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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31-프로이트의 아켄아텐

영국신사77 2008. 8. 20. 14:57

              성지를 찾아서 31-프로이트의 아켄아텐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786184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1937년 발표한 자신의 논문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모세는 이집트인이었다고 주장했다.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유대민족의 조상 모세를 적대민족 이집트인과 동일시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1933년 출판된 미국의 이집트학자 브레스티드의 저서 ‘양심의 여명’을 통해 모세의 유일신 개념은 이집트의 파라오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한 결과였다.

세계 최초의 유일신 종교개혁자라 불리는 아켄아텐은 어떤 왕이었는가. 1824년 영국의 탐험가 윌킨슨이 중부 이집트의 엘-아마르나 절벽에 위치한 무덤들을 탐사했을 때 벽화와 부조에 나타난 기이한 형태의 인물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여러 가지 정황으로 분명 이집트의 파라오를 표현했는데 다른 왕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낯선 형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길쭉하고 갸름한 얼굴에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 두툼한 입술에 튀어나온 턱, 가늘고 길다란 목, 가느다란 허리에 풍만한 엉덩이와 허벅지. 이 때부터 엘-아마르나의 이름없는 파라오는 이집트 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아마르나 문서

1887년 기름진 객토용 흙을 구하기 위해 엘-아마르나의 유적지를 파헤치던 한 농부의 아내가 땅 속에 파묻힌 수십여점의 토판문서를 발견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아니라 쐐기문자인 아카드어로 기록된 이 문서들은 모두가 서기전 14세기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 3세와 4세가 주위 여러 국가와 도시들로부터 받은 외교문서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모두 400여점이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는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국제관계와 여러 사건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역사자료로 평가된다. 더욱이 이 시대는 성서적으로는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 고센땅에 정착한 이후이고 출애굽 이전인데 이 문서에는 예루살렘, 헤브론, 세겜, 므깃도, 게젤 등의 도시의 통치자들의 이름과 함께 도시들 사이의 다툼과 분쟁,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며 이집트의 군사적 제재를 요청했던 하비루 민족에 관한 기록들이 상세하게 나타난다.

아문에서 아텐으로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 숭배에 환멸을 느꼈다. 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신전의 재산과 이를 둘러싼 제사장들의 암투, 파라오의 권좌를 위협하는 제사장 중심의 정치적 음모 등은 당시의 왕 아멘호텝 3세에게도 골칫거리였다. 부왕이 죽은 후 아멘호텝은 자신의 이름을 아켄아텐으로 바꾼다. 왕명에 첨가된 신명을 아문에서 아텐으로 바꿈으로써 종교개혁을 암시했다. 우선 아문 신전들을 폐쇄했고 아문 제사장들을 해체시켰다. 아텐교는 더 이상 제사장의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텐의 아들인 아켄아텐만이 아텐을 섬길 수 있고 인간과 아텐과의 중재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아텐 신 외의 모든 신들의 이름을 정으로 쪼아서 지워버림으로써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성상파괴를 자행했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를 확립하고자 했던 아켄아텐의 가장 획기적인 사업은 기존의 수도를 떠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것이었다.

아케트 아텐

아켄아텐이 왕이 된 후 테베에서 아텐 신전을 건설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수백년된 아문교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개혁의 한계를 느꼈다. 따라서 아켄아텐은 아무 신에게도 속하지 않은 처녀지를 새로운 수도로 개척하고 ‘아켓트 아텐’ 즉 ‘아텐신의 지평’이라고 명명했다. 1891년 영국의 페트리의 발굴을 시작으로 그 동안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조직적인 발굴을 통해서 아케트 아텐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아케트 아텐은 남북의 길이 10km, 동서의 폭이 3∼5km인 반달 모양 평야에 자리잡았다. 나일강의 동편은 여러 개의 신전과 궁전으로 이루어진 도시로 건설됐고 강 서편은 농경지로 개간됐다.

아텐 찬양시와 유일신 개념

아텐은 원래 고대 이집트어로 둥근 원판이란 뜻인데 특히 태양원판과 관련돼 태양을 대표하는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정착됐다. 1824년 윌킨슨이 아이(Ay)라 불리는 주인공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벽에는 아텐을 칭송하는 찬양시가 새겨져 있었고 이를 통해 아텐교의 신학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구약성서의 시편 제104편과도 비교되는 이 찬양시는 아텐은 유일한 존재이자 만물의 창조자이며 생명을 주는 존재로 부각했다. 나아가 아켄아텐이 아텐의 아들로서 신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아켄아텐이 죽은 후 그에 의한 유일신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해외 군사 원정을 통해 지속적인 조공을 확보하지도 않은 채 새로운 수도 건설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국고는 바닥났고, 축출된 아문신 제사장 계급의 끊임없는 반발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겨우 17년에 걸쳐서 도입된 새로운 종교가 수백년의 전통을 가진 기존 종교를 하루 아침에 뒤엎을 수 없었다. 결국 아케트 아텐은 황폐해졌고 그가 건설한 신전은 파괴됐으며 그의 이름과 아텐 신의 이름은 정으로 쪼아졌다.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은 자신의 이름을 투탕크아텐에서 투탕크아문으로 바꿨다.

프로이트는 이집트 왕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 될 수 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고민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결론을 내린다. 모세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로 생활하던 고센 땅의 총독이었다. 그는 자신이 섬기던 파라오 아켄아텐의 종교개혁에 동참했고 유일신을 강조하는 아텐교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아켄아텐이 죽은 후 아텐교가 붕괴되자 자신이 설 땅을 잃게됐다. 낙담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다스렸던 고센 땅의 억압받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 희망을 걸었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그들의 지도자가 됐고 시나이 산에서 유일신을 강조하는 야훼의 십계명을 얻어 가나안으로 향했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