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 제33강 구원의 하나님(3:28-30) | 관리자 | 2006.05.21 | 37 | ||||||
33 | 제32강 풀무불 속의 네 사람(3:24-27) | 관리자 | 2006.05.21 | 40 | ||||||
32 | 제31강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3:19-23) | 관리자 | 2006.05.21 | 34 | ||||||
31 | 제30강 그리 아니하실지라도(3:16-18) | 관리자 | 2006.05.21 | 34 | ||||||
30 | 제29강 누가 너희를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랴(3:13-15) | 관리자 | 2006.05.21 | 34 | ||||||
29 | 제28강 신상에 절하지 않은 세 사람(3:8-12) | 관리자 | 2006.05.21 | 36 | ||||||
28 | 제27강 금 신상의 낙성식(3:4-7) | 관리자 | 2006.05.21 | 35 | ||||||
27 | 제26강 금 신상을 세움(3:1-3) | 관리자 | 2006.05.21 |
제26강 금 신상을 세움(3:1-3)
3:1-3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 그대로 실제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대한 신상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보면 공통적인 일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애굽에 가면 아시겠지만, 그 모래 벌판에 스핑크스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약 22m, 길이가 80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입니다. 그때가 주전 약 2500년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 주전 586년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신상을 세우기 2천년 이전에 애굽은 모래 벌판에 거대한 신상 스핑크스를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람세스 2세는 자기 모양의 거대한 신상을 돌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을 세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자기 모양을 본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무엇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보았던 신상은 머리만 금이었습니다. 두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어 있고, 그밖에 놋과 철, 발가락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신상을 만들 때 몽땅 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주면서 "왕은 금머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나라가 더 이상 다른 나라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금머리로 상징되는 자기 나라가 영원히 든든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상 전체를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엄청난 신상을 속까지 전부 금덩어리로 만들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사 40:19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금으로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에는 나무로 만들고 겉에만 금으로 입힌 것입니다. 금으로 온통 신상을 칠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다.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높이가 60규빗이라고 했습니다. 1규빗은 팔꿈치부터 손가락 끝까지로 대략 45㎝ 정도 됩니다. 계산하기 편하게 50㎝로 잡으면 높이가 얼마나 됩니까? 30m 정도 됩니다. 10층 건물 정도 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키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광은, 즉 너비가 여섯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3m 정도 됩니다. 어깨의 너비가 3m, 높이가 30m입니다.
보통 사람은 제 체구를 한번 보세요. 어깨가 약 40㎝, 제 키가 기분이 좋으면 약 177㎝, 기분이 언짢으면 175㎝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네 배 내지 다섯 배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운 신상은 어깨 너비에 비해 키가 열 배입니다. 보통 사람 모양보다 키만 두 배가 높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어깨 너비와 똑같고 키는 저보다 두 배가 크다고 생각해보세요. 균형이 잡히지 않은 모습입니다. 꺽다리입니다. 63빌딩처럼 아주 높게 세웠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바벨론 사람들은 6진법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10진법을 씁니다. 1부터 0까지 10개의 숫자를 쓰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12진법을 썼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6진법을 썼다고 했는데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경에 6이라고 하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몇째 날에 창조하셨습니까? 여섯째 날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숫자인 완전수는 7입니다. 6은 아무리 해도 늘 7보다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 아래입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에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살나 버리지 않았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굴복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내게 있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금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금 신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바벨론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6마일, 약 10㎞ 떨어진 곳에 두라 평지가 있습니다. 왜 평지에 세웠을까요? 어디서나 누구나 잘 볼 수 있도록 평지에 세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권세와 자기의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상입니다. 신으로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늘 싸움에서 승리를 안겨다 준 바벨론 최고의 신인 벨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적으로 바벨론을 통일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2절을 보십시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일반 서민을 불러 모은 것이 아닙니다. 관리들을 몽땅 다 불러 모았습니다.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왕이 명령을 내리니까 그 결과 3절에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모이라고 한 2절과 관원들이 다 모인 3절을 비교해보십시다. 무엇이 빠졌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3절을 읽어봅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누가 빠졌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예, 아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어떤 사람인데 감히 빠집니까?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 불순종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한 것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감히 느부갓네살 임금이 누구인데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거역하면 어떻게 됩니까? 몸은 쪼개지고 집은 거름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어제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도지사로 발령났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2:49 끝 부분을 보니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그러니까 왕이 낙성 예식에 참여하는 동안 국무총리였던 다니엘은 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빠졌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니엘도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친구와 함께 풀무불에 던져졌겠지요? 그러나 그때 다니엘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왕이 없는 동안 왕을 대신해서 왕궁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엄청난 시련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몸을 더럽히느냐 마느냐하는 갈림길에 놓였습니다. 참으로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꾸었던 꿈으로 인해서 죽을 뻔했습니다. 이번에는 왕이 거대한 신상을 만들고 꿇어 엎드려 절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극심한 시련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끊임없는 환난의 연속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지 없는 사람이든지 늘 시련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보살펴주셨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 그 극심한 환난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는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지 않고, 더 크게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의 디딤돌이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살아가는 가운데 이런저런 환난과 시험과 고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 때문에 세상과 타협해서 넘어지는 연약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지 말고,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뜻을 정하고 뒤돌아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나아가서, 우리가 당한 어려운 일들이 더욱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7강 금 신상의 낙성식(3:4-7)
3:4-7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거대한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두라 평지에 세우고 바벨론 각 도의 모든 관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낙성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그 광경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평지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높이가 30m나 되는 거대한 신상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수백 명의, 예복을 갖추어 입은 관리들이 낙성 예식에 참석해 있습니다.
드디어 크게 외치는 자가 단상에 섰습니다. 그때 무슨 앰프 시설이 되어 있었겠습니까? 전부 육성으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의 명령을 큰 소리로 백성에게 외치는 자를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반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왕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입니다.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마이크가 없으니까 큰 소리로 외쳐야겠지요?
제가 물어봅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미국 사람 같으면 무슨 말로 시작했겠습니까? "Ladies and gentlemen!" 우리말로 하면 "이 자리에 만장하신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아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든지 "사랑하는 승동의 가족 여러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바벨론 식으로 서두에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라고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 힘으로 수많은 이웃 나라들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니까 각 나라 각 족속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4:1을 한 번 찾아보십시다.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그 다음에 5:19을 보십시다.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하나만 더 찾아봅니다. 6:25입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이와 같은 말은 많은 무리들을 불러들이는 공식적인 그 당시의 용어였습니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라고 하면서 반포하는 자가 모인 무리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명령의 내용이 5절에 나옵니다. "너희는"이라고 하면서 그 뒤에 악기 이름이 나옵니다. 악기가 몇 가지 종류가 나오는지 손으로 꼽아보시기 바랍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여섯 가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모든 악기"라는 말에 포함시켜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왕실 관현악단 Royal orchestra입니다. 각종의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었습니다. 왕실 악단이 옆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때나 절하면 안됩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철두철미한 사람입니다. 완벽주의자입니다. 말 한 마디해서 제대로 안되면 몸은 쪼개고 집은 거름터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명령대로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악기 소리를 듣는 순간에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느부갓네살 임금 입장에서는 자기가 정복한 수많은 사람들, 또 자기를 보필하는 관리들이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복종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3장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서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 대신 사신우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하고 왕이 주는 진미도 먹지 않을 것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운 금 신상에 꿇어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외의 다른 거짓 신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5절 끝 부분을 보면 누가 세운 금 신상이라고 했습니까? "느부갓네살의 세운 금 신상"이라고 했습니다. 2절 끝 부분을 보세요.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 3절에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라고 나오고 "느부갓네살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고 하면서 한번 더 반복했습니다. 누가 세운 신상입니까?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운 신상입니다. 그러니까 감히 왕이 명령하는데 그 명령을 어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리들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6절을 보면 하나의 벌칙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벌인지 보십시다.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거대한 금 신상이 중원에 서 있고 그 옆에 무엇이 있습니까? 거대한 풀무가 있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금을 덩어리 째 쓸 수는 없습니다. 금을 녹여서 쓰기 위해서 풀무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대한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 풀무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고고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의 풀무는 마치 병 모양으로 생겼다고 합니다. 위가 아구로 뚫려 있고, 밑에 나무나 숯을 집어넣는 아궁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풀무에 불이 타고 있습니까? 꺼져 있습니까?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타되 극렬히 타고 있습니다. 지금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풀무에 불이 올라오고 있는 연기를 다 쳐다보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풀무불의 온도가 섭씨 1000도(1000˚)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 김상철 장로님, 소각로를 하시니까 소각로 온도는 얼마나 됩니까? 800˚정도라고 합니다. 소각로보다 200˚가 높습니다.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왕의 말대로 신상에 절을 하든지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든지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반포하는 자가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누군데 감히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반복을 해서 왕의 명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악기 이름들도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5절에 대표적인 악기가 몇 개 나왔습니까?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여섯 개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이 빠졌는지 보세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몇 가지입니까? 다섯 가지입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제일 끝에 있는 생황이 빠졌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누군데 생황이 빠졌으니 큰일났습니다. 갑자기 고장이 났을까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파이프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준비가 안되었다든지 해서 빠졌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악기"에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생황이라는 악기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이와 같이 악기의 이름을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느부갓네살 임금이 명령한 그대로 다 빠짐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 그러나 그 "모든"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입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6.25 당시에 서울이 인민군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미쳐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끌려서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인민군 대장이 단 위에 올라가서 연설을 합니다. "동무들, 지금 미 제국주의 놈들이 우리 나라를 송두리째 앗아가려고 하는데 이렇게 평안히 앉아 있어서 되겠습니까? 목숨 걸고 나가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 뒤에는 군병 트럭이 시동을 걸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몽땅 의용군으로 끌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민군 대장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 있소? 있으면 손을 드시오." 그 가운데는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붙잡힌 신학생이 두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내가 죽더라도 떳떳하게 죽자 생각하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용기가 없어서 끝내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인민군 대장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서 말했습니다. "동무들, 저 반동분자를 앞으로 끌고 오시오. 우리가 지금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저런 반동분자를 동참시킬 수 있겠소? 처치하고 갑시다." 그래서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단상 앞으로 끌려나와 꿇어앉아 있습니다. 잠시 뒤에 처형시킨다고 꿇어앉혀 놓고는 인민군 대장이 계속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저 트럭에 올라타시오. 싸우러 갑시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다 태웠습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틈을 타서 기회를 잘 포착해서 앞에 꿇어앉아 있던 사람이 도망쳤습니다. 달려서 그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피했습니다. 이 신학생이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그때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를 집회 때마다 간증을 하면서 다니시는 유명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차마 용기가 없어서 손을 들지 못했던 친구 신학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그 뒤로는 소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싸움터에서 죽었겠지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심해야 할 줄 압니다. 살아가고 있는 동안 어려운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죽으리라. 주님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목숨을 나를 위해서 아낌없이 바치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서 내 생명을 아낌없이 드리리라." 그러면 죽습니까? 안 죽습니다. 주님께서 내 생명도 더욱 장수하게 해주시고 나를 더욱더 나를 존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서 내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치리라."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사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존귀히 여겨주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8강 신상에 절하지 않은 세 사람(3:8-12)
3:8-12
그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무릇 사람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리어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바벨론의 두라 평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벳새다 들판에 장정만 오천 명이 모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그보다도 훨씬 이전이고, 또 왕이 집결시킨 사람들이니까 더 많은 숫자가 모였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저들은 바벨론 각 도에서 올라온 관리들이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운 금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바벨론 각 도에서 올라왔습니다.
지금 중앙에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만든 거대한 금 신상이 놓여 있습니다. 햇빛을 받아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옆에는 금 신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거대한 풀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풀무에서 극렬히 타오르는 화염이 멀리서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금 신상이냐,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이냐? 금 신상에 꿇어 절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느냐?
어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만일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그런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그분은 처자가 맘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위해서 부모, 형제, 가족을 버리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 원리는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지만 곧 그 길이 영생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을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길은 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종국은 멸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드디어 왕실 관현악단의 합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주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였습니다. 저들은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고 금 신상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니엘의 세 친구의 마음에는 자기들과 같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신앙의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유다에서 온 동족만큼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일편단심을 지키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풀무불의 위협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금 신상 앞에 다 절하고 말았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나라 이름이고, 갈대아라는 것은 인종학적인 이름입니다. 제가 과거에 중국 북경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 계신 선교사님을 따라서 북경의 포장마차 골목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다고 해서 가보았습니다. 100m 정도의 거리가 양쪽으로 다 포장마차입니다. 중국 곳곳에서 온 포장마차와 관련된 특산물들이 다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는 중국 사람들도 다 우리처럼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노랗고 눈동자가 파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중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인데 어떻게 머리가 노라냐고 했더니 땅덩어리가 하도 넓어서 카자흐 쪽에는 틀림없이 중국 사람이고 중국어를 쓰는데도 머리가 노랗고 파란 눈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안에는 나라는 중국이지만 조선족도 있고, 한족도 있고 족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바벨론 나라 안에 유다 족속도 있고, 갈대아 족속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갈대아 사람은 본토 사람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역시 갈대아 족속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통하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갈대아 사람들이 나와서 유다 사람들을 참소했습니다. 참소라는 말은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 나쁜 뜻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본토 사람을 제치고 국무총리가 되고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에서 악의에 찬 참소를 하게 된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은 지체 높은 사람들 앞에 가면 "하일!"이라고 인사했습니다. 히틀러에게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인사했습니다. 우리 나라 옛날 조선 왕조 때는 신하들이 왕 앞에서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왕을 알현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이라고 인사했겠습니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했을까요? 바벨론 사람들은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왕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격식을 차리고 나서 10절에 보니까 갈대아 사람들이 왕이 내린 명령을 왕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무릇 사람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리어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왕이 이렇게 친히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왕이 내린 명령을 왕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1절에 보면 왕이 내린 벌이 무엇인지도 왕에게 상기키시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지금 은근히 왕에게 구실을 가하는 것입니다. "왕이여,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왕이 내린 명령대로 과연 처분을 하실 것인지, 실행에 옮기지 않으실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참소가 시작됩니다. 12절입니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고 했습니다.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그 세 사람은 왕께서 친히 세운 사람이고, 왕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왕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을 더 나쁜 사람으로 몰기 위해서 세 사람이 왕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가지로 참소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왕의 명을 어긴 것은 왕을 무시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자꾸 "왕의 명," "왕의 신들," "왕이 세우신 금 신상"이라고 하면서 왕을 강조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개인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왕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왕으로 하여금 화가 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나쁜 일을 하려면 자기 혼자 나쁜 일을 할 것이지, 꼭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이런 좋지 못한 심리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혼자 따먹지 왜 아담까지 같이 먹게 합니까? 그때부터 시작해서 사람은 자기 혼자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의롭게 살려고 하면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바르게 살고자 할 때, 정직하게 살고자 할 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고자 할 때 당하는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그 순간은 쉽지만 그 넓은 길의 종국은 멸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의의 길, 바른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9강 누가 너희를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랴(3:13-15)
3:13-15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였습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화가 난 것입니다. 왜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틀림없이 분명하게 명을 내렸습니다. "왕실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나면 내가 만든 신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해라." 분명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거기다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하면서 엄하게 벌을 주겠다고 위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진 것입니다.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하지 아니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는데 이 두 단어를 한 단어로 합치면 무슨 말이 됩니까? "분노했다." 제가 너무 쉬운 질문을 했습니까? 묻는 데 의도가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하면서 조금 어려운 것을 물을 테니까 잘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사나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사나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왕이 되고 싶습니다." 첫째 사나이는 자기 소원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두번째 사나이는 "저는 아름다운 별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세번째 사나이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앞에 두 사람이 하나는 왕이 되었고, 하나는 별이 되었는데 자기는 둘 다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저는 둘 다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뭐가 되었을 것 같습니까? 별왕이요? 왕별이요? 그렇게 쉬우면 제가 묻겠습니까? 노와 분을 합치면 분노가 되었습니다. 분이 먼저 왔습니다. 왕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킹(king)이라고 합니다. 별은 영어로 스타(star)입니다. 둘 다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양말이 되었습니다. 왜요? 스타와 킹을 합치면 스타킹이 되니까요. 욕심 부리면 안됩니다. 현실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이 지난 일년 동안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현실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꾸 욕심을 부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아지려고 하니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일이 무슨 날입니까?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는 날인데 아직까지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가족이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내 생일도 몰라주고 무관심 속에 넘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은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꼭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헌금할 때도 되는 대로 헌 돈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새 돈으로 바꿔서 준비해야 합니다. 돈 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작은 정성이라도 하나님께 우리 마음으로 표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어떻게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까?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조심해서 모셔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왕이 명령하니까 신하들은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령대로 시행했습니다. 발길질을 하면서 마구 끌고 왔을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드디어 느부갓네살 임금이 심문합니다. 무엇이라고 심문하는지 보십시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느부갓네살 임금은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기 위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세 가지로 참소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첫째로,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둘째로,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셋째로,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14절에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물을 때는 하나가 빠졌습니다. 무엇입니까? 첫번째 것이 빠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가 빠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 동안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를 섬긴 과거의 모습들을 봐서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사랑하고 아끼고 총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확인을 하면서 15절을 보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위해서 왕실 관현악단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합주를 시킬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 친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아까웠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들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위협도 합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일에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풀무불을 가지고 위협했지만 세 친구는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벌써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했을 때 이미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지금까지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그들을 높이 들어 써주셨습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마음을 평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이군인이 간증을 하기 위해서 단상에 섰습니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한쪽 다리를 다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단상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우리 조국을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조국은 내 몸과 마음 가운데 다리 한쪽만 받고 그 나머지는 내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어야 하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그때에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주님을 위해서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금 다 되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내 시간, 내 목숨, 내 건강, 내 물질이라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런 마음 자세와는 달리 느부갓네살 임금을 보세요. 느부갓네살 임금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보십시다.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도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분노 때문에 이성조차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만은 무엇의 선봉이라고 했습니까?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가정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패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완전히 침착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일제 시대 때 평양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결정했습니까? 신사 참배는 죄가 아니다, 애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그것을 결정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반대했습니다.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반대했습니다. 목사직을 면직 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계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하기를 공식적으로 가결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평양에 사탄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이 들어선 것이 당연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면 삽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덤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생각하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말고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주님이 주신 이 생명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발걸음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0강 그리 아니하실지라도(3:16-18)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죽이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단호하게 자기들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을 때 불려왔던 갈대아 수사들은 시간을 천연하려고 했습니다. 시간을 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만든 금 신상 앞에서 절해라."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신앙이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이 세상에 그 어떠한 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무례하다든지, 교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 일사각오의 신앙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불에 던져 넣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그분을 다니엘의 세 친구는 두려워했습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던질 것이면"이라는 말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 말은 느부갓네살 임금이 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15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이렇게 질문한 것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대답한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분명하고도 확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사 43:1∼3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 말씀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깊이 묵상하면서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로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도 함께 하셔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용기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아름다운 말씀, 더 귀한 말씀이 18절에 나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건져주셔도 좋고, 우리를 순교의 자리에 이르게 하셔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 제게 물질이 필요합니다. 제게 물질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이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 잃지 않고 주님의 손 붙들고, 주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제게 건강이 필요합니다. 저의 병을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시고 15년이나 생명을 연장해 주신 하나님, 저의 병도 고쳐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라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신앙 아니겠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세 친구는 비록 순교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사신 우상 앞에서는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서 죽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죽고 나서는 더 영화로운 하늘 나라에 가서 아름다운 금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내세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 뒤에 삼성의료원에서 사랑하는 박의령 성도의 발인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말씀대로 국가적으로 보나 교회적으로 보나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아노를 얼마나 잘 쳤습니까? 박사 과정에 있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슬픔 가운데서도 위로를 얻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뒤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고, 구원의 역사를 알기 때문에 슬픈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일찍 갔지만 그러나 괴로움 많고, 사고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세계, 하나님의 영원한 품으로 간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언제나 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고 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이 바로 그런 신앙입니다.
"살아도 좋고 주를 위해서 죽어도 더 좋고!" 오늘 이러한 신앙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1강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3:19-23)
3:19-23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19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고 뉘우치고 자기가 만든 금 신상에 절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왕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또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말했습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했습니다.
3:19-23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그러니 왕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얼굴빛이 확 변했습니다. 무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으니까 얼굴빛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평소에 풀무불의 온도는 섭씨 1000°였습니다. 칠 배라고 하는 것은 꼭 1000°의 일곱 배인 7000°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잠 24: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그러면 일곱 번 넘어지고 일어난 다음에 여덟 번째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칠 배나 뜨겁게 하라는 말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뜨겁게 온도를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은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저 같으면 사람을 태워 죽일 듯 말 듯한 온도로 해서 오래도록 괴롭힐 텐데 평소보다도 일곱 배나 뜨겁게 하면 고통 없이 금방 죽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고통 없이 죽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군대 중에서 비리비리한 사람 말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힘이 센 용사 몇 사람을 뽑아서 명하였습니다.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느부갓네살 임금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한 말 중에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세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무슨 조치입니까? 첫째는, 풀무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했습니다. 두번째, 가장 힘센 용사에게 명했습니다. 세번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꼼짝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고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다.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고의가 무엇입니까? 속바지입니까? 그러면 속바지 입고, 속옷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었으니까 3중으로 입었습니다. 거기다가 또 별다른 옷을 걸쳤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만든 금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했으니까 모두가 겉에 별다른 옷, 예복이나 관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옷 입은 채로 결박해서 그대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졌습니다. 맨몸으로 던지는 것보다 옷 입은 채로 던지면 불이 붙기가 쉬울 것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그때까지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지금 구해주시는 것보다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구해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벨론 사람과 느부갓네살 임금도 지금보다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더 크게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시간까지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길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구원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금도 저들을 지금도 살피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의 명령이 엄하고." 평소보다 풀무의 온도를 더 뜨겁게 한 것이라든지, 왕의 얼굴빛이 변한 것이라든지, 왕이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 등을 보아서 용사들은 왕의 명령이 얼마나 엄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세 사람을 결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졌습니다.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옛날 풀무는 우윳병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밑에서 아궁이에다 불 땔 연료를 집어넣고 위에 있는 아구에 원료를 집어넣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 금이나, 광물질을 위에서 부어서 녹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구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던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아직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용사 몇 사람을 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충성하는 불쌍한 용사들의 생명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충성하면 결국은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에게 충성하는 용사의 생명을 지켜주었습니까?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의지하면 이와 같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대단하다 해도 자기 부하들의 생명조차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세요. 풀무불 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구원을 얻었고, 풀무불 밖에 있던 던지는 용사들은 죽었습니다. 결박당한 사람들은 살았고, 결박한 용사들은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힘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오히려 온전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사람이 만든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더 좋은 포도주를 비로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끝장이라고 하지 마세요. 바로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법관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그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하루도 넉넉하게 승리하시고 주님 안에서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고 행복한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강 풀무불 속의 네 사람(3:24-27)
3:24-27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참으로 은혜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결박된 채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사건이 이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리들에게 영원토록 순교자로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사건에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어떻게 개입하셨는지 보십시다.
24절 말씀입니다.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보여준 반응을 통해서
무엇인가 특이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에 그토록 놀랐습니까?
틀림없이 결박시켰는데,
풀무불 안에서는 결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더 뜨겁게 한 극렬한 풀무불이기 때문에
집어던진 사람들도 불에 타 죽었는데,
지금 풀무불 속에는 사람들이 살아 있습니다.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또 뜨거운 풀무불 속에 사람을 집어넣었으니
인육이 타는 냄새가 나야 하는데 그런 냄새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느부갓네살 임금의 시선을 끈 사실이 있습니다.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을 더 집어던졌느냐고 모사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사들이 왕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세 사람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틀림없이 용사들이 묶었습니다.
그런데 불 속에서 세 친구를 결박시킨 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극렬히 타는 풀무불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오히려 도움을 주었습니다.
묶고 있던 끈을 다 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조금도 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때
우리가 당한 시련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를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불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불 가운데서 구하셨습니다.
물론 그 옛날 소돔 성에서 롯과 가족들을 구할 때
사람들의 눈을 얻기 위해서 달아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느부갓네살 임금과 거기 모인 사람들의 눈을 얻기 위해서
다니엘 세 친구를 도망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서 비가 내림으로 인해서
극렬히 타는 풀무를 꺼지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무서운 시련을 다니엘의 세 친구로 하여금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하시면서
저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불 가운데서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 41:10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
이니라."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며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면서 저들을 보살펴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더욱더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극심한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포항 종합 제철소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그 다음날로 입관 예배 드려야 합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꼭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일어나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수도 있고, 저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됩니다.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참 놀라운 체험입니다.
뜨거운 풀무불 속을 자유롭게, 뜨거운 불을 즐기면서 왔다갔다 합니다.
아마 세상 역사상 뜨거운 불 속에서 거닐었던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까?
누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내신 사자입니다.
28절에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하나님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천사입니다.
그 다음에 26절을 보시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풀무는 극렬히 타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타는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느부갓네살 임금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가 어떤 신이 너희를 능히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겠느냐?"
고 하면서 자신만만했었는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구나."
자기가 졌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믿는 신이
이 세 사람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구해내지 못하도록
세 가지 조치를 취했었습니다.
평소보다 풀무불을 칠 배나 더 뜨겁게 했습니다.
강한 용사를 시켰습니다. 결박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강한 용사만 죽었습니다.
결박이 풀렸습니다.
또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네번째 사람,
사자가 함께 하면서 자유롭게 거닐었습니다.
그러니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가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풀무가 우유 병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네 사람이 거닐 정도면 풀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왕의 신하들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에 대한 증인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나왔을 때 네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피부에 화상을 입은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피부가 깨끗합니다.
둘째로,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피부보다 더 빨리 타는 것이 머리카락입니다.
불에 들어가면 금방 타 버리는 것이 머리카락인데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입고 있던 옷도 연기에 그슬렸다든지 불에 탔다든지 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넷째로,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불에 타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담배를 태우는 사람을 보면 옷에 담배 냄새가 찌들어서 가까이 가면 담배 냄새가 납니다.
타는 냄새도 전혀 없었습니다.
27절 말씀 가운데 꼭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와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할렐루야! 너희들 다 봤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봤지?"
이렇게 말하였습니까?
전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을 지켰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은 개울물처럼 시끄러운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물처럼, 기적이 있기 전이나 기적이 있고 난 후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어떤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이 무슨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감정에 따라서 좌우되고,
눈에 보이는 어떤 상황에 의해서 왔다갔다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변함없이,
기적을 보기 전이나 기적을 보고 나서나
그것에 좌우되지 않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혀 말이 없습니다.
"내가 이런 기적을 체험했다.
내가 풀무불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와 함께
유유히 다니는 것을 체험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얕은 물과 같이 소리만 요란한 신앙이 아니라,
깊은 물처럼 요동치 않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일편단심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보살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신앙이 아니라,
변함이 없는 깊은 신앙을 다 갖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3강 구원의 하나님(3:28-30)
3:28-30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결박시켜서 평소보다도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또 왕의 손에서 구해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 기적을 보면서 경이로움과 아울러 마음에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화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찬송하고 있습니다. 안 그러면 벌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다. 28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아직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이 온전히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온전한 회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 큰 신상을 당장 박살내 버려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이런 것을 물어보면서 "이제 바벨론의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선포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어떻게 높이는지, 왜 찬송을 했는지 보십시다. 우선 하나님을 찬양하는 두 가지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심한 시련을 맞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저 높은 보좌에 앉아서 "큰일났네, 어떻게 하지? 불쌍하구나!"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시련 가운데 다니엘의 세 친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극심한 시련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로 하여금 그 시련을 이기도록 보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두번째로,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자를 보내주셨고, 두번째로는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세 사람을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다시 28절 중간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종들이 어떠한 종들이기에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구원하셨습니까?
첫째로, "자기를 의뢰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물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사람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의뢰하고, 더욱더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 몸을 버려서." 롬 12:1에 보면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이것 필요합니다. 이것 주십시오. 저것도 필요하니 저것도 주십시오." 그저 고개만 숙이면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도 필요합니다"라는 주시고 행진곡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까? "내 몸을 던져서 하나님께 드리리라. 이 몸까지도 아낌없이 드리리다"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 아침 내 마음과 내 몸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도 다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왜 사랑하는 아들이 고난 당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오늘 이 아침도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모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왕의 명을 거역하고." 불의 앞에서는 아무리 엄한 왕의 명령이라도 용감하게 거역할 수 있는 신앙,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넷째로,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일편단심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의 신앙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하면 첫째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둘째로 하나님께 몸을 드리고, 셋째로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용감하고 담대한 신앙 가지고, 넷째로 일편단심의 사랑, 충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를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29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을 때 구원한 역사를 분명히 보았으므로"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말로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조서를 내리는 것이 권위가 있습니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조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다음을 보세요.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라고 했습니다. 3:4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여기에는 "백성들과 나라들과"라고 하여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는 무슨 단어가 더 들어가 있습니까? "각"이라는 말입니다.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 즉 누구든지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지금까지는 느부갓네살 임금 자신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앞에 설만히 말했습니다. 설만히 말한다는 것은 대항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겠느냐?" 그랬던 느부갓네살이 이제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마치 자기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처럼 "그 몸을 쪼개고"라고 말합니다. 또 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교만합니다.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빠져서 미쳐 버렸습니다.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비천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어야 할 느부갓네살 임금이 아직도 교만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29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그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믿는 신은 여러 신 가운데 좀 뛰어난 신, 지극히 높은 하나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말 속에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어떻게 했습니다.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였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주를 위해서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다 버렸습니다. 몸을 드렸습니다.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오히려 저들을 더욱 높여주셨습니다.
반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참소했던 갈대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임으로써 그 자리를 자기들이 차지하려고 참소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높아졌습니다. 이들을 참소한 갈대아 사람들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귀한 교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뜨거운 풀무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면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우리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참 좋으신 우리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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