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 제46강 교만한 자를 낯추시는 하나님(4:36-37) | 관리자 | 2006.05.21 | 25 |
46 | 제45강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4:34-37) | 관리자 | 2006.05.21 | 36 | ||||||
45 | 제44강 현실로 이루어진 꿈(4:32-33) | 관리자 | 2006.05.21 | 28 | ||||||
44 | 제43강 교만은 패망의 선봉(4:28-31) | 관리자 | 2006.05.21 | 29 | ||||||
43 | 제42강 공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면(4:25-27) | 관리자 | 2006.05.21 | 25 | ||||||
42 | 제41강 나무를 베고 멸하되 그루터기는 남기라(4:22-24) | 관리자 | 2006.05.21 | 31 | ||||||
41 | 제40강 걱정해주는 마음(4:19-21) | 관리자 | 2006.05.21 | 26 | ||||||
40 | 제39강 너는 능히 하리니(4:17-18) | 관리자 | 2006.05.21 | 29 | ||||||
39 | 제38강 순찰자의 외침(4:13-16) | 관리자 | 2006.05.21 | 24 | ||||||
38 | 제37강 느부갓네살의 꿈(4:10-12) | 관리자 | 2006.05.21 | 25 | ||||||
37 | 제36강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4:8-9) | 관리자 | 2006.05.21 | 32 | ||||||
36 | 제35강 느부갓네살 임금의 두번째 꿈(4:4-7) | 관리자 | 2006.05.21 | 34 | ||||||
35 | 제34강 느부갓네살 임금의 조서(4:1-3) | 관리자 | 2006.05 |
제34강 느부갓네살 임금의 조서(4:1-3)
4:1-3
느부갓네살 왕의 두 번째 꿈
1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3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서 4장에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꾸었던 두번째 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과 4장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넓게 있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임금은 43년을 통치했습니다.
상당히 오래 통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4장의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십시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죽고 나서,
바벨론의 역사가들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겪었던
정신병에 대해서 기록을 남겼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통치 말기에 정신병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뒤로 넘어가서 4:28∼29을 보십시다.
"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꿈을 꾸었던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꿈을 꾼 지 열두 달이 지난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꿈을 꾸고 나서 1년 후에 정신이 나가 버렸습니다.
몇 때를 정신병으로 고생했습니까?
일곱 때를 정신병으로 고생했습니다.
정신병으로 7년 고생하다가 그 뒤에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일곱 때를 7년으로 보고
꿈을 꾼 지 1년이 지난 다음이라고 했으니까
8년으로 잡아봅니다.
그러면 43년간 통치를 했다고 했으니까 43-8은 35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통치한 지 35년이 되기 조금 전에,
이와 같은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느부갓네살 원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약 15세라고 했으니까
지금 다니엘은 몇 살이겠습니까?
예, 50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희어지기 시작하는 중년의 나이입니다.
이와 같이 3장과 4장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넓은 간격이 있습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스타일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어디의 왕입니까?
바벨론 왕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무슨 뜻입니까?
자기는 천하의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였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여주는 스타일입니다.
요즘 보니까 대선 주자들이 저마다
"내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점을 자꾸 강조합니다.
"박씨는 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박 대통령처럼 경상북도 출신입니다"고 내세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가 박 대통령과 모습도 닮았고 키도 같습니다"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박 대통령처럼 장기 집권하다가 총 맞아 죽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스타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믿는 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출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높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가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옛날 중근동 지방에서 글로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하든지 조서를 발표할 때는
항상 누가 누구에게 보낸다는 것을 밝히고, 그 다음에 인사말을 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신자는 느부갓네살 임금입니다.
그 다음에 조서를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
그 다음에 세번째로 인사말이 나왔습니다.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 바울은"이라고 하면서 발신자를 밝혔습니다.
그 다음에 수신자가 나옵니다.
"어디 어디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그 다음에 인사말을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중근동 사람들의 인사말은 평강입니다.
이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아랍 말로는 "살람"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샬롬!" "살람!"이라고 인사합니다.
우리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부터 지금까지 그곳의 인사말은 평화, 평강입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보면 왜 느부갓네살 임금이
조서를 쓰게 되었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자기가 경험한 이적과 기사 때문에
조서를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두 번 체험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은밀한 것을
다니엘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을 목격했습니다.
자기가 꾸었던 꿈과 해석을 다니엘이 알려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3장에서는 무슨 이적과 기사를 체험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건져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들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에게, 또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일어나 이적과 기사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행하신 것이라고 했습니까?
자기에 행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4장에는 느부갓네살 임금 자신에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가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 병을 고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직접 경험한 이적과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적(異蹟)이라고 하는 것은 다를 이(異)자에다가
자취 적(蹟)자를 씁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자취가 아닙니다.
신의 자취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신 자취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사(奇事)라고 하는 것은 기이한 일을 말합니다.
놀라운 일을 말합니다.
보통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3절을 보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세 가지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
둘째로 능하심과 전능하심,
세번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했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권병은 대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권병(權柄)은 권세 권(權)자에 역시 권세 병(柄)자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이렇게 찬양하는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정신병에 걸려서 권좌에서 물러났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이 많고 늙었습니다.
잠시 뒤에는 죽는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죽고 나면 그 권좌에서 영원히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현재 처지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세상 줄이라고 하는 것은 다 끊어집니다.
물질의 줄, 내 부모, 내 형제, 내 남편, 내 아내,
심지어는 내 자식의 줄까지도 다 끊어집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지금이라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인생을 가리켜
없고,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는 철이 없습니다.
좀 자란 다음에는 자기 짝을 찾아 연애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중년이 되면 애들 키우느라, 돈 버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가 70이 되고, 80이 되면 쪼글쪼글 형편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영영 없어집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 4:14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야단법석을 떨면서 살아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맥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이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잠시 잠깐이면 떠날 이 세상 너무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주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5강 느부갓네살 임금의 두번째 꿈(4:4-7)
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 한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었노라
6 이러므로 내가 명령을 내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더라
7 그 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지 못하였느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이 시작되었습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다. "나 느부갓네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내가"라고 하지 않고 "나 느부갓네살이"라고 한 것은
좀더 권위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결혼 서약을 할 때 보면 "나 ○○○는 △△△를 신부로 맞아"라고 합니다.
그냥 "내가"라고 하지 않고 "나 느부갓네살이"라고 한 것은
더욱더 권위를 주기 위해서, 힘을 주기 위해서
대명사도 쓰고 이름도 쓴 것입니다.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집에서 사적으로 있을 때도 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바가지를 긁는다든지,
자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공적으로 궁에서의 삶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다 정복했기 때문에
싸움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적으로, 외적으로 다 문제없이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니까 그 평안이 깨져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5절에 보니까 "한 꿈을 꾸고."
꿈 때문에 마음의 평강이 산산조각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으되."
2장에서 본 것처럼
이 꿈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장래 일을 계시해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불길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곧 무엇으로 변했습니까?
5절에 보니까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었노라."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심해서 깊은 고민의 고통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6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명을 내려
바벨론 모든 박사를 내 앞으로 불러다가"라고 했습니다.
첫번째 꿈처럼 바벨론의 모든 박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첫번째 꿈을 꾸었을 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첫번째 꿈을 꾸었을 때는
"내가 꾼 꿈과 해석을 나로 알게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잊어 버린 꿈과 해석을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꿈과 해석을 알게 하지 아니하면
몸을 쪼개고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알게 하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리겠다는 위협은 없습니다.
2장 때보다는 우호적입니다.
아마 그 동안 바벨론 박사들이 중간중간에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도 잘 해석하고
자문도 잘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다.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기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나."
이번에는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꿈의 내용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대아 술사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장에서도 바벨론 박사들은 꿈을 알게 하지 못했습니다.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하신 꿈을 해석할 수 있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두드려야 할 자리를 제대로 두드려야 하는데,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일전에도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만,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사의 공장에 큰 발전기가 있었습니다.
공장 전체의 동력을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기계였습니다.
고장나는 법이 없도록 튼튼하게 설계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발전기가 중단되었습니다.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게 되어 엄청난 손실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술자들이 다 달라붙어서 발전기를 고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멀리서 당대 제일 가는 기술자를 불러왔습니다.
이 기술자는 오더니, 자기가 들고 다니는 조그마한 손가방에서
작은 망치를 하나 꺼내더니 발전기 앞에서 톡톡 두들겼습니다.
또 옆에 가서 톡톡 두들겼습니다.
이번에는 빙 돌아서 뒤에 가더니 또 톡톡 두들겼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중단했던 발전기가
윙 하면서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에 포드 앞으로 청구서가 날아왔습니다.
1만 달러였습니다.
수십 년 전이니까 요즘 가치로 따지면 억이 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 포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와서 작은 망치로 몇 군데 톡톡 두들기더니
1만 달러를 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청구서를 반환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생각해도 망치 하나로 몇 군데 두들기고 나서
1만 달러를 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소?"
하고 보냈습니다.
나중에 회신이 왔습니다.
단 두 줄이었습니다.
그 청구의 내역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1. 망치를 가지고 발전기를 두들기면서 일한 공임 10달러
2.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 알아낸 기술값 9,990달러. 합계 1만달러.
그러니까, 어디를 두들겨야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망치로 몇 번 두들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드는 아무 소리 못하고 1만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은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지식과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로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돈 가지고 다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의 힘을 이용하려고
권력의 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해결이 되는 것 같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더딘 것 같지만,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물질을 의지하거나, 권력을 의지하거나,
지식을 의지하면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인간은 약합니다.
인간은 무능합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이 아침 여러분에게
개인의 문제든, 가정의 문제든, 어떤 문제든지 간에
다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문을 두드리심으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문제가
오늘 이 아침에 속히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축복의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6강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4:8-9)
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따라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되
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환상의 해석을 내게 말하라
짤막한 두 절의 말씀이지만
신앙적인 교훈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구절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2장에 이어서 4장에서도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으로 인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깊은 번민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다 불러서
꿈을 말하면서 해석을 알려고 했지만
바벨론 박사들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박사들 가운데 다니엘이 빠져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니엘의 나이가 그때는 이미 50세 정도가 되었다고 했는데,
너무 늙어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잊어버려서 그렇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9절에 보면 다니엘의 지위는 여전히 무엇이었습니까?
박수장이었습니다.
모든 박사들의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볼 일이 있어서 출장을 갔기 때문에 왕궁에 없어서
그 자리에 오지 못했겠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정확한 이유가
8절 말씀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그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라고 했습니다.
"그후에 내가 다니엘을 내 앞에 불러왔으니"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가 누구입니까?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이 자의로,
다니엘 스스로 왕 앞에 늦게 들어온 것입니다.
다른 박사들이 다 오고 나서,
그들이 꿈을 해석하지 못하고 나서
그 뒤에 다니엘이 비로소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불렀을 그때에
다니엘도 그 자리에 갔더라면,
다니엘도 꿈을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니엘에게 능력이 있어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
밀한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뒤에서 겸손히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장서려고 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눈앞에 있는 풀만 보고 한 걸음 두 걸음 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맙니다.
내가 앞서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앞세우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주여, 주님이시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이 앞서세요.
저는 주님의 뒤를 겸손히 따르겠습니다"는 마음으로 해야
실수가 없고 실패가 없습니다.
왜 중요한 일을 그르칩니까?
내가 자꾸 앞서 가기 때문입니다.
급한 마음에 먼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한 박자 늦더라도
하나님을 앞세우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왕 앞에 들어왔습니다.
다니엘을 보는 순간
느부갓네살이 얼마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겠습니까?
첫번째 꿈을 꾸었을 때도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을 보는 순간 느부갓네살 임금은
마음에 근심과 어두운 그늘이 다 사라져 버리는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아침에 나온 사랑하는 성도님들도
다니엘처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복된 모습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주변에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두루 도는 화염 검으로 우리를 지켜주셔서
가시가 되어서 우리 마음을 찌르는 사람은 다 막아주시고
다니엘처럼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사람들만 많이 만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십시다.
"그는 내 신의 이름을 좇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다니엘의 바벨론 식 이름은 벨드사살입니다.
"벨"이라고 하는 것은 바벨론 최고의 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둑입니다.
"벨 신이 그의 생명을, 그의 삶을 보호하시리라"
는 뜻을 가진 이름이 벨드사살입니다.
"그는 내 신의 이름을 좇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믿고 있는 최고의 신은 누구입니까?
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신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니엘의 신이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이고
자기의 신은 벨이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아직도
온전히 회개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니엘은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속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는
한 마디로 신통한 자라는 것입니다.
족집게입니다.
요즘 우리말로 하면 "그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는 말입니다.
9절에도 똑같은 말이 있습니다.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넘어가서 5:11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5:14 말씀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신들의 영이 있다는 말은
신통한 사람에게 관례적으로 썼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말 같으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고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 임금은 두번째로 다시 반복해서 꿈을 말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박사들이 들어왔을 때는
그 자리에 다니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들어왔을 때
자기의 꿈을 다시 한번 이야기했습니다.
9절입니다. "박수장 벨드사살아."
다니엘은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었습니다.
2:48을 한번 보세요.
다니엘이 첫번째로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였습니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니엘은
모든 박사의 어른 노릇을 충실하게 충성스럽게 잘 감당했습니다.
그때 나이 15, 6세였고, 지금 나이가 약 50세입니다.
30년이 넘도록, 35년 동안을 그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했습니다.
요즘은 국무총리도 1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꾸 갈리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35년 동안 꾸준하게 한 자리를 지키면서
그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충성스럽게 자기 사명에 성실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한 자리에서 10년 동안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이라고 했습니다.
20년 이상 한 사람이 있으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라고 했습니다.
30년 이상 같은 일을 한 자리에서 꾸준하게 성실하게 감당한 사람이 있으면
무릎을 꿇으라고 했습니다.
10년, 20년, 30년을 한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하는 동안
얼마나 속상한 일이 많았겠습니까?
기분 나쁘다고 그만 둔다면 이루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다니엘도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겠습니까?
모함도 있었고 시기, 질투도 많이 있었겠지만
꾸준히 35년 동안 자기 직분에 충실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을 파되 인내를 가지고 계속 한 우물을 파면
언젠가는 샘물이 솟아오를 날이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셨든지 간에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보십시다.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 즉
아무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은밀한 것이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너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안다.
그러니 내가 꿈에 본 이상의 해석을 내게 고하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오늘 여러분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다니엘처럼 성령이 충만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라고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보자마자
이렇게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말만으로 떠들어대지 말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기만 해도, 곁에만 가도
"저 사람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이구나. 은혜스러운 사람이구나.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구나"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이 하루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7강 느부갓네살의 꿈(4:10-12)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에게 자기가 꾼 꿈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가 꾸었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신이 자기에게 주는 묵시요, 이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신이 장래 일을 자기에게 계시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서 그 꿈으로 인해서 두려워했고,
깊은 번민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본즉"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꿈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내가 꾼 꿈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꿈의 내용이 정확해야 해석도 바로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을 본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면
해석 자체가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꿈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꿈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본 것입니까? 나무를 보았습니다.
이 나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슨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땅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땅의 중앙에 있다고 했습니다.
또 여러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한 나무를 보았습니다.
또 고가 높다고 했습니다. 큰 나무, 거목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한 땅의 중앙에 서 있는 거목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바로 느부갓네살 임금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을 나무로 상징합니다.
성경에도 암 2:9을 보면 아모리 사람을 가리켜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또 사사기 9장에 보면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다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때 간신히 살아남았던 요담이 비유를 들어서 말을 했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말했지만 되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슨 나무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했습니까?
가시나무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무는 사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땅의 중앙에 서 있는 큰 나무는 느부갓네살 임금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1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나무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점점 자라나서 크게 되었습니다.
또 나무의 강하기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높이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성과 대를 높이 쌓고
그 꼭대기가 어디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까?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하늘에는 무슨 보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바벨탑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잘못된 욕구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이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넘어가서 22절을 한번 보세요.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나무는 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1절의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라는 말은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땅 끝까지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주변 국가들을 다 정복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권세가 땅 끝까지 미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나무의 잎사귀가 병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싱싱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4절의 말씀처럼 집에서도 평안했고 궁에서도 평안했습니다.
집 안팤에서, 공과 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평안했습니다.
또 얼마나 창성하고 번창했습니까?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모든 짐승들의 먹이가 될 만했습니다.
또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들짐승이라든지 공중에 나는 새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스리는 모든 신하입니다.
모든 신하들의 생명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살아 있는 모든 동물이 그 나무에서 식물을 얻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보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다스려 나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온 세상의 생명이
마치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 권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위에 계신 절대권자를 생각하고 겸손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그 교만 때문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나님의 벌을 받고 만 것입니다.
잠언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교만이 앞서면 꼭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넘어짐이 뒤따라오고 패망이 뒤따라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래도 봐주시는 것 같은데
성경에 보면 늘 강조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높아지려고 애쓰지 말고 도리어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이 낮추십니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앞세우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변에 보면 자기와 특별히 관계도 없는데
간섭하고 괜히 모든 일에 나서서 설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기에 참 안 좋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집 바보는 입다물고 있어서 중간은 가는데
우리 집 바보는 괜히 설치고 다녀서 집안 망신 다 시키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서 설치다가
자기 무식이 다 탄로 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서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자기 위치를 잘 지킬 수 있는 이 하루가 되셔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더욱더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강 순찰자의 외침(4:13-16)
13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14 그가 소리 질러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자르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15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에서
짐승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리라
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이 10절에 이미 쓰였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같은 서두를 다시 한번 반복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꿈에 본 장면이 새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본 장면은
전혀 두려움을 갖게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땅의 중앙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점점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잎사귀가 아름답고 열매가 많이 열리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광경이었습니다.
얼마나 평화스러운 광경입니까?
그런데 새로운 장면, 제2의 장면이 전개됩니다.
이 장면 때문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고 깊은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면이 새로이 전개되기 시작했는지 보십시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느부갓네살 임금은 꿈에서 계속 정신을 차리고 주시하고 있습니다.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순찰자라고 하는 것은 잠자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주목해서 보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찰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도 역시 졸지 않고 잠자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한 순찰자, 거룩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천사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다. "그가 소리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사용했습니까?
첫째로 "소리질러,"
둘째로 "외쳐서,"
셋째로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분명하고 단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외치는 것입니까? 순찰자,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누구에게 외치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외치는 것입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여기에 보면 "순찰자들"이라고 해서
순찰자가 복수로 쓰였습니다.
한
천사가 외치고 그 주변에 다른 천사들이 듣고 있다는 말입니다.
꿈에 본 나무는 베어지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가 자기를 베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나무를 베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순찰자가 같이 온 순찰자에게 외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찰자가 소리질러 외쳤습니다.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순찰자가 어떻게 하라고 외쳤습니까?
첫째로, 견고한 그 나무를 베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무수한 가지를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아름다운 잎사귀를 떨어 버리라고 외쳤습니다.
네번째, 그 많은 열매를 다 헤치라고 했습니다.
다섯번째,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여섯번째로,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더 이상 영향력 있는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신하들이 느부갓네살 임금 밑에서 보호를 받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어져서 다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권좌에서는 물러나지만
생명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나무는 생명이 있습니다.
또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나무가 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다시금 그의 나라가 회복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다시 회복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무슨 말입니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정신병원에 가면 정신병이 심한 환자들은 쇠줄로 묶어놓지 않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동이고"라는 말을 "철과 놋줄로 두르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루터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변에 철과 놋줄로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이 빠져서 미쳐 버렸지만
그래도 왕이고, 또 앞으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에
병사들을 시켜서 짐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주
변에서 지키고 보호해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시겠습니다.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들의 풀 가운데 거한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이 나가서 자기 집이나 왕궁에 거한 것이 아니라
들의 풀 가운데 거하는 가련한 모습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들에서 거하기 때문에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짐승처럼 풀 가운데서 짐승들과 더불어
풀을 식량으로 삼아 분량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짐승이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정신이 빠져서
왕이 먹는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옵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음이 짐승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텔레비전에서 "워 울프(Were Wolf)"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울프는 늑대입니다. 워(were)라는 것은 be동사의 과거형입니다.
자기가 늑대라고 생각합니다.
평상시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다가
보름달이 뜨면 자기를 늑대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실제로 이런 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도 자기를 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없고 자기는 소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풀 가운데서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실제로 역사에 보면 종종 그런 병에 걸렸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다.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때"는 것은 이것이 칠 일 일수도 있고, 칠 주 일수도 있고,
칠 계절 일수도 있고, 칠 년 일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 다 지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칠 일이라든지 칠 개월은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그 중한 병에서 고쳐지는 것이 칠 개월만에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 칠 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칠 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지나갔을 때
그루터기에서 다시 움이 돋고 나무가 자란 것처럼
느부갓네살 임금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이러한 꿈을 주셨습니까?
다니엘 2장에서 이미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금머리였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상이 박살나 버렸습니다. 아무리 금머리였어도, 그만큼 위대하다 해도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내가 아무리 금머리같이 권세가 강하고 귀중한 존재라 할지라도
내 위에는 절대 권력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전히 회개를 했어야 했습니다.
또 3장에서 금 신상을 만들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 속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회개하고 두 손 들고 항복했어야 했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는데,
제일 심한 건망증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단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사 49:15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면서
주님을 앞세우는 심정으로 살아가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9강 너는 능히 하리니(4:17-18)
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8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자기의 정신이 이상해지고
그 때문에 보좌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17절에 보니까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하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이와 같이 꿈으로 계시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곧 인생으로." 그 다음에 17절 제일 끝을 봅니다. "알게 하려 함이니라."
인생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그와 같은 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호
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곧 인생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고 했는데 무엇을 알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아무리 대단한 것 같아도
그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의 주인 되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내 위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머리에 모자 같은 것을 씁니다. 그것을 키파라고 합니다.
그것을 쓰는 이유는 내 위에
하나님이 지금도 계신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
리도 이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내 위에 계셔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나의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신다,
또 하나님께서 내 위에 계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신다.
이러한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는,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잘나서 바벨론 왕국의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잘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번째로,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지극히 낮은 자라도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얼마나 천한 자리였습니까? 낮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이방 나라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제일 말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었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아무 힘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얼마든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더 귀하게 사용해주시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으로 하여금, 또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꿈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큰 업적을 세운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했습니다.
대명사 "나"를 쓰고 이름을 쓴 것은 권위 있게 말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에게 말한 내용이 꿈의 전부입니다.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벨드사살은 다니엘의 바벨론 식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꿈의 내용을 다 말했으니 너도 나에게 해석을 밝히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내 나라 모든 박사가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다니엘이 오기 전에 바벨론의 모든 박사를 불렀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늘 여러분도 먼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이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천덕꾸러기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 사람 좀 안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왜 또 나타나나,
저 사람 언제 이 직장을 그만둘까, 이런 평판을 듣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한 마디로 신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니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주변에 있는 사람이 인정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셔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다니엘은 바벨론의 박사로서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꾀부리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꾀 피우지 말고 게으지 말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 잘 감당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니엘처럼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복된 이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0강 걱정해주는 마음(4:19-21)
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의 꿈을 다니엘에게 말하는 동안
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서 4장에서 다니엘은 아직까지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경청하고 들어줄 수 있는 열린 마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어떤 사람들을 보면 남이 이야기하려고 하면
"가만히 있어, 내 말 좀 들어봐"라고 하면서 자기 말하기 바쁜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하고 끼여들고 나서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다니엘처럼
가만히 들어줄 줄 아는 마음이 열린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아쉽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말하는 동안에 인내하면서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왕의 이야기가 다 끝났습니다. 다니엘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라고 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꿈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은 느부갓네살 임금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즉시 알았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왕을 짐승처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이상해져서 보좌에서 물러나야 하고, 왕궁에서 쫓겨나고,
들에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하늘의 이슬에 젖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이 왕에게 내리신 심판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왕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생각할 때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는데
좋지 않은 꿈의 해석을 어떻게 왕에게 잘 말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느부갓네살 임금이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자기와 자기의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얼마나 잘 대우해주었습니까?
그 덕분에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지만 평안하게 잘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보좌에서 쫓겨나면 다른 임금이 왕이 될 것이고,
그러면 동족 이스라엘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지를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에 번민이 가득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충격에 빠진 모습, 안색이 창백해진 모습을 보면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위로합니다. 어떻게 위로하는지 보십시다.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무슨 말을 하든지, 꿈이 아무리 나쁜 꿈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다니엘이 힘을 얻고 꿈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왕이 꾼 꿈은 좋은 꿈이 아니라 나쁜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돌려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사실 다니엘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왕이 잘못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모시고 있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윗사람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져서는 안되는 마음입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상관이 존경받고 잘 되기를 바라는 다니엘의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20절과 21절에서 다니엘은
왕이 자기에게 말해준 꿈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20절과 21절을 보시고 저는 11절과 12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해준 꿈 내용 가운데 무엇이 빠졌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1∼12절입니다.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다음은 20∼21절입니다.
"20 왕께서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에 살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었나이다"
다 똑같은데 제일 마지막 부분이 다릅니다. 사소한 부분입니다.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와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라는 말입니다.
중복되는 말이어서 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다니엘은 왕이 말한 꿈의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반복을 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이여, 왕께서 제게 말씀하실 때
제가 딴청 피우지 않고 주목해서 빠짐없이 잘 들었나이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잘 들어야 해석도 제대로 정확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잘 듣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임종을 앞둔 분이었습니다.
이분이 목사님을 보더니 울면서 참회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습니다.
목사님의 교회만 해도 20년 넘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늘 딴청만 피웠습니다.
수첩과 연필을 꺼내들고 설교하시는 동안 사업 구상을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말씀을 들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그런 분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말할 때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해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딴청을 피워서야 되겠습니까?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 이야기를 잘 귀담아 들었을 때,
해석을 바로 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잘 귀담아 들어야
살아가면서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딴청만 피우고 있는데,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다니엘처럼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음성 듣고, 오늘도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1강 나무를 베고 멸하되 그루터기는 남기라(4:22-24)
4:22-24
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다니엘은 20∼21절에서 왕의 꿈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이야기하는 동안 정확하게 들었다는 것을 먼저 밝힌 뒤에 오늘 본문부터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 보십시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땅의 중앙에 한 큰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는 곧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느부갓네살 임금도 어느 정도 마음속에 그럴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신뢰하고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다니엘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다.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나무가 자라고 더욱 튼튼해지는 것처럼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더욱 강성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하늘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나무가 자라서 하늘에 닿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성과 대를 쌓고 그 꼭대기가 어디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까?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교만한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 때 선악과를 따먹은 후 계속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높아지려고 하다가는 낮아집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거꾸로 짐승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낮아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이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찰스 에이 베어드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역사를 연구하고 나서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찰스 에이 베어드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로, 어느 시대 어느 문명이든지 간에 권세욕에 빠진 사람은 방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망해가기 바로 직전을 보면 교만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벌을 받아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 박정희 대통령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한 두 번 하다가 그만 두면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을 텐데 계속해서 하려고 하다가 자기도 죽고 가정도 풍비박산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닙니까?
두번째는,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으로 보응하시고 선한 사람은 하나님이 복 주시고 선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도는데 지금도 쉬지 않고 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인간의 악까지도 초월 통치하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도 결국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사탄이 시킨 것입니다. 사탄이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해준 것입니다. 인류의 구속, 구원의 사역을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번째로,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듯이, 역사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오히려 소망의 별이 반짝이더라는 것입니다.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이다, 희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자세히 보면 소망의 별이 더욱 반짝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줄 압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하늘에 닿고자 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해 버리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결국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23절입니다. 왕이 교만해서 어떤 벌을 받았는지 보십시다.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 천사입니다. 순찰자는 잠을 잡니까? 안 잡니까? 자지도 않고 왔다갔다하면서 살피는 사람이 순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것처럼 천사도 자지 않습니다. 인간사를 살피고 있습니다.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나무를 베고 멸하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가 자랑하고 욕심부리던 권좌에서 쫓겨나서 어려움에 처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라고 했습니다. 비록 나무가 잘려지더라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비록 벌을 받아 권좌에서 쫓겨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루터기에서 싹이 돋고 움이 트고 가지가 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느부갓네살 임금이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난 뒤에는 다시금 회복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루터기를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정신병원에 가면 쇠고랑으로 채워서 남을 해치거나 스스로를 자해하지 못하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병에 걸릴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철과 놋줄로 동인다는 말을 "철과 놋줄로 두른다, 울타리를 치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병에 걸려서 미친 사람처럼, 짐승처럼 살아갔지만 왕이고, 또 회복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호위병들을 시켜서 왕을 보호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왕궁에서 쫓겨나서 산과 들에서 거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집에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들에서 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라고 했습니다.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음식의 분량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소가 풀을 뜯어먹는 것처럼 느부갓네살 임금도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풀을 뜯어먹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워 울프"라고 해서 사람이 보름달이 뜨면 자기를 늑대로 생각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피를 먹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이런 병에 걸렸습니다. 자기를 짐승처럼, 소처럼 생각하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칠 년 동안 그런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회개하기까지 칠 년을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24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명정이라는 말은 명하시고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찰자를 통해서 명하시고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왕에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자기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행동하려고 하다가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내 위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미로 모자를 씁니다. 비록 우리 머리 위에 그런 모자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 지금도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초리로 나를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오늘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복이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2강 공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풀면(4:25-27)
4:25-27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을 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벌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 25절에 있습니다.
25절을 한번 보십니다. 첫째로,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까? 본문 앞에 있는 16절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음이 짐승의 마음이 되어서 짐승처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하들이 왕에게 조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짐승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처럼 울음 소리를 내고 밥상을 받아서 다 엎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소처럼 아무데나 대소변을 싸고 네 발로 기어다니고, 밥을 갖다 주어도 풀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밥을 먹지 않으니 어떻게 인간 세계에 살 수 있겠습니까?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다.
두번째,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자기를 짐승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들짐승과 함께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말하는 들짐승은 사자라든지, 호랑이, 늑대와 같은 사나운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에 있는 짐승, 예를 들어서 소라든지 말, 양과 같은 짐승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들짐승과 함께 거할 뿐만 아니고 마치 "소처럼 풀을 먹으며"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소라고 생각하고 소처럼 풀을 먹게 됩니다.
네번째로,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사람이라면 낮에는 들에 나가더라도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짐승처럼 생각을 하니까 돌아올 생각을 안합니다. 들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까 하늘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신병이 얼마나 계속된다고 했습니까?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7년 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기를 고양이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3년 동안 자기가 고양이라고 생각하며서 지내다가 13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의학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짐승처럼 낮아지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비로소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주권은 깨닫고 난 뒤에, 나라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그래도 아직도 한 가닥의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희망인지 보십시다. "또 그들이."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순찰자, 하나님의 명을 받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입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그랬습니다. 나무를 베되 완전히 베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루터기는 남겨 둔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루터기에서는 얼마든지 싹이 날 수 있습니다.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희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하나님의 주권을 왕이 알고 난 뒤에야,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을 알고 난 뒤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소망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병으로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왕이 뉘우치고 난 뒤에, 깨달을 것을 깨닫고 난 뒤에 다시 회복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의 아들이었던 아멜말둑이 7년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을 대신해서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27절에서 다니엘은 왕의 꿈을 다 해석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여, 내 말을 들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왕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권면을 하는지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자기가 하는 말을 잘 귀담아 듣고 이대로 행하면 좋겠다는 간언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했던 것을 다 회개하고 의롭고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의를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세 가지를 들어주셨습니다.
첫째 의는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제할 때 큰 거리 어귀에 가서 나팔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입니다.
두번째 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큰소리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의는 금식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슬픈 기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보이도록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돕고 기도하면서 당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시고, 또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넘어가서 30절을 보시겠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그 큰 바벨론 도성을 건설하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불쌍하고 힘없는 평민들을 얼마나 동원했겠습니까? 말 안 들으면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터로 삼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벨론 도성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런 흉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힘없고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김으로서 죄악을 사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두 가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공의를 행해야 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왕에게 정신병으로 내리셨던 하나님의 심판이 취소되고 왕의 평안함, 건전한 정신이 혹시 장구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혹시"라고 말을 썼겠습니까? 왕을 심판하고 용서하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권한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27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제목을 찾아야 할 줄 압니다. 교만하지 마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겸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들도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잊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 일을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하지 말고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시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나같이 못난 것도 사랑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가 대할 모든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탕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내게 일백 달란트를 빚진 이웃들에 대해 넘어가기도 하고 용서해 주기도 하고 탕감해 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함이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지속되는 복되고 즐거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3강 교만은 패망의 선봉(4:28~31)
4:28~31
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들짐승이 된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William Blake(1795)
2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보았던 그 모든 일을 말합니다.
특별히 두려운 일,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심판으로 주어지는 일이
다 남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찰자를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벌하리라 말씀하셨던 모든 내용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 자체도, 자기의 운명 자체도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아무리 날고 뛰어도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그렇게 약합니다.
야단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주 없이 살수 없는 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 다음에 2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열두 달이 지난 후에"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꾼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이 열두 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려주신 기간입니다.
왜 열두 달을 주셨겠습니까?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하
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주신 날들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김으로써
당신의 죄를 속하시기를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열두 달 동안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1년이 지나면서 아무 일도 안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꿈에 대한 충격과 두려운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건망증이 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진하게, 그렇게 강하게 역사하셨으면,
깨닫고 은혜로 주어진 기간 동안 회개하고 자기의 모습을 돌이켜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열두 달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회개하라고 주신 날들이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새"라고 했습니다.
옛날 중근동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지붕을 뾰족하게 짓지 않았습니다.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아파트 지붕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에 올라서 산책을 한다든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베드로도 욥바의 어떤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을 보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자기의 궁 높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거닐었습니다.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새."
여기에 동사 "거닐 새"가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사형은 계속하는 것을 의미할 때 쓴다고 했습니다.
아마 평소에도 지붕 위에 자주 올라가서 바벨론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자기의 능력, 권세, 위엄, 영광 등을 생각하면서 자고하였을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그냥 바벨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큰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죽고 나서 한 100년 정도 되었을 때,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라는 사람이 바벨론을 방문했습니다.
바벨론의 위용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또 그 뒤에 200년이 지난 뒤에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벨론에 와서
그 위용을 보고, 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본부를
바벨론에 두어야겠다고 계획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도성입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바벨론 성은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깥벽인 외벽의 길이가 17마일, 우리 식으로 하면 20㎞가 넘습니다.
엄청난 크기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을 하면 사방 각각 5㎞씩 해서 전체 20㎞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면이 10리가 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벽의 두께가 7미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위로 병거가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외벽의 두께는 6m입니다.
벽의 높이는 13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높습니까? 대단히 큰 도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부인이 많이 있었겠지만,
특별히 사랑했던 부인이 메대의 공주였던 바벨지스(?)라고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메데 공주의 고향은 산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평지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 부인을 위해서 바벨론 도성 안에
인공적으로 큰 산을 만들었습니다. 야자나무도 심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이 산이 고대 사회에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애굽의 피라미드도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지 않습니까?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정도로 큰 산을 자기 부인을 위해서
바벨론 도성 안에 인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성을 밖에서 보면, 성벽이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크게 만든 그 산이 아주 장엄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강조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내가 내 능력과 내 권세로 건설하여 내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발굴된 벽돌이 있습니다.
그 벽돌을 보면 전부 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이름이 찍혀 있습니다.
도장들이 쾅쾅 찍혀 있습니다.
자기의 권세, 자기의 능력, 자기의 위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우리 인간이 인간의 영광을 나타내니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내가 이 큰 바벨론 성을
내 힘으로 세우지 아니했느냐고 자고했습니다.
교만이 앞서가면 뒤에 따라오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이 앞서가면 뒤에는 꼭 패망이 뒤따라옵니다.
자고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겠습니다. 31절입니다.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 그의 자고함이
그가 당할 패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고하는 말, 교만한 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는 말이
자기 입에 있을 때에 원인이 되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주의 종을 통해서 들린 것이 아니라,
하
늘에서 직접 소리가 내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은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나갈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떠났느니라"고 되어 있습니까?
"떠났느니라"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 40:8에서 말씀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고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전적으로 누구의 은혜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
리를 귀하게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교통 사고를 당해야겠다 생각하고
교통 사고를 당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위암에 걸려야겠다고 원해서
위암에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약합니다.
자기 몸 하나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약한 존재인 줄 깨닫고,
"주여,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오늘도 제 앞길을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를 귀하게 쓰시고, 우
리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4강 현실로 이루어진 꿈(4:32~33)
4:32~33
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
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계속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고,
순찰자, 거룩한 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심판의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나온 내용은 이미 다니엘이 25절에서 예언했던 내용 그대로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의 종 다니엘이 조언한 대로
주어진 일 년 동안에 회개했다면,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항복하고
죄를 속하기 위해서 공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겼다면
이와 같은 심판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어진 기회를
느부갓네살 임금은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종을 존경할 줄 알고
귀하게 섬길 줄 알고 하나님의 종의 말에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어린 시절에 제일 싫어했던 사람이 목사님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형편 속에 목사님만 심방 오시면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없는 형편에서도 꼭 쌀밥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보리밥이라도 한번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는데,
목사님만 오시면 쌀밥을 정성껏 만들어서 대접을 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목사님께서 저 밥을 몇 숟갈이라도 남기시면 좋겠는데 하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야속하게도 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싹 긁어서 다 먹는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물까지 부어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야속하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제일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생각하니까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크게 쓰임 받는 것은
어머니가 주의 종들을 잘 받들어서 섬기고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도 똑같은 인간입니다.
왜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인간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해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다 저렇다 따질 것 없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노아가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함이 노아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판했을 때
하나님이 함을 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종을 잘 받들어 섬기고,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하나님의 종의 말에 순종하고 귀담아 들을 때,
나와 나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만약 다니엘의 조언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심판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보좌에서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짐승의 마음을 품고서 짐승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자꾸 들로 뛰쳐나갑니다.
자기의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성난 소처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머리를 받고 뒷발길질을 합니다.
"음매!" 소리를 내니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그 다음에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에서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들짐승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이 신하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지금 다니엘은 박수장입니다.
또 바벨론의 총리 대신이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병이 들어서 미쳐 있지만,
7년이 지나면 다시 정신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왕을 잘 보살펴야 한다."
청와대에 가면 청와대 뒷산이 있습니다.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도성 안에도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비록 정신이 이상하지만
왕을 모셔다 놓고 잘 보살폈을 것입니다.
철과 놋줄로 울타리를 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면서 왕을 보살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소처럼 생각하는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기를 인간 이상으로 생각했던 느부갓네살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반대로 인간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한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진리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고했습니다.
높아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는데, 오히려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7년의 기간을 지내서라는 말입니다.
이 7년의 기간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의 아들 아멜말둑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나중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시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그 사실을 알고,
아멜말둑을 종신토록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감히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왕 노릇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루리라 하더니."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나만 높이는 것이 교만 아니겠습니까?
30절에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뭐라고 자기를 높였습니까?
"이 큰 바벨론 도성은 내 능력과 내 권세로
내가 만들었고 내가 건설했고
내 위엄의 영광을 삼았느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자기를 높인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겸손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겸손히 주님 앞에 머리 숙였습니다.
"주여,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줄 알아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줄 알아서
오늘도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겸손입니다.
늘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나를 바라보지 말고,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겸손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도록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고할 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빼앗아서
겸손했던 다윗 임금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겸손한 자, 비천한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왕궁 안에 있습니까?
식당에 앉아 있습니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9절에 보니까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궁의 지붕에 올라가서 바벨론을 바라보면서
자고하면서 만족해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아직도 마음속에 교만이 가득 차서
자고하고 있을 그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라고 했습니다.
들에서 사니까 비바람을 다 그대로 맞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낮이 되면 들에 나갔다가도
밤이 되면 집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자기를 짐승으로 생각을 하니까
그대로 들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 몸이 젖을 수밖에 없고,
또 눈이 내리면 눈을 맞으면서 살아가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화씨로 여름철에 110도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제가 계산을 하지 않았지만은 110도면 섭씨 40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뜨거운 날씨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수밖에 없고
또 겨울철에는 화씨 20도까지 내려갑니다.
20도는 영하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면서
7년 동안 그렇게 산 것입니다.
자기를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다가,
결국은 인간 이하의 처참한 지경에 처하고 만 것입니다.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깎을 수 없으므로 계속해서 자랍니다.
머리를 빗지 않으니까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하가 가까이 가서 머리 깎으려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소처럼 머리로 사람을 받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접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를 깎을 수가 없습니다.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손톱과 발톱도 깎지 않으니까 길어서 새 발톱과 같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고하다가 결국은 소처럼 생활하게 되고,
모습은 새처럼 비참한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아침 나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심정으로
하루를 지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심정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에게 주어진 열두 달 동안
애통하는 마음으로 두 손 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했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셨겠습니까?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들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쉼을 다 받으시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5강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4:34~37)
4:34~37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 찬양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교만했던 느부갓네살 임금을 낮추기 위해서
7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왕위에서 쫓겨났고 사람들에게서 쫓겨나서
짐승들과 같이 거하고,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비극적인 상황이
7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4절 보십니다. "그 기한이 차매."
몇 년이 지났습니까? 7년이 지났습니다.
7년이 지난 뒤에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교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볼 줄 몰랐습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알았고, 자기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인간 이상으로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인간 이하로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짐승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었던 교만이 사라져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뉘우치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도와 주옵소서. 저는 지극히 낮고 천한 존재입니다."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세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우러러볼 줄 모르고, 나 자신만 생각하면서,
나만을 위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바로 그때에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짐승의 마음이 다 사라지고,
다시금 인간의 마음이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성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마음, 짐승의 마음,
깨끗하지 못한 마음들이 다 사라지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마음, 깨끗한 마음, 지혜의 마음,
주님의 심정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리학에 불가입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공간에 두 물체가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물컵에 물을 부을 때는 컵 속에 있던 공기가 나옵니다.
한 물컵 속의 공간에 물과 공기가 동시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주님으로 충만하면,
세상의 더러운 생각들이 내 마음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주님이 없기 때문에,
온갖 세상적인 지저분한 짐승의 마음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 짐승의 마음을 다 떨쳐주시고
오직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주셔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인간의 마음을 다시 받게 되었을 때
느부갓네살 임금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의 모습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옷을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7년 동안 머리를 한번도 깎지 않고, 또 빗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머리털이 독수리 털 같았다고 했습니다.
7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7년 동안 손톱, 발톱을 깎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까?
새 발톱같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흉측한 모습이었겠습니까?
"내게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나."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온전히 회개하는 모습이 34절 하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그에 비해서 나는 어떻습니까?
지극히 천하고 낮은 자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로, "감사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생명을 온전히 거두어가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또 나에게 인간의 마음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것 감사합니다."
또 자기에게 정신병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할 수 있고,
지극히 높으신 이를 깨닫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병을 주신 그 자체도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느부갓네살 임금이 감사했습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둘째로,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안개와 같습니다.
새벽에 자욱하게 끼었다가 동편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언제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존경하였노니." 감사드리고, 찬양하고, 존경했습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을 존경할 줄 몰랐습니다.
삼상 2:30 하반부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존경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길 수 있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우리를 귀하게 쓰십니다. 높여주십니다.
동사가 세 가지 나왔습니다.
감사했고, 찬양했고, 존경했습니다.
과거에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통해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알고,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할 줄 알고,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할 줄 알았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하나님은 영원히 사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나라는 잠시 잠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인간 나라,
세상을 위해서 너무 땀흘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바벨탑처럼 쌓은 것 같지만 다 쓰러지고 맙니다.
대대에 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땀흘리고 애쓰고 노력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 하늘 나라 창고에 보화를 쌓아두면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만이 대대에 이를 것입니다.
그 다음에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나님 앞에서 땅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티끌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nothing입니다.
전혀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이 땅의 모든 거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군사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시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언제 보았습니까? 풀무불 속에서 보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이기 위해서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서
자유롭게 거니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자기의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순찰자, 거룩한 자가 자기로 상징되는 땅의 중앙에 있는 큰 나무를
사정없이 베어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사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이신 것을
느부갓네살 임금이 직접 체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니엘과 세 친구가 물만 마시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니까
그 얼굴빛이 더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어떠했습니까?
자기에게 충성했던 신하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해서 풀무불 속에 던지는 자기 신하들에게
불이 붙어서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손 하나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연약합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땅 중앙에 한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바로 느부갓네살 임금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순찰자, 천사가 자기를 벨 때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땅의 거민에게도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 임금은 여러 번의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누가 하나님의 손이 하시는 일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냐 할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다스려 나가시고 섭리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 임금이 깨닫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에 우리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조
용히 머리를 숙여야 할 줄 압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내게 생명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주의 전으로 불러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이 아침에 내 마음을 드릴 수 있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감사의 조건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고통을 주시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는 줄 알고,
감사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이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면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면서,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있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없어질 세상만을 위해서 땀흘리지 말고,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지 말고,
대대에 이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거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사든지, 땅의 거민이든지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오
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할 수 있는
이 아침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6강 교만한 자를 낯추시는 하나님(4:36~37)
4:36~37
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 벌을 주셨습니다.
7년 동안 짐승의 마음을 주어서 짐승처럼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다 지났을 때,
드디어 느부갓네살 임금이 회개하고 겸손히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36절입니다. "그 동시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온전한 회개를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그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짐승의 마음이 떠나가고
인간의 마음이 다시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바벨론 나라의 영광도 다시금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역사적으로 아주 보기 드문
강력한 권세를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다 정복했습니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왔습니다.
다니엘도 그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왕좌에서 쫓겨난 7년 동안,
아무래도 바벨론의 국력이 많이 쇠하여졌을 것입니다.
나라의 영광이 많이 감하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7년 뒤에 느부갓네살이 왕위를 회복하면서
과거에 느부갓네살 임금 때 누렸던 나라의 영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나라의 영광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임금 개인의 위엄과 찬란한 광명도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회복되고, 국가적으로도 회복되었습니다.
계속 보시겠습니다.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스렸던 모든 신하들이
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찾아와서 머리를 숙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누구의 영향이 컸을 것 같습니까?
박수장이었고, 행정의 수반이었던 다니엘의 역할이 컸을 것입니다.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7년 동안 미친 짓을 하고 정신병자로 살았지만,
다니엘이 신하들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의 건강은 틀림없이 곧 회복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각자에게 주어진 국사에 성실히 임하기를 바란다."
다니엘의 말을 듣고 신하들이
두말없이 주어진 일에 충성하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다니엘은 윗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회복시켜 줄 것을 알지만,
모른 체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
저 사람을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얼마든지 대신 왕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윗사람을 잘 받들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모시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니엘처럼 자기 위치를 잘 지키고,
윗사람을 잘 받들어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느부갓네살 임금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다 느부갓네살 임금을 다시 왕위에 세워주었습니다.
평화롭게 다시금 자기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보세요.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과거보다도 더 놀라운 위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욥도 그러했습니다.
환난을 당한 이후에 오히려 환난을 당하기 이전보다
두 배의 복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때로는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임금처럼 우리가 온전히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환난을 당했을지라도 환난 이후가
훨씬 더 낫게 역사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갈수록
더 나아지는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36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우리가 느부갓네살 임금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36절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몇 번 나오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읽어봅니다.
거기에 일인칭 대명사 "나"라고 하는 말이 몇 번 나오고 있는지 손꼽아보세요.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몇 번 나옵니까? 열 번 나옵니다.
전부 자기 입장에서 나! 나! 나! 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예전에 그랬듯이 "나"를 꼭 붙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할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말을 해야 할 텐데,
과거에 바벨론 왕궁 위에서 바벨론 도성을 바라보면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나의 권세와 능력으로 나의 도성을 삼고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했듯이,
여전히 나! 나! 나!입니다. 잘못이지요.
버릇이라는 것은 참 고치기 어렵습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잘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인홀트 니버라는 유명한 사람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그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침착함과 냉정함을 주옵소서.
그리고 아울러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고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여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키가 크게 만든 사람도 있고,
키가 작게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살아야지요.
제가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내가 키가 좀 크고 남편이 키가 좀 작습니다.
결혼식을 할 때 부인이 키가 크니까 남들 보기에 안 좋아 보일 것 같아,
일부러 다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구부정하게 해서
한 시간 동안 서 있느라고 혼났다고 합니다.
키가 크면 큰 대로 서야지, 구부정하게 서 있었으니
오히려 얼마나 멋이 없었겠습니까?
키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지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염려를 한다고 키가 한 자나 자라겠습니까?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키가 작다고 크게 보이려고 목을 자꾸 길게 잡아 빼면
얼마나 교만하게 보이겠습니까?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일평생 살아온 습관을 어떻게 쉽게 고치겠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삶의 철학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고쳐집니다.
그 버릇이 어떻게 고쳐집니까?
젊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어떻게 하시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젊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3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찬양한다, 칭송한다, 존경한다는 거의 비슷한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한다, 칭송한다, 존경한다는 단어를 모두 분사형을 사용했습니다.
분사형이라는 것은 계속되는 것을 말할 때 쓴다고 했습니다.
찬양하고, 칭송하고, 존경하는 것을 한 번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 찬양하고,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일을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때부터 일평생 동안 계속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왜 느부갓네살 임금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칭송하고, 존경했습니까?
그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로,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둘째로, 하나님의 행하심이 의로우시고,
세번째로, 하나님은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능히 낮추시는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 틀
림이 없습니다.
누가 교만하고, 누가 겸손한지 하나님은 다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의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한 자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실수가 없습니다. 진실하십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두번째로,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짐승의 마음을 주어서 7년 동안 고통 당하게 하신 일도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옳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 겸손하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과거에 자기가 교만했던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교만했구나." 자기가 교만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제 그가 겸손해진 것 아니겠습니까?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잠 16:18을 찾아서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 있으면 꼭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패망입니다.
거만한 마음이 있을 꼭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넘어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시면서,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시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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