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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29-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반 사역을 한 이유

영국신사77 2008. 8. 20. 14:53

  성지를 찾아서 29-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반 사역을 한 이유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731220

 바울은 그의 선교여행 중 모두 60여군데의 도시들을 거쳐가는 동안 들리는 곳마다 길게는 한달 짧게는3∼4일 정도 머물렀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이방인들의 반발, 그리고 이러한 소요사태를 방지하려는 지방 총독들의 제지로 한 곳에서 오랜 기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무려 1년6개월을 머물렀다. 고린도는 어떤 곳일길래 그토록 오랜 세월 바울을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까.



                        국제적인 ‘도시왕국’ 고린도

  비록 아테네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하지만, 서기 1세기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해발 575m 높이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바닷가의 레카이온 항구를 동시에 지닌 고린도는, 도시라기보다는 막강한 왕국이었다. 일찍부터 고린도에는 유대인들이 정착했으며, 바울은 자연스럽게 이곳의 유대인 구역에 머물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전할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여러 외국인들과 교류하며 이를 통해 그의 선교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케아 지방에서 그를 시기하는 유대인들과 해당 로마 관리들의 저지로 구금되고, 몰래 탈출하는 등 계획했던 만큼 선교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안디옥에 필적할만한 선교의 본부를 고린도에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는 근처의 성소 이스트미아에서 대규모 축제와 운동경기를 2년에 한번씩 개최했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올림픽 버금가는 경기와 축제

  서기전 776년부터 시작되어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필적할 만한 이스트미아 경기는 서기전 580년경부터 시작됐고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9㎞ 떨어진 이스트미아에서 개최됐다. 이 경기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소년 신 팔라이몬에게 헌정하는 축제로 열렸다. 포세이돈 신전은 서기전 7세기에 최초로 세워졌고 이후 1300여년 동안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 이스트미아에는 두 개의 스타디움이 있었는데 서기전 7세기에 건설된 최초의 스타디움이 너무 신전과 가까이 있어서 대규모의 관중석을 만들지 못함에 따라 서기전 4세기경 남동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스타디움을 건설했다. 서기 1세기 디오 크리소스톰은 이스트미아 경기를 관전하고 이 축제의 생생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축제가 시작되면 포세이돈 신전에는 많은 소피스트 철학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제자들은 시를 낭송하며 서로 자신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마술사들과 점쟁이들은 신기한 요술과 재주로 손님들을 끌어모았고 수많은 장사꾼들은 거리의 가판대에서 온갖 물건을 팔았다. 돼지기름을 온 몸에 바른 선수들은 저마다 승리를 장담했고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셀러리로 만든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졌다” 육상경기로는 달리기, 높이뛰기, 창던지기, 원반 던지기 등이 있었고 격투기는 권투와 레슬링 경기가 열렸다.

  바울이 이스트미아 경기에 참여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기술을 활용해서 선교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마시대에는 선박의 돛을 비롯해서 극장의 차일, 포룸의 천막, 노천상점 등 천막의 수요가 많았기때문에 천막업자는 중요한 직업 중 하나였다. 이중에서도 천막의 수요가 가장 많은 경우는 그리스 지역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축제와 운동경기였다. 보통 축제는 일주일 정도면 끝나지만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스트미아 축제나 4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올림피아 축제는 2∼3개월씩 지속됐다. 축제에 몰려든 수만명의 참가자들을 위해서 수백개의 천막이 필요했고 수백명의 천막업자들이 동원되어 몇달씩 일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요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많은 천막업자들이 활동했고 로마에는 천막업자의 조합도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통해서 네로 황제의 원형경기장에는 푸른색 바탕에 별들이 그려진 천막이 지붕의 역할을 했으며, 가정집의 안마당에는 붉은색의 천막을 쳐서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바닥에 이끼가 잘 자라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막업자의 경우 수입은 괜찮았지만 일을 매우 고된 것이었다. 대부분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이나 겨울철의 차가운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서 작업을 해야했고 천과 가죽을 자르고 굵은 바늘을 이용해 바느질을 했기 때문이 손이 부르텄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바느질 작업으로 바울의 손이 매우 무뎠기 때문에 그는 글씨를 크게 쓸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갈 6:1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전문적인 천막업자들로서 로마 제국내에서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다니며 일했다. 로마에 많은 일감이 있었음에도 불굴하고 이 부부가 고린도에 온 이유는 서기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내린 로마로부터의 유대인 추방령때문이었다(행 18:2). 바울은 이미 자리를 잡은 고린도의 아굴라 가족을 알게됐고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했다(행 18:3). 이 부부는 바울과 1년6개월을 동거동락하며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스트미아 경기 특수때문에 사업도 번창할 수 있었기에 목숨을 내걸 정도로 바울의 선교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롬 16:4). 바울의 선교로 이 부부는 에베소(고전 16:19)와 로마(롬 16:3∼5)에 가정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서기 50∼51년 고린도에서 일년반이나 지내며 관전했던 이스트미아 경기는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경기의 전 과정이 끝난 후 우승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폐막식은 그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운동경기로 비유한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운동경기에 참여하여 정당하게 경쟁을 했고 이제 막 달리기를 끝냈습니다. 나는 (경기)의 서약을 준수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며 공정한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내게 수여하실 것입니다(딤후 4:7∼8)”.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