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성지를 찾아서 32-단(Dan) 석비와 역사적 다윗

영국신사77 2008. 8. 20. 14:57

               성지를 찾아서 32-단(Dan) 석비와 역사적 다윗

 

 1993년 7월 21일 이스라엘 북부의 중요한 유적지 텔 단 한 발굴자는 성문 밖 광장의 나지막한 돌담을 파헤치던 중 잘 다듬어진 새카만 돌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대부분 구조물들이 냇물에 다듬어진 매끈한 석회암이기 때문에 이 조각은 쉽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 돌을 들쳐낸 순간 지금까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뒷면에는 히브리어와 모양이 비슷한 고대 아람어 기록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문화가 발달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굴에서도 이러한 기념비의 발견은 대단한 일인데, 기록물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석비의 형태이기 때문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석비가 발견된 단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를 이루는 도시였다. 원래 단 지파는 중부지역을 분배받았는데 해안에 이미 정착해있던 블레셋 사람들 때문에 그곳에 자리잡을 수 없었다. 할수없이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서 맑은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도시 레셈(수 19:47), 또는 라이스(삿 18:29)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단이라 명명했다. 요단강의 이름은 원래 단으로부터 흘러 내려온다는 뜻인데, 세 군데의 원류 중에서 단의 샘이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길이 32cm 폭 22cm 크기의 석비 조각에는 고대 아람어로 모두 13줄 기록돼 있었다. 비록 부숴진 조각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람의 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을 죽이고 정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굴자들은 곧 아람의 왕 벤하닷 단을 정복했다는 열왕기상 15:16-22의 사건을 떠 올렸다.서기전 9세기 초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두 왕국의 끊임없는 전쟁은 유다의 아사왕 아람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아사는 자신의 적 북 이스라엘을 징벌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고에 보관된 은과 금을 모두 끌어 모아 다메섹 아람 왕에게 조공으로 바쳤다. 아람의 왕 벤하닷은 아사의 부탁을 받고 단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북부지역을 유린했고, 그 결과가 바로 단에 세운 승전비에 기록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석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홉번째 줄에 새겨져 있는 ‘베잇트 다비드', 즉 ‘다윗 왕조’라는 단어 때문이다. 구약성서 외의 기록에서 다윗이 처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때부터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심 있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성서학자들 사이에 ‘역사적 다윗’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 뜨겁게 이어진다.

                                    역사적 다윗

 베들레헴에서 여덟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들에서 하프를 켜면서 양떼나 돌보던 보잘 것 없던 한 목동이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돌멩이 하나로 쓰러뜨리고, 마침내 왕이 되었다는 동화같은 다윗 이야기는 구약성서 뿐만 아니라 서양역사를 통털어 가장 드라마틱하게 출세했던 영웅전의 전형으로 손꼽힌다.다윗은 사울왕의 궁정 악사로 입문했지만 왕의 질투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유대광야를 전전했고, 그렇게도 미워했던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고향 헤브론에서 통치자가 되는데 만족해야만 했다.왜냐하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요단 건너편 길르앗 지방의 마하나임에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기브온 전투에서 이스보셋의 세력을 물리치고 난공불락의 요새 예루살렘을 지하 통로를 타고 들어가는 '트로이 목마' 같은 기발한 전술로 점령한 후, 그는 이스라엘 최초의 통일왕국을 형성했다.그의 위상은 400년 이상 유다왕국이 그의 이름으로 왕조가 이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다윗의 역사성이 왜 의심을 받게 됐는가?

 가장 큰 이유는 다윗의 시대를 입증할만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다윗이 태어난 베들레헴이나 초창기 7년 반을 통치했던 헤브론, 심지어 그가 정복해서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았던 예루살렘에서조차 다윗 시대인 서기전 10세기 전반의 고고학적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선 그가 태어났던 베들레헴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건물을 짓고 살아 왔기 때문에 왕정시대의 몇 몇개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구약시대의 주거층을 발굴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헤브론의 경우에도 단편적인 발굴 결과만 있을 뿐 다윗이 통치한 주거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 다윗에 대한 결정적인 부인 요소는 예루살렘 발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고고학자들은 1950년대와 특히 1980년대 집중적으로 다윗 성이라 불리는 예루살렘의 남쪽 언덕을 발굴했지만, 다윗 시대의 건축물을 받치고 있던 경사면의 축대만 발견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의 석비는 다윗의 역사성에 무게를 실어줬다. 그것도 외국의 왕이 기록한 기념비를 통해서 밝혀졌기 때문에 그 객관성이 입증된 것이다. 아마도 아람의 왕들은 통일왕국을 건설하고 다메섹까지 진격했던 다윗의 위상과 업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요람과 다윗왕조의 아하시아

 최초의 석비 조각이 발견된지 1년이 지난 1994년 6월 두 개의 작은 비문 조각이 더 발견됐다. 이 비문에는 이스라엘의 왕 요람과 다윗 왕조, 즉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언급돼 있었다. 따라서 1년전의 해석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문제는 비문의 내용과 성서의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성서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가 이 두 왕을 차례대로 살해한 것으로 나타나지만(왕하 9:21-28), 단의 석비에는 아람의 왕이 이 둘을 죽인 것으로 돼 있다.
 
 과연 어느 기록에 더 역사적 신빙이 있을까? 아마도 실제로는 예후가 죽였겠지만 예후의 쿠데타 자체가 이미 아람 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뤄졌기 때문에 아람 왕 하사엘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두 왕을 죽였노라고 기념비에서 당당하게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  김 성 교수(협성대·성서고고학)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78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