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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40-메르네프타 석비

영국신사77 2008. 8. 20. 15:09

               성지를 찾아서 40-메르네프타 석비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7062288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에서부터 비롯됐다(창32:28).그런데 엘,즉 하나님과 싸웠다는 뜻의 이스라엘의 기원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민족이 약탈당해서 더 이상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졌다는 고대 이집트의 한 절망적인 비문에서부터 출발한다.

페트리의 이스라엘 석비

1896년 겨울 이집트 최대의 유적지 테베에서 한 파라오의 장례신전을 발굴하던 영국 출신의 이집트학자 페트리(W.F.Petrie)는 높이 3.2m,폭 1.6m에 달하는 검은 화강암 석비 하나를 발견했다.당시까지 이집트 지역의 발굴에서 파라오의 업적을 새긴 전승비와 기념비가 자주 출토되기 때문에 이 발견은 그리 대수로운 사건은 아니었다.하지만 모두 28줄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해독하던 그는 27번째 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더군다나 이 단어의 끝에는 민족을 의미하는 한정사가 붙어있어서 특정한 민족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성서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이 최초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메르네프타

이 비문을 기록한 주인공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열 세번째 아들인 메르네프타였다.부친이 거의 90세가 넘도록 67년간이나 통치했기 때문에 메르네프타가 서기전 1210년쯤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이 넘어서였다.부친의 오랜 통치기간 중 그 위로 열 두명의 형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메르네프타는 모두 10년을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를 괴롭혔던 남쪽의 누비아와 서쪽의 리비아를 점령했고 북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평정했다.일명 이스라엘 석비로 불리는 메르네프타의 전승비는 바로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이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르네프타는 시적인 어조로 팔레스타인 정복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홉 활(원수) 중에서 아무도 고개를 드는 자가 없다.이제 리비아는 폐허가 됐고 하티는 평정됐다.가나안은 온갖 재난으로 약탈당했다.

아쉬켈론은 정복됐고 게제르는 사로잡혔으며 야노암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의 자손은 더 이상 없다.후루(팔레스타인)는 이집트 때문에 과부가 됐다.메르네프타는 가나안 지역의 세 도시국가와 한 민족을 정복했다고 언급하는데 아쉬켈론,게제르,야노암 등은 모두가 땅을 의미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그들은 이미 정착한 도시국가내지는 왕국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이스라엘은 민족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 있어서 당시 이 민족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던 유목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우리는 이 비문을 통해서 이미 서기전 1210년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을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막강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 민족을 물리친 사건을 그의 승전비에 기록할 만큼 위협적인 세력이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당시까지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근거하여 람세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던 람세스 2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여겼다.하지만 1896년에 발견된 이스라엘 석비에서 메르네프타가 이스라엘 민족을 무찔렀다는 언급 때문에 그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이라고 여겼다.더욱이 왕들의 계곡에 있는 메르네프타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서 이상하게도 그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하다 홍해에 빠져 죽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출14:28).하지만 1898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아멘호텝 2세의 무덤에서 무려 16기에 달하는 왕족의 미이라가 발견됐고 이 중에서 메르네프타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어졌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발견됐지만 당시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은 1840년대 니느웨에서 발견된 산헤립 왕궁 벽의 라키쉬 부조를 통해서였다.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메르네프타 석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민족에게 점령당하고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는 처량한 모습이었다.하지만 페트리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석비를 발견한지 80년이 지난 1976년 시카고 대학의 유르코(F.J.Yurco)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모습을 카르낙 신전 부조를 통해 확인했다고 발표했다.그의 발표는 니느웨 궁전의 부조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선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집트 테베의 카르낙 마을에는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을 모신 대신전이 있는데 신전 마당의 한 외벽에 메르네프타가 가나안의 네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사실 이 부조는 당시까지 람세스 2세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됐지만 왕의 이름을 자세히 분석한 유르코는 그의 아들 메르네프타의 전투장면이 추가로 삽입된 것을 확인했다.유르코는 ‘3200년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논문에서 메르네프타가 그의 비문에서 아쉬켈론,게제르,야노암,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 언급한대로 실제로 신전 부조에서도 모두 네 가지 장면의 전투가 등장한다고 밝혔다.

비록 이 부분에서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민족과 전투하는 생생한 장면은 서기 5세기쯤 로마인들이 근처에 세워진 한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운반하기 위해서 벽을 허무는 바람에 일부가 훼손됐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이중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투장면에서는 세 도시와는 달리 성벽을 지닌 도시가 나타나지 않는다.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서기전 1210년쯤 아직 도시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 용사들은 머리띠를 두루고 길다란 턱수염을 길렀으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이들은 아쉬켈론,게제르,야노암 사람들과 복장과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원주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