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20-에발산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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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어느날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한 강당에서 이스라엘 고고학자 제르탈(A.Zertal)은 자신의 발굴 결과 세겜에 있는 에발산 중턱에서 여호수아에 의해 건설된 제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3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국제구약학회의 성서고고학 분과에서 제기된 이 폭탄선언은 곧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유럽 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로마 대학의 소진(A.Soggin)교수는 강단으로 올라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일축해버렸고,다른 학자들도 그것은 제단이 아니라 근처의 농부들이 만든 일종의 망대라고 주장했다.너무나도 강한 그들의 어조 때문에 한동안 강의실이 술렁거려 더 이상 순서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0년부터 세겜을 중심으로 하는 므낫세지역에 대한 포괄적인 지표조사를 진행하던 제르탈은 해발 940m로 솟아 있는 에발산의 경사면을 지나다가 중턱에 위치한 한 돌무더기를 주시했다.돌이 많은 산지에서 포도원이나 올리브 밭을 가꾸기 위해 치운 돌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들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지만 그중 에발산의 것이 유난히 이 고고학자의 눈길을 끈 이유는 바로 근처에 흩어진 구약시대의 토기조각들 때문이었다.성서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연대추정의 근거가 되는 `달력'으로 일컬어지는 토기조각들은 해당지역이 어느 시대에 번창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1982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돼 돌무더기를 파헤친 결과 그 아래에서 한 변의 길이가 8~9m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구조물이 발견됐다.
돌로 쌓은 벽의 두께가 1.4m나 되는 육중한 이 유적의 정체를 두고 발굴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단순한 집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입구가 없는 게 이상했고,망대로 보자니 너무나도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근처에 이렇다 할 만한 중요한 요새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조물의 내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돌과 흙 사이에서 수많은 불에 탄 짐승의 뼈와 재가 발견됐고,바닥 한가운데서는 여러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m 크기의 원형화로가 발견됐다.그렇다면 이 구조물을 성서시대의 희생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또한 제사장들이 안전하게 제단의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폭 90㎝,길이 7m 정도의 경사로가 설치돼 있었다.제단 주변에는 여러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한 쪽에 출입구가 있는 돌로 쌓은 울타리까지 있어서 이 지역이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동물학자들에 의한 짐승뼈의 분석 결과 제물은 대부분 섭씨 400~600도 정도의 불에 태워졌고 주로 소 양 염소 사슴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그중 사슴을 제외하고는 모두 레위기서에서 언급된 대표적 희생제물들이다.원래 고대 근동의 제사의 기원은 가축을 잡아 요리를 할 때 워낙 더운 지역이어서 고기를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불에 구워 먹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잔치를 벌인 데서 비롯됐다.가축을 도살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들인 제사장들의 역할과 이에 따른 제의 요소가 첨가됐고,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깨끗한 바위 바닥과 불고기 받침대로 설치된 상설 제단은 신성한 장소로 인식됐다.
이 제단이 여호수아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발견된 토기류의 70%를 차지하는 이스라엘 정착시대 대표적인 `목이음 항아리'다.높이가 1.5m나 되는 대용량의 항아리를 한꺼번에 물레에서 빚어내기는 힘들기 때문에 몸통을 먼저 만들고 아가리 부분을 나중에 결합하는 과정에서 목둘레에 약간 튀어나온 이음새가 있는 이 항아리는 성서고고학에 있어서 철기 1시대(기원전 1200~1000년)를 지칭하는 시금석이 된다.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은 기름진 저지대의 평야는 이미 블레셋이나 가나안 민족이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중앙산악지대에 정착하게 됐고 멀리 떨어진 골짜기로부터 물을 길어 오기 위해 이러한 큰 항아리들을 개발했다는 것이다.따라서 `목이음 항아리'가 출토된 지역은 곧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했던 곳이라는 가설이 생겨났고 특정한 유물과 민족을 일치시키는 인종고고학 연구를 촉진했다.
여호수아시대로 볼 수 있는 또 한가지 증거는 기원전 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양식의 스캐럽 도장이다.이집트에서 태양신 라(Ra)를 운반하는 신으로 숭배된 풍뎅이 모양의 도장은 연한 동석을 정교하게 조각해서 만든 것으로 주로 반지에 끼고 다녔으며 이스라엘지역에서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모세는 요단 건너편에서 이스라엘민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세겜에 있는 에발산에 제단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신명기 27장4~8절).나중에 여호수아는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을 이용하여 이곳에 제단을 쌓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 무리는 남쪽의 그리신 산으로,다른 한무리는 에발산 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차례대로 선포했다(여호수아 8장30~35절).우뚝 솟은 두 산 사이 기름진 평야에 위치한 세겜에서 이루어진 이 의식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겜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종교적 중심지로 부각된다.나중에 다윗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솔로몬이 야훼 성전을 건설했지만,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정착한 곳도 바로 세겜에 있는 모레 상수리여서 세겜의 전통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한편 제르탈은 에발산의 제단과 이곳에서부터 요단강에 이르는 파라 골짜기를 조사한 끝에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 진출 루트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민족의 지리적 고향을 야곱의 기사에도 등장하는 얍복강변의 기름진 평야인 요단 건너편의 숙곳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세겜은 나중에 여로보암에 의해 반야훼적 제의가 행해지는 곳으로 전락했다.한때 그리심산 정상에 성전을 건설했던 사마리아민족의 후예들은 오늘날까지도 이곳에서 양을 잡아 유월절제사를 지내며 구약시대의 종교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성소와 법궤의 이동〉
에발산 여호수아제단의 발굴을 계기로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민족의 종교적 중심지에 대한 지리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민족은 열두 개의 돌로 상징적인 원을 만든 후 그곳의 이름을 길갈이라고 했고 그곳을 진지 삼아 여리고를 공격했다.이어서 벧엘과 아이 등으로 이동하지만 종교적 중심지는 오히려 북쪽에 위치한 세겜의 에발산에서 등장한다.
이동식 성소인 법궤는 광야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싯딤목으로 만들어진 이집트양식의 제의 상자로 집을 짓고 정착할 수 없는 유목민들의 대표적인 종교적 상징물이다.비록 성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에발산 근처에 법궤가 모셔진 성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사무엘시대의 법궤는 실로에 있는 `야훼의 집'(사무엘상 3장15절)에 모셔진다.기원전 1050년경 에벤에셀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색이 짙은 이스라엘민족은 법궤를 메고 전장에 나갔지만 그나마 전리품으로 빼았겼다.블레셋에게 재앙을 일으켰던 법궤는 결국 7개월만에 다시 이스라엘지역으로 돌아오지만 실로의 성소는 이미 파괴됐기 때문에 임시로 기럇 여아림에 보관했다.
이방도시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은 다윗은 이 법궤를 가져옴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통을 이어받게 됐다.세겜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남하한 성소와 법궤의 이동경로는 고고학적 조사 결과 이스라엘민족의 주거지 분포가 초창기에는 세겜지역에서 번창하다가 차츰 남쪽으로 이동한 것과 우연히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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