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39-엘리아 카피톨리나와 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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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예루살렘 성 안에 새로운 수도원을 건설한 시온 수녀회는 낡은 건물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펼쳐져 있는 로마시대의 한 광장을 발견했다. 사방 1m 이상 크기의 잘 다듬어진 바위로 이뤄진 광장의 바닥에는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장기판도 여러 개가 새겨져 있었다. 마침 이 곳이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셨다는 안토니아 요새에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광장을 리토스트로토스, 즉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던 박석이라고 선포했다(요 19:13). 더군다나 중세 십자군 시대부터 정해진 비아 돌로로사의 출발점인 안토니아 요새 자리, 즉 아랍인들의 오마리예 학교 마당보다는 훨씬 더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성지로 인정됐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돌바닥을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리토스트로토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빌라도는 법정 안에 위치한 박석에서 예수를 재판했다고 한다(19:13). 요세푸스에 의하면 서기 70년 여름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진입한 로마 군단은 성전산 북서쪽 모퉁이에 건설된 안토니아 요새를 허물어뜨리기 위해 경사로를 쌓는데 마침 근처에는 저수장이 있어서 그 위로 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 저수장은 규모가 비교적 작기 때문에 참새의 저수지로 불렀다는 것인데 마침 시온 수녀원의 지하의 박석 아래에는 길이 52m 폭 14m에 달하는 대규모의 지하 저수장이 발견됐다. 또한 바로 옆에는 십자군 시대 이래로 라틴어로 ‘에케 호모’라 불리는 세개의 아취가 있는데 이 아취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다는 구절(요 19:5)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십자군 시대의 전승으로만 여겼던 빌라도의 법정자리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포룸
하지만 1970년대 이래로 가톨릭 고고학자들의 치밀한 발굴 결과 박석이라 불리는 리토스트로토스는 서기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새롭게 건설한 예루살렘의 동부 포룸 광장의 한 부분으로 밝혀졌다. 로마식 도시의 포룸은 그리스식 도시의 아고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장소로서 도시민들의 만남과 공공집회, 상거래가 이뤄지는 일종의 시장터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공병대가 이곳에 넓은 광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장애물은 바로 참새의 저수장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취형의 지붕을 덮고 그 위에 박석을 깔았다는 것이다. 이 광장의 서쪽 입구에는 승리를 기념하는 세개의 아취가 세워졌고 후대에 십자군들은 이 아취에 에케 호모라는 제목을 붙였다. 동부 포룸의 전체 넓이는 1만5000평방미터로 추정된다. 한편 예루살렘의 중심적인 중앙 포룸은 오늘날 골고다의 성묘교회가 위치한 곳에 있었으며 남북의 길이 250m 동서의 폭 150m에 달하는 거대한 광장의 북쪽에는 비너스 신전과 바실리카가 자리잡았다.
마다바의 모자이크 지도
이러한 예루살렘의 로마식 도시설계는 이미 1884년에 요르단의 마다바의 한 비잔틴 교회 바닥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지도를 통해서 알려졌다. 서기 6세기에 만들어진 이 지도의 한가운데는 타원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성이 표시돼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가 눈에 띈다. 이 중에서도 북쪽의 성문 안쪽에는 높은 기둥이 서있는 광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1930년대부터 예루살렘의 북쪽 성문인 다마스커스 성문 아래에서 로마시대 성벽과 성문의 흔적을 찾아냈다. 1967년 이후 이곳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 결과 이 성문은 거대한 삼중 성문 중 동쪽의 것으로 확인됐다. 성문 안쪽에는 박석이 깔린 광장의 일부도 발견됐다. 마다바의 지도대로라면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카르도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에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발굴이 불가능했다.
카르도
모든 로마식 도시에는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 카르도와 이에 동서로 연결되는 소로 데쿠마누스가 있다. 1976년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자 아비가드(N Avigad)는 유대인 구역의 발굴을 통해서 카르도 중 180m 부분을 발굴했다. 원래 도로의 폭은 12m에 달하며 인도에는 지붕을 받치기 위한 기둥이 줄지어 있었고 인도의 안쪽에는 상점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로 밑바닥에는 로마시대의 토기가 아닌 비잔틴시대의 토기가 나오기 때문에 이 부분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보다 늦은 비잔틴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시대에 이 지역에는 제 10군단의 진지가 있었기 때문에 카르도가 더 이상 이 곳까지 연장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아 카피톨리나
서기 132년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은 로마 정권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예루살렘의 로마 군인들을 몰아내고 화폐까지 발행하는 등 독립을 쟁취했지만 서기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진압으로 끝을 맺고 만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만들기 위해 성문과 광장, 카르도와 포룸, 신전 등을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과 로마의 언덕을 상징해 이 새로운 도시를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명명했다. 다윗이 정복하여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은지 1100년 동안 이스라엘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예루살렘은 로마식 도시로 탈바꿈했고 이후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학문적 중심지는 북쪽의 갈릴리로 이동됐다.
프레토리움은 어디인가
오늘날 십자가의 길 제 1, 2장소에 해당되는 안토니아 요새가 바로 빌라도의 법정이라는 주장은 마태복음서의 프레토리움(27:27)을 이 요새와 일치시켰기 때문에 생겨난 전승이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역사학자들은 빌라도가 평상시에는 가이사랴에 있다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경우에는 오직 군사적 용도로 건설된 답답한 안토니아 요새보다는 보안과 시설이 뛰어난 헤롯 궁전에 기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재판도 오늘날 다윗 성채라 불리는 헤롯 궁전터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십자가 형장인 골고다도 바로 이 궁전의 성벽 바깥에 위치해 있어서 형을 집행시키기가 훨씬 수월한 입지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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