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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21-솔로몬 성전

영국신사77 2008. 8. 20. 14:38
               성지를 찾아서 21-솔로몬 성전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484344


  성서고고학 역사상 솔로몬 성전 같이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유적·유물 발굴은 아직까지 없다.

  19세기 말 유럽 강대국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진행된 팔레스타인 탐사목록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유적지는 언제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이었다.바로 그 자리에는 오늘날 `바위의 돔'이라 불리는 이슬람교의 사원이 있어, 서구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이목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

  이슬람 건축사에서도 길이 남을 만한 대작으로 여겨지는 눈부신 황금빛 돔과 페르시아제 채색타일로 외벽이 장식된 이 아름다운 팔각형의 건물은, 무하마드가 승천하면서 남긴 발자국이 있다는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기원전 691년 건설됐다.

  그런데 그 바위가 다름 아닌 솔로몬 성전 터였다는 막연한 추정은 있었지만, 그곳이 이슬람 성지여서 아무도 발굴을 시도할 수 없었다.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해 3천년 전 다윗왕 때와 같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지만, 성전산을 포함한 옛성 지역은 당시 요르단의 영토여서 더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1967년 5월 치러진 6일전쟁은 이 모든 상황을 뒤바꿔놓았다.전쟁 발발 3일만에 이스라엘 특공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사자문을 통해서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옛성을 탈취하는데 성공했고, 이어 전 세계 1천6백만 유태인의 최고 성지인 통곡의 벽에는 다윗의 방패가 선명하게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였다.이스라엘군 랍비가 부는 뿔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군인들은 모두 통곡의 벽에서 기도했다.

  예루살렘 옛성이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직후, 전쟁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이 지역에 대대적인 건축공사가 계획됐다. 본 공사에 앞서 고고학적인 발굴작업이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신약시대의 집터가 나왔다.또 성전산과 통곡의 벽 근처에서도 대규모 발굴이 진행됐다.그 결과 비록 성전산 내부의 구조는 알 길이 없지만, 신약시대 성전터를 둘러싸고 있는 축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게 됐다.헤롯 성전이 자리잡은 14만㎡ 규모의 넓은 성전뜰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20m 이상으로 솟은 축대로 둘러싸여 있다.통곡의 벽은 바로 이 축대의 일부였다.

  솔로몬은 궁전과 성전을 포함한 대규모 건축공사를, 페니키아왕 히람에게 발주했다.그 이유는 건축공법상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의 해외무역 자체가 `다시스 상선대'라 불렸던 페니키아 해운회사에 깊이 의존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즉, 이스라엘로서는 페니키아 뱃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동방무역에 간여할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무역거래의 일환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중 하나가 성전 및 궁전 건축공사였다.

  또 고대세계의 가장 질 좋은 목재인 백향목은 페니키아에서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이 목재는 뗏목으로 이스라엘 해안까지 운반된 다음, 육로로 예루살렘으로 이송됐다.건축에 필요한 석재는 예루살렘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모두 7년이 걸린 성전 공사는, 13년이 걸린 궁전 공사와 함께, 과다한 지출로 한때 이스라엘의 국고를 바닥나게 했다.솔로몬은 공사 대금을 현물로 다 갚지 못해, 페니키아와 인접한 갈릴리 산악지대 20여개의 이스라엘 촌락을 통째로 넘겨주었고,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두고두고 구설에 오르게 된다.심지어 히람은 이러한 거래에도 만족못하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카불'이라는 그 지방의 지명으로 유래되기도 했다(왕상9:10~12).

  솔로몬 성전의 설계도(왕상 6)에 따르면, 이 건물은 길이 30m,폭 10m로 가나안의 신전 양식중 `긴방(long-room)구조'에 해당된다.고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도시들에서 발견된 기원전 1800~1600년에 건설된 신전들 중, 일부가 솔로몬 성전과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비록 성전산을 발굴할 수 없어 그 구조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솔로몬 성전과 가장 흡사한 신전이 시리아의 텔 타이낫에서 발견됐다.이 신전은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 민족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아마도 솔로몬시대 히람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체계적으로 성전산의 동쪽 축대를 면밀히 관찰하던 고고학자들은, 구약시대의 축대와 헤롯이 확장한 신약시대 축대의 이음새를 찾아냈다.땅속에 파묻힌 부분을 확인하고자 했지만, 이 지역이 아랍인들의 묘지로 뒤덮여 있어 발굴할 수 없었다.단지 지상에 드러난 부분을 근거로, 이 축대가 구약시대 성전뜰을 받치던 것이라고만 여길 뿐이다.




〈석류모양 상아 장식품〉

예루살렘에 사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르메르는 79년 한 골동품상점에서 석류 모양의 상아 장식품을 발견했다.높이 4㎝,직경 2㎝인 이 조그만 장식품 한 귀퉁이에는 고대 히브리어 글귀가 새겨져 있어, 그는 금방 이 물건이 구약시대의 유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자체로 보아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판명됐고, 비록 몇개의 글자가 훼손됐지만 그는 글귀를 “거룩한 야훼성전의 제사장들의 것”이라고 해독했다.그런데 문제는, 하필이면 `야훼'라는 부분의 네 글자가 훼손된 점이었다.단지 그 공백의 길이가 야훼라는 히브리어 네 글자가 들어갈 정도라는 점에서 야훼로 보았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신전 발굴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물들을 근거로, 이 석류장식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손에 쥐고 다니는 지팡이의 머리부분에 해당된 것으로 판명됐다.구약시대 성전에 속한 유일한 유물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뜻있는 고고학자들은 상점 주인으로 하여금 이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요청했다.하지만 이미 상아 석류가  구약시대 성전에 속한 유일한 유물임이 권위있는 고고학자에 의해 밝혀진 이상,그 상점 주인은 쉽게 기증할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7년 뒤 이 유물은 유럽으로 빠져나가, 스위스 골동품 경매장에서 약 6천만원에 팔렸다.이름을 밝히지 않은 구입자는, 이 상아석류를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