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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41-선한 사마리아 사람

영국신사77 2008. 8. 20. 15:10

               성지를 찾아서 41-선한 사마리아 사람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7096728
1983년 여름 이스라엘 고고학자 마겐(Y.Magen)은 세겜에 있는 그리심 산 정상의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그리심 산 발굴이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서기전 4세기 말 이곳에 건설되었다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때문이다.

서기 1세기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는 산발랏을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산발랏은 유대인들과 친분을 맺기 위해 자신의 딸을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므나세의 동생 야두아와 결혼시켰다.제사장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건은 유대인들을 격분시켰고 산발랏은 유대인 사위에게 그가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겠노라 약속했다.서기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로 진격하는 도중 페니키아 지방의 두로를 공격할 때 산발랏은 군대 8000명을 거느리고 두로에 가서 알렉산드로스를 도와줬다.알렉산드로스는 그 대가로 그리심 산 정상에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만한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서기전 4세기말에 건설된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은 서기전 113년쯤 하슈몬 왕조의 히르카노스에 의해 파괴됐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요세푸스의 사마리아 성전에 관한 언급이 느헤미야서의 산발랏 기사(느 13:28)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역사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판단한다.그러나 1964년 그리심 산의 북쪽 봉우리 에르-라스에 위치한 로마시대의 신전을 발굴한 미국의 고고학자 불(R.J.Bull)은 신전 밑바닥에서 요세푸스의 언급대로 서기전 4세기 말에 건설된 사마리아 성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하지만 정밀한 조사결과 로마 신전이 각각 서기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밝혀졌다.그렇다면 사마리아 성전의 남은 후보지는 그리심 산 정상에 위치한 서기 5세기말에 지어진 비잔틴 시대의 테오토코스 교회터밖에 없다.

10여년에 걸친 마겐의 발굴결과 그리심 산 정상에는 서기전 2세기 초부터 사마리아인들이 주거지를 형성했음이 밝혀졌다.이 주거지의 넓이가 자그마치 35만㎡에 달하기 때문에 1만명 이상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1988년 발굴에서 비로소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이 최초로 발견됐다.이곳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요새처럼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전체 면적이 2만㎡ 정도이다.비록 서기 5세기말 교회가 건설되면서 성전의 기초가 대부분 파괴됐지만 야훼라는 기록을 포함해서 모두 60여점의 종교적 기록물과 함께 불에 탄 가축의 뼈도 대량으로 출토됐기 때문에 이곳을 사마리아인들의 성소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대 사마리아인들의 기원은 서기전 721년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멸망시킨 앗시리아가 사마리아 지역에 강제로 이주시킨 이방민족과의 혼혈에서부터 비롯됐다고 알려졌다(왕하 17:24).하지만 그리심 산 발굴결과와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 사마리아인들은 서기전 2세기초에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종교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의식과 절기준수는 이방인들과의 혼합종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유대교와 거의 흡사하다.심지어 모두 6군데서 발견된 사마리아인들의 회당도 그 방향이 그리심 산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이 거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유대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삼고 그리심 산을 야훼가 선택한 성지로 여기며 오늘날에도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는 구약시대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물었다(눅 10:25).자신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예수는 율법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율법사는 신명기(6:5)와 레위기의 구절(19:18)을 인용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했다.예수는 이 두 계명을 행하라고 권고했다.율법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웃이 누구냐고 되물었다.이때 비로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준다.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던 강도 만난 자를 친절하게 도와 준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은 ‘굿 사마리탄’이라는 국제적 박애의 상징으로 굳어졌다.사실 따지고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위선자였기 때문에 지나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 성전 제사를 수행키 위해서는 부정한 주검을 만지면 안되기 때문에 거의 죽어 가는 피해자를 마음으로는 도와주고 싶지만 차마 가까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심지어 오늘날에도 유대인 중에서 제사장 가문인 코헨 가족은 남의 장례식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는 율법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세겜과 예루살렘을 비교해 볼 때 예루살렘이 원래 이방민족 여부스의 도시임에 비해서 세겜은 이미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야곱 등 족장들이 거주한 곳이고 요셉의 무덤이 있으며 여호수아가 제단을 쌓은 종교적 중심지였다.세겜의 사마리아 성전이 서기전 113년에 파괴됐고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도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됐다.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함께 사두개파의 전통과 제사의식이 사라졌다.더욱이 서기 691년 예루살렘 성전산에는 무하마드가 승천하며 발자국을 남겼다는 거룩한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일명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리는 바위의 돔이 건설됐다.이후로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산은 이슬람교의 3대 성지 중 하나가 됐고 현실적으로 이곳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성지가 아닌 셈이다.하지만 세겜의 사마리아인들은 오늘날에도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해 축복받은 그리심 산 정상에서 율법대로 희생 제사를 지내며 구약시대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는 세겜에 300명,홀론에 300명 등 모두 600여명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멸종위기의 소수민족으로서 국제적인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