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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34-알렉산드리아

영국신사77 2008. 8. 20. 14:59

                   성지를 찾아서 34-알렉산드리아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961150

서기전 47년 알렉산드리아의 카이사르를 쫓던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포위해 들어오자 빈 배에 불을 붙여 이를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창고에 보관중이던 도서관의 책들이 불에 탔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에게 선물로 준 5만권이었다. 서기 391년에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테오필루스가 이방제의를 처단하려는 목적으로 세라페이온에 불을 질렀다. 이 신전은 5만권의 책을 소장한 일종의 공공 도서관이었다. 서기 642년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 점령군은 당시 세계적인 학문의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많은 서적들을 탈취하고 건물에는 불을 질렀다. 1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 전통이 마침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황제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문명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던 세계 최대규모의 도서관은 이집트의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됐다. 서기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점령했다. 스스로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의 아들임을 신탁 받고자 리비아 사막에 위치한 시와 오아시스로 가기 위해 그는 지중해 바닷가의 조그만 어촌 라코티스를 방문했다. 서기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그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이곳에 대규모 메트로폴리스를 건설했고 바벨론에서 죽은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이곳에 매장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자기 아들의 교육을 위해 대학자 스트라토를 아테네로부터 초빙했다. 그는 조직적인 교육을 위해 서기전 306년 무세이온(Mouseion)을 설립했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대학과 도서관의 기원이 됐다. 서기전 300년경 아테네의 데메트리오스가 초대 도서관장으로 임명되면서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으로 발전됐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의 책’을 수집하여 보관할 것을 지시했다. 도서관의 사서들은 아테네와 페르가몬 등에 파견돼 책을 사들이거나 베꼈다. 심지어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수색하여 책들을 압수한 다음 출항시 돌려 주는데, 이 기간 동안 필사하거나, 필사본과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책들을 수집했다. 기존의 에테네나 페르가몬의 도서관과 경쟁하기 위해 기발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당시 모든 책은 이집트산 파피루스로 제작되는데 알렉산드리아 당국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했고 이를 계기로 페르가몬 등의 도시에서는 양가죽을 얇게 가공하여 책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수집 노력 덕택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장서가 50만권이나 되는 고대세계 최대의 규모로 발전했고 서기 1세기에는 무려 100만권에 달했다고 한다.

피나케스: 세계 최초의 도서분류표

‘서판’이라는 뜻의 피나케스는 ‘모든 그리스 문화의 유명한 작품들의 서판’의 줄임말로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고안된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분류표이다. 모두 120개의 두루마리로 구성된 피나케스는 아마도 장르별로 책들이 보관된 장소에 걸어놓았던 팻말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피나케스에는 특정한 책에 대한 참고 정보가 기록돼 있는데 제목과 저자 이름, 출생지, 저자의 부친과 스승, 교육장소와 교육의 성격, 저자에 관한 간단한 전기, 작품의 첫줄, 작품의 내용요약, 책의 구입장소 및 경위, 전체 내용의 줄수(분량) 등이 포함돼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풍은 1000년의 기간동안 시대별로 다섯 단계를 거쳤다. 초기의 학문적 주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을 장려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유클리드와 에라토스테네스였다. 서기전 150년 이후로는 플라톤적인 철학이 중심역할을 하면서 형이상학과 종교학이 발달했다. 서기 1세기에는 필로를 중심으로하는 유대교학파의 전성기였고 이어서 서기 150년 이후는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같은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이 활동했다. 서기 350년 이후부터는 소위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불리는 독특한 철학이 발전됐다.

파로스 등대

알렉산드리아에는 진리의 등불인 도서관 외에도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가 있었다. 서기전 280년경 건설된 이 등대의 총비용은 모두 은 20톤(시가 약 60억원)이며, 최대 높이 180m로서 50㎞ 떨어진 해상에서도 등대의 불빛이 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는 각각 사각형, 팔각형, 그리고 원통형의 세 층의 탑으로 구성되었으며, 등대의 꼭대기에는 제우스 상이 세워져 있었다. 등대의 불빛은 지하에 위치한 연소실의 불빛을 탑 꼭대기에 설치한 거대한 청동제 반사경을 이용하여 사방으로 비취게 했고 낮에는 연기를 뿜어내거나 햇빛을 반사시키기도 했다.

칠십인역

서기전 280년경 이집트 제국의 황제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에게 유대인들의 경전을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도시의 유대인 지도자였던 아리스테아스는 그 대가로 이집트에 구금돼 있는 10만명의 유대인 포로를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각 지파별로 6명씩 모두 72명의 학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에 파견되어 72일에 걸쳐 그리스어 구약성서가 완성됐다. 번역자의 수를 따라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그리스어 성서는 예수와 제자들이 즐겨 읽었던 성서였으며 복음서 기자들도 구약의 본문을 인용할 때마다 칠십인역을 참고했다.

1099년 7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한 십자군들은 야만인들로 알려진 아랍인들의 발달된 학문적 수준에 놀랐다. 특히 천문학과 기하학 분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을 압도했다. 이 모든 것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탈취했던 그리스어와 라틴어 책들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계속 연구했던 결과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십자군들에 의해 다시 전파된 신학문의 영향으로 유럽에서는 대학이 생겨나고 나아가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서기전 306년에 최초로 설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1988년 이집트 대통령은 현대식 감각의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기공식의 테이프를 끊었다. 유네스코가 중심이 돼 200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고 800만권을 목표로 옛 도서관의 영화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