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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성서 번역의 주역 윌리암 D. 레이놀즈(李訥瑞)와 그 가족

영국신사77 2008. 7. 25. 13:49

        8. 성서 번역의 주역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84세)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는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햄덴 시드니 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외국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축구 야구 정구 등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892년 5월 5일 25세 때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은 미국 남장노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때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선교사함께 내한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189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사진 : 전주신흥학교모습 / 출처 : 종이박물관

 

 신흥학교는 1900년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한 소년에게 신식 교육을 시키면서 시작되어, 이후 1909년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옛 희현당 자리에 벽돌 2층 양옥 건물을 지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된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서양식 2층 건물이 신흥학교의 건물이다(전주 서문교회 제공).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43년간)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폭 넓게 헌신하였다.

 

 1937년 70세에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필자 : 신호철 양화진선교회장(서교동교회 시무장로)

 

 

  레이놀즈(한국명:이눌서, 李訥瑞, William David Reynolds, 1867.12.11~1951) 선교사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레이놀즈는 어린 시절의 꿈처럼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등을 익히게 되는데 그의 재능은 훗날 성서번역의 초석이 되었다.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을 졸업한 후 레이놀즈는 남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고, 1891년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해 레이놀즈가 재학 중인 신학교에서 선교보고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레이놀즈는 조선 행을 기도하며
전킨이라는 귀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는데 레이놀즈와 전킨은 매일 3시에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온 마음을 쏟아, 선교의 길을 열어줄 것을 끈질기게 간구했다.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난 레이놀즈가 조선에 다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년이었다. 서민층 전도를 위해 순 한글 성경은 필수였다. 하지만 성서번역을 담당할 유능한 언어학자는 극히 드물었다.

 

 또한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양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하여 ,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누구보다도 어학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널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 한국말로 전도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널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 전주 ,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조선어와 씨름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조선말이 입에 붙게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선교사와 함께 본격적인 성서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널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렇게 모인 예배는 전주서문교회의 설립의 시초가 된다.

 

 레이놀즈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한다. 성경번역은 외국인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이 컸다.

                                  

 


 끈기있게 성경번역을 진행하던 레이놀즈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입니다. 출판된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은 아예 성경번역에만 매달렸다. 이들은 1902년 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하였다. 히브리어에 정통하였던 레이놀즈는 1910년 구역성경의 출판에서도 주역의 역할을 하여서, 신·구약 성경 한 권이 온전히 출판되는 일에 쓰임 받았다.

                             

                                                                      조선 성경 번역 위원

                                                                               左上 으로 부터: 문경호, 김명준, 정동명
                                                                     W. D. Reynolds (이눌서), H.G. Underwood (원두우),
                                                                              J. S. Gale (기일), G. H. Jones (조원시),
                                                                                                1900 초반 경, 성경 개정


 레이놀즈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다. 신학지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신학연구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교회의 신학이해와 신앙영위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목사들의 신학 연구를 북돋고 뛰어난 목회자, 설교자가 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 연구지는 현재까지도 장로회 신학대학측의 <교회와 신학>, 총신대학측의 <신학지남>으로 계속 간행되고 있다.

 

 

>> 참고고리 :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양화진 선교회 자료)

>> 연결고리 : 미국선교사, 내한 선교사한국 교회사, 장로교

 

 

 

 

 

[해외 선교사가정 열전 (6) 윌리엄 데이비드 레이놀즈] 어린아들 잃고도 헌신

 
   윌리엄 데이비드 레이놀즈

      (William David Reynolds 1867∼1951, 84세)

  “조선은 더 이상 숨겨진 나라가 아닙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즉시 열매 맺는 믿음의 옥토입니다. 이제는 헌신한 자는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 장래를 맡기고 한 걸음 나아갑시다. 그럴 때 주님의 위대한 손길을 경험할 것입니다.”

 레이놀즈는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잠시 귀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남장로교신학교에서 했던 연설을 듣고 선교에 열망을 갖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언어학자의 꿈을 꾸었던 레이놀즈는 미국 햄펀시드니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남장로교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레이놀즈와 몇몇 친구들은 매일 오후 3시에 기숙사 방에 모여 조선 선교의 길을 열어줄 것을 간구했다. 기도회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로부터 8월에 떠나라는 전보를 받았다. 레이놀즈와 테이트, 전킨, 테이트 목사의 여동생 매티와 데이비스, 전킨의 부인 리번, 레이놀즈의 부인 볼링 등 ‘ 7인의 선발대 ’로 불린 이들은 1892년 11월4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레이놀즈는 조선에 도착한 뒤 첫 사역으로 미남장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됐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 공의회를 조직하고 초대 의장에 선임됐으나, 그해 태어난 장남 윌리엄이 전염병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레이놀즈 부부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아들을 양화진에 묻고 더 열심히 주의 일에 헌신했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아 1900년 신약전서를 완역했다. 그리고 이어 1910년 구약성서 번역을 완료했다. 이들 부부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4년 태어난 둘째아들 존 B 레이놀즈는 미국에서 공부한 후, 1920년 남장로회 교육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됐다. 한국에서 10년 동안 교육선교사로 활동했으며 뉴욕시립대 교수를 역임하고 1970년 75세로 별세했다. “제2의 고향은 미국이고 제1의 고향은 한국”이라고 했던 그의 유해는 동생이 묻힌 양화진 묘역에 안장됐다.

                                                                                                                                  이지현 기자

 

 



                                <호남 7 인의 개척선교사 - 레이널즈 선교사 부부>

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호남 선교의 7인의 개척 선교사이었던 레이널즈와 볼링 선교사 부부의 조선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1867년 10월 11일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학 재학 중 누구보다도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각종 어학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졸업 후 라틴어 교수로 근무하다가 가정이 어려움을 당하자 초등학교 교장으로도 근무하였습니다.
꾸준히 신앙생활과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 영적 성장과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선교사의 삶을 살기 위해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신학교 재학 중에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내쉬빌의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 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감동되어 선교동지인 테이트, 전킨 등과 함께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양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하여 ,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어학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널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 한국말로 전도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널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 전주 ,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습니다.

 타고난 어학실력을 인정받아 남장로교회 선교부 대표로 성경번역 위원이 되었으며, 1910년 4월 2일 전주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완수하였습니다.
또한 한영 사전 편집 책임자로 , 평양신학교 교수로,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한국 선교의 학적인 기초를 잘 쌓아 주셨습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신학자이며 어학자이고 성경번역가이자 교정지도자로서 그 업적이 무척 다양하였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사에 남긴 공헌은 물론이며 호남선교를 위해 끼친 그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지대했습니다. 45년간의 한국 선교 사역을 마치고 나이 많아 선교사로 은퇴하여 미국에 돌아가서 84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습니다.

 부인 볼링 선교사도 어릴 때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선교에 열성적인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 , 아프리카 선교사 지망을 할 정도로 선교의 열정을 지니고 준비하고 살았습니다. 레이널즈 선교사와 결혼하여 한국에 오셔서 남편의 45년간의 서울 , 전주, 평양 사역을 내조하면서 , 한국 선교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1937년 은퇴하여 94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습니다.

 이 두 부부 선교사는 나이 많아 은퇴 할 때까지, 한 평생을 한국 땅에 머물려 , 한국 선교의 기초를 누구보다도 튼튼히 쌓아 놓고 가신 선교사님이었습니다.

2002-10-14 09: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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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놀즈[Reynolds:이눌서(李訥瑞 )] 선교사!

 

 

 레이놀즈(李訥瑞 Reynolds) 선교사! 그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마포삼열 등등의 선교사들이 세운 업적에 비하여 전혀 덜하지 않았지만, 한국 교회사에서 별로 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역시 서울, 평양 등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 집중 조명을 받다보니, 호남지방을 무대로 한 그의 사역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4년 11월 4일 한국에 도착한 직후인 1895년부터 38년까지 무려 43년간 가장 오랫동안 우리 말 성경 번역작업에 관여한 인물이다. 한 때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신학논문집 「신학지남」편집인으로도 사역했다.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부인은 펫시 볼링)는 윌리엄 맥클레이 전킨(전위렴)과 부인 마리 레이번, 윌리엄, 테이트(최마태)와 그의 부인 레위스 보이드 테이트(최의덕), 테이트 누이 마티 사무엘 테이트, 리니 풀커스 데이비스 등과 함께 미국 남장로회 7인의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충청 전라도 지역을 선교지로 할당받은 이들은 1892년 9월 17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한 달이 넘는 항해 끝에 1892년 11월 3일 제물포항에 도착했으며, 뱃길로 군산을 거쳐 전라도의 중심지였던 전주에 들어왔다.


 

  이들이 한국에 도착한 그 이듬해인 1893년 1월 28일, 서울에서는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공의회’라는 한국 교회사상 중대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선교정책을 수립한다.


 

 첫째, 선교구역의 예양협정이다. 이것은 각 선교회가 선교의 중복과 지역의 이중 점거에서 오는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자는 것이다.


 

 둘째, 소위 ‘네비우스 방법’을 근간으로 하여, 전도대상을 상류층보다 서민층, 부녀자들과 청소년층에 두는 동시에, 성경을 비롯한 모든 문서사업을 순 한글로 한다는 것이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이 역사적인 공의회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으며, 함께 도착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전라, 충청 지방을 선교구역으로 배정받았던 것이다

 

 이들이 호남지역에 세운 업적은 화려하다 못해 눈부시다.

 

 이들은 전주, 광주, 군산, 목포 등 호남 지역에서 서문교회, 양림교회, 구암교회, 개복동교회, 양동교회 등 각 지방 최초의 교회들을 설립했다.

 

  전주의 신흥, 기전여고(호남 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광주의 숭일, 수피아, 순천의 매산, 목포의 정명 등 호남 지방의 전통 깊은 기독교 명문들을 설립하는 주역이 된다. 이 가운데 중심 인물이 남자 셋, 즉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 선교사이며, 그 중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가장 큰 리더십을 발휘한다.


 

 이들의 사역현장은 오늘날에도 광주 양림동 일대와 전주 예수병원 언덕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이후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묘지도 광주호남신학대 언덕과 예수병원 앞 언덕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 역시 지방에 묻힌 관계로,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본지에서 이들의 삶과 신앙을 추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레이놀즈, 한글 성경 번역의 아버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한국 민족을 위하여 ‘한 책’에 헌신된 레이놀즈 선교사,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되었는가?

 

 1891년 10월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미국 외지선교신학생 연맹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언더우드 목사가 보고 연설을 했고, 윤치호가 한국에 관한 강연을 했다. 이때 레이놀즈는 큰 감격과 자극을 받고, 평생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다. 이 대회에 함께 참석했던 테이트(최의덕)도 가슴이 뜨거워져 남장로교 선교부로 찾아가 한국 선교를 청원했다.


 

 그러나 선교부에서는 “한국과 같이 미개한 나라에는 파송할만한 인적 물적 자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 거기에 대한 계획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는 상당히 황당하다할 거절 답변을 들어야 했다. 그러자 이때 의기투합한 레이놀즈, 전킨 등은 매일같이 시간을 정하여 합심기도회를 열었다.

 

 매일 3시에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을 쏟아,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줄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2년 후에나 한국으로 떠날 줄 알았던 그들은, 기도를 시작한지 두 달만에 한국으로 떠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때 이들이 한국선교를 앞당기게 된 데에는, 당시 언더우드 목사의 친형이며 북장로교 전도국 위원이었던 존 언더우드가 2천불을 남장로교에 헌금하고, 동생 언더우드 역시 5불을 헌금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로 언더우드 가문 3형제의 숨은 공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처음엔 성서번역 관계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1896년 전주로 옮겨간다. 이때 어학교사로 데리고 간 사람이 추강 김필수라는 유학자이다. 추강은 안성 부유한 집의 독자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지도자 박영효의 총애를 받았던 관계로 박영효와 함께 일본 고베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박영효와 함께 있는 동안 그는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10년만에 귀국하자, 곧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교사로 발탁되었다. 전주에서 레이놀즈 선교사를 돕던 그는 1909년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이 되는 동시에, 1915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었다.??


 

 학자 출신의 레이놀즈와 김필수, 이들은 너무나 흡사한 달란트를 잘 발굴하였고, 오랫동안 동역했다. 레이놀즈 선교사가 누구보다 빨리 한국어와 문장력에 익숙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목사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서상륜, 이수정 역에서 오역을 가려내며 완벽한 한글 성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았다.


 

 특히 1902년 1월부터 1906년 3월까지 약 3년 6개월 동안 3명의 성서번역 대표위원(게일, 언더우드, 레이놀즈)들이 555회의 독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때는 아주 서울로 이주해야 할 정도였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1900년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할 수 있었다. 1910년까지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레이놀즈 선교사는 주석을 담당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 히브리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레이놀즈 선교사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 책의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헌신하여 1900년 신약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완역에는 거의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

 

 1937년 은퇴하고 귀국하기까지 신구약 개정판을 내는데 중심 인물이었다.

                                                          분신이 묻힌 자리

 지금 양화진에는 레이놀즈 선교사 내외가 묻혀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분신이자 사랑하는 아들들이 묻혀있다. 맏아들 윌리암 데이비스와 다른 아들 존 볼링이다.


 

 맏아들은 1893년 한국에서 태어나던 그해 바로 죽어 양화진에 묻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둘째 아들 존 볼링이다.


 

 그는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0년 미국 테네시에서 내쉬빌에서 작고했다. 70년대 초반 미국에서 작고한 사람이 한국 땅에 묻히기는 퍽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에서 일한 선교사도 아니었고, 뉴욕 시립대학 수리학과 교수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에게 제 1의 고향이었다. 그는 항상 “한국은 제 1의 고향이고, 미국은 제 2의 고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사랑의 1번지가 바로 한국이었다. 미국에서도 매일 아침 일어나면 제일 먼저 피아노에 앉아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가 애국가를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첫째로 자신이 한국 사람이며, 둘째는 부인이 안익태 선생과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탓이라고한다.


 

 미국에서도 항상 한국 김치를 반찬으로 식사했고, 서울에 올 때면 어린 시절 평양에서 먹었던 깨엿을 잊지 못해 반드시 깨엿을 사갖고 호텔로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1년에 한 번씩은 동양 각 국을 여행했는데, 그 때마다 반드시 코리아 타임스 지에 기고를 할 정도였다.


 

 1970년 75세로 별세하자 그의 부인 마가렛 여사는 남편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그 재를 한국에 묻어달라고 보내왔다고 하였다. 당시 에피소드 하나. 그의 유해가 우체국 소포로 보내 왔기 때문에, 우체국 직원이 무슨 화공약품인가 하여 까다롭게 조사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 유해를 다시 입관하여 양화진에 묻었는데, 하관식 때에는 대를 이어 우정을 이룬 언더우드 가문의 원일한 박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한줌 흙으로 돌아온 그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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