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양화진묘원· 선교사

★'메리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

영국신사77 2008. 11. 2. 22:23

                                         '메리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 
                                                                        2006.08.25  기독넷 > 기독넷마당 - 아름다운 세상/사람 


 일제 치하,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목숨을 바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선교사들이 고히 잠들어 있는 곳, 양화진 외국인묘지. 아직도 연고를 알지 못하는 선교사들의 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곳에는 이 땅에서 죽음을 무릎서고 선교사역을 펼쳤던 선교사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듯하다.

 오늘날 세계교회가 부러워할만큼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바로 여기에 이름없이 묻혀있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지난 2002년 4월 10일, 한강이 눈앞에 펼쳐치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개한 양화진 외국인묘지공원 한 켠에는 30여 명의 교인들이 뜻깊은 행사를 갖고 있었다.

 올해 교회 창립 1백7주년을 맞는 서교동교회(우영수목사 시무)가 잔다리교회(서교동교회의 옛 이름) 설립에 기여했던 메리 헤이든 기포드(Mary Hayden Gifford) 선교사의 기념비 제막과 1백2주기 추모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초기 서교동교회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한 선교사의 선교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이 자리가 무엇보다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서교동교회의 설립자를 언더우드선교사로만 기억해 왔는데, 1백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교회 설립에 기여했던 메리 헤이드 기포드 선교사를 새롭게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 포드 선교사를 찾아내게 된데는 서교동교회 신호철장로의 공이 컸다. 신장로가 교회 부설 유치원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한국 이름인 기보부인(奇普夫人)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지난 3년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와 도날드 클락의 저서를 근거로 기포드 선교사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 1년여 동안 그는 여러 경로와 방법으로 묘지의 소재를 청문했지만, 아무도 기포드선교사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고, 또 묘지공원도 몇 차례에 걸쳐 답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2000년 9월 도날드 N. 클락의 저서에 그의 묘지가 양화진에 위치한 기록을 읽고 현장을 추적한 결과, 겨우 흔적만 남아있고 관리되지 않은 초라한 묘지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만약 신 장로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기포드 선교사는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혹독한 때, 선교사들이 이 땅에 오는 것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했을 만큼, 기포드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뎠던 이 땅은 선교에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1888년 9월29일, 서른한살의 나이에 미북장로회의 파송을 받아 홀로 이 땅을 밟았던 기포드 선교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사실 낯선 이국 땅에 처녀의 몸으로 건너와 선교사역을 펼친다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첫 선교사역지로 현 정신여고의 전신인 정동여학당에서 당장을 지내다가,  2년 후 4살 연하의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인 다니엘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는 1888년 10월27일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이 땅에 들어와, 예수교 학당장과 육영공원교사, 정동, 연못골에서 목회활동을 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서기를 두차례(1895년, 1898년) 역임하기도 했다.

 다니엘 기포드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을 도와 서울근교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고, 1895년에 들어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잔다리교회[현재의 서교동교회]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그녀는 또 새문안교회에서 건축위원으로 활동했고, 1898년에는 황해도 지역까지 활동지역을 넓히기도 했다.

 1898년 7월 1일자 그리스도신문에 보면, 그의 선교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국 여교사 헤이든 부인이 황해도 여러 회당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큰 공로를 우매한 교우에게 힘써 전하여, 교회의 남녀 노소가 다 이 부인의 교훈을 듣고 깨닫는 일이 많았다.

 또한 이 나약한 부인이 '불피 풍우'하고 힘을 다하여 각처를 다니며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거룩하신 뜻을 교인들에게 전하여 어두움 속에서 밝은 그리스도인의 길로 인도하였다.

 우리가 치하하는 것은 남자도 전도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하물며 부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러 사람을 구원하였으니 얼마나 감격한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900년 5월 5일, 경기지역에서 열정을 쏟아 복음의 씨를 뿌리던 그녀는, 43세의 나이에 결국 전염병인 이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인 다니엘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도 한달전인 4월 10일 같은 전염병인 이질로 앞서 세상을 떠났다.

 43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도 하나 남기지 않은채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는, 10여년의 길지 않은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그렇게 이 땅에 묻히고 말았다. 교회 설립에 앞장섰던 기포드선교사의 묘지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서교동교회는 기포드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묘비건립안을 수립하고, 이날 기념비 제막식과 기념식수를 하게 됐다.

 이날 추모예배에서 서교동교회 우영수 목사는 그녀의 삶을 되돌아 보며, "메리 헤이든 기포드선교사는 한 알의 밀알로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죽으셨다"면서, "우리의 삶도 한 알의 밀알이 되자"고 말했다.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의 묘비는 남편인 다니엘 기포드선교사의 묘비와 서로 마주보고 세워졌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이 땅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사역을 펼치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 두 선교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이, 저 세상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겨있으리라.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 기념비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서교동교회는 기포드 부부의 숭고한 선교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감사하며

  제 1백2주기를 맞아 추모사업으로 이 기념비를 세운다"

                                                                                                          ksj@kidokongbo.com

 

 



                               ◈ 기포드 선교사의 자취 세상에 알린 '신호철 장로'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찾아낸 초라한 묏자리를 바라보면서, 우리교회를 설립해준 고마운 선교사의 묘지가 이대로 방치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묘비 건립안을 교회에 제안하고, 오늘 기념비 제막 및 추모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교회 부설 유치원의 역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메리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를 처음으로 찾아낸 신호철장로는, 그녀의 삶을 통해 숭고한 선교 정신을 기리며 감사하는 추모의 정이 가슴속 깊이 생기게 됐다고 소개했다.

 기포드 선교사를 발굴하게된 배경에 대해 그는 "기포드 선교사는 가난한 이 땅에서 열심히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돌봐줄 자녀나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짧은 생애를 마감한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1백년이 지난 그의 묏자리라도 찾아볼 생각으로 그녀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고 설명했다.

 그후,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와 도날드 N. 클라크의 저서에서, 헤이든 기포드 선교사의 묘지가 양화진 Top Line Section F-8에 위치한 기록을 읽고 현장을 추적해 냈지만, 겨우 흔적만 발견하게 된 것.

 기포드 선교사의 업적을 다음 세대에 기록으로 전할 의무감과 당위성을 인식한 그는, "곧바로 '기포드기념 제1단계 사업계획'으로 묘비건립안을 작성해 서교동교회 당회에 제안했고, 당회도 이 계획안을 만장일치로 받아줘 이 일이 이뤄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그는 "이러한 추모예배와 행사가 매년 지속되기를 희망한다"면서, "한걸음 나아가 제2단계의 새로운 기포드 기념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 양화진 외국인묘지 관리한 최초의 한국인 - 잔다라교회 '최봉인장로'

 양화진 외국인묘지를 관리했던 최초의 한국인은 누구였을까.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출발은 1890년, 고종황제가 땅을 기증해서 장로교 선교사인 존 헤론 박사가 이곳에 처음 묻히면서 시작됐다. 이 시기에 외국인묘지의 초대 관리인은 바로 최봉인 장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교동교회의 전신인 잔다리교회의 창립교인의 한사람이었던 최봉인장로는, 1915년 11월21일 이 교회의 초대장로로 임직했다. 그는 1873년 1월에 태어나 1950년 6월 25일 노환으로 77세에 별세했다.

 2002년 4월10일 서교동교회는 양화진 외국인묘지 한켠에 마련된 그의 묘지에 제막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