도시가 다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해자"는 도랑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는 겨울철에만 비가 옵니다. 더운 여름철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건조합니다. 그래서 수로를 만들어서 비가 올 때 한 곳에 모아서 그것으로 비가 오지 않을 때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의 모습을 이제는 제대로 갖추었다는 말씀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25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고 난 뒤에 육십 이 이레가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바로 얼마 뒤인 3년 뒤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또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승천을 가리키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늘 나라로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후손이 그 피 값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대로 죄 값을 받은 것입니다.

 

  주후 70 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와 그의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시켰습니다. "그의 종말은." 여기서의 "그"는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로마의 장군 티투스와 그의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황폐해지도록 철저하게 파괴를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오백 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살육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마24:1-2에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예고하셨습니다.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헤롯 성전을 가리키면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감탄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다시금 황폐해짐에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에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스라엘은 다시금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남은 한 이레가 곧 시작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십 구 이레부터 마지막 한 이레까지 그 중간에 공백기가 있습니다. 그 공백기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며, 부활하신 뒤에 승천하시며, 또 다시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파괴되는 것 등 이런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공백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7절에서 말씀하는 마지막 한 이레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벧전4:7-11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를 우리가 눈앞에 두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베드로는 세 가지 방면으로 우리 자신들을 늘 점검해 볼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7절 말씀에 있는 대로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둘째로 이웃을 향하여 점검해 볼 것이 있습니다. 8절과 9절 말씀에 있는 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향해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10절 말씀에 있는 대로 봉사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깨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서는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충성스럽게 봉사해야 합니다.

 

  기도, 사랑, 봉사의 세 가지를 늘 점검하면서 사는 것이 마지막을 대비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11절 끝 부분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 위함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를 하는 것도, 내 이름과 명예가 높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시고, 이웃에게 많은 사랑도 베풀어 주시고,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제99강 마지막 한 이레(9:27)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서에 나타난 칠십 이레는 세 시기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첫 일곱 이레,

      그 다음으로 육십 이 이레,

      그리고 나서 마지막 한 이레입니다.

 

  첫 일곱 이레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예루살렘이 중건[아닥사스다 왕 재위 20년, BC 445년]됩니다.

 

  25절에 기록된 대로 그때는 곤란한 때였습니다. 느헤미야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때, 반대자들의 핍박을 많이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 일곱 이레 동안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임금에 의해서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은 다시 중건이 되었습니다.

 

  그 뒤 육십 이 이레가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이 곧 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십니다.


  육십 이 이레가 지나고 마지막 한 이레가 될 때까지의 공백기에, 26절에 있는 말씀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끊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후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땅에 사십 일을 계시다가 구름을 타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그 죄 값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읍과 성소가 로마의 장군 티투스와 그의 군인들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이레가 27절에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 동안에 일어날 사건이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입니다. 여기에서의 그는, 작은 뿔의 실체인 적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많은 유대인들과 더불어서 한 이레, 곧 칠년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입니다. 이레의 절반은 얼마입니까? 삼년 반입니다. 삼년 반이 지나고 나면, 적그리스도는 언약을 파기하고서 유대인들을 핍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마치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게 된다는입니다.

 

   그러나 종국은 어떻게 됩니까?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적그리스도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끝나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에 되어질 첫째 사건이 무엇입니까? 적그리스도와 유대인들 사이에 언약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그"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한 이레 동안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칠십 이레의 예언은 24절에 있는 말씀처럼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많은 사람"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적그리스도는 장차 많은 유대인들과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8:23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만, 적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는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는 궤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도 미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유대인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에 기습을 했습니다. 그는 십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을 죽이고, 오만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 실체가 되는 적그리스도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먼저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아마도 적그리스도는 종교의 자유를 그 언약 속에서 보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심하고 그 언약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곧 자신의 본색을 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로 일어날 일입니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삼 년 반 동안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폭풍전야의 평온함일 뿐입니다. 그 이레의 절반이 되면, 적그리스도의 마각이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제사와 예물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것이니까, 첫 이레 즉 삼 년 반 동안에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이 되며, 또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와 예물이 드려진 것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 년 반이 지나고 나면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일어날 일은 무엇입니까? "또 흉포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가증스러운 것은 우상이나 이방 신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의 숭배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후2:3-4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마지막 한 이레의 후반에 가면,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이 하나님 노릇을 대신 하려고 들게 될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또 흉포하여 가증스러운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날개를 의지해서 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이니까요. 보통 날개라고 하면, 몸통이 아닌 어느 한쪽 부분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가 장차 성전의 한쪽 부분에 자기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숭배토록 할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옛날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 모양의 금 신상을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하도록 만든 것과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의 지붕 위에 십자가가 있듯이, 장차 적그리스도가 성전 꼭대기에 날개가 달린 자기 모양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천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도록 할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적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숭배를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4:15∼17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그러면 적그리스도의 핍박이 영원토록 계속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해진 때 안에, 즉 삼 년 반 동안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만 끝나고 나면 예수님은 구름 타고 다시 오십니다.


  마24:29-31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우리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날, 믿는 자들은 홀연히 그 몸이 변화해서 공중에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악인들은 그들을 위해서 예비된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 던지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먼저 이미 정해 놓은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입니다. 황폐케 하는 자, 곧 적그리스도는 무한정 택한 백성을 괴롭힐 수는 없습니다. 정하신 기간 안에서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차면, 적그리스도는 그를 추종하는 자와 함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믿음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중에서 예수님을 반갑게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주와 더불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살전4:13∼18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 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시간 우리 주님의 위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시련이든지,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두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까? 그저 골짜기에 가리어서, 앞에 있는 산모퉁이에 가리어서 그 너머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우리 눈앞에는 우리가 짐작하지도 못했던 축복과 영광이 우리를 반겨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시고 믿음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고, 조금만 더 인내하셔서, 시련 너머에 있는 찬란한 영광을 다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