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성지를 찾아서 37-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

영국신사77 2008. 8. 20. 15:05

         성지를 찾아서 37-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7062034
1908년 이집트의 엘레판틴 섬에서 2년전에 발견된 아람어 파피루스 기록을 검토하던 독일의 언어학자 자코(E. Sachau)는 이 섬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이미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 시대에 신전을 건설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점에서 오직 예루살렘만이 야훼가 스스로 선택한 거처인데 또 다른 신전을 그것도 이방인 지역에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 문제가 학자들 사이의 논란거리가 됐다.

믹돌에서 수에네까지

구약성서에서 이집트의 영토는 흔히 ‘믹돌에서 수에네까지’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이 두 지역은 각각 이집트의 북쪽과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겔 29:10). 수에네로부터 오늘날의 지명 아스완이 유래됐다. 대부분 연한 석회암 지대를 완만하게 흐르는 나일강이 아스완 지역의 화강암 지대에 이르러 길이가 10km에 달하는 급류를 형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배가 다닐 수 없어서 천연적인 이집트의 남쪽 국경이 됐다. 아스완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핑크빛 화강암 채석장이 있어서 예로부터 파라오들은 오벨리스크나 대형 조각 석재를 얻기 위해서 이곳을 개척했다. 또한 황금과 상아, 흑단목, 노예 등 남쪽 누비아 지역의 특산품을 얻기 위한 무역의 관문으로도 개발됐다.

엘레판틴과 크눔 신

아스완의 나일강 한가운데 길이 2km 폭 500m에 달하는 제법 큰 섬인 엘레판틴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 초기 왕조 시대인 서기전 3000년경부터 이 섬은 이집트의 남쪽을 지키는 수비대의 요새로 개발됐다. 수양 머리를 한 크눔 신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인간 창조의 신인 동시에 급류의 신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엘레판틴에는 서기전 2800년경 크눔과 그의 배우자 사테트를 기념하는 신전을 건설했다. 또한 아스완은 나일강의 신 하피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의 물이 아스완에 있는 하피가 거주하는 동굴에서 흘러나온다고 여겼다. 급류 때문에 더 이상 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에 생겨난 전설이다.

나일눈금(Nilometer)

엘레핀틴 섬에는 고왕국 시대부터 만들어진 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나일눈금이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고대 이집트에 있어서 강이 범람하는 홍수는 풍년을 약속하는 전제조건이었다. 겨울곡식인 밀과 보리를 재배했던 고대 이집트에 있어서 나일강은 농한기인 여름철에 강의 원류인 중부 아프리카의 고산지대의 눈이 녹으면서 강 양편의 농경지를 완전히 잠식시킨다. 이러한 나일강의 범람은 새로운 흙을 실어다주고 물기를 머금은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물이 빠지는 10월경 씨앗을 뿌리기만 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여름철에 홍수가 나지 않으면 흉년이 된다. 따라서 곡물을 세금으로 징수하는 중앙정부는 해마다 미리 농사의 성패를 예측해야 하는데 이러한 장치가 바로 엘레판틴 섬에 설치한 나일눈금이다. 이 지점의 수심을 기준으로 8m가 평년작이고 이보다 2m 이상 낮으면 흉년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해야만 했다. 엘레판틴의 나일눈금은 20세기 초까지도 사용했었다.

유대인 공동체

비록 1906년에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밝혀졌지만 이 연구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한 것은 1953년 클랠링(E. Kraeling)이 미국의 브룩클린 박물관 소장의 파피루스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모두 17점에 달하는 이 파피루스 문서는 1893년 미국의 이집트 학자인 윌버(C.E. Wilbour)가 엘레판틴에서 구입한 것으로서 그의 가족들에 의해 1947년 박물관에 기증됐다. 윌버의 파피루스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엘레판틴 문서를 종합한 결과 모두 35통의 편지와 43건의 계약서가 확인됐으며 이들의 기록 연대는 서기전 495년부터 399년까지 약 100년의 기간으로 밝혀졌다. 문서의 주인공들 중의 하나인 아나니야의 경우 야후 신전의 제사장으로서 귀족의 노예와 결혼한 후 다음세대에까지 재산을 양도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야후(Yahu) 신전

예루살렘 외의 이방 지역에 최초로 건설된 유대인들의 야후 신전은 이 신전이 파괴됐다는 기록을 통해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서기전 410년 크눔 신전의 제사장들이 유대인들의 야후 신전을 파괴시켰고 2년 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총독에게 원조를 요청한다. 19세기말 이후로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파괴된 야후의 신전을 찾기 위해 엘레판틴 섬을 발굴했지만 아직 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이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왜 야훼를 야후로 표기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유대인들의 이름에서 야훼를 의미하는 줄임말로서 예레미야(후)나 이사야(후)와 같이 야후가 접두사나 접미사로 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연히 야후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구역성서의 단편들이 함께 발견됐더라면 이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오경이 페르시아 시대에도 여전히 최종적으로 편집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페르시아와 유대인 용병

그렇다면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이 먼곳까지 이주해 왔을까?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된 후 포로로 끌려가던 예레미야는 극적으로 구출된 후 이집트로 피난가게 됐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여생을 이집트에서 보내면서 예언 활동을 지속했다. 서기전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유대인 포로가 석방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됐고 서기전 525년 캠비세스가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이곳의 유대인들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비록 페르시아가 남쪽의 누비아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기 위해서 엘레판틴 요새에 유대인들을 용병으로 배치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자율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전을 건설할 만큼의 종교적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서기전 399년 130년에 걸친 페르시아의 통치가 끝나고 이집트에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 페르시아 당국에 의해 정착된 엘레판틴의 유대인 용병 공동체도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없어졌다. 파괴된 야후 신전과 함께 그들의 기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