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5장 벨사살의 주연<박상훈 목사>
59 | 제58강 그날 밤에(5:29-31) | 관리자 | 2006.05.21 | 20 | ||||||
58 | 제57강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25-28) | 관리자 | 2006.05.21 | 23 | ||||||
57 | 제56강 벨사살을 질책함(5:22-24) 5:22-24 | 관리자 | 2006.05.21 | 21 | ||||||
56 | 제55강 과거를 기억하라(5:18-21) | 관리자 | 2006.05.21 | 23 | ||||||
55 | 제54강 왕의 예물을 거절함(5:17) | 관리자 | 2006.05.21 | 21 | ||||||
54 | 제53강 벨사살이 다니엘을 멸시함(5:13-16) | 관리자 | 2006.05.21 | 25 | ||||||
53 | 제52강 다니엘이 벨사살에게 나아옴(5:13-16) | 관리자 | 2006.05.21 | 26 | ||||||
52 | 제51강 다니엘을 부르소서(5:10-12) | 관리자 | 2006.05.21 | 28 | ||||||
51 | 제50강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는 술사들(5:7-9) | 관리자 | 2006.05.21 | 29 | ||||||
50 | 제49강 분벽에 나타난 손가락(5:5-9) | 관리자 | 2006.05.21 | 27 | ||||||
49 | 제48강 거룩한 기명을 더럽힘(5:1-4) | 관리자 | 2006.05.21 | 28 | ||||||
48 | 제47강 벨사살 왕의 잔치(5:1-4) | 관리자 | 2006.05.21 |
제47강 벨사살 왕의 잔치(5:1-4)
5:1-4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옛날에 꿈에서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신상은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었고, 두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어 있었고, 배와 넙적다리는 놋으로 되어 있었고, 종아리와 발가락의 일부는 철, 발가락의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장래 일을 계시해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은 어디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까? 바벨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은은 팔이 두 개이듯이 메대와 바사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놋은 헬라 제국, 그 다음에 철은 로마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나서 메대 바사가 서고, 메대 바사가 멸망한 후에는 헬라 제국이 서고, 헬라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로마 제국이 설 것을 미리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나라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그 꿈대로 바벨론이 어떻게 해서 멸망당했는지,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어떻게 메대와 바사가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다니엘서 5장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의 임금은 누구였습니까? 벨사살 왕(재위 BC 553~539, 14년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4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죽고 나서 23년 있다가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되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때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15세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43년을 통치했습니다. 죽고 나서 23년 있다가 바벨론이 멸망했습니다. 그러면 이 숫자들을 다 합하면 얼마가 됩니까? 15+43+23=81입니다. 그때 다니엘의 나이는 81세였습니다. 이미 다니엘은 공직에서 물러나서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죽고 나서 23년 뒤에 바벨론이 멸망했는데 그 사이에 왕들이 몇 명이 더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미쳤을 때는 그의 아들 아벨말둑이라는 사람이 왕좌에서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벨말둑은 자기의 처남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벨사살 왕과 느부갓네살 왕은 어떤 관계였겠습니까? 2절을 보니까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언뜻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은 벨사살 왕의 아버지고, 벨사살 임금은 느부갓네살 임금의 아들로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옛날 중근동 지방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과 지금의 자신들과 수천 년의 차이가 있지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 예수님도 다윗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년수의 차이가 있지만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것은 선조를 말합니다. 실제로는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임금의 외손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딸이 벨사살 임금의 어머니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벨사살의 선조이지만 부친,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요즘으로 말하면 김영삼 대통령의 아버지가 노태우도 될 수 있고, 전두환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성경을 보겠습니다.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일천 명이 모인 잔치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잔치였겠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바벨론 도성이 발굴되었는데, 일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연회장이 여러 곳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벨론은 바사 나라에 멸망당했습니다. 에스더 1장을 보면 바사 나라의 임금이었던 아하수에로가 잔치를 베풀었는데 며칠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고 나옵니까? 180일 동안 계속 잔치를 했습니다. 6개월 동안, 반년 동안이나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의하면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 결혼 잔치에 일만 명을 초대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벨사살이 일천 명을 모이게 한 것은 그다지 큰 잔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 자기 신하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했는데, 지금 바벨론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벨사살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바벨론 도성 밖에는 누가 와 있습니까? 5:30∼31을 보십시오.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메대와 바사 사람이 지금 바벨론 성 밖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습니다만 바벨론 도성은 외벽과 내벽으로 된 큰 성이었습니다. 든든한 성이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메대와 바사 사람들이 큰 강 유브라데 강의 물줄기를 끌어들여서 물의 힘을 이용해서 바벨론 성을 무너뜨리려고 물길을 파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신하 일천 명을 초청해서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을 "괜찮아, 일없어!" 하고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호기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무릎 꿇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텐데, 벨사살 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술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3:1을 보면 벨사살 임금의 부친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이 큰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낙성 예식에 참석하라고 신하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수많은 귀인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자기 할아버지 느부갓네살이 교만에 빠져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멸시했다가, 결국은 벌을 받고 정신병을 7년 동안 앓았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할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아픔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자기 할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다.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보통 임금 같으면 신변의 안전 때문에 대중 앞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연회를 베풀어도 자기 몸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을 텐데, 일천 명 앞에 모습을 당당히 드러냈습니다. 연회장 앞에 높은 단상을 놓고 벨사살 임금이 좌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자!"고 하면서 축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벨사살 왕이 직접 연회를 주관하고 앞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술을 마시니라"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이 말은 분사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분사형이라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한 잔 마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또 마시는 것입니다. 술을 계속 마시다가 벨사살 임금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술이 언제부터 나옵니까? 누구 때 술이 나옵니까? 노아 때 나오지요? 노아가 홍수 뒤에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노아가 낮잠을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노아가 낮잠을 자는데, 악한 마귀가 와서 노아가 가꾼 포도원에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먼저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는 사자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는 돼지 피를 뿌리고, 제일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그 덕분인지 짐승들의 피를 거름으로 해서 포도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양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사람이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면 양순해지고 차분해집니다. 그러다가 세 잔 네 잔 들어가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십니다. 사자처럼 무서운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성전에서 쓰는 금 은 그릇을 가져다가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돼지 피를 뿌렸기 때문에, 더 마시면 돼지처럼 미련해집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원숭이가 별별 해괴한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술이 꼭지까지 취하면 전봇대를 붙들고 씨름을 하지 않나, 아무데나 싸지 않나, 별별 희한한 짓을 다 합니다. 잠언을 한번 찾아보시겠습니다. 잠언 20:1을 찾아봅니다. 넘어가서 잠 23:29 이하에서 술 취한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 취한 사람의 모습을 잘 묘사해주는 말씀인 줄 압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술을 즐기는 분은 안 계신 줄 알지만, 우리에게 어떤 걱정스런 문제가 있을 때,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이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더 아프고, 결국은 더 파괴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난관이 있을수록 누구를 더욱 의지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오늘도 문제가 있으면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께 다 아뢰어서 깨끗하게 해결받고 오늘 하루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제48강 거룩한 기명을 더럽힘(5:1-4)
5:1-4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바벨론의 마지막이 다가왔습니다. 바벨론 도성의 성 밖에는 지금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바벨론 도성의 성벽 코 앞까지 와 있습니다. 그것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유프라테스의 강물을 이용해서 바벨론 도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동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불안과 근심과 초조에 싸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바벨론을 다스리고 있던 벨사살 임금이 큰 술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신하들, 귀인들 일천 명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천 명 앞에서 벨사살 임금이 호기를 부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는 것과 명하는 것이 관련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서 속삭이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큰 목소리로 일천 명 앞에서 술의 힘을 빌려서, 술기운에 명했습니다. 무엇이라고 명했는지 보십시다.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느부갓네살 임금과 벨사살 왕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어제 설명했듯이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외손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의 통치자는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라는 왕이었습니다. 이 나보니두스는 한 일 년 동안 군사들을 이끌고 원정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원정길을 떠났던 나보니두스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패했습니다. 메대와 바사 연합군은 나보니두스 군을 격퇴하고 나서 그 기세를 몰아서 바벨론의 수도 바벨론 도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쳐들어온 것입니다. 조금 넘어가서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다시 2절을 보시겠습니다."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1:2을 보시겠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그것을, 지금 벨사살이 가지고 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왜 그랬을까요?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이 말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한 말입니다.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에브라임 지파를 비롯한 열 지파가 여로보암에게로 가 버렸습니다. 왜 르호보암이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자기가 부친 솔로몬보다 더 용기 있고 더 강하고 더 권세가 크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벨사살은 막강했던 느부갓네살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더 권세 있는 사람이다. 느부갓네살은 용기가 없어서 겁이 많아서 예루살렘 성에서 가져온 기명들을 신의 보고에 두었지만 나는 얼마든지 거기에 술을 부어 마실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언제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게 함락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신하들 앞에서 자기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호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취하여온 금은 기명들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까? 신성모독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왕상 11:3에 보면 솔로몬에게 왕후가 몇 명 있었습니까? 700명입니다. 빈궁들은 몇 명이었습니까? 300명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천 명입니다. 그러면 큰 베벨론 성 안에 벨사살 임금의 왕후와 빈궁들이 그만큼도 없었겠습니까? 왕후와 빈궁들, 여자들이 몇 명입니까? 일천 명이고, 귀인들 남자들이 몇 명입니까? 일천 명이 모였습니다. 술이 있고, 음식이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완전히 주지육림 속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서 가지고 온 기명에 술을 퍼마셨습니다. 음란한 소리들이 오갔을 것입니다. 잡담 소리, 잔 부딪치는 소리, 술 취한 사람들의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왁자지껄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술에 취했으니까 거룩한 기명들을 땅에 떨어뜨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벌받아 마땅합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기록한 다니엘의 입장에서 그것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그릇들이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전인 성소에서 취하여 온 기명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쓰는 거룩한 그릇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벨사살 임금의 행위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벨사살은 금은 기명을 가져 오라고 했는데 부하들은 주로 무엇을 가져왔습니까? 금 기명들을 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왕이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과 더불어 술을 마셨습니다. 왕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왕이 마시고, 왕을 따라서 무리가 술을 마시면서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고 했습니다. 큰 연회장 앞에는 바벨론 신들이 놓여 있습니다. 금으로 만들고, 은으로 만들고, 동으로 만들고, 철로 만들고, 목으로 만들고, 석으로 만든 신들이 서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벨사살 임금은 단상 높은 곳에 앉아서 술 파티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건배합시다! 금으로 만든 우리 신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이러면서 한 잔 마셨을 것입니다. 또 잡담을 하다가 " 자 여러분, 술잔을 드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금 기명들입니다. "술을 부으세요. 은으로 만든 우리 신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위하여!" 그 다음에는 동으로 만든 우리 신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철로 만든 우리 신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나무로 만든 우리 신을 위해서, 돌로 만든 우리 신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왜 벨사살 임금이 그와 같은 일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우리 바벨론 신은 이스라엘 신보다, 이 세상의 어떠한 신보다도 더 낫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믿는 우리의 신, 바벨론 신이 우리를 이 난국에서 건지리라, 보호해 주리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2절을 보시겠습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그러니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상 2:30에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벨사살 임금이 하나님을 멸시할 때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겸손히 머리 숙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 아침 괴롭고 답답한 모든 것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면서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평강으로 여러분 마음을 채우시고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하루를 시작하시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치리자가 누구입니까?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사위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실제적인 치리자입니다. 둘째 치리자는 누구입니까? 벨사살입니다. 아들에게 바벨론 성을 다스리라고 맡기고 실제 왕은 전쟁터에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셋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유다 왕국을 함락시키고 전리품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쓰는 거룩한 그릇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한 그릇들인 줄 알아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것을 자기 신의 보물을 두는 창고에 잘 모셔두었습니다.
2절 끝 부분을 보세요.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귀인들이 몇 명이었습니까? 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후들과 빈궁들"이라고 했습니다. 왕후는 왕의 아내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빈궁들은 그 밑에 첩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후가 지위가 높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고 겸손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높였습니다. 계속해서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제49강 분벽에 나타난 손가락(5:5-9)
5:5-9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벨사살의 잔치'(캔버스에 유채, 1630년대 작품, 164x204cm,런던 국립미술관 소장)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거짓 신을 숭배한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한다는 예언이 왕국 벽위에 새겨지는 장면이다. 화려한 색채 감각과 동적인 구도, 극적인 명암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렘브란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바벨론을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바벨론은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바벨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마땅합니까?
그 옛날 니느웨 도성처럼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면서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면서 회개의 운동을 일으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불쌍히 여겨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귀족 일천 명을 초대했습니다. 술을 마셨습니다. 여자들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그 옛날 하나님의 성전에서 탈취해 와서 바벨론 신의 보고에 두었던 거룩한 기명들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거기에 술을 부어서 마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을 이용해서 바벨론의 헛된 신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결국 벨사살 왕과 바벨론 사람들은 심은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왕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지 못하고 사시는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독했을 때 결국 패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을 벌하시는 심판의 장면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라는 말입니다.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에, 또는 그들이 서로가 서로의 손을 끼고서 잠자리에 들어갔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라는 말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장래의 일을 꿈속에서 계시했던 것처럼, 얼마든지 벨사살 왕의 꿈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사람의 손가락들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벨사살 왕 혼자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따라서 같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글을 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또 보시기 바랍니다. "왕궁 촛대 맞은편"이라고 했습니다. 촛대가 있고 그 맞은편 벽이기 때문에 환한 곳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환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분벽에"라고 했습니다. 색을 칠해 놓은 벽이 아니라, 하얗게 회칠해 놓은 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손가락이 나타나서 움직이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분명히 보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써놓은 글씨도 뚜렷하게 보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무엇을 했습니까? 글자를 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누가 그것을 보았다고 했습니까?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 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참여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벨사살 왕에게 있습니다. 왕이 술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 일천 명을 초대했습니다. 왕후와 빈궁들을 불러온 것도 왕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객기를 부리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취하여 온 금은 기명들을 가져오게 한 것이 벨사살 왕이었습니다. 또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명에 술을 부어서 바벨론의 헛된 신을 찬양토록 주도한 것도 역시 벨사살 임금이었습니다. 따라서 벨사살 왕이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또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6절의 말씀은 벨사살 왕이 보인 반응입니다. 6절을 보십니다.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동안 벨사살 왕은 마셨던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는 것을 보는 순간 낯빛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아마도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새하얗게 창백한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마 이런 반응도 보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가 찬양했던 우리 바벨론의 신들이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저렇게 사람의 손가락을 보내서 우리를 위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쓸 때 그것이 나쁜 징조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양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큰일났구나!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했더니 신이 내게 노했구나. 이제 내가 벌을 받게 되었구나. 그 옛날 내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고 자기를 높였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서 정신병에 걸렸던 것처럼 내가 이제는 당하게 되었구나." 이런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순간에는 쾌락이 옵니다. 즐겁습니다. 그러나 곧 양심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셔서 악한 죄에서 다 떠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마음이 떳떳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 편안하게 하루를 보낼 수가 있습니다. 절대 죄악 된 길에 들어서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6절을 계속해서 보십시다. 왕의 즐기던 빛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왕의 모든 용맹이 다 사라지고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번째 보니까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라고 했습니다. 관절이 힘없이, 연결 마디가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힘이 없으니까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번째로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고 했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을 때나 아주 무서운 일을 당했을 때에 무릎이 막 떨리지 않습니까?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벨사살이 어떻게 했습니까? 7절에 보니까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왕이 크게 소리하였다고 했습니다. 비명을 지른 것입니다. 두려움에 크게 소리를 질러서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바벨론 박사들을 다 불러서 그것을 물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벨사살 임금이 사실은 또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영적인 일에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이 됩니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사람 만나는 일에 너무 마음 바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보다도 참 하나님, 사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오늘 여러분이 하실 일들을 낱낱이 고하시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 문제, 또 여러분의 건강 문제, 그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빠른 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실수가 없습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꾀를 써서 누구누구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서 부탁을 하면 그것이 빠를 것 같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조용히 이 아침에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하나 하나 아뢰시면서, 하나님께 물어보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큰 평안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 아침 주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 받고 오늘도 주님의 손 붙들고 기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실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괴로우면, 양심의 가책이 있으면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 사실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눈이 밝아지니까 무화과 잎으로 자기들의 부끄러운 것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제50강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는 술사들(5:7-9)/다미엔 성자 예화
5:7-9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바벨론의 벨사살 임금에게 큰 위기가 임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왕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머리 숙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그렇치 못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했던 거룩한 기명들을 가져다가 거기다가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마음이 높아 있었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반대로 하나님의 것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줄 줄 아는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멸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들을 귀하게 사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벨사살 임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에, 바벨론의 헛된 신들,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행여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을 찬양하는 우리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벨사살 임금은 교만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오히려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술잔치를 베풀어놓고 귀족들 일천 명을 초대했습니다. 자기가 영광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 임금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충이 먹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도 내가 영광 받으려고 하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했다"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낮추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바벨론 박사들을 불러와서 두 가지를 요구를 했습니다. 첫째로,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이 글자를 먼저 읽으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자가 무슨 의미인지는 둘째치고 먼저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어야지요. 그 다음 두번째로,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마치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고 나서 "먼저 꿈을 말하고, 그 해석을 내게 말하라"고 했듯이 "먼저 글자를 읽고, 그리고 나서 그 해석을 내게 보여라"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다니엘이 그 글자를 읽었습니다. 뭐라고 읽었습니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아람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다니엘서도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람어를 읽고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박사들이 그 아람어를 읽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마 같은 아람어라도 글씨체가 조금 특이하게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똑같은 한자라도 초서체로 흘려 쓰면 보통 사람들이 읽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아람어라도 초서체로 흘려 써놓으면 보통 사람은 읽기 힘듭니다.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누구든지 가능케 하면 세 가지 특권을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자주옷을 입히고." 예나 지금이나 자주 색깔은 왕을 나타내는 색깔입니다. 왕의 색입니다. 동양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국 북경에 가면 옛날 왕들이 살던 성이 있습니다. 무슨 성이라고 합니까? 자금성이라고 합니다. 왕을 상징하는 색깔입니다. 자주옷을 입히겠다고 하는 것은 왕복을 입히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에스더 8:15을 보면 왕이 쓰는 금 면류관을 쓰고, 자주옷을 입고서, 즉 왕복을 입고 왕 앞에 나타날 때에 바사의 수산 성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누구입니까? 누가 자주옷을 입었습니까? 모르드개였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왕에게 권했었는데, 자기가 죽이고자 했던 모르드개가 자주옷을 입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요즘은 너나할것없이 다 금목걸이를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고, 아무리 권세가 크다 해도 금목걸이는 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하사한 사람, 왕이 드리워준 사람만 금목걸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41:42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 이야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서 그의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금사슬로 그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요셉입니다. 왕이 걸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사슬로 목에 두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영예입니다. 영광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일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다니엘서 5장에서는 바벨론 도성을 다스리는 왕이 벨사살 왕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벨사살 임금의 아버지 나보니두스라는 사람이 바벨론의 마지막 임금이었습니다. 이 나보니두스가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원정을 떠난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자기 아들 벨사살에게 바벨론 도성을 통치하도록 위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치리자는 사실 누구입니까?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실제 왕입니다. 그 다음 둘째 치리자는 누구입니까? 벨사살입니다. 그 다음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벨사살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소리겠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는 자가 하는 소리입니다. 그날 밤이면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마는데 셋째 치리자가 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주옷을 입고 금사슬을 건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이 지나면 끝인데 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딩 짓고, 돈 많이 벌고, 권세 있고,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여러분, 다미엔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다미엔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 하와이 옆에 있는 조그만 몰로카이 섬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 섬은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거기서 일평생 나환자를 돌보면서 보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환자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내서 자기 몸에 수혈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문둥병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다미엔은 나환자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다미엔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빈손으로 온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도 철저하게 남긴 것 하나 없이 빈 몸으로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큰 상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썼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남기려고 애를 쓰지 말고, 다미엔처럼 철저하게 빈 몸으로 갈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최대한 노력해서 더 많이 주를 위해서 쓰고 돌아갈 수 있는,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 큰 칭찬과 상을 받으시는 우리 승동의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을 보십시다.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벌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인데, 세상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이 됩니까?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에 따라 어려운 문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을 만난다고 해결이 됩니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박사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에 보니까 결과가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라고 했습니다. 더 크게 번민했다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라고 했는데 이제 믿었던 바벨론 박사들이 해결하지 못하니까 번민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사람을 믿으면 더 번민합니다. 꼭 낙심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해 주고, 용서해 줄 대상은 되지만, 사람을 믿으면 꼭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의지하고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6절에도 그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술을 마셔서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창백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바벨론 박사들이 들어왔을 때 얼굴의 빛이 본래의 색깔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박사들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던 박사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그의 낯빛이 다시 변하였습니다. 더 창백해졌습니다. 핏기가 사라졌습니다.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이제는 왕뿐만 아니라 거기에 참석한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틀림없이 바벨론 박사들이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박사들이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엄청나고 무섭고 두려운 일들이 생길 것이라 생각되어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 힘으로, 세상적인 방법에 의지해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51강 다니엘을 부르소서(5:10-12)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마음을 높였던 벨사살 임금을 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왕의 몸과 마음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7절을 보십니다. "왕이 크게 소리하여." 비명을 질렀습니다.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다 불러오게 했습니다.
5:10-12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10절 말씀입니다. "태후가." 왕의 살아 있는 어머니를 태후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태후의 이름을 리토크리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리토크리스는 벨사살 임금의 어머니인데, 그 당시 바벨론의 첫번째 치리자였던 나보니두스의 부인이고 느부갓네살 임금의 딸이었습니다.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을 아마 누군가가 태후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라고 했습니다. 급히 들어왔습니다. 5:30 말씀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누구나 언젠가는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가 자기의 마지막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벨사살은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는데 몰랐습니다. 벨사살도 몰랐고, 태후도 몰랐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탈무드에서 지혜자들이 말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최초의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그만큼 성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준비하면서 살아라."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지만 그후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사실 생각하면서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행여 내가 오늘 주님 앞에서 선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생각하면서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지혜로운 자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십시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포에 떨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왕의 나라에 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두 번째 꿈을 꾸었을 때의 4:8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또 4:9을 보십시다.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을 칭할 때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딸인 태후도 다니엘을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태후도 자기 아버지 느부갓네살 임금 때 다니엘이 주었던 그 강한 인상을 지금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이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본문을 계속해서 보십시다.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왕의 부친 때 있던 자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공직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얼마라고 했습니까? 81세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원년에 나이 15세에 끌려갔고 느부갓네살 임금이 43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합치면 58이 됩니다. 그 다음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죽고 난 뒤에 23년이 지난 후 벨사살 임금이 죽고 바벨론이 멸망당했습니다. 15+43+23=81입니다. 다니엘의 나이 81세였습니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은퇴할 나이였습니다. 그것보다도 왕이 바뀌면 보통 신하들도 다 바뀝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각료가 다 바뀌지 않습니까? 총리도 바뀌고, 장관도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왕이 바뀔 때 그 각료들도 다 바뀌는 것입니다. 다닐엘은 왕의 부친 때의 자로서,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해서 조용히 기도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지극한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에게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속에 거룩한 신들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태후가 다니엘의 능력을 무엇에 비유했습니까?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라고 했습니다. 신들의 지혜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을 높이 사서 그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의 어른으로, 박수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벨드사살은 바벨론식 이름이었고 다니엘은 히브리식 이름이었습니다. 실제로 다니엘에게 바벨론식으로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준 사람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아니라 누구였습니까? 1장에 보면 환관장이 바벨론 식 이름인 이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 다니엘"이라고 하면서 태후는 또다시 다니엘의 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마음이 민첩하다고 했습니다. 빠릿빠릿하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느리고 더딘 사람이 아니라 민첩하고 지식이 있어서 모든 유익한 정보를 다 가지고 있고, 또 총명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결과로 다니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로, "능히 꿈을 해석하며." 느부갓네살 임금의 두 가지 꿈을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둘째로, "은밀한 말을 밝히며." 원문대로 해석하면 수수께끼를 잘 푼다는 뜻입니다. 은밀한 말, 남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잘 밝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어려운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세 가지 면에서 나타난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태후가 벨사살 임금에게 무엇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다니엘이 지금 연회장에 있습니까? 다니엘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도성의 틀림없는 귀인이었습니다. 박수장이었습니다. 총리대신이었습니다. 그만큼 높았던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벨사살 임금도 큰 잔치를 베풀고 귀인들을 초청할 때 다니엘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술잔치를 베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짓밟고 우상들을 찬양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다니엘이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벨사살 임금보다도 훨씬 더 권세 있고 두려웠던 느부갓네살 임금이 주는 포도주와 진미도 감히 거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벨사살 임금이 초청한다고 그 자리에 가겠습니까? 다니엘은 그 초청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다니엘처럼 일편단심의 신앙, 주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어야겠습니다. 가서는 안될 자리는 가지 말고, 보아서는 안될 것도 보지 말고, 사귀어서는 안될 친구는 사귀지 않는 돈독한 신앙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지금 태후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꿈을 해석만 하면 그 꿈이 주는 불길한 내용을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벽에 있는 이상한 은밀한 글들을 해석만 하면, 그 글들이 주는 불길한 내용들을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석한다고 그것이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벨사살 임금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것인데, 사람이 해석한다고 그것이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그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인데, 태후는 아직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불러주셨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고, 주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 하루를 복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궁에 들어와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십시다.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물론 왕에게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사람이 말한다고 왕이 만세수를 누릴 수 있습니까? 벨사살 임금은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날이 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바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후가 들어와서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오래오래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약 4:14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벨사살도, 태후도 알지 못했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살아야 합니다. 또 히 9:27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그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좇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여기서 나는 느부갓네살 임금입니다. 다니엘은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서 4:18을 보십시다.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박사가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제52강 다니엘이 벨사살에게 나아옴(5:13-16)
5:13-16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바벨론의 벨사살 임금이 태후로부터 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 사람을 보내서 즉시 연회장으로 오라고 일렀습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입고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을 때 바벨론 박사들이 꿈을 알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박사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을 왕에게 인도해 주고 소개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옥의 역할을 이번에는 누가 한 것입니까? 태후가 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서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마음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 도성 밖에는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공격하기에 앞서서 적당한 시간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궁에서는 연회를 베풀고 귀인들 천 명과 왕의 왕후들과 수많은 왕의 첩들이 그곳에서 술 파티를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술 냄새, 음식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거룩한 기명들이 더러는 그 속에 술이 담겨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왕궁 촛대 옆에 있는 왕에게 걸어가면서 다니엘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착잡했을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다니엘이 왕 앞에 나왔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을 알고 있었겠습니까?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 때 바벨론 온 도성을 다스리는 바벨론의 총리 대신이었고, 거기다가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었는데 벨사살이 다니엘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왕궁에서는 틀림없이 왕의 이름으로 잔치에 오라고 다니엘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이 오라고 했으니까 가서 술을 마시는 대신에 음료수나 생수를 마시면 될 것이 아니냐? 또 바벨론 신들을 찬양하지 않고, 숭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될 것 아니냐?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다니엘이 그 사람들 가운데 있어다면, 그 술잔치에 참석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니엘을 찾겠습니까? "그 사람도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이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다니엘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름철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기 때문에 송죽의 절개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서 찬바람이 불고 백설이 온 천지를 뒤덮을 때는 송죽의 절개가 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 바른 신앙의 사람은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더욱더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깨끗한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석탄을 캐는 탄광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보세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커멓게 검댕이가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니엘은 가서는 안될 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가서는 안될 자리에는, 아예 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합니다. 어두움에 물들지 말고, 어두울수록 더욱더 빛을 발하고, 부패한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다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왕이 다니엘에게 말을 합니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태후는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할 때 그런 식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만약 그 소개대로 벨사살이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은 그 다니엘이냐?"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다니엘을 경시하고 깔보는 말을 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추억, 치욕적인 조국의 과거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다니엘은 일개 포로 출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법관이시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존경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기명에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벨론 식 이름으로 안 부르고 계속해서 히브리어 식 이름을 부르겠습니까? 자기 이름이 무엇입니까? 벨사살입니다. 다니엘의 바벨론 식의 이름이 벨드사살입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히브리 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니엘을 존중하고 다니엘의 말에 경청해서 다니엘의 조언대로 신앙적으로 나아갔었더라면 어려운 일들을 안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무시하고 교만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자기 나라도 망해 버리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중세에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 내려옵니다. 수도원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이 많이 왕래했던 이름난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수도원이 썰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풍성하던 수도원에 찬바람이 쌩쌩 불고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반목, 질시하는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썰렁한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구를 대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만 생각하십시다. 첫째로, 다니엘처럼 어둠에 물들지 말고, 가서는 안될 자리에 가지 말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 성도들을 대할 때 내가 지금 주님을 만나고 있다는 심정으로 사랑과 존경으로 잘 대해주고, 우리를 겸손히 낮출 수 있는 하루가 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또 거기다가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에게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까?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계속해서 다니엘의 이름을 바벨론 식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히브리 식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도원 원장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지혜로운 현자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현자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당신네 수도원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 알아봐서 그렇다."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현자가 한 말이 수도원 안에 쫙 퍼졌습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있던 저 사람이 혹시 육신의 모양을 입고 있는 하나님이 아닐까?" 그때부터 서로 대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전에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는데, 이제는 달라져서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나와 대화하고 있는 이 사람이 하나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도원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사랑을 다시 찾았습니다. 따뜻한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사람들이 많이 그 수도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53강 벨사살이 다니엘을 멸시함(5:13-16)
5:13-16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태후의 말을 듣고 바벨론이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다니엘이 드디어 왕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다니엘을 보고 고의적으로 그를 업신여기는 말로, 무시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태후는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할 때 다니엘에게 특별한 능력과 자질이 있어서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다니엘을 보았을 때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고 "네가 우리 부친이 유다에서 포로로 끌고 온 그 사람이냐"고 하면서 포로 출신이라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고의적으로 다니엘을 무시한 것입니다. 너는 일개 포로 출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다니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유다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또 그가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지 않는 듯이 소문을 들어서 아는 정도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반신반의하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이 말할 때는 단어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예, "거룩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냥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다는 것입니다.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단 4:9을 보시겠습니다.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것과 소문을 들어서 안다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18절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느부갓네살과는 달리 다니엘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다니엘은 자기를 인정해주었던 느부갓네살 임금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임금에 대해서는 아주 가혹하리만큼 그의 교만을 질책하고 공격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사랑을 심었으면 사랑을 거둘 것이고, 이와 같이 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배척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15절에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바벨론 여러 박사들도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인 것을 다니엘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두 가지를 박사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먼저 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해석을 알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바벨론의 여러 박사들이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인데 네가 과연 풀겠느냐는 반신반의하는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소문을 통해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다니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데 이 말에는 태후가 한 말 가운데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벨사살 임금이 바벨론 박사들에게 약속했던 상 세 가지를 다니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자줏빛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색입니다. 왕복을 입혀준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옛날에는 금목걸이를 아무나 걸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훈장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왕이 금목걸이를 걸어주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첫째 치리자는 벨사살의 아버지였던 나보니두스였습니다. 실질적인 왕이었습니다. 두번째 치리자가 벨사살입니다. 바벨론 도성을 다스렸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니엘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벨사살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아, 비록 네가 포로 출신이다만, 만약 네가 그것을 읽고 해석하면 내가 너에게 큰 상과 영예를 주겠노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네가 다른 박사들처럼 글을 읽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한다면, 내가 너에게 약속한 상급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너에 대한 소문이 다 거짓일 것이며, 네가 지금까지 쌓았던 명성과 평판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고 하는 은연중에 이렇게 친절하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벨사살 임금처럼 여러분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만나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여러분을 높여줄 수 있고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며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여러분을 인정하는 사람만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해주시는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도 벨사살 임금처럼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태도를 취하지 말고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높여줄 수 있는 복된 자리에 이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입니다. 항상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인정해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부족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역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발명왕 에디슨을 생각해봅니다.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에디슨에 관한 일화가 많습니다. 집에서 고양이를 두 마리 키웠는데 에디슨이 고양이를 위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고양이가 한 마리는 컸고 한 마리는 작았습니다. 그래서 고양이 집에다 구멍을 두 개를 뚫었는데 하나는 크게, 하나는 작게 뚫었습니다. 에디슨 어머니가 "왜 구멍을 두 개 뚫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에디슨이 하는 말이 큰 구멍은 큰 고양이가 드나들게 뚫었고 작은 구멍은 작은 고양이가 드나들도록 뚫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이가 없어서 "큰 구멍 하나만 만들면 그곳으로 고양이 두 마리가 다 드나들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에디슨이 머리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미련한 구석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비록 학교에서 쫓겨난 에디슨이었지만 그 어머니는 실망하지 않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너는 다른 사람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어. 너는 그 다른 점을 잘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럴 때 에디슨이 결국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인류 사회에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서 쫓겨난 아들을 보고 "이 멍텅구리야 나가 죽어라"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에디슨은 인생의 실패자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다.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태후가 다니엘을 소개할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11절을 보십시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아무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이상의 해석을 내게 고하라."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박사가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첫째로 꿈을 해석하고, 둘째로 은밀한 말을 밝히고, 셋째로 의문을 파할 수 있다고 했는데, 벨사살 임금은 두번째 은밀한 말을 밝힌다는 말을 뺐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고 인정해주고 세워주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세워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54강 왕의 예물을 거절함(5:17)
5: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였던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적인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다니엘은 앞에서 본 바대로 벨사살 임금이 말하는 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비록 벨사살 임금이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고,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까지도 인정했던 다니엘의 특별한 능력과 자질과 공을 몰라주는 말을 했다 해도, 다니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진정한 용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서 누가 우리에게 조금만 언짢은 말을 하면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말하는 동안 끝까지 기다렸다가 자기가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불을 토하는 듯 조금도 거리낌없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용기겠지요? 우리에게도 다니엘처럼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할 줄 알고, 참을 때는 참을 줄 알고, 또 말을 해야 할 때는 당당하게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줄 압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어떻게 대답했는지 보십시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다니엘에게 약속했습니다. "다니엘아,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세 가지를 주겠다. 첫째로,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둘째,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셋째,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이렇게 약속했을 때 다니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 것은 왕이 가지시든지, 다른 사람에게 주든지 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취했던 태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첫번째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바벨론의 온 도를 치리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어른으로 삼았습니다. 다니엘은 감사한 마음으로 왕이 내린 선물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자기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까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이 상급을 약속했을 때 다니엘은 다른 사람에게나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 물질적인 미끼를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마십시오"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게 다른 태도를 취했을 것 같습니까? 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4:19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에 대해서는 여러 면에서 존경하고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에 대해서는 그런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을 인정해 주었고 벨사살은 다니엘을 무시하고 업신여겨서 그렇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한 선지자가 나옵니다. 불의의 삯을 받고 하나님이 원치도 않는데 모압 왕 발락을 위해서 예언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발람 선지자였습니다. 불의의 삯을 받고 메시지를 전했다가 나중에 자기도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그것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뇌물은 사람의 마음을 굽게 합니다. 그런 물질적인 미끼를 가지고 유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벨사살과 바벨론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르게 전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바벨론의 귀인들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고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이 다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이 읽지 못했던, 아무도 능히 알게 하지 못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쓴 그 글을 다니엘이 어떻게 자기가 그것을 읽고 해석을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글은 누가 쓰신 것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읽고 해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니엘은 물질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리낌없고 떳떳하고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다니엘은 벨사살 임금과 그의 신하들 앞에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벨사살 임금에게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담대했겠습니까? 담대하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전하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뜨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때는 사람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사람을 무서워하기 시작하면 벌써 마음이 급해집니다. 영이 맑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면서 마음에 분요한 생각들을 다 떨쳐 버릴 때 우리의 영이 맑아지고 마음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잘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 41:10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의 복잡한 마음들을 다 떨쳐 버리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담대한 생각 주시고 두려운 마음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참된 용기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알고, 그것을 붙들고 오늘 이 하루도 담대하게 승리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55강 과거를 기억하라(5:18-21)
5:18-21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이, 왕으로 제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벨사살 임금이 예루살렘에서 취하여 온 기명에 술을 부어서 찬양한 바벨론의 신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바벨론의 신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나라를 주셨고, 나라와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큰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모든 사람 앞에서 명성과 영광도 주셨고, 위엄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가지고 있는 나라, 권세, 영광, 위엄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잘나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께 받았을 따름입니다. 19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얼마나 큰 권세를 주셨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슨 말입니까? "벨사살 왕이여, 잘 들으소서. 당신의 부친 느부갓네살 임금은 당신처럼 바벨론의 도성 하나를 다스렸던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백성들과." 복수입니다. 수많은 여러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또 "나라들과"라고 했습니다. 한 나라가 아닙니다. 또 "각 방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떨며 두려워할 정도의 권세를 가진 임금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느부갓네살 임금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졌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교만하냐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보십시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큰 권세를 주셔서 자기 뜻대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말만 하면 사람의 몸을 쪼개기도 하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기도 하고, 또 풀무불에 집어던져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니엘과 세 친구 나이 열 여섯 살, 얼마나 어립니까? 그렇지만 말 한 마디로 모든 도를 다스리고, 또 바벨론 각 도를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세우기도 하는 엄청난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물어봅니다. 실제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경 몇 군데를 찾아봅니다. 시 75:7입니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또 신 32:39을 찾아보시겠습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삼상 2:7입니다. 사람을 임의로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인간 이하의 모습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다. 본문 20절입니다.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뜻이 강퍅하여." 마음이 돌같이 단단해졌다는 뜻입니다. 옥토와 같이 부드러워서 겸손하고, 내 의견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도 옳은 줄 알고 고개를 숙여야 할 텐데 돌같이 마음이 강퍅해서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자기 말이 법인 것처럼 행했습니다.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왕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영광을 다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21절을 보니까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정신병에 걸려서 짐승의 마음을 받아서 짐승처럼 살고, 짐승처럼 행동을 하니까 사람 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았습니다.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생했습니다.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그래서 짐승과 함께 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라고 했습니다. 행동까지 짐승처럼 했습니다.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낮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밤에도 역시 짐승처럼 살고 짐승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니 하늘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사 1:3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언제까지 그랬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7년 동안 고통을 당하고 나서 비로소 느부갓네살 임금은 회개하고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 C. 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저술가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적인 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신앙적인 감화를 끼친 인물입니다. 이 C. S. 루이스가 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평소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을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드러운 음성에 사랑하시는 자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는 이따금씩 확성기를 틀어놓은 듯한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다." 부드러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칠 년 동안 정신병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다니엘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18절에 보니까 "왕이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다니엘 앞에는 벨사살 임금이 있고, 바벨론 도성의 귀인 일천 명이 있고, 수많은 왕후들과 빈궁들도 있고, 또 바벨론의 술사, 술객, 점쟁이들, 이른바 바벨론의 박사들이 다 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니엘의 말을 직접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벨사살 임금입니다. 왜냐하면 벨사살 임금에게 모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여"라고 하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짐승에게 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짐승보다도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짐승처럼 살면서 짐승에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해 버렸습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잘 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교만을 꺾기 위해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을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마음을 높이고 뜻이 강퍅해서 교만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시고 겸손히 사시며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셔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56강 벨사살을 질책함(5:22-24)
단 5:22-24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 항복하고 머리를 숙였을 때에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회복하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미워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내용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벨사살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고 있었겠습니까? 물론 소문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역사에 보면,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죽은 지 2년이 되었을 때 바벨론 도성의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말년에, 벨사살은 이미 상당한 나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의하면 벨사살 임금의 부친이었던 나보니두스가 느부갓네살 임금 당시에 바벨론 도성 안에 있던 공직자였습니다. 따라서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을 그때에, 바벨론 도성에 있으면서 바벨론 도성 안에서 일어난 일을 직접 보고 지각할 수 있는 나이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이나 소문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인간의 교만을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이는 것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낮춰야 하고, 오히려 남이 나를 높여주고, 하나님이 나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교만해서 자기를 낮추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였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교만했습니까?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는 자리에 올라갈 정도로 교만했습니다. 하늘의 주재가 누구입니까? 하늘을 다스리시는 하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하늘 보좌에 높이 앉아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리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벨사살 임금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는지 세 가지 구체적인 실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기명들을 짓밟았습니다. 신성모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두번째,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우상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바로 우상입니다. 거기다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찬양했습니다. 세번째,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우상들에 비해서 영원하신 하나님, 사시는 하나님, 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묘사되어 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인간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인간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참 하나님, 사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이렇게 세 가지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 다음 24절을 보십시다. "이러므로." 그러니까 벨사살 임금이 교만해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한 연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앞에서." 여기서 말하는 그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손가락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그 손가락을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하나님이 손가락을 보내서 글을 기록하셨는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즉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박사들이 어떻게 그 글을 읽고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인 다니엘만이 그 글을 읽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배워야 할 것은 다니엘의 담대함입니다. 다니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자기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왕 앞에서, "당신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당신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다"고 담대하게 호통쳤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이런 당당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다니엘이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그분,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오직 그분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담대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모두가 벨사살 임금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벨사살 임금과 반대의 모습만 가지면 됩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벨사살 임금은 마음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벨사살 임금은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여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높여줄 것입니다. 벨사살 임금은 하늘의 주재를 거역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주재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위 앞에,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종하며 머리숙일 수 있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것을 무시했습니다. 거룩한 기명들을 더럽히고 모독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벨사살 임금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고 오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목숨 다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라고 했습니다. 벨사살 왕은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고했을 때 그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취하여 가시고, 대신 짐승의 마음을 집어넣어서 7년 동안 정신병을 앓게 하셨습니다.
제57강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25-28)
단 5:25-28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먼저 분벽에 쓰인 글자를 읽었습니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몇 단어로 되어 있습니까? 네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 두 단어는 강조를 위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메네"라는 말이 두 번 나왔고, 그 다음에 "데겔," 마지막 단어가 "우바르신"이란 글자였습니다. 네 단어가 모두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문장의 형태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메네"라는 말은 "수를 헤아리다"는 말의 수동태로 "수가 헤아려졌다"는 뜻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세어졌다는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세어졌다는 말입니다. "데겔"이라는 말은 "저울을 놓고 달았다"는 말의 수동태니까 "저울에 달려졌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우바르신"이라는 말에서 "우"는 아람어로 접속사입니다. "그리고"라는 말입니다. "바르신"이라는 말은 "나누다"의 수동태로 "나누어졌다"는 뜻입니다. 28절에 보면 "베레스"라는 말이 나오는데 베레스는 단수이고, 바르신이라는 말은 복수 형태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바벨론의 지식층은 모두 아람어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박사들도 틀림없이 아람어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같은 한자라도 초서로 흘려 쓰면 보통 사람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자도 아람어인데 날림체, 초서체로 써 있었다면 바벨론 박사들이 읽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혹 바벨론 박사들이 읽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메네, 즉 셈을 당했다는 말인데 무엇이 세어졌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큰 대회장에 귀인들이 일천 명이 있고 수많은 왕후들과 빈궁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숫자가 세어졌다는 뜻이겠습니까? 제대로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데겔이란 말도 저울에 달렸다는 말인데 이것도 술안주로 쓸 고기 등을 저울에 달아서 쟀다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우바르신은 나누어졌다는 말인데 저울로 근수를 잘 재서 귀인들에게 고기를 나누어주라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50명, 또는 100명씩 나누어서 줄을 서게 하라는 것인지 그 해석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이 26절에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말에 대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왕의 시대, 왕의 생명, 왕의 날이 하나님에 의해서 계수가 되었는데 결과는 왕의 날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시편 90편의 모세의 기도대로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줄 압니다. 27절을 보세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의 삶의 질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질을 감찰하시면서 하나님의 저울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늘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행여 하나님의 저울로 우리의 삶의 질을 재어볼 때 턱없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하구나, 착하구나, 중하구나, 충성되구나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오늘 하루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28절을 보십시오. 앞의 메네와 데겔은 하나님이 쟀다는 것이고, 우바르신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이 말은 바벨론이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메대가, 한쪽은 바사가 차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바벨론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메대와 바사 연합군이 공격해 왔습니다. 성밖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리컵을 땅바닥에 던지면 깨져서 산산조각 나서 형체도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산산조각이 나서 나뉘어진다는 뜻입니다. 산산조각이 나서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과연 어떠한 심판을 내리실지, 내가 행한 그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을 비디오로 찍어서 사람들 앞에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잘라 버리고 싶은 장면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많은 지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과 동기를 감찰하십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바르고 의롭고 정직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메네." 우리의 삶의 날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앞에 23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계수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늘 생각하면서 언제 하나님 앞에 설지라도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데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저울질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의롭게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저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여기 승동교회 교인들의 모든 의를 합쳐도 부족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의를 합친다 해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가 아니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비록 나는 부족하지만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변호해주시고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나의 오른 손을 높이 들어주실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변호사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못 삽니다. 오늘도 주님의 손을 든든히 붙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의지하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니엘 5장이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벨사살이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교만해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습니다. 다니엘서 5장이 어떻게 끝나고 있습니까? 벨사살이 어떻게 끝나고 있습니까?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잠 16:18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교만이 있으면 그 뒤에는 반드시 패망이 뒤따라옵니다.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거만함이 앞에 있으면 뒤에는 반드시 넘어짐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5장이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벨사살 임금이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나를 낮추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면 벨사살과 같이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자기를 높이려 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를 다시 한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은 벨사살 임금에게, 느부갓네살 임금이 겪었던 역사적인 경험과 교훈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고 질책한 뒤에,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기록된 글자를 풀고 있습니다.
제58강 그날 밤에(5:29-31)
단 5:29-31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 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습니다. "메네"는 "왕의 시기가 세어져서 끝이 났다"는 뜻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에 부족하다"는 뜻이었고, "우바르신"은 "바벨론 나라가 산산조각 나서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멸망당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즉 바벨론이 언제 메대와 바사에 함락되어 멸망할 것인지 그 시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벨사살 임금의 개인적인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물론 한 나라가 멸망하면 왕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벨사살 임금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벨사살 임금은 바로 그날 밤 그렇게 빨리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메대와 바사가 들어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을 보니까 벨사살이 어떻게 했습니까? 수많은 귀인들 앞에서 자기가 다니엘에게 약속했던 세 가지 상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주 옷을 입히게 하고, 둘째로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세번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았습니다. 27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다니엘이 처음에는 왕이 주는 예물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왕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왜 처음에는 거절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물질을 받으면, 뇌물을 받으면 마음이 움직여서 말씀을 잘못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거절했지만 지금은 할 말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그대로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받아도 이제는 메시지가 변질될 우려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바벨론의 백성으로서 왕에 대한 마지막 최소한의 의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바로 몇 시간 뒤에 벨사살 왕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마 벨사살 임금은 자기가 바로 몇 시간 뒤에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벨사살이 누구에 의해서, 또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 바로 벨사살 임금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과연 벨사살 임금의 죽음이 준비된 죽음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마지막은 준비된 죽음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만일 벨사살 임금이 자기가 바로 몇 시간 뒤에 이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어떤 조처를 취해야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임금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교만했습니다. 마음을 낮추지 않고 다니엘이 글자를 해석했을 때 "여봐라! 내가 다니엘에게 약속한 상급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낮아지지 않고 끝까지 교만하고 높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31절을 보시겠습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장래 일을 계시해주었습니다. 그 꿈대로 금 머리 시대가 지나고 은으로 만든 가슴과 팔의 시대, 즉 메대와 바사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31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제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선물을 얻은 것입니다. 선물을 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으면 나라를 주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나라의 주인 되셔서 벨사살 임금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다리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리오가 위대하고 잘나서, 힘이 있어서 자기의 힘으로 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다리오가 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다리오를 선택하셔서 나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다리오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벨사살은 젊었습니다. 젊은 사람에게서 나라를 빼앗아서 나이가 많은 다리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 인간의 나이, 인간의 능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하란을 떠났을 때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가 75세였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시내 산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몇 살이었습니까? 80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나이에 관계없이 쓰고자 하실 때 쓰십니다. 또 하나님은 때에 때라서 많이 배운 사람을 쓰기도 하시고 베드로처럼 불학 무식한 사람도 귀하게 쓰십니다.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던 이사야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여러 가지 일들을 성실하게 잘 감당할 수 있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고, 아울러 모세가 시 90:12에서 기도했던 제목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옛날 현자들의 말처럼, 오늘이 나의 최초의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살고,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은 벨사살 임금에게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나타난 글씨를 읽고 그것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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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사살의 죄와 멸망 (다니엘5장 17-31절)
2005년 02월 04일 김성철 목사
1. 알고도 교만한 죄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멸망케 하신 것은, 조상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앞에 교만하게 행하다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마치 들짐승처럼 지내다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았을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왕으로 삼으신 것을 알면서도, 그 역시 하나님앞에 교만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
습니다. 즉, 알고도 행치 않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신느 것이 무엇인지 알면
서도 행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같이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도 행치 않는 어리석은 자리에 떨어져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항상 믿음에 민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벨사살의 멸망
벨사살은 다니엘의 예언을 들으면서, 그래도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
릅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 약속대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 벨사살은 하나님앞에 엎드
려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말씀대로 믿고 자신을 낮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그의 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항상 그 말씀이 오랜 후에 올 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돌아서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회개하고 되돌아 서는 참된 겸손
함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김성철목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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