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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윌리엄 쇼 추모공원

영국신사77 2008. 9. 19. 13:35
                      [만물상] 윌리엄 쇼 추모공원
                                                                         김동섭 논설위원 dskim@chosun.com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1952년에 출판된 김말봉의 '찔레꽃' 같은 책들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한국전쟁 중에 나와, 우리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책들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한국전쟁 중 서울 근교에서 전사한 하버드대 중국학 전공 대학원생 윌리엄 쇼 기념 도서'라고 찍혀 있다. 쇼의 가족과 친구 5,925명이 2~3달러씩 모은 추모 기금으로 사들여 기증한 책들이다.

 ▶윌리엄 해밀턴 쇼는 1922년 평양에서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해군 장교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활약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며 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그는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밟던 1950년, 6·25가 터지자 처와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긴 채 해군 대위로 자원 입대해 참전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겠습니까.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해도 늦지 않아요." 쇼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후, 해군 경비함 함장 이성호 중령에게 한 말이다.

 

 미 해병대에 배속된 그는 서울 탈환작전에 나서 9월 22일 녹번동에서 인민군 매복조와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6년 뒤 백낙준 등 종교계·학계 인사들이 쇼가 전사한 자리에 추모비를 세웠다.

 ▶쇼 집안은 3대가 대한민국에 헌신했다. 아버지는 평양 광성학교 교사, 해방 후 목원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다. 어머니도 숭덕여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부부는 전사한 아들을 따라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안장됐다. 쇼의 부인은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 와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로 일하며, 세브란스병원에 사회사업실을 열어 봉사활동을 폈다.
 
 1968년 귀국해 오하이오에 살고 있는 쇼 부인도 남편 곁에 묻히기로 돼 있다. 큰아들 로빈슨은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에서 일했고 하버드대 한국사 박사다. 며느리 캐럴도 한국 근대사 연구가다.

▶쇼의 추모비는 오래 전 도시계획에 따라 은평구 응암어린이공원 한구석으로 옮겨졌다. 은평구청과 향군, 그리고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인천상륙작전 전우 이성호씨가 홀대받는 그의 추모비를 재건하기로 했다.
 
 22일 추모대회를 열고 역촌동에 들어설 광장에 '윌리엄 해밀턴 쇼 추모공원'을 만든다고 한다. 한국을 고향과 조국으로 여기고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쇼, 그에 대한 보답을 뒤늦게나마 하게 돼 다행이다.

 


 

                                                                                                             입력 : 2008.09.16 0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