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2장 "느부갓네살 왕의 꿈"<박상훈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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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 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방언으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1장 제일 마지막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몸으로 장수할 수 있게 해주셨고, 또 아울러서 비록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 나라에서 높이 들려서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국을 위해서 기도한 그대로 다니엘은 조국의 광복을 보았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다 고토로 귀환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건강하시고 장수하시고 마음속에 있는 기도의 제목들, 품은 뜻이 다 이루어지는 귀한 축복이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부터 시작해서 고레스 왕 때까지 있었는데, 2장부터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 때부터 시작해서 고레스 왕 때까지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펴봅니다.
오늘 2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 때 겪었던 첫번째 사건입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 지 이년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느부갓네살이 왕이 된지 오래 되었다는 말입니까? 얼마 안되었을 때라는 말입니까? 얼마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아직까지 안정이 안되었을 때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왕이 되자마자 여러 나라들을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나라들이 배반하지 않을까? 반역을 하지는 않을까? 세금을 제대로 바칠까? 이 큰 나라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나? 신하들은 내가 통솔하는 대로 잘 따라올까? 모반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뭐가 뒤숭숭합니까?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 지 이년에 무엇을 꾸었습니까?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느부갓네살이 있은 지 이년에 꿈을 꾸었다고 했는데, 이때 다니엘은 무엇을 하고 있는 중입니까? 예, 훈련 중이었습니다. 훈련기간이 몇 년이었습니까? 3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원년에 유다를 정복했고 그때 다니엘 등이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아직 훈련 중에 있었습니다. 그때의 사건입니다.
2장 하반부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큰 신상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심히 두렵다고 했습니다. 꿈에 그런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도무지 꿈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꿈을 꾸고 나면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꿈을 개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 사람들은 꿈을 꾸고 나서 기억을 하면 그 꿈에 대한 해결이 있는데 신이 다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꿈을 잊어버리면 신이 노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신이 노하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가 꾼 꿈이 무엇인지 꿈 자체를 기억나게 하려고 명했습니다.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바벨론의 모든 지식인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직도 밤이 깊은 시간입니다. 새벽 2시나 3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왔습니다. 왕이 부르는데 감히 지체하고 꾸물댈 수 있습니까? 즉시 왕 앞에 왔습니다. 왕 앞에 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깊은 밤이라 왕 앞에서 졸았겠습니까?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왕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나님 앞이므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 인간의 생명을 영원토록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그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늘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 느부갓네살 왕 앞에 온갖 지혜자들이 다 와서 서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권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포악한 임금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벨론의 박사들은 그 꿈을 알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다.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꿈 자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신이 노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고통 속에서 잠을 못 이룬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까 갈대아 술사들이 대표로 왕에게 말을 했습니다. 무슨 방언으로 말했다고 했습니까? 아람 방언으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람 방언은 지식인들이 다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쳐들어 왔는데 그때 앗수르 왕의 신하였던 랍사게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서서 큰소리로 하나님을 훼방하면서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말하는데 유다 방언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무슨 말로 하고 유다 방언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아람 방언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지식인들은 아람 방언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람어는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사 나라가 섰을 때, 바사 나라의 국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했을 때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람 방언이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을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달리다굼"은 무슨 뜻입니까? "소녀야 일어나라." "에바다"는 무슨 말입니까? "열려라." "마라나타"는 무슨 뜻입니까? "주여 오시옵소서." "게바"는 무엇입니까? "반석, 바위"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헬라말입니다. 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입니다.
아람어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말을 하는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제가 물어봅니다. 지금 갈대아 술사들은 왕을 무엇처럼 여기는 것입니까? 사람은 만세수를 누릴 수 없습니다. 만년을 살 수 있는 것은 신밖에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왕을 마치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까? 왕이 하나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4장에 가서보면 알지만 느부갓네살 임금이 얼마나 추한 모습이 되었습니까? 교만했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정신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쇠고랑 차고 소처럼 풀을 뜯어먹었습니다. 사람이 짐승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중요한 교훈을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세요. 꼭 낙심하게 됩니다.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한 분만 늘 의지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그러면 실패가 없습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갈대아 술사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계속 보십시다.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지금 신하들은 왕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습니다. 왕은 꿈 자체를 알고 싶어하는데 신하들은 무슨 꿈인지 꿈을 먼저 말해주면 해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신하들에게는 꿈을 해몽하는 책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돼지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돈이 생각나세요? 옛날에 저의 어머니도 그러셨습니다. 돼지꿈을 꾸면 먹을 것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또 먹는 꿈을 꾸면 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바벨론 박사들에게는 경험적으로 해몽에 대해 적어놓은 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꿈을 자세히 말해주면 그 책에 의해서 설명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왕은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꾼 꿈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기다립니까?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다니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귀중한 가르침을 한 가지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다니엘을 위시해서 모든 사람이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중차대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사람은 그 위기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그 위기를 통해서 더욱더 귀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저와 여러분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 41:10을 암송하시지요? 다 함께 암송해보십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굳세게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풀무불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사자굴의 무서운 시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비록 다니엘이 위기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함께 하시면서 오히려 이 일을 통해서 다니엘을 발탁하시고 다니엘을 귀하게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것은 더 큰 축복의 자리, 성공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다니엘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시는 가운데 오늘도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1강 꿈과 해석을 알게 하라(2:5~7)
2:5~-7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왕이 된 지 이년이 되었을 때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특이한 꿈이었습니다. 두려운 꿈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꿈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꿈이란 신이 자기에게 계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꿈을 꾸었는데도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면 신을 화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길한 꿈이라도 꿈을 기억해서 꿈을 해석을 하면 불길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고대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아무리 생각해도 참 두려운 꿈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번민하였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박사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내가 꾼 꿈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니 내가 꾼 꿈이 무엇인지 내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술사들이 왕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기가 꾼 꿈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갈대아 술사들이 말했습니다. "왕이여, 그 꿈을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왕과 갈대아 술사들 사이에 있었던 두번째 대화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명령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한번 이야기했으면 됐지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느냐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성격이 온유했겠습니까? 불 같았겠습니까? 불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꿈을 말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벌을 주겠다고 했습니까?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해석을 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까? 무슨 꿈이었는지 꿈을 먼저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해석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을 말하기 전에 먼저 꿈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해석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꿈과 그 해석을 알게 하지 아니하면 두 가지 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라고 했고, 둘째로는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벌은 고대 사회에 흔히 있던 것이었습니다.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하고 했습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임금 때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싸움이 붙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다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자기 공명심 때문에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살렸습니다. 나중에 한 선지자가 그것을 알고서는 직접 아각을 찍어 쪼갰습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였습니까? 아각을 찍어 죽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울 임금을 책망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한 선지자입니다. 예, 바로 사무엘입니다. 삼상 15:33 이하에 보면 나옵니다. 사무엘이 아말렉 왕 아각을 찍어 죽였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형벌이 있었습니다. 무슨 형벌입니까? 능지처참이라는 형벌입니다.
두번째 벌은,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흔적조차도 없이, 재기하지 못하게 완전히 파멸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왕하 10:27에 보면 예후가 바알 산당을 다 헐어버리고 거기다가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변소를 만들었습니다. 거기다가 다시는 바알 산당을 세우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반대로 6절을 보면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상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들입니까?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큰 영광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왕이 신하에게 줄 수 있는 큰 영광으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 앞에서 왕이 직접 상을 내리는 것도 큰 영광입니다. 또 신하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도 큰 영광입니다.
또 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임금이었을 때 신하였던 다윗이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에게 누구를 주었습니까? 자기 딸 미갈을 주었습니다.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도 신하에게 있어서는 큰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딸이 있다면 딸 중 하나를 주어 사위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갖 상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이 아무리 엄해도 갈대아 술사들이 보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리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협박을 하고, 아니면 아무리 큰 상을 주겠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꾼 꿈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누구만이 알 수 있습니까? 은밀한 곳을 살피시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해주시면 다니엘처럼 가능합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꿈을 말씀하여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7절과 4절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4절에서 갈대아 술사들이 첫번째로 한 말과 7절의 두번째로 한 말을 보면 7절에 한 단어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가 하나 더 들어가 있을까요? 7절은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왕이여 왕은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단어가 더 들어가 있습니까? "청컨대"라는 단어입니다. "please"라는 말입니다. 왕이 죽이겠다고 하니까 신하들이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별별 수단을 다 써도 사람은 남이 꾼 꿈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공중에 올라가시기도 하시고,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바다 위를 걸어가기도 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밤중에 물위를 걸어가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아주 힘들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머리 속으로 그림을 한번 그려보세요. 제자들이 힘들게 노를 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니까 밤중에 누가 물위를 걸어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겁을 먹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너무나도 반가워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예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사람은 물위를 걸어갈 수 없는데 예수님이 허락하시니까,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님이 능력을 주시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도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실 때 느부갓네살 임금이 꾼 꿈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해석까지 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물위를 걸어가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물결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에 베드로는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급하게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이 자비와 긍휼의 손을 펴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실패를 하셨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복잡하게 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듯이 물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물에 빠졌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하다가 실패했으면 물에 빠진 것입니다. 왜 물에 빠졌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니까, 물질 바라보니까, 사람 바라보니까 빠진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펼쳐주셔서 우리를 다시금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베드로가 다시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손 붙들고 주님만 바라보시면서 물위를 걸어가시는 승리의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위를 걸어가는 우리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물위를 걸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생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물위를 걸어가시는 우리의 생업과 기업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2강 죽게 된 다니엘과 세 친구(2:8-13)
2:8-13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오늘 본문은 느부갓네살 임금과 갈대아 술사들의 사이에 있었던 마지막 세번째 대화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너희가 이름은 박사지만 다 사기꾼이라는 것입니다.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협잡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어떤 명령을 내렸습니까? 내가 꾼 꿈과 해석을 알게 하면 상을 주겠지만 만일 그것을 알게 하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몸은 쪼개고 집은 거름터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박사들을 꿈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자꾸 시간만 지연시킨다는 것입니다. "꾸물꾸물 대면서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애를 쓰고 있구나"라는 말입니다.
9절에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석을 하기에 앞서서 꿈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처치할 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5절에 보니까 "왕이 갈대아 술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 터를 삼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단순히 말로만, 위협적으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만든 금 신상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절하지 아니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산 채로 붙들어서 집어던졌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펄펄 끓는 소각로에 사람을 통째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 정도로 포악한 임금이었습니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로 겁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박사들을 다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꾼 꿈과 해석을 영영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신에게 벌을 받고 노함을 입을 텐데, 그것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신에게 벌을 받아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엉터리 같은 것들을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참 무서운 임금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보십시다.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왜 벌을 내리겠다는 것입니까? 이유가 두 가지 나옵니다. 첫째,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며." 지금까지 내가 꿈을 꾸고 나서 내 꿈을 해석해준 것은 다 거짓말로 꾸며서 헛된 말을 지절거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할 놈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내가 지금 내고 있는 화가 사르러들 때까지 너희가 기다리려고 그런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해석에 앞서서 먼저 꿈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희 말이, 너희 해석이 바르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10절과 11절을 보면 갈대아 술사들이 자기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세 가지로 인정을 했습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술사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첫째로,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무슨 뜻입니까? 왕의 꿈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 술사에게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역사적인 전례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아무리 권력이 있는 왕이라도 이런 일을 과거에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뭐하는 겁니까? 왕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잘못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왕이 꾼 꿈을 왕 앞에 보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누구라는 것입니까? 신들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술사들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인간의 능력 밖이다. 두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전례가 없다. 세번째로 이것은 신이나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 임금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두번째로, 자기가 지금까지 속은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나도 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언을 받고, 꿈을 꾼 것에 대해 해석 받은 것이 다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속은 것을 생각하니까 화가 납니다. 또 거기다가 한 가지 이유를 더 말하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갈대아 술사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왕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왕이 없었는데, 왜 느부갓네살 당신은 엉뚱한 것을 묻느냐고 왕을 나무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진노하고 통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나라의 녹이나 축내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니 다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지금 왕 앞에 서 있는 바벨론 박사들 사이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 아직도 다니엘과 세 친구는 훈련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박사들이 다 죽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훈련받는 훈련생들도 다 쓸모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습니다. 아마도 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마치 그 옛날 예후가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몰살시켰듯이, 느부갓네살 임금도 한자리에 바벨론 박사들을 모아놓고 죽이려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훈련받는 사람들도 찾은 것입니다.
큰일났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우리의 친구 다니엘도 죽게 되었고 다니엘의 세 동무도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새벽기도 끝나고 쏜살같이 가지 마시고 우리의 친구 다니엘과 세 동무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주십시다.
시 50:15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얼마나 능력 있느냐 하는 것은 내일만 되면 알게 됩니다.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지 내일이 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다.
다니엘처럼 세 친구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십시다. 혹시 여러분이 다니엘처럼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 위기가 변해서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건져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 아침에 기도해야 할 제목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3강 시간을 주시면(2:14~16)
2:14~16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고하매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우리가 어제 보았습니다만 바벨론 박사들이 끝내 느부갓네살 임금이 꾼 꿈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대단히 노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를 다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지금 훈련받고 있는 다니엘과 세 동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우리가 다니엘과 세 동무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자고 했는데 기도하셨습니까? 오늘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다니엘도 죽지 않습니다. 세 동무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살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왕의 명령에 따라 바벨론의 모든 박사를 죽이는 일을 맡은 집행관의 이름과 직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리옥입니다. 직분은 무엇입니까? 시위대 장관입니다. 다니엘을 죽이도록 되어 있는 이 사람이 결국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겠지만, 느부갓네살 임금과 다니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보살펴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우리를 해하고자 하는 아리옥과 같은 사람이 바뀌어서,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가 잘 되게 해주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는 귀한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실제로 그런 일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원수같이 지내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갑자기 가까워지고 아주 친한 이웃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원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 다 풀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그 원수가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존경하고 나를 도와주고 모든 일에 나를 믿어주는 가장 좋은 친구로 변하는 귀한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4절을 보십시다.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이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과 세 동무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옥이 다니엘을 만났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지금 아리옥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왔습니다. 다니엘은 겁에 질려서 벌벌 떨면서 말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낙심해서 풀이 죽어 어쩔 줄 몰랐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지혜를 주셨고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아리옥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 41:10에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다니엘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다니엘처럼 어떠한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5절을 보니까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왕의 장관 아리옥에게 물어 가로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 당신이 그렇게 급하게 왕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내게 알게 할 수 없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리옥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잔말 마라. 내 칼을 받아라." 이렇게 말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고하매"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법관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법관이 되셔서 다니엘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리옥이 왕이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다니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사명이 있습니다. 주인공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 주인공이 죽을 수 있습니까? 서부 영화를 생각해보세요.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수십 명이 총을 쏘아도,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주인공은 죽지 않습니다. 엑스트라는 빗나가도 죽지요.
사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엑스트라가 아닙니다. 주인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주인공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남자입니다. 아주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는 사명을 마음속에 가졌습니다. 결국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므온입니다. 이번에는 여자입니다. 결혼해서 7년 동안 남편과 같이 살다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84년을 과부로 지냈습니다. 7년을 결혼해서 살고 84년을 과부로 살았으니까 그것만 해도 91년이지요? 결혼을 몇 살에 했는지 모르지만 결혼할 때까지의 나이를 합하면 족히 100살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야로 금식하고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 안나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그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안나가 100살이 넘었는데 치매에 걸렸을 것 같습니까? 안 걸렸을 것 같습니까? 안 걸렸을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은 절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습니다. 제가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명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일을 다 하고 주 앞에 가리라는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부르지 않습니다. 또 금방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 때문에 다니엘이 죽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다. 16절에 보면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기한을 늦추어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왕이 허락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2:8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다른 바벨론 박사들이 시간을 늦추어달라고 했을 때 왕이 허락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안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기한을 늦추어 주면 말해 드리겠다고 했을 때는 허락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물론 왕은 다니엘의 모습 속에서 자신감에 차 있고 성실하고 진실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주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의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법관이 되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4강 은밀한 것을 보이신 하나님(2:17~19)
2:17~19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박사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박사들은 "안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고 하면서 세 번이나 할 수 없다고, 왕의 꿈을 가르쳐줄 수 없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기한만 늦추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떠한 태도가 신앙적인 태도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 어려운 난관에 부닥칠 때가 있습니다. 쉽게 좌절합니다. 낙심하거나 포기합니다. 꼭 하나님 없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다니엘처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우리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널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또 다니엘처럼 사자굴 속에 던져져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져도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바다 위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얼마든지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을 만나는 동안, 다니엘의 세 친구는 아마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초조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다. 17절입니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고했습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다니엘처럼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18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다니엘서를 보면 포로시대, 또 포로시대 이후에 하나님을 가리켜 특별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을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에스라서, 느헤미야서에서 많이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은밀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꾸었던 꿈과 해석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이 은밀한 일에 대해서 내게 알려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면 다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물질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 창고문이 활짝 열립니다. 여러분에게 건강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대인관계가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원수가 변해서 친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긍휼을 다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바벨론의 다른 박사들은 죽든지 말든지 상관 없고 나와 내 친구들만 살아나면 된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모르긴 해도 이미 살육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바벨론 박사들 가운데 이미 몇이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미 죽은 사람들처럼 살육을 당하지 않게 구하게 했습니다. 누구에게 구하라고 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구하게 했습니다.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문제 해결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는 누구에게 구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벧전 5:7에 보면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다 맡기라고 했습니다. 90% 정도는 맡기고 10% 정도는 내가 염려해야지요? 그게 아닙니다. 99%는 맡기고 1%는 내가 염려해야지요? 그게 아닙니다. 염려를 다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100% 몽땅 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다 주님께 맡기시는 이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됩니다.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만 그 문제를 가지고 끙끙 앓고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세 친구에게 그것을 다 이야기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에게도 육신의 가족이 있고, 믿음의 가족이 있습니다. 나 혼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고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갈 6:2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을 서로 지라고 했습니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서로 나누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첫째,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고, 둘째, 믿음의 가족들에게 조언하고, 함께 기도하자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밤에 잠을 잤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에는 밤에 잠을 잘 잤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님처럼 갈릴리 거센 풍랑에서도 고요히 잠을 청할 수 있는 평안이 다니엘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고 편안히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또 물어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잠자지 않는 분이 계셨습니다. 다니엘은 평안히 잠을 자도 주무시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역사하십니다. 양쪽 다 잠을 안 잘 필요가 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자도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양쪽이 다 뜬눈으로 밤을 새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평안하게 주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깨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꿈을 꾼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꿈을 꾸었다면 자신의 심리 작용에 의해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라고 했습니다. 그 이상을 누가 보여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꿈을 꾸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밤에 이상으로 나타나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다니엘이 응당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늘에 계셔서 우리의 기도에도 역시 귀를 기울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기도 제목들이 다 응답되어 다니엘처럼 여러분 마음속에 찬송이 충만한 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5강 하나님을 찬양함(2:20~23)
2:20~23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상 가운데 다니엘에게 은밀한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은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꾸었던 꿈과 해석입니다. 그것을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때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꿈을 알았으니까 밤중에라도 빨리 왕에게 뛰어가야지요?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감히 느부갓네살 임금을 깨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중간에 다리를 놓게 한 사람에게 가야지요?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아리옥입니다. 시위대 장관 아리옥에게 가야지요? 아니면 지금 걱정 가운데 초조하게 뜬눈으로 밤을 새고 있을 친구들에게 가서 자기가 이상을 보았다고 이야기해줘야지요? 어떻게 했습니까? 다 아닙니다.
다니엘에게 은밀한 것을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이 지금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을 앞세우는 다니엘의 삶을 본받아야 할 줄 압니다.
지금 다니엘의 나이가 얼마입니까? 다니엘이 14세 내지 15세에 붙들려 왔습니다. 지금은 느부갓네살 2년입니다. 훈련 기간이 1년밖에 안 지났습니다. 그러면 몇 살입니까? 예, 15세 내지 16세입니다. 중학교 3학년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그 위기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때,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렸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 승동의 자녀들도 어릴 때부터 다니엘과 같은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송입니다. 어떻게 감사의 찬송을 드렸는지 살펴보십시다. 20절을 보시겠습니다.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궁히,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라든지,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누구를 찬송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송의 이유, 찬송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지혜의 근원이 누구시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고 은밀한 것을 나타내 보이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니십니까?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권능입니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1절 이하는 이 두 가지, 지혜와 권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먼저 권능에 대해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때를 길게도 하시고 짧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누구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생사 화복은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왕의 권세가 제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왕의 때도 다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 권사님들이 오래 사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구에게 감사드려야 합니까? 조상 잘 만나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꾼 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머리와 팔, 다리로 나누어지고, 배와 넙적다리와 종아리와 발이 나누어진 신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멸망하고 나서 메대와 바사로 나누어지고, 그 다음에는 헬라 나라가 서고, 또 로마 제국이 서는 꿈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또 "왕들을 폐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왕이 멸망하고 나서 메대와 바사의 왕이 서고, 또 그 왕들도 폐하시고 헬라 왕을 세우시고, 또 헬라 왕이 지나고 나면 로마 왕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21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혜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더하신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지혜를 주신 분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온 것입니다. 또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 우리가 가진 총명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습니다. 빛이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아무리 은밀한 것이라도,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하나님의 빛 안에서는 다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표현했는지 보십시다.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열조가 어려울 때마다 도우셔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이제"라고 했습니다. 열조의 하나님께서 내가 맞은 위기를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극복하게 해주셨다는 말입니다.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아까 20절에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혜와 권능을 내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 찬미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3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내가 주께 구한 바 일"이라고 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구한 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함께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을 누구에게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상 중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고 하면서 다니엘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찬송을 불렀지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 시인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큰 태산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산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산 너머에 있는 그 산을 지으신 자를 보았습니다. 누구를 본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지금 다니엘 앞에는 태산보다 더 큰 엄청난 위기가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위기 상황, 태산보다 더 큰 문제만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계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위가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고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문제만 자꾸 쳐다보면 태산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것에 위축되고 맙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보지 말고 그 배후에 있는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놓인 태산같은 문제보다도 더 크고 능력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아무리 큰 문제라도 작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닥쳐와도 그 문제만 생각하지 마시고 그 문제를 능히 해결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지혜와 권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앞에 놓여 있는 문제를 바라보면 안됩니다. 아무리 내 앞에 태산보다 큰 문제가 놓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위대하시고 더 크시다는 사실을 생각하시면서,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앞세우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낫게 해주셨습니다. 아홉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분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병을 낫게 해주신 그날을 자기의 생일로 삼았습니다. 매년 그날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성전에 감사의 꽃을 봉헌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됩니다. 이와 같이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속에 찬송이 충만한 이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6강 내가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2:24-25)
2:24-25
이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이르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 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되 내가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 그가 그 해석을 왕께 아시게 하리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는 다니엘의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고, 25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리옥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과연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라고 했습니다. 14∼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아리옥의 관직은 시위대 장관이었습니다. 아리옥은 그때 바벨론 박사들을 다 죽이라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령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일을 맡고 있던 아리옥이 오히려 왕과 다니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아리옥에게 갔습니다. 아리옥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기뻐하소서. 내가 꿈을 알았나이다. 그러니 왕이 약속한 상금과 선물과 큰 영광은 이제 내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게 상을 주든지 말든지 상관없습니다." 이런 것은 전혀 다니엘의 안중에 없습니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 내가 왕의 꿈과 해석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바벨론 박사들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이 제일 먼저 무엇을 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제일 뒤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말의 영어 단어가 무엇입니까? joy입니다. j는 "jesus"의 약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앞세우고, 그 다음에 o는 "other," 다른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y는 "yourself," 너 자신을 제일 뒤에 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제일 앞에 둡니까? 예수님을 제일 앞에 두고, 그 다음에는 나보다 누구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제일 뒤에 나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joy입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 기쁨 생활입니다.
기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앞세우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제일 나중에 나를 생각할 때 따라오는 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오늘도 다니엘처럼 하나님 제일주의, 그리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25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리옥의 모습이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다. "이에"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이 아리옥에게 와서 "내가 왕의 꿈과 해석을 알았습니다"고 했을 때 아리옥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되"라고 했습니다.
왜 급히 들어갔겠습니까? 자세한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몇 가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꿈 때문에 번민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왕을 생각하는 충정에서 그랬을 수도 있고, 죽어가는 불쌍한 바벨론 박사들의 생명을 하나라도 구하기 위해서 급한 마음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6에서 왕이 약속한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자기 공명심에서, 왕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는데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내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 자기가 얻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공명심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안 믿는 사람의 생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우화가 있지 않습니까? 큰 연못에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가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서 연못가에 내려왔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기러기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기러기에게 자기 소원 하나를 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슨 부탁인데? 말해봐." "나도 너처럼 하늘을 날아보고 싶은데 딱 한번만 나를 도와서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해줘." 기러기는 개구리가 하늘을 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개구리가 작대기를 하나 주워왔습니다. "한쪽 끝은 내가 물고 다른 한쪽은 네가 물고 있으면 네가 하늘을 날을 때 나도 따라서 하늘을 날 수 있지 않겠니?" 마음씨 좋은 기러기가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기러기가 개구리와 함께 연못 위를 천천히 돕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밑에서 개구리들이 개굴개굴하면서 감탄을 합니다. "야, 멋있다. 저렇게 멋진 생각을 도대체 누가 했을까?" 그 소리를 듣고 하늘을 날고 있던 개구리가 입이 근지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누구긴 누구야? 내가 했지." 입을 벌려서 내가 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하늘에서 곤두박질해서 허리가 부러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가!"하면 허리 부러집니다. 조심하세요.
아리옥이 바로 그랬습니다. "내가 사로잡혀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 자기가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이 2:25 이하에 이제 아리옥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아리옥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때부터 느부갓네살 임금의 관심은 오직 다니엘에게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면 다른 사람이 인정해줄 것 같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허리만 부러집니다. 그러지 말고 다니엘처럼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을 언제나 앞세우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의견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도 얼마든지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고집만 내세우면 안됩니다. 잘못입니다. 내 의견이 옳을 때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역시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나도 잘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너무 고집 피우는 것도 잘못입니다.
항상 나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나는 제일 나중에 놓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입니다. 또 그리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다니엘의 모습을 본받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17강 왕 앞에 선 다니엘(2:26-28)
2:26-28
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얻은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왜 그렇게 귀하게 쓰시고 존귀케 하셨는지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왕의 시위대 장관 아리옥의 안내를 받아서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 섰습니다. 26절에 보니까 왕이 물어봅니다. "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벨드사살이라는 것은 바벨론 식 이름이고 다니엘은 히브리 식 이름입니다.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다니엘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벨드사살이라고 고쳤습니다. 벨드사살이란 이름의 첫 글자 "벨"은 바벨론 신의 이름입니다. "벨 신이 그의 생명을 보호하시리라"는 이방적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법관이시다"라는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관점에서는 다니엘의 이름은 벨드사살입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다니엘을 자기의 신하로, 바벨론 사람처럼 인정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관점에서, 다니엘서를 기록한 저자의 관점에서 다니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어디까지나 다니엘입니다. 그래서 계속 보면 다니엘이라고 나옵니다. 27절에 보면 "벨드사살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가 아니라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나를 벨드사살이라고 불러도 내 이름은 어디까지나 다니엘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지조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26절을 봅니다. "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지금 왕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잘 생겼고,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는지 그런 것이 관심사가 아닙니다. 왕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기가 꾼 꿈을 알고 그 해석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얻은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지금 왕은 다니엘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미심쩍어하고 있습니까? 미심쩍은 것입니다. "과연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아직도 확신이 안 서는 것입니다.
그때 27절에서 다니엘이 왕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가 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 다니엘이 "내가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대답했다면 이것은 누구의 태도와 똑같습니까? 우리가 어제 살펴본 아리옥의 태도와 똑같아집니다. 아리옥은 "내가 얻었나이다"고 했습니다. "내가"를 앞세웠습니다. 불신자는 자기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라고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개구리가 "내가"라고 하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허리가 부러지지 않았습니까? 허리 아프신 분들은 혹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지 않았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나이다"고 하면서 자기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또 "왕께서 꾼 꿈은 이렇습니다"고 하면서 그 꿈에 대해 바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은밀한 것을 자기에게 알게 한 분이 누구인지, 왕이 꾼 꿈을 자기에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말했습니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니엘을 귀하게 쓰실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27절을 한번 보세요.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바벨론 박사들이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세 번이나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박사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도록, 왕이 박사들을 죽이지 않도록 은연중에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마음이지요?
그리고 나서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박사라 해도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내 능력 밖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태산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것보다 더 큽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쪽이 막혔습니까? 서쪽으로 가세요. 서쪽도 막혔습니까? 남쪽으로 가세요. 남쪽이 막혔습니까? 북쪽으로 가세요. 동서남북이 다 막혔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눈을 들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생과 사를 가름하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원하시고 우리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자기에게 능력이 있어서 왕의 꿈을 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은밀한 것을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지요. 다니엘을 귀하게 쓰실 수밖에 없습니다.
28절 하반부를 계속 보십시다.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왕의 꿈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도 다니엘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Soli Deo Gloria!" 무슨 뜻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뜻입니다. "내가 했지"라는 소리는 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존 칼빈과 형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옛날 불란서 땅에 존과 찰스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불란서 식으로 하면 존은 장이고, 찰스는 샤를르입니다. 동생 존은 어릴 때부터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또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격이 북받쳐 오를 때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형 찰스는 자라면서부터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Soli Deo Gloria!"를 외칠 때마다 옆에서 "오직 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세속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허락하신 삶을 다 살았습니다. 먼 훗날 불란서 대백과사전에 이 형제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동생인 존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존 칼빈, 칼빈은 장로교 제도를 창시한 사람. 27세에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를 저술. 프로테스탄트 곧 개신교의 아버지. 민주국가와 자유주의 사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 이런 식으로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불란서 대백과사전이 장장 세 페이지에 걸쳐 존 칼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형에 대한 소개입니다. 단 두 줄입니다. 찰스 칼빈, 존 칼빈의 형. 부도덕한 삶으로 인해서 교회에서 치리를 당한 자.
똑같은 형제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다짐할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내 영광을 위해서, 세상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외쳤던 찰스는 결국은 부도덕한 삶으로 인해서 교회에서 치리 당하고 타락한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사적인 사실을 생각하면서 다니엘처럼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8강 하나님을 앞세움(2:29~30)
2:29-30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짤막한 말씀입니다만 참으로 은혜롭고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가 궁극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본문 말씀이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고있습니다.
지금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 서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것처럼 다니엘은 자기에게 은밀한 것을 보여주신 이가 누구인지를 왕에게 분명히 밝힘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 후에 오늘 본문에서는 걱정하고 있는 느부갓네살 왕을 안심시키고 위로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9절에서 다니엘은 왕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꿈을 꾸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여 왕이 침상에 나아가서." 침상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잠을 자는 곳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침상에 나아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지금 느부갓네살 왕이 위에 있은 지 몇 년이 되었을 때 꿈을 꾸었습니까? 2년이 되었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아직도 왕위가 든든하지 못합니다. 혹시 정복한 많은 나라들이 다시 공격해 들어오지 않을까? 신하들이 모반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여러 가지 정치적인 불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장래 일을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세상 여러 나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특별히 내 나라 바벨론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이런 것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라고 했습니다.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을 아시고 왕의 소원을 이루어주셨나이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이 왕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제가 일전에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자 할 때는 깊이 생각하자고 했습니다. "think"하자고 했습니다. t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true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냐, 추측해서 하는 말이 아니냐, 소문만 듣고 하는 말은 아니냐? 말을 할 때는 진실된 말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h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help, 이 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느냐, 득이 되느냐? 그런 말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에 i는 important, 과연 중요한 말이냐? 실없는, 쓸데없는 말이 아닌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n은 necessary. 이 말이 중요하고, 진실되고,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지금 꼭 해야 하느냐? 그 필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한번 더 기도하고 나서 말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에 있는 k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kind라고 했습니다. 친절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이 말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다니엘의 모습은 얼마나 친절한 모습입니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하는 왕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왕이여 걱정하지 마소서.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을 아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안심하소서." 왕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왕에게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이 왕을 아끼고 사랑하셔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위로하는 말입니다.
다니엘의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영광,
둘째로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나를 낮추는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 영광! 다른 사람은 높이고! 나는 낮추고! 이러한 가운데 참된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위대한 저술가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하고, 사회사업가이기도 하고, 발명가이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청운의 뜻을 품고 자기가 살고 있던 시골을 떠나 큰 도회지로 나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제 청운의 꿈을 가지고 도회지로 나가려고 합니다.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꼭 기억해야 할 귀중한 말씀을 한 마디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끔뻑끔뻑하면서 프랭클린을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멋쩍었겠습니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프랭클린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럼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저 가겠습니다"고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프랭클린이 키가 좀 컸던 모양입니다. 나오다가 "쾅!"하고 세차게 문지방을 들이받았습니다. 갑자기 들이받았으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프랭클린을 불러세웠습니다. "여보게. 자네 어디를 가든지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 다니게. 그리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해도 인상 쓰지 말고 살게. 이 두 가지를 명심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할 수 있을 걸세."
프랭클린은 목사님이 주신 이 두 가지를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겸손하게 살자. 아무리 나를 언짢게 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난다 할지라도 절대로 얼굴 색을 변하지 말자. 환하고 기쁜 표정을 짓고 살자." 이 두 가지를 어디 가든지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받은 교훈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다른 사람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심으십시다. 그래야 그 사랑이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옛말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 비판이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지 말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나를 낮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겸손하게 사시고, 또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라도 내색하지 마세요. 환한 표정, 기쁜 표정을 하시고 살아가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복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제19강 신상에 대한 꿈(2:31-35)
2;31-35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에게서 알고자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꾼 꿈을 알고 싶은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그 꿈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오늘 본문에서 우선 느부갓네살 임금이 꾸었던 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이 거대한 신상을 보았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두번째 장면은 거대한 신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박살이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장면입니다.
31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왕이여 내가 보니 큰 신상이 서 있나이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관점에서, 왕의 입장에서 다니엘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생각이 참 깊습니다. 나이가 기껏해야 15살, 16살로 지금 우리 식으로 보면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 정도밖에 안되는 소년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장에서 말하지 않고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고 하면서 왕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눈높이 교육, 눈높이 설명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생각이 얼마나 깊습니까?
오늘 이 아침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마음이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내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겠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이 얼마나 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깊은 생각을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내 입장에서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또 베풀어주는 모습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계속 보십시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라고 했습니다. 지금 왕 앞에 신상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자세하게 정확하게 다 관찰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놓칠 수 없습니다.
그 신상의 크기가 작다고 했습니까? 크다고 했습니까?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크기가 컸습니다. 그러면 그 신상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을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3:1을 보십시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높이가 육십 규빗입니다. 규빗은 사람의 팔꿈치에서 손끝까지를 말합니다. 사람마다 그 길이가 다르지만 대략 평균적으로 45㎝ 정도 됩니다. 계산하기 편하게 50㎝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높이가 300㎝, 즉 3m 정도입니다. 3m는 10층 건물쯤 됩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큰 것이지요. 그런 큰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신상은 "광채가 특심하며"라고 했습니다. 머리가 정금으로 만들어졌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와 발의 일부는 철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신상이었습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칠 때 번쩍번쩍 빛이 나는데 한 가지로 만들어졌다면 덜 현란하겠지요? 금으로, 은으로, 놋으로, 철로 만들어졌으니 그 빛이 얼마나 특심했겠습니까? 현란했겠습니까?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을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을 보세요.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3:1을 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너비가 여섯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너비에 비해서 높이가 열 배가 큽니다. 저를 보세요. 제 어깨 너비가 대략 40㎝ 정도 됩니다. 사람은 어깨에 비해 키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키가 좀 작은, 160㎝ 정도 되는 사람은 4배가 될 것이고, 키가 큰 사람은 5배 정도일 것입니다. 어깨보다 키가 4배 내지 5배 정도 큰 모양이 정상인데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보고 만든 신상은 어깨에 비해서 키가 열 배입니다. 어떤 형상이겠습니까? 제 몸에 비추어볼 때 어깨는 그대로고, 키가 지금 제 키의 두 배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보기가 좋겠습니까, 안 좋습니까? 보기가 아주 비정상적입니다. 마치 야자나무나 우리 나라 63빌딩처럼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양이 눈에 익숙지 않아 두렵고 보기 싫은 흉측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32절을 보세요. 그 우상의 머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까? 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38절 제일 끝 부분을 보니까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상의 머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바벨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역사적으로 금을 좋아하는 나라였습니다. 세금을 거둘 때에도 금으로 거두었고, 또 느부갓네살 임금의 보좌가 순금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금으로 만든 보좌에 앉아서 통치했다고 합니다. 금을 참 좋아하는 나라였습니다.
그 다음에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라고 했습니다. 팔은 두 개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무슨 나라로 갈라졌습니까? 메대와 바사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메대와 바사는 은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세금을 거둘 때도 은으로 거두었습니다. 은은 메대와 바사를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라고 했습니다. 배와 넓적다리는 무슨 나라입니까? 메대 바사 뒤에 무슨 나라가 생겼습니까? 헬라 제국을 상징합니다. 헬라 나라 군인들을 사진이나 유물로 보면 무엇으로 만든 투구에, 무엇으로 만든 흉배에, 무엇으로 만든 방패, 무엇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습니까? 놋입니다. 놋은 헬라 제국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33절을 보세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헬라 나라 뒤에 무슨 나라가 섰습니까? 로마입니다. 로마 나라는 철처럼 강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로마 나라가 여러 나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는 말은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는 금인데 그 아래는 은, 그 아래는 놋, 또 그 아래는 철이라고 했습니다. 갈수록 가치가 더해갑니까? 줄어듭니까? 줄어듭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습이 되면 안됩니다. 갈수록 가치 있는 존재, 처음보다 나중이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거꾸로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사울 임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왕으로 세워주셨는데 갈수록 못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받고 열두 제자 가운데 뽑혀서 회계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못했습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갈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다니엘과 같이 동편에서 솟아오르는 해처럼 갈수록 강성해지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셉도 그렇습니다. 종살이 했습니다.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나중에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여러분의 삶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낫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낫고, 갈수록 더욱 창대해지는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야 합니다. 사업도 흥하시고, 믿음도 쑥쑥 더 자라시고,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보았던 신상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머리가 무겁습니까? 발이 더 무겁습니까? 순금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머리가 무겁습니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무너지기 쉬운 형상입니다. 세상 나라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원리가 그렇습니다.
물질 의지할 것 없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빌딩을 하나 가지고 있었답니다. 거기서 나오는 세만 받아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여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데도 점심은 늘 자장면을 먹고, 옷 하나 사 입지 않고 세를 부지런히 모아서 그 빌딩 맞은편에 땅을 사서 융자를 얻고 해서 빌딩을 또 하나 세웠습니다. 그 사람의 하는 일이라고는 이 빌딩에서 저 빌딩으로, 저 빌딩에서 이 빌딩으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왔다갔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냐 하면 왔다갔다하다가 차에 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점심은 자장면을 먹고 너덜너덜 낡은 옷을 입으면서 돈을 모은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물질은 써야 합니다. 값있게 쓰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첫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늘 첫번째 친구를 가까이 하려고 했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첫번째 친구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소중히 여기고 가까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세번째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이래라저래라 요구만 하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친구지만 될 수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루는 왕궁에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왕의 법정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내가 무슨 잘못한 것이 있구나. 왕이 나를 처벌하기 위해서 출두 명령을 내렸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는 첫번째 친구에게 가서 왕궁에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첫번째 친구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낙심했습니다.
두번째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하소연을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번째 친구가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같이 가주기는 하겠는데 왕궁의 문까지만 같이 가겠다. 그 다음은 너 혼자 들어가라." 실망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친구에게 갔습니다. 별 기대도 하지 않고 내가 이러이러한데 함께 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세번째 친구가 두말없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물론이지. 내가 함께 가주지. 내가 자네에 대해서 다 알고 있지 않나? 내가 왕에게 가서 자네가 틀림없이 결백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네." 그러면서 따라나섰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왕의 법정이라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누구나 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친구는 누구입니까? 물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물질은 절대로 같이 따라가 주지 못합니다. 물질은 아무리 쌓아도 소용없습니다. 바벨탑과 마찬가지입니다.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물질을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그 다음에 두번째 친구는 누구겠습니까? 우리의 친척, 친구들입니다. 우리 부모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무덤까지는 따라와 줄 수 있습니다. 무덤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애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세번째 친구는 누구겠습니까? 탈무드에서는 지혜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세번째 친구는 예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우리의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한 분만 의지하면서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따라갈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까지 안전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앙망하면서 걸어가시는 여러분과 저의 복된 발걸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20강 신상의 모양(2:34-35)
2:31-35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신상이 어떠한 모양을 했습니까? 사람의 모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도 있고, 가슴과 팔도 있고, 배와 넓적다리도 있고, 종아리도 있고, 발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 크기가 엄청나게 크다고 했습니다. 또 광채가 특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머리는 금이고, 그 밑은 은이고, 그 밑은 놋이고, 그 밑은 철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양은 심히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습처럼 균형 잡힌 모습이 아니라 어깨 너비에 비해 키가 엄청나게 큰 불균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본 신상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 약점이 무엇입니까? 머리가 무겁습니까? 다리가 무겁습니까? 머리가 무겁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안정되지 못하고 무너지기 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우려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꾼 꿈의 첫번째 장면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신상을 본 것이고, 두번째 장면은 꿈에 본 신상이 무너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두번째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34절을 보십시다. "또 왕이 보신즉"이라고 하면서 두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라고 했습니다. 돌은 어디서 뜹니까? 바다에서 뜹니까? 2:45에 보면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라고 했습니다. 산에서 뜹니다. 산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본 신상은 인간의 손이 들어갑니다. 신상은 인간이 만든 연장을 인간의 손으로 사용해서 인간이 만들지만, 산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돌을 뜰 때는 끌이나 망치를 이용해서 뜹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이 전혀 들어가지 않게 연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돌을 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능력으로 돌을 떴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을 뜬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돌을 뜬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어떻게 했습니까?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친 것이 아니라 어디를 친 것입니까? 신상의 제일 밑바닥, 철과 진흙응로 되어 있는 발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을 보세요. 철과 진흙만 부서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졌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장면에서는 금, 은, 놋, 철의 순서으로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 어깨, 무릎, 발의 순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너질 때는 거꾸로 순서를 말했습니다. 철, 놋, 은, 금의 순서, 그러니까 발, 무릎, 어깨, 머리의 순으로 말했습니다. 바벨탑이 밑에서부터 무너지듯이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에게, 또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앞에서 인간은 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금이라든지 은과 같은 것을 우리는 보석물로 간주합니다. 재물, 물질, 보물을 인간은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 다음에 놋이라든지 철을 가지고 인간은 연장을 만들기도 하고 무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제일 밑에 있는 진흙, 그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진흙에다 썼습니다. 진흙에 써서 그것을 구워서 토판을 만들었습니다. 또 진흙을 이용해서 질그릇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35절을 다시 보십시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겨같이 되었다는 것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겨는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되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우상을 친 돌은 어떠했습니까?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여러분,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그렇고, 메대와 바사도 그렇고, 로마 나라나 헬라 나라, 또 히틀러의 나치즘이라든지, 공산주의, 김일성이 다 무너졌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히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 세상에 좍 퍼져나가는 것을 우리에게 의미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너무 과신할 것 없습니다. 물질의 힘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 지력, 권력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다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본 그 거대한 신상을 전부 무너뜨리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던진 자그마한 돌 하나에 맞아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누구였습니까? 골리앗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골리앗처럼,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본 거대한 신상처럼 엄청나게 어렵고 큰 난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골리앗처럼, 거대한 신상처럼 크고 어렵고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문제라 할지라도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덧입게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세상을 이기시되 넉넉하게 이기고, 승리하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1강 꿈의 해석1(2:36-38)
2:36-38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그 신상을 부서뜨리고, 그 신상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꿈 가운데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본 신상은 인간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보았던 내용을 말한 뒤에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다.
3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꿈이 이러한즉." 아마도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이 정확하게 자기가 꾸고 나서 잊어버렸던 꿈 내용을 설명할 때 경탄해 마지않았을 것입니다. 또 두려운 생각에 계속해서 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대한 신상을 보았는데 돌이 나타나 사정없이 무너뜨리니 아무리 지각없는 사람일지라도 이것이 좋지 않은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요? 느부갓네살 임금은 꿈 때문에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잠을 못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다니엘이 어떻게 해석해주고 있는지 보십시다. 3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 꿈이 이러한즉"이란 말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내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제가 일전에 설명한 적이 있지요? "내가! 내가!"를 앞세우면 뭐가 끊어진다고 했습니까? 허리가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큰일났습니다. 다니엘이 "내가"를 앞세우다가 허리가 부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성경에 보면 "내가"라는 말 위에 아라비아 숫자 1이 작게 적혀 있습니다. 관주 1을 보라는 뜻입니다. 관주1을 보면 "히"라고 해서 "우리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부분에서는 아람 방언으로 하고 있는데 본래는 "내가"가 아니라 "우리가"라는 말입니다. 복수입니다. "우리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데 자기를 내세우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한쪽은 다니엘입니다. 그럼 또 한쪽은 누구이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지금 다니엘에게 은밀한 것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이 여기서 "우리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것을 전달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은밀한 것을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왕에게 전달할 뿐입니다."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원문에는 "우리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 보십시다.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니엘의 삶의 스타일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 둘째는 이웃을 높여주고 세워주고, 세번째로 나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왕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왕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세워주고 있습니다.
왕을 어떻게 세워주고 있는지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로 왕을 세워주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느부갓네살 임금을 안심시키고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37절에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고 했습니다. 사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나라 임금들이 다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베니게의 왕도 무릎을 꿇었고, 수리아의 왕도 무릎을 꿇었고, 유다 왕도 무릎을 꿇었고, 애굽 왕까지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니 느부갓네살 임금은 열왕의 왕이요, 왕 중의 왕입니다. 이렇게 왕을 높여주었습니다.
두번째는,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왕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모든 사람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사람에게 수많은 나라를 다 정복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권세를 주었고, 능력도 주었고, 영광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세력 뿐만 아니라 38절에 보니까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즉 자연 세계까지 다스릴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특별히 선택하셨습니다. 왕을 하나님께 선택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왕을 안심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38절 끝 부분을 보면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꼬리가 아니라 머리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온몸을 지배하는 것처럼, 왕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왕은 머리이되 무슨 머리라고 했습니까? 금머리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신상을 보았는데 머리가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금을 좋아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은 바벨론 도성을 golden city, 황금 도시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각 나라에서 세금을 거둘 때도 금으로 거두었습니다. 또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앉아서 통치하던 보좌도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3:1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임금이 무엇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까?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꿈에 본 것은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을 너무 좋아해서 신상을 만들 때 전체를 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라는 사람이 느부갓네살이 죽고 나서 90년 정도 되었을 때 바벨론을 방문했습니다. 가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자기 평생에 그렇게 많은 금은 처음 보았다고 기술해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느부갓네살과 바벨론 사람들은 금을 좋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욥의 세 친구들과는 달랐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위로한다고 해놓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따지고 정죄하고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욥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처해 있는 어려운 입장을 헤아리고, 말로 우선 느부갓네살 임금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이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회개하라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고 감싸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따뜻한 마음을 여러분이 가지게 되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누가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주었습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본 신상이 아무리 거대하고 크다 할지라도, 또 머리가 느부갓네살 임금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위에 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1 말씀부터 그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대단해서 자기 힘으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에워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가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2절에 보니까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을 도구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니엘이 우회적으로 빙 둘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28을 보십시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내가, 내가 하다가 결국은 허리가 부러지지 않았습니까? 정신이 빠져 버렸습니다. 미쳐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벌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늘 겸손하게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늘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내가 잘나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나지만,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게 힘주셔서, 나를 귀하게 사용해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잊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2강 꿈의 해석2(2:39)
2:39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오늘 본문 첫 절 39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오늘은 이 한 절 말씀만 공부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간단히 생각하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꿈을 꾸고 나서 언제 자기가 보았던 거대한 신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박살이 나 버릴 것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니엘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마음을 알고 왕을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세 가지로 왕을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첫째로, "왕은 열왕의 왕이십니다." 둘째로, "왕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해서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주신 분이십니다." 셋째로, "왕은 금머리입니다. 그만큼 귀중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왕을 세워주면서 왕을 안심시켰습니다.
39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의 후에." 이 말은 "왕의 통치가 다 끝난 후에"라는 말입니다.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왕의 후에"라고 하지 않고 "왕이 통치하는 도중에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라고 했다면 이것은 반란입니다. 왕위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마음에 얼마나 두려운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왕의 통치가 다한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보았던 뜨인 돌이 신상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은 자기가 통치하는 중에는, 자기가 살아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심되는 말입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근심 걱정들이 이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귀한 역사가 이 아침에 다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속에 있는 불안 걱정들을 다 떨쳐 버리고, 오늘도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나와 함께 하셔서 내가 든든히 서리라는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46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왕이 통치하는 가운데 그런 일이 생길 것입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벨드사살아,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면서 우려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니까 다니엘에게 큰 상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하 20:19을 보면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물어볼 테니 아는 분은 빨리 손을 들고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유다 왕 때였습니다. 바벨론의 사신들이 찾아왔습니다. 유다 왕은 바벨론 사신들에게 나라의 모든 보물과 무기를 자랑할 마음으로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선지자 이사야가 왕을 찾아와서 왕을 질책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왕이 자랑했던 모든 보물과 모든 무기들을 바벨론에 다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몸에서 태어난 왕의 후손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환관이 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왕이 왕하 20:19에 보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자기가 사는 날 동안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므로 하나님의 행사가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왕이 누구입니까? 예, 히스기야입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임금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39절입니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신상의 머리는 금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팔과 가슴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이 금보다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습니까? 은은 어느 나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팔이 두 개인 것처럼 나라가 나뉘었습니다. 어느 나라입니까? 메대와 바사입니다. 메대와 바사는 역사적으로 보면 은으로 유명합니다. 바벨론은 금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황금 도시를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메대와 바사는 세금 제도가 아주 발달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공물을 은으로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메대와 바사가 바벨론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나라의 크기로 말하면 메대와 바사가 더 큽니다. 그리고 세번째 일어난 나라에 대한 본문의 설명을 보면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영토 면에서 다음에 나타나는 나라들이 조금도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금보다 은이 질적인 면에서 떨어집니다. 은보다는 놋이 질적인 면에서 떨어집니다. 질의 면에서 떨어집니다.
질의 면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도덕적인 수준이 떨어집니다. 도덕적으로 더욱 타락합니다. 그래서 결국 뜨인 돌에 의해서 박살나 버릴 수밖에 없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점차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아마도 느부갓네살 임금이 가졌던 강력한 절대 주권,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후대로 갈수록 약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계속 본문 39절을 보십시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두번째 일어나는 나라는 메대와 바사라고 했습니다. 세번째로는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셋째 나라는 헬라 제국이라고 했습니다. 헬라 제국은 놋으로 투구를 만들고, 놋으로 흉배를 만들어 가슴에 붙이고, 놋으로 칼과 창을 만들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놋 같은 나라 헬라 제국이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하나 물어봅니다.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의 세계사 실력을 테스트 해보겠습니다. 헬라 제국에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온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알렉산더 대제입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20세 때 왕이 되었습니다. 20세에 왕이 되어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땅은 내가 정복하리라." 알렉산더 대제는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나라를 다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울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하는 나라마다 자기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세계에는 70군데의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가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력으로 전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주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제는 성도인 예루살렘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위용을 과시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서 결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제는 33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열병으로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던 그의 나라 헬라 제국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뒤에 3백년이 흘렀습니다. 한 시골 청년이 역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제처럼 화려하게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알렉산더 대제처럼 무력으로, 세상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용서와 봉사의 정신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제와 같은 33세의 나이로 돌아갔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렉산더 대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고 세상에서 최고가는 침략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와 희생 정신으로 올라가서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35절에 있는 말씀처럼 태산을 이루고 그의 왕국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화려해 보입니다. 권위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희생을 요구하는 길입니다. 고난을 요구하는 길입니다. 용서를 요구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만이 승리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요,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길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3강 꿈의 해석3(2:40-43)
2:40-43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신상은 인간의 모양이었습니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머리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다음에 두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어 있었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으로 되어 있었고, 종아리와 발과 발가락의 일부는 철이었고, 일부는 진흙이었습니다. 이 네 부분은 각각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네 나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금은 어느 나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바벨론입니다. 은은 메대와 바사를 상징하고, 놋은 헬라 제국, 철과 진흙은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해석을 하는데 먼저 느부갓네살 임금이 통치하고 있는 바벨론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해석을 듣고 있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위로하는 심정에서 왕을 안심시켰습니다. 첫째로, 왕은 열왕의 왕입니다. 두번째로, 왕은 하나님께 특별하게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세번째로, 왕은 금머리로서 으뜸가는 존재라고 하면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우리 주변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따듯한 말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고, 또 여러분 주변에도 다니엘과 같은 귀한 친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처럼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감싸주는 친구들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은 두번째 나라와 세번째 나라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한 줄로 설명하였습니다. 3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둘째 나라에 대한 설명을 왕만 못한 나라라고만 말하였습니다.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이렇게 셋째 나라도 간단하게 한 줄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네번째 나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나라는 로마라고 했습니다.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로마 제국은 아주 강한 나라였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40절에 나온 동사를 보시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동사가 아주 강한 어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로마 군대들이 철 병거를 타고 주변 국가들을 짓밟고 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지요? 성경을 읽을 때 시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읽으시면 더욱 실감 있게 와 닿습니다. 로마의 병거들이 주변 이웃들을 부수고 빻고 짓밟는 모습이 연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강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한 로마 제국에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약점이 있었는지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줄 압니다. 41절을 보시겠습니다.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약점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통치하던 바벨론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강함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강해도 쪼개진다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릴 때 들으셨던 동화가 생각나십니까? 어떤 아버지가 나이 어린 세 아들을 남기고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유언을 남겼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나가서 회초리로 쓸 수 있는 막대기를 하나씩 가지고 오너라." 아들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함께 묶어라." 막대기 세 개를 한 데 묶었습니다. "그것을 부러뜨려라." 힘센 큰 아들도 그것을 부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묶은 것을 풀어라. 그리고 하나씩 부러뜨려보아라." 막내아들도 쉽게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바로 그거다. 너희들이 뭉치면 그렇게 힘이 있으니까 살고, 너희가 흩어지면 죽는다. 그러니까 비록 나이 어린 너희들이지만 힘을 합쳐서 하나 되어서 뭉쳐서 살아라."
그렇습니다. 나뉘면 안됩니다. 뭉쳐야 합니다. 어느 단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예수님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교회가 될 것을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지면 안됩니다. 또 우리 개인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 바라보았다가, 세상 바라보았다가 하면서 나누어지면 안됩니다. 그러면 힘이 없습니다. 햇빛도 돋보기를 통해 한 곳에 집중되면 종이를 태우지 않습니까? 뭉쳐야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직 한 곳, 예수님을 향해 시선을 집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예!"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예!"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나아갔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함께 따라왔던 조카 롯은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눈을 들어서 요단 들을 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마세요. "뒤돌아보지 않겠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우리의 마음을 오직 주님께만 둘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또 약점이 있습니다. 41절 하반부부터 42절을 보시겠습니다.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로마 제국은 겉으로는 철처럼 강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진흙처럼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무력이 약해서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속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로마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몇 절만 읽어봅니다. 롬 1:26 이하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성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아주 타락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로마가 결국 멸망했습니다.
로마는 성적으로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타락했습니다. 롬1:29∼31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렇게 도덕적인 타락이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또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우리 속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지, 깨끗한지를 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속이 과연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는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 같은데, 속에는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내 마음 문 열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내 마음속에 와서 좌정해주시고, 내 마음속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을 다 정결케 씻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밝은 빛으로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가 이 아침에 있어야 할 줄 압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오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고민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냥 돌아가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 왜 그러니?"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를 위해서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어.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었어. 너를 의롭게 해주었어. 지금까지 네 발걸음을 인도해주었어. 지금도 너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고 있어. 앞으로도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예비하면서 발걸음을 인도해 줄거야.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영화로운 천국까지 예비해 두었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을 다 떨쳐 버리고 이 아침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밝고 기쁜 마음, 가벼운 마음, 즐거운 마음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다 회복하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4강 꿈의 해석4(2:44-45)
2:44-45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꾸었던 꿈은 두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첫번째 장면은 왕이 거대한 신상을 본 것이었고, 두번째 장면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이 거대한 신상을 쳐서 무너뜨리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오늘 본문에서 왕이 꾼 꿈의 두번째 장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44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열왕의 때에"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보았던 신상은 네 개의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왕국이 어느 나라였습니까? 로마 왕국이었습니다. 로마 왕국은 강하기가 철 같았지만 뒤에 나라가 나뉘었습니다. 사람의 발가락이 열인 것처럼 나라가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처럼 강력한 하나의 통치 왕국이 되지 못하고 열왕들이 나누어서 통치하였습니다.
"이 열왕의 때"는 바로 그때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 나라는 무슨 왕국입니까?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이 세계를 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까?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그리스도의 왕국은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벨론도 망했습니다. 메대와 바사도 망했습니다. 헬라도 망했습니다. 로마도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세력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절대로 주권을 빼앗기는 법이 없습니다.
세번째로,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기독교가 결국은 로마 제국을 정복하지 않았습니까? 이겼습니다.
네번째로, "영원히 설 것이라." 그 나라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히 서게 될 것입니다.
45절은 꿈의 클라이맥스를 보여줍니다.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돌을 뜨기 위해서는 연장이 필요합니다. 망치와 끌이 필요하고 사람의 힘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돌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하나님께서 뜨신 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사람의 손으로 아니한 뜨인 돌이 이러한 것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신상을 부숴뜨렸습니다.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보았던 거대한 신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왼쪽에 인간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셉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꼼짝도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금과 은, 물질, 보물, 재물과 같은 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습니까? 잘못입니다. 또 철과 놋으로는 무기를 만들지 않습니까? 인간의 권력을 왜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의지합니까? 왜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잘못입니다. 옛날에는 진흙 위에 글을 썼습니다. 왜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의지하려고 합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이런 꿈을 꾸게 하신 것은 무엇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까?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거대해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의 생각이 참 깊습니다. 나이 기껏해야 15, 16세의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그 꿈을 보여주셨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사랑하시고 왕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얼마나 왕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고 있습니까?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생각이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신문지상에서 보셨겠지만 선경의 최 회장이 폐암 때문에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저는 이 의사를 의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암세포가 너무 퍼져서 수술해도 힘들겠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옆에서 간호하던 부인이 "앗!" 하더니 쇼크를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의사가 죽인 것입니다. 이왕이면 "괜찮아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습니다"라고 한 마디 해주었더라면 그 부인이 죽었겠습니까? 다니엘처럼 깊이 생각해서 말을 했다면 멀쩡한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어디 아픕니까? 무슨 걱정 있습니까?"라고 하면 가슴이 덜컥합니다. 힘들더라도 "좋아 보입니다. 얼굴이 좋아졌습니다. 생생한데요"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이 늙었네요. 폭삭 늙으셨어요"라고 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니 목사님, 얼마나 힘드세요? 교인들을 섬기시느라 얼마나 힘드세요?"라고 하면 저는 기분이 별로 안 좋습니다. 마음이 편하더라도 "아 정말 어려운 일이 있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세워 주는 말이 아니라 사람 기죽이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지혜서라고 하는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도 죄가 안되는 거짓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거짓말은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첫번째로 죄가 안되는 거짓말은 결혼식장에 가서 신랑, 신부를 치켜주는 말입니다. 좀 시원찮은 사람이라도 "어떻게 저렇게 멋있는 신부를 구했노!" "참 멋진 신랑 구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신랑이 손해보는 것 같고, 신부가 손해보는 것 같아도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데요. "정말 잘 어울린다, 멋있다!" 이런 거짓말은 죄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말은 많이 해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도 되는 거짓말은 물건을 샀을 때입니다. 이미 돈을 주고 샀습니다. 물건을 사고 "좀 어때요?"라고 하면 그때는 거짓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잘 샀어." 옷을 하나 사 입었습니다. "이 옷 어때?" 그러면 "잘 어울린다, 멋있다"고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옷이라고 돈 주고 샀니?"라고 하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똑같은 말이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그 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얼마나 마음에 더 번민이 크겠습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왕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준 것입니다. 우리가 말이라도 함부로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고 했습니다. "이 꿈은 틀림없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니엘의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서 세워 주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모습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도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오늘도 크게 승리하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25강 더욱 높아진 다니엘(2:46-49)
2:46~49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로부터 자신이 꾸었던 꿈과 그 해석을 전해듣고 나서 보여준 반응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정도 안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다니엘이 말로써 왕을 위로해주지 않았습니까? "왕은 열왕의 왕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었습니다. 왕은 금머리입니다. 그리고 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꿈에서 본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을 치는 일이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왕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친히 계시해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했던 만큼 우려할 만한 일이 자기 생전에는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 마음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신들이나 할 수 있는, 자기가 꾸고 잊어버린 꿈을 다니엘이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경의로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에게 깊이 존경을 표함으로써 다니엘의 신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46절을 보십시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다니엘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니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다니엘에게 깊은 경의를 표함으로써 다니엘의 신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47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의 신을 찬양한 세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신들 가운데 으뜸 되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우리처럼 유일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신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신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신도 여러 신 가운데 어떤 나라의 신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신론 사상을 가진 가운데 다니엘의 하나님을 여러 신 중에 으뜸가는 신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두번째로,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을 폐하고 나서 메대와 바사를 세우셨습니다. 메대와 바사를 폐하고 나서는 헬라 제국을 세웠고, 헬라 제국을 폐하고 나서는 로마 제국을 세웠습니다. 세상 나라의 왕을 세우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했니다.
세번째,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48절에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을 높여주었습니다. 어떻게 높였는지 바로 뒤에 설명이 있습니다. 다니엘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선물을 주었습니다. 시시한 선물이 아니라 "귀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적게 준 것이 아니라 "많이" 주었다고 했습니다. 선물과 관계된 말이 두 가지가 쓰였습니다. "귀한"이라는 말과 "많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을 또 어떻게 세워주었습니까?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오늘날로 따지면 뭐가 된 것입니까?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무슨 직분이 되겠습니까? 박사는 왕의 자문 역할을 하니까 비서실장이나 대법원장 정도의 위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니엘이 몇 살입니까? 10대 중반입니다. 15, 16세의 어린 나이에 국무총리에, 비서실장에, 대법원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다니엘처럼 머리가 되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그 어린 나이에도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니엘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왕이 주는 진미와 왕이 주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혔다면, 다니엘도 다른 사람들처럼 역사 속에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유혹이 많이 몰려옵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유혹에 더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를 버리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주를 위해서 뜻을 정하고 유혹을 물리치고 우리를 깨끗하게 간직할 때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49절에서 우리가 다니엘에게 본받아야 할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식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 식 이름은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였습니다. 다니엘은 자기와 동고동락했던 세 친구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 위해서 함께 기도했던 세 친구를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잘 되고 높아지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친구들을 무시하고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높아질 때 자기를 사랑했고, 자기를 도와주었고, 자기와 동고동락했던 세 친구를 잊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세 친구들도 들어 사용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다니엘의 청구대로 세 친구들을 들어서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도지사쯤 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던 이웃이 있지는 않은지, 친구가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시고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또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 준 은혜가 생각나거든 오늘 전화라도 한 통화 해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런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그러면 겉으로는 표현을 안하지만 속으로는 섭섭하지 않습니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대수롭지 않은 작은 친절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그것을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갚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던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전화라도 한 통화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니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행정의 수반으로 왕 곁에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지방의 도지사로 발령을 받아서 내려갔습니다.
마지막에 이 말이 왜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3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임금이 금 신상을 만들고 낙성식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니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히 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니엘도 풀무불에 던져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풀무불에는 세 사람만 던져졌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아마 사정이 있어서 왕궁을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만 도지사로 있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두라 평지에 오게 되었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세 친구만 풀무불에 던져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도지사로 발령 받아 갔고, 다니엘은 왕궁에 홀로 있었다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뜻을 정하고 세상적인 것들로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저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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