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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말 이스라엘 고고학성의 실험실에서 최근 발견된 신약시대의 유골을 분석하던 한 연구원은 철제 못이 관통한 발뒤꿈치 뼈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신약성서를 비롯해서 로마시대의 여러 역사기록에서 자주 언급된 십자가 처형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67년 6일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통치하던 동예루살렘을 합병하면서 새로운 도시계획에따라 북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확장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68년 여름철 어느날 예루살렘 북쪽의 ‘미브타르 언덕’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신약시대의 무덤들이 여러 개 발견됐다. 이중 한 무덤에서 무려 8개나 달하는 유골함이 발견됐으며 가족으로 보이는 17구의 유골이 담겨져 있었다. 부활신앙과 유골함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싼 모든 지역에는 바위에 굴을 파서 만든 암굴무덤들이 산재해 있었다. 구약시대 가족무덤의 경우 일단 시신을 무덤에 안치했다가 일년 정도 지나 썩으면 뼈만 추려서 무덤 안에 만들어진 별도의 유골 보관소에 모았다. 이러한 관습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이 죽었을 경우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서기전 2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으로 유대교에 부활 사상이 들어오면서 유대인들의 매장 양식도 변하기 시작했다. 즉 개인의 뼈를 추려서 한꺼번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각각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유골함에 보관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형의 역사 십자가형은 로마시대에 처음으로 고안된 것은 아니다. 이미 신 앗시리아 시대인 서기전 800년경 전쟁 포로들을 죽여서 나무에 매단 것을 부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와 페니키아에서도 십자가형이 자주 시행됐다. 구약시대에도 사형에 처해진 사람을 죽여서 나무에 매달아 놓을 경우 다음날까지 두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신 22:21∼22). 십자가형은 사형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서 사형수가 죽을 때까지 최대한 고통을 가하는 한편 죽은 시신을 나무에 매단 채로 방치함으로써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사형의 끔찍함을 알리는 전시효과를 노렸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방법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통치자들의 영향으로 서기전 1세기 하스몬 왕조 시대부터 십자가형이 자주 시행됐다. 따라서 서기전 87년경 알렉산더 야나이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800명을 한꺼번에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다. 서기전 1세기말 로마 당국은 식민지 사람들의 형벌로 십자가형을 공식적으로 택했다. 처음에 십자가형은 사형방법이 아니라 채찍질같은 형벌 중의 하나로 적용됐다. 대부분 중죄를 저지른 노예에게 부과된 십자가형은 우선 노예의 목과 양팔에 걸쳐 큼직한 나무 막대기를 묶어서 형장에까지 지고 가도록 함으로써 전시효과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십자가형은 못을 박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이 아니라 나무에 묶어놓고 고통을 증가시키는 형벌로서 채택됐다. 하지만 서기 1세기에 들어와 십자가형은 차츰 로마 정권에 대항했던 반란자들에 대한 잔인한 처형방법으로 정착됐다. 서기 70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의 장군 티투스는 여러 달에 걸쳐서 매일 유대인 포로 500명씩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다. 당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전해들은 역사가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일부러 예루살렘 성안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성벽 주위에 포로들의 십자가를 세웠는데 ‘더 이상 십자가를 세울만한 공간과 나무 십자가를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몸이 처지면서 숨쉬기가 곤란해지며 근육경련과 질식현상으로 수 시간내에 혼수상태에 빠져 곧 죽게 된다. 로마의 사형 집행관들은 죄수가 금방 죽지 않고 장시간 살아있으면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 냈다. 십자가 중간에 돌출부분을 만들어 죄수가 그 위에 앉도록 하거나 발 받침대를 만든 것이다. 비록 통증이야 심하겠지만 몸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에 숨을 계속 쉴 수 있다는 것이다. 뼈를 관통한 11.5cm 길이의 철제 못의 끝은 구부려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올리브 나무로 된 십자가에 못을 박다가 내부의 단단한 옹이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만일 못이 구부러지지 않았다면 시신 수거 과정에서 뼈와 쉽게 분리되기 때문에 십자가형의 증거는 영원히 보존되지 않았을 뻔 했다. 손목 뼈에 날카로운 흠집있는 것으로 미뤄 팔목 두 개의 뼈 사이로 못을 박았거나, 또는 전혀 못을 쓰지 않고 밧줄로 묶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골 분석 결과 무릎 아래의 두 개의 정강이 뼈가 부러져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장례법을 지키려했던 결과로 해석된다. 해가 지기전에 시신을 거둬 매장해야 하는데 죄수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나무망치로 정강이 뼈를 부러뜨려 빨리 죽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강도의 경우에도 그들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었다고 볼 수 있다(요 19:31∼33). 십자가형을 당했던 주인공의 나이는 24∼28세 남자로 추정되며 함께 발견된 유골을 통해 키가 167cm로 밝혀졌다. 유골함에는 이 주인공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요한난 벤 하그콜’, 즉 하그콜의 아들 요한난으로 새겨져 있다. 요한난은 요한의 히브리어식 이름이다. 가족묘지에서 함께 발견된 다른 유골함에는 ‘성전의 건설자 시몬’이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미뤄 헤롯 성전의 건설공사에 동원된 전문적인 기술자 가족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이 어떤 종류의 정치적 반란 음모를 꾸몄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가족들은 무덤을 갖춰 정식으로 매장할 수 있었던 중산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십자가형의 고고학적인 증거는 오늘날 더이상 박물관에 보존돼 있지 않다. 장례법에 의해서 발굴된 모든 유대인들의 다른 유골과 함께 다시 현대식 방식으로 예루살렘 묘지에 매장됐기 때문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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