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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35-소아시아의 산타클로스

영국신사77 2008. 8. 20. 15:03

           성지를 찾아서 35-소아시아의 산타클로스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961224
크리스마스의 전설적인 수호성인 산타클로스는 신약시대의 소아시아로 알려진 터키로부터 유래됐다. 1812년 영국의 카커렐(C.R. Cockerel)과 1830년대 프랑스 건축가인 텍시어(Ch. Texier)는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의 리키아 지방을 여행하던 중 고대 유적지 뮈라에 있다는 성 니콜라우스 교회유적에 관심을 갖게됐다. 1853년 러시아는 최고 통치자 차르의 수호 성인인 니콜라우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뮈라의 교회 유적지를 구입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이때부터 중세 이후 수백년 동안 잊혀졌던 소아시아의 산타클로스가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리키아

터키의 리키아 지방은 오늘날 테케 반도라 불리는 곳으로서 북쪽으로는 타우루스 산맥이 자리잡고 있으며 최고봉이 해발 3070미터나 되는 매우 험한 바위산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고립된 지역이었다. 외부지역과 유일한 교통로였던 바닷가에는 파타라, 안드리아케, 리뮈라, 텔메소스 등의 항구가 자리잡고 있다. 리키아의 전성기에는 70여개의 도시들이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26개의 도시가 번창했으며 이 지방의 수도는 크산토스였다.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리키아에는 이미 서기전 2000년대 초기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힛타이트, 이집트, 우가릿 등지에서 출토된 문서들을 통해서 서기전 1500년경부터 이곳에 뤼카라 불리는 민족이 살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리키아가 유래됐다. 리키아의 언어는 루위아어의 일종으로서 서기전 4세기 말 그리스어로 동화되기 전까지 모두 29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알파벳을 갖고 있었다. 할리스 강 서쪽 지역에서 유일하게 강대국 리디아의 세력에 대항했던 리키아는 서기전 546년부터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이후 차례로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리키아는 서기전 189년부터는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갔지만 서기전 169년부터는 자유도시 지역으로 그 지위가 격상됐다. 당시 리키아는 크산토스, 파타라, 프나라, 올림포스, 뮈라, 틀로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모두 23개의 도시들로 구성된 ‘리키아 동맹’을 결성했다. 서기 74년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다스리는 리키아-팜필리아 주를 설립했다.

뮈라

리키아 지방의 중심도시인 뮈라는 향품의 일종인 몰약(myrrh)의 거래와 관계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학설이 있으나 역사적인 증거는 희박하다. 바울은 재판을 받기위해 가이사랴를 떠나 로마로 출항할 때 시돈을 거쳐 리키아 지방의 뮈라에 도착하여 배를 갈아탄 적이 있다(행 27:5-6). 뮈라의 요새는 해안에서 5km 정도 내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들린 항구는 바닷가의 안드리아케 항구였을 것이다. 바울은 이곳까지 아드라미티움 배를 타고왔으며 이곳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바꿔탔다.

고대도시 뮈라의 유적들은 비교적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데 북쪽의 바위언덕에 자리잡은 아크로폴리스, 남서쪽의 극장과 절벽묘지가 있는 아고라, 그리고 남동쪽의 미로스 강가에 위치한 묘지와 수로 등 모두 세지역으로 구분된다. 서기전 5세기에 최초로 건설된 뮈라의 아크로폴리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한가운데 망대와 신전, 그리고 지하 물 저장소 등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의 성벽은 서기 5세기경 비잔틴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 모두 35줄의 객석에 1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뮈라의 로마식 극장은 남서쪽 절벽지대에 건설됐으며 현재의 것은 서기 141년 지진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극장의 서쪽으로는 소위 ‘바다 묘지’로 불리는 절벽동굴 무덤군이 자리잡고 있다. 소아시아의 무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뮈라의 무덤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건물의 모습과 똑같게 입구를 장식했기 때문에 마치 고층 아파트를 보는 느낌을 갖게한다. 특히 채색무덤은 부조로 조각한 인물상위에 여러색깔을 칠함으로써 매우 화려한 장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 니콜라우스 교회

뮈라에는 성탄절의 수호성인 성 니콜라우스, 즉 산타클로스의 기념교회가 있다. 서기 270년경 항구도시 파타라에서 유복한 곡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니콜라우스는 서기 300년경 뮈라의 주교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니콜라우스는 여러 종류의 선행과 기적을 베풀었고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당시 옥고를 치루었으며 서기 325년에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난파당한 뱃사람들을 보살펴주고 뮈라에 기근이 닥쳤을 때 지나가던 곡물 운반선으로부터 곡식을 구해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연고로 인해서 니콜라우스는 오늘날 지중해 지역 선원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서기 341년 니콜라우스가 죽은 후 그의 유해는 뮈라에 묻혔으나 서기 1087년 뱃사람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바리로 옮겨졌다. 중세 이후로 유럽전역에 걸쳐 12월 6일을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로 기념하게 됐으며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 교민들에 의해 미국 개신교계에 전해져서 오늘날 산타클로스 관습의 직접적인 유래가 됐다.

뮈라의 현재 마을인 데므레에 자리잡고 있는 성 니콜라우스 교회는 그의 무덤자리에 건설된 서기 6세기의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로부터 유래됐다. 지진과 아랍인들의 침략으로 파괴와 복구가 여러차례 반복된 후 11세기 이곳에는 수도원이 건설됐다. 하지만 13세기 이후로 미로스 강의 퇴적 작용으로 교회주변이 서서히 흙속에 파묻히면서 폐허로 변했다. 주변지역보다 6m나 낮게 묻혀있던 교회유적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에 세워진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는 한 가운데의 돔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연결된 정방형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쪽에는 모두 10개의 반원형 계단으로 구성된 벤취가 있고 그 앞에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1989년부터 안탈리아 박물관과 이스탄불 대학에 의해 고고학적 발굴과 복원작업이 진행중이며 오늘날 터키의 국교가 이슬람교이지만,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차원에서 소아시아의 산타클로스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