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선교사 시리즈
기포드 부부 선교사 편
양화진은 구한말과 일정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가난과 무지로 절망에 처했던 시절에 복음을 들고 이 땅에 들어와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외국 선교사의 묘가 있는 곳이다.
오직 빛과 소금으로 사명을 감당하면서 한편으로는 교육, 의료, 농업, 외교, 체육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초석이 된 분들이 안장된 곳이다. 소수 선교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교사들 행적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포드 선교사 부부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남편 다니엘 기포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 교사·경신학교장
다니엘 기포드(Gifford, Daniel Lyman, 奇普, 1861~1900, 49세)
다니엘 L. 기포드(Gifford, Daniel Lyman, 奇普, 1861~1900, 49세)는 1861년 1월 9일 출생했다. 1888년 10월 27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에서 새문안교회 교역자와 경신학교 교장으로 목회와 교육분야에서 폭 넓은 활동을 하였다.
1890년, 헤이든과 결혼하였으며 1892년부터 발행된 선교잡지 에 많은 기고를 했다.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죠션 셩교서회' 창립위원으로 일을 했다.
1898년 뉴욕에서 '조선의 매일 생활(Every Day Life in Korea)'이라는 책을 발간, 우리 나라의 풍속을 세계에 알리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0년 4월 10일 경기지방 선교여행 중 이질에 걸려다. 가난한 이 땅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별세하여 돌보는 이 없이 양화진에 묻히게 됐다 (바-7)
기포드 어머니는 1898년 8월, 60세가 넘은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아들 다니엘과, 며느리 헤이든이 별세한 뒤에도 조선의 가난하고 병든자를 구제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최초의 공인 찬송가집 발간한 정신학교 교장 헤이든 기포드(1857~1900, 43세)
다니엘 기포드의 부인 헤이든 기포드(Mary Hayden Gifford, 奇普夫人, 1857~1900, 43세)는 1857년 8월 23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파크대학을 졸업했다.
1888년 9월 29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신 여학당장과 여성 선교사역으로 경기 지방과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다니엘과 결혼 후에도 가냘픈 여성이지만 선교 활동과 전도에 힘쓰다가 남편과 함께 1900년 5월 5일 양화진에 묻혔다.
O. R. 에비슨 박사는 양화진 묘역에서 거행된 추모사(追慕辭)에서 "헤이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한국에 왔고, 결혼한 후에도 어떠한 선교 활동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포드는 서울 남쪽 지방을 순회하는 동안 이질에 걸렸으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이곳에 장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헤이든은 1895년, 54곡의 찬송가집을 처음 출판하고, 1898년에는 83곡을, 1900년에는 87곡의 제3판을, G. 리와 공동 출판하였다. 장로회 선교 본부로부터 최초의 공인 찬송으로 채택되어 장로 교단 모두가 사용하게 되었다.
1895년 양화진 한강변에서 피서를 하다가 뜻을 가지고 언더우드와 함께 지금의 서교동교회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세문안교회에서 여성사역을 담당하면서 성전신축 담당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2002년 4월 10일 서교동교회가 세운 비문에는 "풍요로운 고국을 버리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1년 간 활동하였다. 기포드 부부의 숭고한 선교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감사하며 제102주기를 맞아 추모사업으로 이 비를 세운다"고 하였다. |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1-16 (90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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